박주선 의원 “해외 게임도 한국 등급분류 받아야”
9월 29일, 박주선 국회의원(광주 동구, 교문위, 새정치민주연합)은 스팀의 한글화 게임을 예로 들며 해외 게임도 등급분류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 의원은 해외 게임들이 미국이나 EU의 등급분류는 받으면서 한국 등급분류를 받지 않는 것은 부당하고, 이는 한국게임사들에 대한 역차별이라고 말하면서 해외 게임, 특히 스팀에서 유통되는 게임들에 대해 한국 등급분류를 받도록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네티즌의 반발이 거세자 박 의원실은 같은 날 저녁 다시 입장을 밝히면서 ‘이 정도를 가지고 스팀이 한국 서비스를 차단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담그는 격’이라며 기존의 입장에 한 층 날을 세웠다.
실제 한국 정부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박주선 의원(정확히는 박주선 의원 비서) 말도 타당한 점은 있다.
이 정도 수준으로 건드린다고 해서 스팀이 실제로 한국IP를 차단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스팀에 게임을 올리는 모든 개발사에게 등급분류를 받으라고 강제하고 제재할 실질적인 수단이 없다. 한국정부가 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스팀은 개발사들에게 한국 등급분류도 받으라고 말좀 해주세요.” 수준의 권고가 고작이다. (물론 권고한다는 것 자체도 웃기는 일인 건 맞다)
그걸로 스팀이 한국을 차단한다고 호들갑 떠는 것은 진짜로 그럴 가능성이 있어서가 아니라, “제발 스팀느님이 그렇게 해줘서 한국정부가 X됐으면 좋겠다.” 는 딥다크한 판타지가 투영된 한풀이성 발언이다.
박주선 의원의 말은 “한국에 거주하는 사람한테 게임을 팔겠다면 한국법을 준수해라.” 라는 아주 합리적(이어보이는)인 포장을 하고 있기 때문에, 게임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는 일반인들한테는 아주 설득력 있게 먹힐 것이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 이건 당연한 것이다.
스팀은 어디까지나 미국 장터이다
문제는 박주선 의원과 게임위가 법을 무리하게 해석하고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다.
현행 ‘게임산업진흥에 관한 법률 제21조’는 ‘게임을 유통시키거나 이용하게 할 목적을 가진 제작/배급자는 사전등급분류를 받아야 한다.’ 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스팀 게임들이 등급분류를 받아야 하는지의 여부는 ‘한국에서 게임을 유통시키거나 이용하게 할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의 여부로 판단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스팀은 법적으로 미국의 온라인장터다. 한국 거주자가 스팀에서 게임을 구매하는 것은 외국에서 상품을 구매하여 국내에 가지고 들어오는 것, 즉 ‘반입’ 혹은 ‘수입’일 뿐이다. 이렇게 보면 스팀 게임이 ‘한국에서의 유통/이용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판단하여 등급분류 의무가 없다는 결론을 내는 것이 가능하다.
문제는 박주선 의원과 게임위는 위와 전혀 다른 판단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마켓(플랫폼)이 어느 나라에 속하는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들이 말하는 판단 기준은 다음과 같다.
– 게임이 한국어를 지원하는가
– 한국에서 발급된 신용카드 결제를 허용하는가
위 2가지 중 하나라도 만족하는 ‘모든 게임’은 한국의 사전등급분류를 받아야 하고, 그렇게 하지 않은 게임은 법에 따라 ‘수거, 폐기 또는 삭제’ 되어야 하는 대상이다.
실제로 많은 한국인들이 스팀에서 게임을 구매하여 플레이하고 있고, 그에 따라 한국어 사용자를 배려하기 위해 한국어를 지원하는 스팀게임이 존재한다. 스팀은 VISA카드 결제를 지원하기 때문에 한국에서 발급된 VISA카드로 게임을 구매하는 것은 당연히 가능하다.
명동 상인들은 중국인 대상이니 중국법을 따라야 하는가?
그런데 이렇다는 이유로 이들 게임이 ‘한국에서의 유통/이용 목적을 가지고 있다.’ 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판단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게임이 아니라 모든 시장에서 고객이 친숙한 언어와 결제수단을 지원하는 것은 고객서비스의 기본 중의 기본이다. 실제로 한국의 대표적 온라인쇼핑몰인 ‘지마켓’은 한국어 뿐 아니라 영어와 중국어도 지원하고 있고, 국제카드 결제도 가능하다. 그렇다면 ‘지마켓’에서 물건을 파는 상인들은 ‘미국, 영국, 중국 등에 상품을 유통/이용시킬 목적’을 가지고 있고, 그에 따라 해당 국가들의 유통 관련 법률을 준수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좀 더 나아가서, 명동에 있는 롯데백화점을 가보면 중국에서 온 관광객들 천지로, 사방팔방에서 들려오는 중국어로 인해 여기가 한국인지 중국인지 분간이 안갈 정도다. 그럼 명동 롯데백화점은 명백하게 ‘중국에 상품을 유통시키고 이용하게 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으므로 중국의 관련 법률을 준수해서 장사를 해야 한다는 결론도 도출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기준을 따른다면, 영등위가 앞으로 유튜브에 한국어가 나오는 동영상을 올릴 때는 영상물등급심사를 받고 나서 올리라고 나서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더 나아가 페이스북을 비롯한 한국어 서비스를 지원하는 모든 SNS서비스 또한 한국 법령의 규제 대상이며, 규제를 따르지 않을 경우 ‘특단의 대책’을 마련할 수 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 이건 어떤 정당 의원들이 좋아할 것 같긴 하다. 물론 나는 박주선 의원은 그 정당에 맞서 싸우는 사람이라고 믿고 있다.)
여기서 박주선 의원은 또 다른 근거를 내놓는다. ‘스팀게임은 미국, EU, 일본 등의 등급분류는 받는데 한국의 등급분류는 받지 않는다.’ 는 것이다. 이 주장은 스팀이 선진강국의 법률은 준수하면서, 한국의 법률은 무시한다는 느낌을 준다. 애국심에 호소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 또한 적절한 것은 못된다.
박주선 의원의 주장이 무리인 이유
첫째, 미국, EU, 일본의 등급분류는 법으로 강제되고 있지 않다. 소위 자유민주주의국가 중 게임에 대한 사전등급분류를 국가기관에서 강제하는 나라는 대한민국이 거의 유일하다.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등급분류는 최소한의 윤리질서 확립을 위해 게임사들이 ‘자발적으로’ 시행하는 자율심의제 형태를 띠고 있다.
물론 등급분류를 받지 않은 게임은 소매점들이 ‘자발적으로’ 취급을 하지 않기 때문에 사실상 강제되고 있다고 볼 수는 있다. 그러나 이 또한 개인과 기업의 자유의사에 의한 것일 뿐, 국가가 나서서 게임 하나하나에 딱지를 붙이고 유통을 통제하는 것과는 그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다.
또한 스팀은 인터넷을 통해 유저에게 직접 판매하는 직거래시장이기 때문에 소매점이 끼어들 틈이 없다. 예를 들어 영어로 된 스팀 게임이 미국의 등급분류를 안받는다고 해서 무슨 제재를 받는 것이 아니라는 소리다. (실제로 미국 등급분류를 안받아도 스팀에선 잘만 유통된다.) 그런데 한국의 플랫폼도 아닌 스팀 게임에 한국의 등급분류 수검을 권고하고 이를 거부할 경우 특단의 조치를 강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둘째, 많은 스팀 게임이 대부분 미국, EU, 일본 등의 등급분류를 받은 이유는 한국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해당 게임들이 그 나라의 소매점에서 패키지 형태로 판매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패키지게임 시장이 사멸하여 모든 게임이 온라인다운로드 형태로만 판매되는 한국인 입장에서는 의아할 수 있겠지만, 인터넷보급률과 속도, 게임문화 등의 요인으로 미국, 유럽, 일본에서는 온라인게임도 오프라인에서 패키지 형태로 유통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위에서 말했듯 등급분류를 받지 않은 게임은 소매점들이 취급을 안하기 때문에, 이들은 패키지 유통을 위해서 스팀에서만 유통한다면 받지 않아도 되는 등급분류를 어쩔 수 없이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의 등급분류는 받지 않았는데 미국, 유럽 등의 등급분류를 받은 게임이 꽤 존재하는 것은 이런 이유이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스팀 등 해외 플랫폼에서 유통되는 게임에 대해 한국의 등급분류를 강제하는 것은 무리한 해석이며, 상식적으로 타당한 요구라고 볼 수 없다.
법은 최소한이어야 한다. 당장 눈에 거슬리는 무언가를 해결하기 위해서 무리한 법해석과 규제를 들이댄다면 결국 큰 혼란을 야기하게 될 것이다.
‘게임산업진흥에 관한 법률 제21조(등급분류)’ 에 매몰되어 눈앞의 등급분류를 아무에게나 들이대는 국회의원이 아니라, ‘대한민국헌법’에 따라 표현의 자유, 출판물에 대한 검열의 불인정,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의 참된 의미를 성찰하고 행동하는 국회의원이 많아지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