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준의 관점과 비판자들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참여연대의 소액주주 운동을 비판하면서 “신자유주의의 앞잡이들”이라는 거친 표현을 썼습니다. 장하준 교수는 한국 경제의 고질적인 문제는 재벌이 아니라 신자유주의라고 주장합니다. SK그룹을 공격했던 소버린 펀드와 손을 잡은 걸 두고 “투기자본의 앞잡이”라고 비난하기도 했죠. “진보의 탈을 쓴 신자유주의자들”이란 표현도 나왔죠.
장하준 교수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장 교수가 재벌 개혁에 딴죽을 건다며 “재벌 옹호론자”라고 딱지를 붙이고 심지어 “재벌의 하수인”이라는 표현까지 서슴지 않습니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한국 재벌은 주주 자본주의가 아니라 천민 자본주의”라고 규정하고 “재벌을 주주 자본주의라는 논리로 옹호하거나 비판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장하준 교수의 사촌 형이면서 소액주주 운동을 이끌었고 재벌 저격수로 불렸던 장하성 고려대 교수는 “월스트리트 앞잡이라는 비난에 동의하지 않지만 기관 투자자들이 투자해서 여의도 앞잡이가 됐으면 좋겠다”고 받아치기도 했습니다.
김성구 한신대 교수는 장하준 교수를 겨냥해 “재벌과 화해하면서도 진보적 성향의 교수로서 명망을 유지하려는 기회주의적 방식”이라고 비판했죠. 김상조 교수에 대해서는 “전에는 케인스주의자였고 지금은 제도주의 경제학을 추구하고 있으며 신자유주의에 의해서도 적지 않게 오염된 경제학자”라고 비판을 쏟아냈습니다.
김상조 교수는 스스로를 “구자유주의자”라고 부르는데 장하성 교수는 “한국식 자본주의자”라고 불러달라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김정호 교수처럼 아예 “나는 신자유주의자다, 그게 뭐가 문제냐”고 당당하게 선언하는 사람도 있죠.
좀 더 깊이 들어가면 김상조 교수를 신고전파로, 장하준 교수를 발전국가론자로 분류하는데요. 박형준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연구원은 “신고전파는 탈정치화된 시장을, 발전국가론은 탈정치화된 국가를 상정하고 있다”면서 “두 가지 접근 방식 모두 시장 또는 국가에 고정 불변의 형이상학적 성격을 부여하고 이로부터 경제 변화를 설명하는 본질주의적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한국인의 좌우 스펙트럼
지난 23일부터 28일까지 5일 동안 재벌개혁 성향을 묻는 퀴즈를 굴려봤습니다. 7개의 유형을 찾아가는 17개의 문항으로 구성돼 있는데요. 7024명이 참여했고 결과는 아래와 같습니다.
처음에는 장하준 교수와 김상조 교수의 대결 구도 또는 이 둘과 이병천 강원대 교수가 삼분하는 구도가 될 거라고 예상했는데요. 막상 결과를 놓고 보니 김상조 교수가 압도적으로 많았고 장하준 교수와 이병천 교수, 그리고 김성구 교수까지 비슷한 분포를 기록했습니다. 김정호 교수와 같은 성향으로 분류된 사람도 꽤 많이 나왔죠. 엄밀한 의미의 여론조사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의미를 짚어보는 건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이 퀴즈는 출간을 앞두고 있는 ‘한국의 경제학자들’을 요약해서 만들었습니다. 사회적 대타협론과 경제 민주화 담론의 여러 쟁점을 추적하면서 7명의 경제학자들을 내세웠는데요. 이 스펙트럼에 왼쪽에 장하준 교수를, 오른쪽에 김상조 교수를 놓고 더 양쪽 극단으로 김성구 교수와 장하성 교수를 놓았습니다. 그리고 가운데 부분에 이병천 교수를 놓고요. 김상봉 교수를 김성구 교수와 비슷하게 놓을 수 있을 거고요. 뉴라이트 계열 학자들을 맨 오른쪽에 놓을 수 있겠죠.
이런 구분에 따라 대략 줄을 세워보면 왼쪽부터 김성구-김상봉-장하준-이병천-김상조-장하성-김정호, 이런 순서가 될 텐데요. 누가 더 왼쪽이냐 오른쪽이냐 보다는 국가와 사회의 시장 개입을 어느 정도 요구하느냐 또는 시장의 자유를 어느 수준까지 허용하느냐의 척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한국 경제학자들의 재벌, 국가관
장하준과 가깝다고 분류된 분들은 현실적으로 재벌 체제를 인정해야 한다고 보고 이른 바 사회적 대타협론에 동의하는 입장입니다. 금융을 시장에 맡겨둬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거나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국가의 개입을 넘어 금융과 산업 정책을 견인해야 한다고 답변했을 수도 있습니다.
김상조와 가깝다고 분류된 분들은 금산분리에 확고한 입장을 갖고 있거나 재벌 체제가 낙수효과는커녕 양극화를 불러왔다고 답변했을 겁니다.
김상조와 이병천은 사실 거의 이론적 스펙트럼이 비슷한데요. 이병천과 가깝다고 분류된 분들은 주주 자본주의 보다는 이해 관계자 자본주의를 강조하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김성구 교수는 가장 왼쪽에 있는 이른바 좌빨 교수라고 불리는 사람인데요. 1원1표 또는 1주1표의 경제 민주화를 거부하고 국가의 개입으로 자본주의의 모순을 치유할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 언뜻 맞는 말 같아서 김성구 교수를 선택한 분들도 있겠지만 국가 권력 위에 자본이 있다, 독점자본을 사회화해야 한다는 무시무시한 주장이죠.
장하성 교수는 노동자들의 경영 참여를 원칙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제대로 된 시장경제를 구현하는 게 우선이라는 입장입니다. 잔여이익이 당연히 주주들의 몫이라는 답변을 선택해야 장하성까지 올 수 있습니다.
김상봉과 가깝다고 분류된 분들은 노동자들이 경영의 주체가 돼야 한다는 답변을 선택하셨을 겁니다. 언뜻 좋은 말이지만 현실적으로는 다분히 몽상적인 아이디어라고 할 수 있죠.
김정호와 가깝다고 분류된 분들은 재벌이 잘 돼야 한국 경제가 잘된다고 생각하고 재벌의 상속세를 깎아줘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재벌을 인정하는 건 장하준 교수와 비슷하고 시장의 질서를 강조하는 건 김상조 교수와도 비슷하지만 서로 또 충돌되죠.
국민들은 재벌 개혁을 원하고 있다
결과를 다시 분석해 보면 장하준이 20.0%, 김상조와 장하성이 32.9%와 3.2%, 그리고 이병천이 18.8%, 김성구가 16.4%로 나타났습니다. 김정호가 6.9%고요.
김상조 교수가 주도하는 소액주주 운동 진영이 36.1%나 지지를 얻었다는 건 한국 사회가 주주 가치를 강조하는 주주 자본주의를 크게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이해 관계자 자본주의를 선택하긴 했지만 이병천 교수를 지지한 18.8% 역시 재벌 개혁의 큰 방향에 뜻이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참여연대 성향의 재벌 개혁론이 54.9% 정도되고요. 장하준 주도의 재벌 활용론이 20.0%에 김정호의 재벌 견인론을 더해도 26.9%로 개혁론이 활용론의 거의 두 배 이상이라는 이야기죠.
김성구 교수의 16.4%는 한국 사회 좌빨의 비율이라기 보다는 근본적으로 자본주의는 치유가 불가능하다는 인식에 공감하는 비율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좌빨이 될 싹수가 있는 사람들이라고 분류할 수도 있겠네요.
국가의 개입이라는 범주로 구분하면 국가 또는 사회의 적극적인 개입을 요구하는 장하준+김성구=36.4%, 그리고 법치주의와 시장 자율을 강조하는 김상조+이병천+장하성+김정호=61.8%로 역시 두 배 가까이 차이가 납니다.
거칠고 듬성듬성한 설문조사지만 큰 맥락을 보면 한국 사회는 재벌 활용 보다는 규제, 그렇지만 국가 권력의 시장 개입보다는 시장 자율을 강조하는 여론이 지배적이라는 결론을 끌어낼 수 있습니다. 재벌 규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국가 권력에 대한 불신이 크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거고요. 역설적으로 재벌을 내쫓으면 그 대안은 시장이 될 것이라는 장하준 교수의 경고가 한국 사회에서 큰 울림을 갖는 것도 이런 분위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원문: 한국의 경제학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