톱니바퀴
역사는 반복된다. 왜? 사람은 뻔한 짓을 반복하니까.
2010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유시민은 홍… 아니 MLB파크에 인증을 한 바 있다. 스포츠 관련 사이트지만 진보 성향이 강한(근데 동아일보꺼다?) 이 곳에 유시민이 인증을 남기자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그리고 2년이 지난 2012년 데칼코마니와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바로 문재인 후보의 인증.
같은 곳에 비슷한 성향의 정치인이 인증을 남겼다는 건 둘째치고 인증의 구도 자세가 아주 묘하게 일치한다는 걸 보면 ‘따라했다’는 것을 의심치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역시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나는 여기서 ‘구태의연’이라는 말을 떠올린다. 왜 똑 같은 짓을 하냐. 먹히는 짓이라면 물론 계속 반복하는 게 좋다. 괜히 정석이 있는 게 아니고 매뉴얼이라는 게 있는 게 아니니까. 하지만 이게 과연 먹히냐? 의미가 있냐고 하면 나는 반대요.
애초에 자기를 찍어줄 이른바 ‘본진’에서 인증을 해서 반응을 얻었다? 그래서 얻는 것이 뭔데? 어차피 인증 안 해줘도 지지하고 찍어줄 성향의 사람들이 가득한 곳에서 뜨거운 반응과 많은 조회수를 기록해봤다 ‘인기의 확인’에 불과하다. 이건 절대 표로 이어지지 않는다. 선거 막바지에 중요한 것은 ‘새로운 표’를 얻는 것이 아닌가?
유시민은 인증을 통해 자신의 인기를 확인한 후 패배했다. 문재인 역시 인증하고, 반응을 얻고, 패배했다. 그들은 과연 그 곳에서 인증을 해야 했던 것일까?
정사충의 계보
디씨인사이드 정사갤이라고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아마 다들 정사충. 패드립. 수꼴. 답이 없는 놈들. 한나라당(지금은 새누리당이지만) 알바. 등을 연상할 것이다. 하지만 2000년도 중반까지 디씨 정사갤이 서프라이즈와 어깨를 나란히 했던 열혈 친노 커뮤니티였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2000년도 초중반 디씨인사이드 정사갤은 노무현 대통령 지지자(노빠)들이 점령하던 곳으로, 소수의 NPC급 악플러 이외에는 모두가 일치한 성향으로 동기화되어있던 공간이었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건 당시에도 탄핵을 반대하는 운동을 펼칠 정도였고, 모 보수 커뮤니티에서는 정사갤을 ‘요주의 노빠 사이트’로 선정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정사갤이 어째서 지금의 모습으로 변했는가? 바로 이 분 때문이었다.
탄핵 사건 당시 전여옥은 ‘젖녀오크’라 불리며 공공의 적, 마녀와 같은 취급을 받고 있었는데, 당연 정사갤에서는 아침에 일어나서 자기 전까지 전여옥을 까는 것으로 일과를 보내고 있었다. 그 와중 허세에 가득차서 ‘내 말빨 앞에서 전여옥 따윈 개미나 퍼먹는 좆밥이다’ 라는 한 갤러의 발언이 나왔고 이는 꾸준글이 되어 계속해서 재생산되게 되었다.
점차 고무된 정사갤러들은 전여옥과 대면하여 결투를 요청하고 전여옥은 왠 떡밥이냐면 덥썩. 좌담회 시간을 잡게 되었다.
정사갤 고정닉들은 서로 자기가 전여옥의 목을 따오겠다며 밤새 낄낄거렸으나, 실제 뚜껑을 열어보니 결과는…
전여옥 앞에서 말 한 마디도 못한 채 꼬랑지만 마는 추태를 보이며 골뱅이나 비비고 있었다(…) 적진에 가서 목을 따온다더니 따이고 앉아있는 그런 행보.
이를 여옥대첩이라 하는데, 친노 정사갤러들은 완전히 농락당하고 이러한 사실이 인터넷 상에 알려지지 않도록 은폐 시도까지 하다 들통나면서 완전히 무너져버리고 만다. 그 당시 인터넷에서의 충격은 엄청나서 정사갤 뿐 아니라 디씨 전체에서 친노는 축출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물론 여옥대첩에 대해서는 다른 시선들도 존재한다. 사실은 발린 게 아니었고 1,2차 간담회의 연장선으로 애초에 맞짱을 뜰 자리가 아니었다는 시선. 엔하위키의 해당 항목. 당시의 디씨 뉴스. 등을 참고하여 각자 판단하시길.)
친노 고정닉들이 빠진 자리는 보수(혹은 입진보에 회의를 느끼고 전향한)들이 채우기 시작했고 이것을 시초로 정사갤, 합필갤, 그리고 디씨 대부분은 보수로 전향하게 된다. 심지어 디씨인사이드의 대표 유식대장도 대놓고 자신은 보수라고 선언했을 정도.
전여옥 한 사람의 신의 한수를 통해(혹은 정사갤의 최악의 한수) 인터넷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대형 커뮤니티는 진보 성향에서 보수 성향으로 돌아서게 된다.
일베충
최근은 정사충이라는 말을 들을 기회는 그다지 많지 않다. 그보다 쉽게 들을 수 있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일.베.충.
일베는 어디서 튀어나온 놈들이냐? 디씨는 매일 그날의 가장 인기글을 추려 화면 우측에 ‘일간 베스트 게시물’이라는 코너를 구축하고 있었는데, 그 인기글이 알바에 의해 삭제되는 경우가 빈번했고 또 역대 일간 베스트 게시물을 모아서 볼 수 있는 시스템이 없었기 때문에 불편했다. 주옥 같은 글개드립을 편하게 모아서 보자는 취지로 몇몇 갤러들은 일간베스트를 미러링해서 삭제되더라도 볼 수 있도록 스크립트를 탑재한 사이트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일베, 4camel.net, gaedrip.net, 코셔틀 등등의 여러 사이트가 그런 의도로 만들어졌고 인터넷 유머 중 선별된 인기글을 볼 수 있다는 메리트로 디씨 출신 뿐 아니라 수 많은 일반 네티즌들이 이와 같은 디씨 파생사이트로 모이기 시작했다. 그 중 가장 시스템이 편리하고 활성화되었던 일베로의 쏠림현상이 일어났고 현재의 일베에 이르게 되었다. 동접자 2만 명 일일 접속자수 100만, 하루에 수십만 개의 게시물 생성이라는 잉여력을 자랑하는 거대 사이트로 거듭나게 되었다. 랭키닷컴 기준 국내 유머사이트 1위. 전체 순위 141위의 거대 사이트로.
디씨에서 파생된 일베는 디씨의 말투, 그리고 성향을 이어받게 되었다. 여옥대첩 이후에 우경화된 성향은 일베에도 이어지고 더 강화되었다. 이들의 정치성향은 신념일까? 우연일까? 전여옥의 날개짓은 수백만의 회원을 가진 국내 최대 유머사이트를 수꼴사이트로 만들게 되었다. 유머를 보러 온 이들이 우경화된다는 것. 젊은 수꼴이 양산된다는 것은 간과해도 좋을 문제일까? 개인적으로 나는 이번 선거가 5,60대 보수층의 결집 외에도 20대 수꼴의 샌드위치로 나타난 결과라고 생각한다.
문재인은 일베에 인증해야 했다
홍팍. 아니 MLB파크에 인증했던 문재인 그 이후 유머사이트 중에선 진보 성향에 속하는 오늘의 유머(안생겨요!)에 인증을 했다.
전여옥의 날개짓은 인터넷 커뮤니티의 지형도를 바꿀 정도의 포… 포풍을 불러 일으켰지만, 문재인의 인증은 아무 것도 남기지 못했다. 뻔한 곳에 남기는 뻔한 인증은 그저 뻔한 지지층 확인에 그칠 뿐이었다.
여기서 상상해본다. 문재인이 만약에 일베에 인증을 했다면 어땠을까?
물론 각종 비난과 욕설이 쏟아지겠지만 그 의외성. 적진에 나타난 정치인에 대한 관심을 끌 수 있었을 것이다. 수 많은 일베충들은 일단 욕부터 하고 패드립을 치겠지만 그래도 문재인이 나타났다는 것에 대해 흥분하지 않을까? 인증에서만 끝날 게 아니라 말을 섞어주면 그 와중에 호감을 느껴 공주님에게서 문재인으로 지지를 바꾸는 녀석들도 나오지 않았을까?
애초에 일베충의 보수 성향은 신념이 아니다. 자신들이 혐오하는 패션좌파와 허세종자들에 대한 반감으로 인한 보수 성향. 그냥 진보 성향 정치인이 싫은 것보단, 나꼼충 깨시민, 미권스와 같은 추종자들이 싫고 진보 성향의 오유나 MLB파크가 싫은 것이지. 그런 흔들리기 쉬운 성향을 인증을 통해, 정면돌파를 통해 바꾸는 시도가 필요했다고 본다 난.
오바마의 인증은 적진에 나타난 건 아니었지만 의외성을 보여주었고, 구태의연한 인기 확인이 아니라 권위를 벗고 지상으로 내려온 것과 같은 의미가 있었다. 일반 네티즌과 같이 질문 받고 놀고 자신을 빗댄 필수요소도 알고 있다며 같이 웃고 노는 이런 인증. 천조국 Style.
문재인에겐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다. 너무 모범적이어서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는 지적도, ‘평범한’ 대한민국 남자의 옷입는 방식으로 잘 생긴 얼굴조차 부각시키지 못했다는 지적도…
결국 문재인에게 빠졌던 한 가지는 의외성이 아니었을까? 뻔한 이미지에서 탈피해서 사람들에게 기대나 희망을 주거나 고리타분함을 깨부수는 파격이 있어야 했던 것은 아닐까? 새 정치를 하기에는 문재인은 전략도 이미지도 패션도 뻔했다. 그리고 인증도…
문재인이 다음 대선에도 도전할지는 모르겠으나 다음 선거에선 자신의 성향과 정 반대인 사이트에서 가루가 되도록 까여 보기도 하는 경험을 다들 해보기를 바란다. 인기의 확인에 불과한 하나마나한 인증보다는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유의미한 결과를 낼 수 있는 그런 인증을…
아프니까 선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