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한국이 그렇게 나쁜 나라인가? 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중국 역사에서 실제로 있었던 역사라고 어느 정도 합의가 이뤄진 것은 은나라, 혹은 그 전의 하나라까지다. 그보다 이전인 왕조나 3황5제의 시기 같은 것은 글자 그대로 이야기로만 전해지며, 하나라 자체도 구체적인 역사기록과 왕조 역대 왕들의 명부가 전해지고 있기에 그럴 거라고 믿는 것이지, 고고학적인 뒷받침은 없다.
이 하나라를 창시한 것은 바로 우 임금인데, 우가 태평시대의 대명사인 요순시대, 요순우할 때의 그 우이다. 요와 순, 순과 우는 각각 중국을 태평성대로 이끌었고 명사를 등용하여 선양을 통해 나라를 물려주고 받은 것으로 역사에 남아있다. 특히 이 선양이 중요한데, 맹자가 유교의 이론을 세울 때 역성혁명론을 올리는 한 근거로 삼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리학적 근간이 중요해지고 주공의 시대(=주나라)가 보다 더 중요해진 이후에도 여전히 요순시대는 유교 전통에서 “경이로운 시대”로서의 의미를 갖는 시대로 남아있었다. 단순한 혈연이 아니라 군주가 직접 현인을 가려 뽑고 그 현인이 우수한 정치를 이어 가는 것이 이상향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선양, 정말로 존재했는가?
그런데, 실제로 이런 선양이 있었던 일인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의심을 받는 책이기는 하지만, 1917년 복원된 춘추전국시대의 사서인 죽서기년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舜囚堯於平陽,取之帝位, 舜囚堯,復偃塞丹朱,使不與父相見也.”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요의 덕이 쇠하자 순이 그를 평양에 가두고 제위를 찬탈했다. 순이 요를 가두고, 단주(요임금의 친아들)를 막아, 두 부자가 서로 만날 수 없도록 하였다.”
삼국시대 조비가 한의 마지막 황제 헌제로부터 선양을 받으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기도 하였다. (삼국지 위서) “오늘 이 자리에 서고 보니, 요순의 선양이 무엇인지 비로소 진실로 알겠노라” 실제로 요순의 선양이 미덕이었을까? 요순시대의 또 다른 의기의 예시로서, 백성이 배를 두드리며 ‘임금이 무에 소용이냐, 내가 이렇게 잘 사는데’라고 노래하는 것을 요가 듣고 흐뭇해했다고 하는데, 그런 고복격양의 미담을 근거로 도교에서는 곧 무위한 통치가 가장 좋다는 이야기를 한다. 최고의 상사는 자리 비운 상사(…..)
달리 말하면 이 시기의 통치가 오직 수탈하고 동원하는 통치였다는 근거가 되면 되었지 그 자체로서 격언으로 삼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가정맹어호..)
주나라가 이상향인 이유는 귀족에 의한 仁의 지배
조선시대에 유교적 이상사회로 제시된 것은 예와 의가 살아있고 절의와 범절이 곧 세상을 지배하는 도리로 자리잡고 있었던 주나라였다. 주나라를 모범으로 삼은 이유는 몇가지가 있다. 첫째로 불의 – 은왕 주 – 에 항거하여 의인으로 유명하던 제후이던 서백(서쪽의 대영주, 백작) 희창과 그의 가계가 세운 나라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둘째 아들 희발이 왕위를 받아 주무왕이 된 후 금방 죽어버려, 어린 그의 아들 주성왕이 왕위에 올랐는데 이때 주무왕의 동생인 주공 단이 모든 실권을 잡고 통치를 했음에도 도리에 따라 조카인 주성왕이 성인이 된 뒤에 곧바로 물려준 절개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춘추시대의 성인인 공자가 예의와 도리의 기준을 주나라로 삼고 이 당시의 의인들을 기리는 이야기를 춘추 등에 실었기 때문이다. 이인화씨는 이것을 조금 더 밀고 나가서 그의 저서 “영원한 제국” 책에 주나라 이전의 모든 나라는 주나라를 향해, 주나라 이후의 모든 나라는 주나라로 향해 가고자 했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이런 감성이 조선을 지배하진 않았겠으나 주나라가 이상향으로 그려진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예컨대 향촌 자치의 사상적 논리는 물론 계몽의 구체적 실현을 위해 선비들이 주변을 먼저 계도해야한다는 것에 근간하지만 그 목표점으로 제시된 것이 주나라의 분봉을 통한 귀족에 의한 인의 지배였기도 하다는 것이 그런 예시일 것이다.
주나라의 현실, 정말 이상국가였는가?
그러나 이런 이상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주나라가 그렇게 꿈과 희망에 가득찬 국가이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주나라가 근거한 서백령은 고공단보(용비어천가에 나오는 그 사람) 시절에 비로소 중국의 황하 문화권에 포섭된 이민족의 지역으로 보인다. 이들에 대해 20세기 중엽 이후에 실시된 갑골문 발굴과 번역에 따르면 서백령이 공격하기 전까지 은허(은나라의 수도)나 주변 지역에서는 딱히 민심 이반이나 혹은 자연재해가 있던 것으로 보이지 않으며 도리어 서백령이 민족간 항쟁의 개념으로 습격한 것으로 보이는 증거들이 지적되었다는 설이 있다.
둘째로, 주나라 초기 시절 주공단의 시절에 일어난 대표적인 반란인 ‘삼감의 난’을 보면 재미있는 사실들이 보인다. 삼감의 난에서 반란 세력은 주공단 자신의 형과 동생들이었고 여기에 망국인 은나라 왕의 아들이 함께 태그를 짜고 있었다. 이들의 반란 이유는 “주공 단이 왕위를 찬탈하였다.”는 것이었다.
유교 사서에서는 주공단의 형제인 관숙, 곽숙이 주공 단의 의기를 오해(실제로 주공 단이 의인이었다면 오해할만하긴 하다)한 것이라고 보거나, 혹은 도리어 자신들이 찬탈할 생각이었다고 간주하는데 반대로 실제로 주공 단이 왕위를 찬탈하고 있었다고 볼 근거들도 없는 것이 아니다. 토포악발의 고사가 바로 찬탈자들이 흔히 하는 행동이 아니냐는 것은 마타도어겠지만, 갑골문에서 주공 단이 ‘자신의 이름으로 귀족들의 작위를 새로 내리거나 거두는’ 행위들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셋째로, 공자의 논리가 그리 근거가 될만하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도 생각해야 한다. 공자가 살던 춘추시대는 중국이 이전에 차마 겪어보지 못한 엄청난 격변기였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주나라 중엽의 기간은 중국이 안정되었으나, 춘추시대는 경제사회정치적으로 모든 면에서 격변기였다. 풍우란의 지적과 같이 이 기간에 모든 소유권이 흔들렸고 안정된 거주 및 소속이라는 것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전쟁이 빗발치듯 일어났고 이런 시대를 살던 성인에게는 당연히 이전 시대가 그립기 마련이었을 것이다.
공자가 그 혼란기에 대해 비견할만한 평화로운 시대는 오직 문헌 상으로 접한 주나라뿐이었을 것이기 때문에 주나라를 극찬한 것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주나라의 공후백자남의 5등작으로 나뉜 분봉과 통치 체계는 그리 안정적이라고 보기도 어렵고 예의염치를 위한 것도 아니었다. 주나라 자체가 강력한 힘이 없었기 때문에(기원이 된 서백령은 은나라 4대 영주의 하나일 뿐이고, 은허를 위시한 은나라 본국이 4대 영주보다 우세했다) 은나라 왕족 미자계에게 공작 작위를 주었어야 했기도 했다.
우리 상상속’만’의 고구려
오늘날 한국에서 한반도 땅의 국민으로서 가장 좋았던 시절을 꼽으라고 하면 극소수만이 지금을 꼽을 것이고, 그에 비견할만한 소수만이 조선이나 고려를 꼽을 것이며, 적지 않은 사람들은 없던 나라(주신이라거나…)를 꼽거나 아니면 고구려 이런 걸 꼽을 것 같다. 있지 않았던 나라를 최고로 치는 거야 뭐 가장 좋은 건 세상에 없다는 반증일테니 논외로 하고 본다면, 고구려가 과연 좋은 나라였는지를 생각해 볼만하지 않을까 싶다.
고구려 당시의 국민은 정확한 통계가 있지 않은데, 장수왕 시절 정도 되면 70만여호 정도가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한 호당 인구를 추정하기는 어려운데, 경제 및 사회구조의 차이를 불사하고 살핀다면 신라의 민정문서에 볼 때 호당 6~7명이 있다고 보는 것이 가능한 선택지 같은데, 그렇다면 인구는 대략 500만명 정도였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중국의 5호16국 시대에 요동 지역의 지방정권으로 세워진 후연 북연과 적대적 관계였고 광개토대왕기 이전(광개토대왕이 대단한 정복군주로 평가되는 이유가 바로 이 지방정권을 물리쳤다는 점 때문이다)까지는 내내 밀렸다는 점이나, 혹은 삼국시대 위나라의 지방정부 군대의 토벌에 국가가 흔들릴 정도로 위기를 겪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가 동천왕. 위나라와의 전쟁으로 인해(유주자사 관구검의 침입) 선대왕인 미천왕의 왕묘가 도굴당하고 수도 환도성이 폐허가 되는 정도의 피해를 겪기도 했다. 이 사회는 우리 생각과는 다르게 노예제 사회는 아닌 것으로 파악되고 있는 거 같은데(심지어 북한 사학에서도 노예제로 분류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군인의 비중이 몹시 높고, 전쟁이 거의 십수년에 한두차례는 벌어지기 때문에 가족 중 한명 이상이 전쟁에서 죽는 것을 볼 확률이 적지 않았다.
전쟁을 통해서 얻은 전리품을 가산으로 보태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이는데 관련된 고구려의 형법은 알려져 있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지만 당대의 비슷한 주변 국가들에서는 전리품은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지휘관이 하사하거나 등) 개인이 갖기 어려웠다. 전쟁은 단지 의무일 뿐이지, 고대 부족 국가 등에서 그렇듯 재산 축적의 기회는 이미 아니었다. 다만 출세가 오직 무위를 통해서만 가능했기 때문에, 중국 사서에서는 고구려에 곳곳마다 경당이 있어서 책을 보고 무를 익히는 이들이 많고 공직에 오르기 위해 힘쓴다는 이야기가 있기도 하다.
그 이외의 사람들은 그리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다고 보기에는 어려웠고, 유민의 기록도 다수 있었다. 이 시기 왕족 내지는 대귀족은 5부에서만 배출되어 이들이 왕 혹은 왕비나 각부의 대인직을 맡았다. (연개소문의 경우 동부대인 집안) 이들 이외에는 고위직을 맡기는 곤란했던 것으로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최고위 직에 대해서는 거의 계층화되어 있고, 노예 등 극빈층은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잘 살려면 반드시 전쟁에 나가 공을 세워 임관해야 했다는 것이다. 다만 상업은 발달해 있었는데 도리어 조선시대보다 발달했었다는 주장도 있다. 요약하면 그리 엄청나게 잘 살거나 주변국에 떵떵거리며 사는 시대는 아니었다는 것.
북유럽에 대한 선망, 그들의 특징은?
5에서 8년 전까지 한국에서 모델로 삼아야 하는 나라로 보통 북유럽을 많이 꼽았다. 오늘날에는 독일을 그 대상으로 자주 꼽는 것 같기는 한데, 보편적인 기준이라고 보기는 어려우므로 지금은 공감대를 형성한 모범적인 국가가 없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한다. 여하튼 북유럽이라고 하면 지리적으로는 아이슬란드, 스칸디나비아 3국과 핀란드, 간혹 베네룩스 삼국 정도가 여기 포함된다. (이들보다 북쪽이지만 영국, 아일랜드는 서유럽으로 많이 친다)
편의상 스칸디나비아 3국과 핀란드만을 대상으로 해서 볼 때, 북유럽이 선망의 대상인 이유는 이들 사회가 “모든 이들을 잘 살게”하는 표어대로 구체화되어 있는 Social Regime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교육 체계가 경쟁 위주이기보다는 인성 교육을 위주로 하고, 높은 직접세율을 토대로 하여 강도 높은 복지 체계를 갖추고 있으며, 그런데도 국민소득 수준이 높고, 강력한 산업적 기반을 갖고 있으면서 학벌이나 혈연과 같은 실력과 무관한 요소로 출세하거나 하지 않고, 소명의식을 갖고 자신의 여건에 만족하며 살 수 있다고 한다.
또한 부패가 극히 적고 사람들이 행복하게 산다는 점을 자주 지적한다. 사실 그렇다. 이들 북유럽 국가는 선진국 중에서 국민들의 만족도가 가장 높은 편에 들어가고, 부패도 실제로 낮으며, 자살율도 한국의 절반 이하이다. (2009년 기준으로 한국은 10만명 당 약 30명이 자살하고 스웨덴은 약 12명이 자살한다) 정말로 소득세율이 높기도 하다.
북유럽, 복지를 할 수 밖에 없었던 역사적 맥락
이런 체제는 어떻게 구축된 것인가? 노르웨이나, 특히 스웨덴 복지 체계에 대한 이론들을 보면 통상 2차 대전 직후의 유럽 1위의 국민소득/1인당 국민소득이 유럽 특유의 사회주의 분위기와 맞물려 이런 높은 복지를 일궈냈다고 본다. 맞는 말일 것이라고 본다. 다만 이런 것도 고려되어야 한다. 스칸디나비아, 특히 스웨덴은 NATO의 핵심 방어선과 동떨어진 지역이다. 핀란드는 심지어 소비에트 유니언과 직접 교전을 2차례 이상 수행한 국가이며, 겨울전쟁 등의 기간에 소련에 동조하는 내부 집단의 문제를 특히 강하게 겪기도 했다.
2차 대전 종전 이후에 이들은 소련과 사회주의에 직접 반박하기는 어려웠고(한국은 6.25 이후 미국의 방어선에 포섭되었고 그래서 직접 반박하는 반공주의를 택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내부의 친사회주의 동조자들을 만족시킬 방법을 고민했어야 했다. 이들이 높은 소득세율과 높은 복지지출을 택한 것은 그런 맥락이 반영된 것일 것이다.
특히, 이 시대에는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높은 소득세율이 일반적이었다는 것에 유념하자. 다른 국가들은 그 세원을 갖고 국방 지출과 국가 재건에 투입했어야 했는데 스칸디나비아 국가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것도, 복지 제도 확충에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따라서 국방비와 재건비(특성상 고정적인 지출이 아니다) 지출 필요성이 낮아지는 과정에서 점진적으로 세율이 낮아진 미국과 서유럽국가들과는 달리 복지 제도(특성상 지출 규모가 고정적이다)를 ‘강한 생산성’의 소련과 경쟁하는 과정에서 확충했던 북유럽국가에서는 세율이 낮아지기 어려웠을 것이고 이미 그것이 한 regime으로 자리 잡은 연후에는 낮출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애초에 복지를 하기 위해 높은 세율을 책정하거나 복지제도를 만든 것이라 보기는 어렵지 않느냐는 것이다.
과연 북유럽은 복지를 통해서 경제적 역량을 이뤄낸 것일까?
또한 이들이 복지제도를 확충한 초기인 1950년대 초반에는 자살율이 극히 높았다. 당시 이들의 자살율은 지금의 한국 수준이었는데, regime change가 끝나고 안정화되면서, 혹은 복지 제도가 안정화되면서 지금의 수준으로 낮아진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끝으로 이들의 강력한 경제적 역량은 복지를 통해 일궈진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노르웨이의 경우 북해산 브렌트유 개발이 있기 전까지는 그다지 강한 경제력을 갖췄다고 볼 수 없었다. 이들은 이 이후에 비로소 강력한 경제적 역량을 비축했다. 스웨덴의 경우 “친나치 지향적이지만 연합군에 속한” 양태를 보여서 2차대전의 참화에서 비껴갔고, 그렇기 때문에 전쟁 이전의 생산 역량을 가진 상태로 종전기 유럽의 생산 공장 역할을 할 수 있었어서 초기 성장을 주도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크루그만이 북유럽에 대해서 이들이 세계 경제에 대체 어떤 기여를 했기에 저렇게 잘사는 것이며, 우리가 본받아야 한다고 하는 것이냐는 식으로 말한 것이 이런 측면의 이야기들 때문이 아닌가 싶다. 애초에 복지 체제가 갖춰진 1950년 이후에도 한동안 자살율도 높았고, 복지제도 확충 이후로 유럽 내 경제력 순위나 경제성장율은 도리어 하락세였고, 신용위기나 혹은 경기 불황도 역시 겪었다. 일전에 말했듯이 이쪽 나라들도 여전히 서유럽 국가보다 자살율도 높고 방만한 경제 운영으로 인한 재정적 문제를 경험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 지금 한국보다는 일반 시민이 살기 더 나을 뿐이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가 종종 현실에 대해 불만을 갖고 어떤 이상적인 세상이 있을 것이니 우리 현실은 지옥이야, 라고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의외로 이상적인 세상은 없고 혹시 있더라도 그것은 역사 속에서 나타난 한 우연일 경우가 많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