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하나뿐인 달력’ 이야기를 알게 된 것은 연초에 <한겨레>를 통해서다. 사할린, 그 잘 상상하기 어려운 낯설고 물선 나라에 살고 있는 한인들에게 세대와 고향을 이어지는 ‘음력 달력’이 필요하다는 먹먹한 이야기 말이다. 그리고 얼마 전 우연히 인터넷을 돌아다니다가 ‘사할린 한인 달력’을 만들기 위한 ‘희망 모금’을 만났다. 바빠서 다음에 들러야지 하고 생각하고선 그걸 까맣게 잊고 지냈다. 한가위 연휴가 시작되는 9월의 첫 주말, 새벽에 일어나 신문을 읽다가 퍼뜩 그게 생각이 났다.
‘희망해’의 희망 모금, 사할린 한인 달력 2015
‘사할린 달력’으로 검색해서 확인해 보니 ‘다음’의 ‘희망해’에서 진행 중인 모금(2014.8.1~9.30)은 마감 25일을 남긴 현재 목표의 95%를 달성하고 있다. 목표액 오백만 원에 3310여 명이 이 모금에 참여했다. 서둘러 그 끄트머리에 이름을 올렸더니 참여자수 1명이 늘면서 목표 금액 달성률이 95에서 96으로 바뀌었다. [희망모금 바로가기 – 세상에서 하나뿐인 사할린 한인 달력 2015]
‘사할린(Sakhalin)’은 러시아대륙 동쪽 끝의 작은 섬. 일본 홋카이도 바로 위에 있는 작은 섬이다. 이 섬에서 살았던 한인들의 역사는 곧 우리 근대사의 가장 아픈 부분 중 하나다. 식민지의 한인들은 강제 징용되어 낯선 땅에 부려졌고, 해방이 되어도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한인들이 사할린과 연을 맺은 것은 19세기부터다. 연해주로 건너간 조선인 중 일부가 사할린으로 들어간 경우가 있었지만 이는 소수였다. 1930년대 말에서 1940년대 초까지 일제에 의해 한인들이 사할린 섬으로 강제 징용되면서 한민족의 ‘사할린 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일제는 전시 상황에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 한인들을 가라후토[일본에서 사할린을 부르는 이름. 화태(樺太)]의 탄광·군수공장 등에서 혹사시킨 것이다.
일본의 패망하면서 가라후토는 소련에 반환되었지만 사할린의 한인들은 조국에 돌아올 수 없었다. ‘내선일체’와 ‘동조동근’을 부르짖으며 펴던 동화정책의 끝은 무책임하고 비열했다. 일본정부는 자국민들은 일본으로 데려갔으나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조선인들은 방치한 것이다.
광복 이후의 신생 대한민국은 이들을 송환할 여력이 없었고, 한국전쟁 이후에는 냉전으로 한국과 소련이 적대관계였으므로 사할린의 한인들은 대한민국과 소련, 일본 세 나라의 무관심 속에서 무국적자로 어렵게 삶을 이어갔다. 북한에서 이들의 귀국을 회유하기도 했으나, 이들 대부분은 경상도·전라도 등 한국 남부 출신으로 남한에 연고가 있었으므로 북한으로의 송환을 거부하였다.
6, 70년대를 거치면서 일부는 소련 국적을 취득하기도 했으나, 한국으로 귀환을 바라던 1세대들은 무국적자로 남아 있었다. 이들에게 조국으로의 귀환에 대한 희망의 불씨가 지펴진 것은 1988년 이후다. 우리나라와 소련의 관계가 개선되면서 이들의 고향 방문이 추진되면서 일부가 대한민국을 찾기도 했다.
90년대 후반부터 한일적십자사를 통해 한국으로 영주귀국사업이 시작됐지만 이미 반세기가 넘게 귀국을 꿈꾸던 1세들은 대부분 사망한 뒤였다. 1945년 8월 15일 이전에 태어난 사람(1세로 규정)과 2인 1가구라는 조건으로 영주귀국이 이루어지고 있어 다수의 귀국 동포들은 사할린에 자식들을 두고 와야만 했다.
현재 사할린 주에 살고 있는 동포는 3만여 명, 이 중 50%는 유즈노사할린스크에 거주한다. 이들 동포 가운데 북한에 1,000여 명이, 남한에 3,500여 명이 귀환했다. 이들은 서울, 인천, 안산 등지의 정착촌에서 만년을 보내고 있다.
사할린에 살아 있는 1천여 명의 한인 1세들은 지금도 달력을 보면서 농사를 짓는다고 한다. 이들은 여전히 음력이 나오지 않는 러시아 달력 대신 한인사회에 대대로 이어온 ‘수제작 음력 달력’으로 제사와 생일을 챙기고, 농사를 짓고 조석 간만을 알아내고 있다.
역사의 희생자들이 간직해온 ‘모국의 ‘기억’
음력은 집을 수리할 때, 이사를 갈 때에도 요긴하다. 양력 달력 밑에다 음력을 적어놓고 조상의 기일을 챙기는 이들 동포들은 어쩌면 이미 국내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한국인의 원형’일지도 모른다. 망국의 역사에 희생된 무명의 백성들이 간직해 온 모국과 고향에 대한 기억은 아름답지만 슬프다.
이들 동포들은 모국에 다녀오는 사람들과 지원 단체 등을 통해 힘들여 ‘음력이 나오는 한국 달력’을 구해왔다고 한다. 이에 지난해 KIN(지구촌동포연대)에서는 <사할린 한인 1세 어르신들에게 드리는 ‘세상에서 하나뿐인 달력 2014’>를 1천 부 제작해 직접 전달했다.
이왕 만드는 김에 러시아가 생활의 기반인 한인들을 위해 ‘러시아 달력’을 만들어 ‘음력을 표기’하고, 우리의 명절, 절기, 국경일, 기념일 등을 러시아말로 번역해 우리의 문화를 잘 모르는 3·4세까지도 함께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단다.[관련 기사 – “달력 하나에 할머니들은 춤을 추었습니다”]
‘2014 달력’ 제작에는 1,600여명의 한국, 일본, 중국, 독일의 동포와 시민들과 한국의 풍경을 담은 사진, 달력 디자인, 러시아어 번역을 위해서 많은 분들이 재능기부로 참여했다고. 1천 부의 달력에 담긴 것이 어찌 음력뿐이랴. 거기엔 ‘당신’들을 잊지 않고 있다는 모국 사람들의 마음이 담겨 있는 셈이다.
사할린과 관련한 내 기억에도 슬픈 이야기 하나가 남아 있다. 1990년대 사할린 동포들의 모국 방문이 한창이던 때다. 고향의 이웃마을에 젊어서 지아비를 사할린에 보내고 소생도 없이 수십 년을 살아온 할머니가 계셨다.
그런데 어느 날, 죽었겠지 잊고 있었던 남편이 돌아온 것이다. 마을사람들의 환영 속에 상봉이 이루어졌는데 여든을 바라보던 할머니는 돌아온 지아비 앞에 새색시처럼 부끄러워했다던가. 이들 내외의 만남은 당시 한 공중파 프로그램을 통해서 다큐멘터리로 방영되기도 했다.
달력에 담긴 건 모국 사람들의 ‘마음’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지키고 있는 고향으로 영구 귀국했다. 만년에 부부의 삶이 어떠했는지는 나는 알지 못한다. 여든을 훌쩍 넘기고 있었던 할아버지는 얼마 후에 세상을 떠났고 홀로 남은 할머니도 마을의 조그만 못에다 몸을 던져 지아비를 따랐다는 슬픈 소식을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사할린 한인 1세 어르신들에게 드리는 ‘세상에서 하나뿐인 달력 2015’>를 위한 현재 모금액은 4,801,322원(오늘 08:39 현재). 목표액에 198,678원이 부족하다. 모금기간 안에 그걸 달성하는 건 문제가 아닌 듯하다. (주: 이 글은 지난 달 작성되었으며, 현재 목표모금을 달성했습니다)
달력 하나만으로도 조국으로부터 잊혀진 동포들에게 작은 위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은 한편으로 서글프기 짝이 없다. 사할린 한인들 문제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순전히 타의로 낯선 나라로 이주해 수십 년 세월을 살아야 했던 동포들에게 주어지는 모국의 지원은 거의 없다.
그나마 진행되고 있는 영주귀국 사업도 법적 근거나 정책의 뒷받침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형편이라고 한다. 이들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안정적 지원을 위해선 ‘사할린 동포 지원 특별법’이 필요하지만 관련 법률은 지난 10여 년간 국회에 계류되다가 기간만료로 폐기만 반복하고 있다고 한다.
사할린 동포들을 기억하고 이들을 위한 ① 사할린 한인지원 특별법 제정 활동, ② 사할린 피징용자 현지 위령시설 및 역사 기념관 건립을 위한 범국민 모금 활동, ③ 사할린 잔류 한인 1세 및 후손에 대한 범국민 지원 활동을 펴는 단체가 ‘사할린 희망 캠페인단’이다.[누리집 바로가기]
짧으면 나흘, 길면 닷새간의 한가위 연휴가 시작되었다. 철이 좀 이르긴 하지만 한가위는 한가위다. 풍성한 수확의 기쁨만큼이나 아직 치유되지 못한 슬픔과 아픔의 목록도 적지 않다. ‘더도 덜도 말고 늘 가윗날만 같아라’는 이 풍성한 명절에 ‘나눔’을 생각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원문 : 이 풍진 세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