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책의 주제는 공부하는 번역자가 되자는 것이다. 한겨레교육문화센터 강좌인 ‘번역자를 위한 한국어 문장 강화’를 진행하면서, 번역자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건 바로 한국어 표현을 더 섬세하게 익히는 일이다. 번역은 외국어 실력에서 시작하여 한국어 실력에서 완성된다.
그동안 내 강의에 참여한 수강생 직업 분포를 요약하면 이 책의 독자를 구체적으로 규정할 수 있을 것 같다. 기술 문서만 다루다 보니 한국어 어휘 선택이나 문장 감각이 무뎌진 것 같다고 느끼는 현직 번역자, 외국어 구사 능력에 비해 한국어 표현력이 부족하다 여기는 통역사, 이제 막 번역이라는 세계에 발을 디딘 초보 번역자 그리고 수많은 번역서를 검토하고 원고의 질을 판단해야 하는 외서 편집자가 그들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모든 의사소통은 번역 과정을 거친다. 새로운 뜻을 더하거나 빼지 않고 원문을 옮기는 게 번역이라면, 원뜻을 살리되 자기 상황에 적용해 새롭게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 해석이니, 좋은 대본을 정해서 공들여 번역하면 훌륭한 해석도 나올 것이다. 한국인이 한국어 문장을 읽고서도 쉽게 뜻을 알지 못한다면 그건 둘 중 한 군데에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원문의 언어인 출발어의 맥락이 잘 옮겨지지 않았거나 독자가 이해하는 언어인 도착어의 맥락이 잘 반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의사소통의 양편을 두루 살펴야 하는 고된 임무를 성실히 완수하려면 꾸준히 공부하는 길밖에 없다. 출발어의 맥락을 잘 파악하려면 배경지식을 꾸준히 쌓아야 하고, 도착어인 한국어의 맥락을 잘 파악하려면 독자의 처지나 조건에 맞게 한국어 표현을 섬세하게 발굴하고 구사할 줄 알아야 한다.
명확한 주제와 정확한 출처 그리고 충분한 근거와 책임감 등을 두루 충족하는 대본을 찾으려 노력해야 한다. 좋은 대본을 만났다면 험난한 번역의 여정도 견뎌 낼 수 있다. 번역을 완수했을 때의 보람도 클 것이기 때문이다.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는 뒤마 피스가 지은 소설 『동백 여인』을 각색한 작품이다. ‘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는 ‘길 잃은 여인’이라는 뜻이고, ‘동백 여인’의 원제인 ‘라 담 오 카멜리야’(La Dame aux Camélias)는 ‘동백꽃의 여인’이라는 뜻이다. 원작 소설과 오페라의 제목은 일본에서 ‘쓰바키히메’(椿姬)라고 번역되었다.
일본에서는 동백나무를 ‘동백’(冬栢)이 아닌 ‘쓰바키’(椿)라고 표기한다. ‘히메’는 여인이라는 말이니 ‘쓰바키히메’는 원뜻을 잘 살린 간결한 번역이다. 그런데 한국은 원제를 바로 옮길 생각을 하지 않고 일본어 번역 제목의 한자 표기를 한국식으로 읽어 ‘춘희’라고 옮겨 왔다. 원문을 바로 옮기지 않고 다른 언어로 번역된 것을 다시 옮기는 걸 ‘중역’(重譯)이라고 하는데, ‘춘희’란 제목은 중역의 전형적인 문제점을 보여 준다.
한국인이 ‘춘희’라는 말을 보거나 듣고서 ‘동백꽃의 여인’이라는 원뜻을 떠올리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더구나 한국에서 한자어 ‘춘’(椿)은 동백나무가 아닌 참죽나무를 가리키므로 병기된 한자를 보더라도 원뜻에 가까이 가기 어렵다. 문제를 푸는 건 간단하다. 원문을 바로 옮기면 된다.
영국 정치와 사회 풍조를 비꼰 조너선 스위프트의 소설 『걸리버 여행기』는 1993년에 완역본이 나오기 전까지 그저 꼬마들이 읽는 동화로 치부돼 왔다. 『걸리버 여행기』를 제대로 알려면 소인국 이야기인 1부 「릴리퍼트」와 거인국 이야기인 2부 「브롭딩낵」뿐 아니라, 현실을 무시하고 이념 세계에만 몰두하는 지식인 사회를 비꼰 3부 「라퓨타」와 야수인 야후를 닮은 인간 본성을 고발하는 4부 「휴이넘」까지 읽어야 한다. 그런데 왜 이 작품이 청소년 모험 소설로 분류돼 왔을까?
1908년 청소년 잡지 『소년』을 창간한 최남선은 첫호에 『걸리버 여행기』를 번역하여 실었다. 청소년의 기상을 드높이려는 것이 게재 목적이었는데 영국 사회상을 풍자하고 고발하려 한 저자의 의도와 무관하다. 이렇게 원래 맥락과 동떨어져 청소년 모험 소설로 둔갑한 이래 1993년까지 이 작품의 원전을 완역하려는 시도가 한 번도 없었다. 최초 번역자의 역할은 매우 막중하다.
문자 메시지를 보내려 하는데 ‘하마터면’이 맞는지 ‘하마트면’이 맞는지 헷갈린다. 그럴 때 어떻게 하면 좋을까? ‘자칫하면’이라고 쓰면 된다. ‘웬간히 좀 해’인지 ‘엔간히 좀 해’인지 헷갈릴 때는 ‘작작 좀 해’라고 쓰면 된다. 그렇지만 어떤 이는 해 오던 일을 잠시 멈추고 국어사전을 찾는다. 하마터면 잃어버렸을 미묘한 어감을 다음부터는 잘 전달할 수 있다. 이런 태도를 늘 유지하려면 엔간히 노력해선 어림없다.
원문의 맥락을 잘 살폈다 해도 독자 맥락을 제대로 살피지 않으면 번역은 완결되지 않는다. “백미, 쿠쿠가 맛있는 취사를 시작합니다.” 글쓰기 강사인 나를 적어도 하루 한 번은 괴롭히는 말소리. 이 말이 들릴 때마다 중얼거린다. “맛없기만 해.” 쿠쿠 음성 안내는 독자에게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오역이다. 취사한 밥이 맛있을 순 있어도 맛있는 취사라는 건 애당초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판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역자 해설을 쓸 때는 추상적인 개념을 구체적인 현상에 빗대 표현하는 방식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관한 글을 번역했다고 해 보자. 4원인설이 나오는데 본문에 추상적인 개념으로만 설명돼 있다면 역자 해설에서는 구체적인 사물이나 현상으로 이야기하듯 설명하면 독자에게 무척 유용할 것이다. 4원인은 집을 지을 때 필요한 네 가지 조건과 비슷하다. 집을 지으려면 먼저 집짓기에 대한 열망(목적인)이 있어야 한다. 다음으로 설계(형상인)가 필요하고, 자재(질료인)도 있어야 한다.
세 조건이 갖추어지면 마지막으로 노동력(동력인)이 투여되면 된다. 동일한 개념을 달리 설명한 훌륭한 대본을 참조해도 좋다. “훌륭함의 종류는 한 가지이나 나쁨의 종류는 수없이 많다”라고 말한 철학자 소크라테스와 “행복한 가정은 모두 같은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각기 다른 이유로 불행하다”라고 적은 작가 톨스토이는 다른 조건에서 출발해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플라톤의 책 해설에는 톨스토이를 언급하면 되고, 톨스토이의 책 해설에는 소크라테스를 등장시키면 된다. 훌륭한 대본은 서로 돕는다.
건축가 정기용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말하는 건축가』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건축가로서 내 관심은 원래 거기 있던 사람들의 요구를 공간으로 번역하는 것이다.” 그는 훌륭한 번역자였다. 한국 프로 야구를 빛낸 투수 최동원이 사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상파 방송사들이 추모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여 방영했다.
그런데 사망 직후 방송을 내보낸 다른 방송사와 달리 문화방송만 두 달 뒤에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MBC 스페셜』 제작진은 2011년 11월 11일 밤 11시 무렵 「불멸의 투수 최동원」 편을 선보였다. 제작진은 롯데 자이언츠 팬들을 위해, 등 번호 11번을 달고 뛰었던 그들의 영웅을 아름답게 추모했다. 방영 시기만으로도 최동원이 현역 선수로 뛰던 그 시절의 맥락이 생생히 살아난다.
한국방송 프로그램 『다큐멘터리 3일』의 「국립과학수사연구원」 편에 시신을 부검하여 사망 원인을 밝히는 법의관들의 인터뷰가 나왔다. 그런데 특이한 건 이들이 시신을 ‘죽은 모습’이라고 말하지 않고 ‘삶의 마지막 모습’이라고 표현한다는 점이었다. 불가피하게 삶과 이별하면서 시신이 남긴 소리없는 마지막 이야기를 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은 자신들뿐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몸담은 분야에 애정을 품고 오랜 세월 성실히 그 일을 하다 보면 이렇게 훌륭한 번역자가 된다.
희생자의 처지에서 그가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밝히고 일반인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잘 옮기고자 하는 법의관의 진지한 태도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훌륭한 번역자인 이들의 번역관은 이런 것이다. ‘사람은 죽어서 흔적을 남긴다. 그것을 올바로 번역하는 게 우리 일이다.’ 원문의 맥락이 생생히 살아난다. 플라톤의 『국가』 10권에 이런 내용이 있다. “훌륭함에는 주인이 따로 없다. 훌륭함을 귀하게 여기는 이는 훌륭함을 많이 갖고 천하게 여기는 이는 적게 갖는다.” 이 훌륭함을 많이 갖기 위해 우리는 공부하는 번역자로서 소명을 다해야 한다.
원문 : 리드미파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