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더미. 멘붕. 박근혜씨의 제18대 대통령 당선을 바라보는 야권 성향 유권자의 심정은 두 단어로 요약된다. 75%가 넘는 기록적인 투표율이 보여주듯이 보수와 진보가 1:1로 격돌한 선거에서 철저하게 패배했기 때문이다.
진보 세력의 ‘조선일보’ 같은 역할을 자임하고 있는 한겨레 계열의 주간지 <한겨레21>은 이번 선거 결과를 가리켜 “잿더미에서”라고 평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것일까”라는 제목의 기사에서는 “야권이 이기는 게 자연스러워 보였던 2012년 두 번의 선거에서 모두 졌다”라며 “한국의 야권은 왜 2012년에 몰락했을까?”라고 질문을 던진다.
야권의 패배는 단순한 패배가 아니다. 민주 또는 진보 세력이 대중정치의 수싸움에서 완전히 보수 세력에게 밀린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그들의 ‘멘붕’은 그러한 현상이 구조로 고착될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에서 기인한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야권의 허약함이나 몰락으로만 바라볼 수 있을까. 박근혜 당선인과 여권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그것은 ‘보수의 재구축’으로 읽히게 된다. 한발 더 나아가 새로운 ‘범보수’라고 일컬을 만한 새로운 정치적인 블록을 구축했다는 평가도 가능하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보수 내의 이단아였던 이명박의 집권과 몰락으로 위기를 맞았던 보수 정치는 박근혜가 이끄는 보수의 재구축으로 안정적인 정치 기반을 갖게 되었다.
이렇게 ‘범보수’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세력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크게 3가지 하위 계층으로 나뉜다. △1960년대 산업화와 1980년대 이후 계급 사회의 강화로 굳어진 역사적 보수 엘리트, △다소 새롭게 하위파트너로 포섭된 지방 정치, △이번 승리의 주역이 된 50대 장년층을 겨냥한 보수적 복지연합이 그것이다. 박근혜의 업적은 단순히 선거에서 승리했다는 것이 아니라, 지난 4월 국회의원 총선거와 이번 대통령 선거를 치루면서 이들 3가지 하위블록을 보수적 집권 연합 내에 편입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데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새로운 보수 정치 블록이 안정적인 형태를 유지시켜 갈 수 있을지와 △민주당을 필두로 한 민주-진보 세력이 여기에 맞서 대항적인 정치 블록을 구축할 수 있을지 여부다. 전자의 가능성은 아직 미지수이지만, 후자가 성공할 가능성은 낮다. 박근혜의 집권을 계기로 ‘포스트 87년 체제’가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는 이유다. 박근혜식 가부장적 코포라티즘으로 구성된 ‘범보수’의 장기집권의 형태로 말이다. ‘멘붕’ ‘잿더미’ ‘패배’라는 단어가 묘사하는 것보다 더 거대한 흐름의 시작일지 모른다는 얘기다.
박근혜發 ‘포스트 87년 체제’
이른바 ‘87년 체제’는 정치 영역에서 5년 단임 대통령제와 4년 임기의 단원제 소선거구 국회라는 민주주의 제도로 요약된다.
그런데 그것을 실제로 작동 시킨 것은 지역정치였다. TK, PK, 호남, 충청 등의 지역에는 노태우-김영삼-김대중-김종필이라는 87년 6월까지 대한민국 정치에서 주역을 맡았던 이들이 보스가 되고, 그들을 핵으로 한 지방 명문고 출신 엘리트들과 지역 토호들이 모여서 결성한 파당이 한국 민주주의를 이끌어왔다. 정치란 여기서 경합을 벌인 각 세력이 투쟁과 협상을 통해 중앙정부의 여러 가지 자원을 분배받는 행위였던 셈이었다. 1997년 대선은 호남과 충청이 연합하고 제주와 강원 일대를 포섭해 3당 합당으로 만들어진 TK-PK 연합을 포위하자는 것이었다면, 2002년 대선은 이러한 지역 연합의 틀을 유지한 상태에서 부산을 중심으로한 PK일부를 잠식하기 위한 시도였다.
하지만 노무현 정권이 지역 정치에 완전히 등을 돌리고 탄핵 사태를 계기로 기층 정당 조직이 무너지면서 민주당 계열의 지역 정치는 무너졌다. 보수 세력도 위기를 겪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2007년 대선에서 한나라당은 이명박이라는 아웃사이더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한다. 이명박은 주류 중의 주류, 이회창이 패배하고 난 뒤 보수세력의 고민 -어떻게 수도권 40대를 공략할 것인가-을 담을 인물이었다. 그리고 이명박 정권은 처참하게 실패했다. 집권 첫 해 발생한 촛불시위를 계기로 이명박 정부는 정권 유지를 위해서 계속 무리수를 둘 수밖에 없었다. 지역 맹주 중심의 87년 체제가 무너진 셈이다.
그렇다고 지역 정치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한국 경제에서 지방이 차지하는 위상이 점점 줄어들고, 상당수 지역이 구조적인 경제침체에 빠져 들면서 지역은 중앙 정부의 시혜적인 정책에 더 의존하게 되었다. 이전의 지역 맹주 정치와 같은 파괴력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서울의 정책에 의존적인 하위파트너로서 자리는 계속 유지했다는 얘기다.
문제는 이러한 상황에서 박근혜가 적극적으로 ‘보수의 리빌딩’을 추진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박근혜는 성공적으로 충청, 강원, 제주 지역에서 보수정치에 대한 지지를 다시 이끌어 냈다. 여기서 특기할만한 점은 박근혜 주도의 ‘레콩퀴스타(reconquista·재정복)’ 과정에서 민주당은 거의 방임하다시피했다는 것이다. 민주당의 거물급 지방자치단체장이 있는 지역에서 박근혜는 손쉽게 선거의 여왕임을 증명했다.
박근혜의 지역 재장악이 손쉽게 가능했던 또다른 원동력은 그의 중위수 정치다. 그는 김부겸이 지난해 말 “야권이 차기 대선에서 ‘경제적 민주화’를 의제로 싸워야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를 꺾을 수 있다”고 말한 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김종인을 영입해 경제민주화 의제를 선점했다. 복지 의제의 경우 몇 년 전부터 계속해서 갈고 닦았다. 오른쪽에 있으면서 맹렬하게 왼쪽으로 달려갔다.
박근혜는 전통적인 엘리트는 커녕 시대착오적인 궁정인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에게 투사되는 것은 남한이란 국가가 오늘날 중진국 대열에 낄 수 있을 정도로 양적, 질적으로 성장해 온 ‘역사’다. 김현태가 지적하듯이 “박정희식 개발독재는 다수 대중의 동의를 획득한 첫 번째 합의모델”(분노한 대중의 사회, p.278)이다. 특히 이 합의 모델에 대해 “사회경제적 하위 계층은…‘딴생각 없이 부지런히 일만 하면 잘 살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박근혜가 어떠한 형태로 ‘시대정신’을 이야기하건 그것은 이전의 ‘역사’에서 나오는 유산의 성격을 갖고 있다. 그의 중위수 정책은 사실 예전에 잘 작동했던 ‘첫 번째 합의 모델’이라는 정치적 자산 위에서 주장되는 것이다.
박근혜가 적극적으로 민주당의 영역에 들어가 그들을 대상으로 ‘중위수 꺾기’를 시도한 것은 결과적으로 지방에 남아있는 장년층이 그를 지지할 가능성을 큰 폭으로 끌어올렸다. 단순한 ‘향수’와 ‘지역정치’를 떠나 지역의 대중들이 그를 찍지 않을 이유를 없앤 셈이다.
결국 박근혜의 보수 리빌딩은 보수세력이 또다시 호남을 제외한 나머지 지방을 장악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는 특정한 지역 맹주 없이도 작동이 가능하다. 그 점이 바로 ‘포스트87체제’의 문을 박근혜가 열어젖혔다는 평가가 가능한 이유다.
‘지역’은 어떻게 장악당했나
4월 총선과 이번 대선에서 확연이 드러나는 사실은 민주당이 충청-강원 서부-제주에서 인심을 잃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하게 정당이 선거 운동을 하지 못했다는 수준이 아니다. 지방에 제대로 된 조직이 없으며, 따라서 지역민들과 제대로 된 소통을 하지 못하다는 근본적인 약점이 있다. 공약 개발 및 선거 운동에서 취약점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 일부일 뿐이다. 반면 새누리당의 지역 조직은 그대로 힘을 발휘하면서 세를 유지해왔다. 아래 분석은 그것이 어떠한 효과를 낳았는지를 잘 보여준다.
“민주당은 열린우리당 분당 이후 생활 공간에 밀착돼 목소리를 낼 조직을 갖지 못했다. 지방 조직은 다 잘려나가고 상층의 리더십 교체만 이뤄졌다. 새누리당은 뿌리 조직이 살아있다. 동네마다 당원들이 일상적으로 떠들어준다…50대 이상 유권자는 많아졌는데, 이들은 ‘바람’으로 쉽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아니다. 정치는 개인이 하는 게 아니라 세력이 하는 것임을 안다. 50대들은 지난 5년 동안 새누리당 조직의 목소리는 들었고, 민주당의 목소리는 존재하지 않았다.(서복경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선임연구원, 한겨레21, 942호 p.32)”
더군다나 강원도는 이번 총선을 계기로 완전히 민심을 잃었음이 분명해졌다. 충청지역은 총선에서 이긴 지역에서도 박근혜보다 지지율이 낮았다. 이들 지역은 민주당 소속의 도지사들이 있는 곳이다. 그럼에도 패배했다는 것은 민주당의 지역 레벨의 정치 운영 능력이 뒤떨어 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직의 문제 이전에 지역 정치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운용능력이 결여되어있는 셈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곳이 제주다. 강정 해군기지는 이명박 정부가 군기지를 관광 코스 한 복판에 지으려고 했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대규모 해군기지는 이후 다른 군 기지 증설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제주도에서 인기를 잃기 딱 좋은 이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은 여기에 대해서 적절한 지역 조직 동원에 실패했다. 오히려 ‘평화의 섬’을 운운하며, 수도권의 진보적 유권자의 표심에 호소하는 자기만족적인 행동에 그쳤다. “현 이명박 정부의 제주 홀대론이 제기되면서 새누리당 역시 도마 위에 오른 데다 민주통합당인 경우 제주에서 3석의 국회의원을 배출, 유리한 입지를 선점”한 상황이었는 데도 제주도에서 박근혜 지지표가 더 많이 나왔다는 것은 민주당의 무능을 보여주는 적합한 사례다. 거꾸로 박근혜의 경우 신공항 사업 등 지역현안에 대해서 공세적인 입장을 취했다. 여기에 박정희 시절 516도로 등 개발에 대한 향수까지 겹치면서, 민주당은 패배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주당의 선택은 부산 지역에 ‘올인’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부산 지역의 선거 운동은, 문재인의 출신고인 경남고의 지지도 못이끌어 내면서 젊은 층에 대한 세몰이 수준에 그쳤다. 부산에서 문재인의 득표율은 39.87%로 4월 19대 총선 당시 민주당, 통합진보당, 진보신당이 얻은 40.2%보다 더 낮다.
기본적인 선거 수학을 생각해보았을 때 과연 부산 지역에 대한 집중적인 ‘세몰이’는 올바른 선택이었나. 그리고 그것은 과연 가능한 작전이었나 하는 것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이미 4월 총선에서 문재인이 나선 부산에서 민주당은 심각한 패배를 당했고, 그 결과는 당내 경선 당시 김두관 전 경남지사와 조경태(부산 사하을) 의원의 ‘반란’으로 이어졌다. 여기에 대한 반성없이 또다시 총선 당시의 인물 선거를 시도한 것이 민주당의 부산 대선 켐페인이다.
문제는 민주당이 이후 지역 정치에 적극적으로 세를 넓혀갈 수 있느냐다. 지역 정치는 중앙정부에서 적합한 자원을 획득하는 중앙정치, 지방자치단체를 중심으로 하는 지방정치, 그리고 정치조직 바깥의 다양한 NGO 조직들과 연계되는 사회운동의 3가지 층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중앙에서는 적합한 정책을 계발, 자원을 발굴하고 이를 지방으로 전달해주는 도관(conduit)으로서의 역량, 현지에서는 지역 현안을 책임있게 해결해줄 수 있는 정치세력으로서의 능력, 그리고 지역 토호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지역민들을 재차 동원할 수 있는 NGO들과의 네트워크가 그것이다. 하지만 민주당은 이러한 측면의 문제들을 거의 논의하고 있지 않다. 별다른 고민없이 수도권 중산층에 갇혀 있는 것이 민주당의 현실이다. 보수 정당의 지방 정치의 장악이 박근혜 없이 유지될 가능성이 높은 이유는 바로 이런 민주당의 무능 때문이다.
수도권 50대, 과연 세대인가 지역인가?
민주당의 지역 정치 부재는 지방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서울과 수도권에 거주하는 중장년층에 대한 호소력의 문제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이번 선거 ‘50대 열풍’의 주역인 베이비붐세대(55년~63년생)의 대학 진학률은 30%가 채 되지 않았다. 전두환 정권이 80년대초 대학 정원을 늘리기 전 대학생은 소수였다. 특히 지방에서 서울로 진학한 대학생은 말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지역의 젊은 층은 어떻게 해서 수도권에 오게 되었는가? 지방의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수도권으로 취업을 했거나 아니면 지방 소재 대학을 거쳐 상경했다는 얘기다. 거기에 1974년 고교 평준화 이전만 하더라도 지역 소재 고등학교는 주된 ‘인맥’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원경험은 그대로 지역색이 남아있으며, 축적한 네트워크들도 지방에 기인한 것들이 많다. 그들이 사회에 나와 맺은 네트워크들이 탈지역적이고, 그들의 정체성을 바꿀 만큼 강렬한 아이덴터티를 부여했을 가능성도 낮다. 결국 그들의 생활세계는 강한 지역 기반을 가질 수밖에 없는 셈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호남을 제외한 각 지역에서 제대로 ‘맹주’의 이미지를 굳힌 것은 바로 박근혜와 새누리당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과연 어느 후보에 투표를 할 것인가? 그들이 지역에서 맺은 다양한 관계 내의 타인들이 강한 박근혜 선호성향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 별도로 문재인을 찍을 특별한 유인은 존재할 것인가?
박근혜가 50대에게 얻은 62.5%(방송3사 추정치)의 지지율의 원인에서 현재 논의되지 않은 것은 지역적 요인이다. 이택수 리얼미터 대표는 “지지후보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인 중에 하나가 유권자 아버지의 고향”이라며 “영남과 호남에 현재 거주하는 유권자들의 지지율 분포와 부친의 고향이 영남과 호남인 유권자들의 지지율 분포는 거의 비슷하게 나타난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이 분석이 가장 유효가게 적용되는 연령은 바로 50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50대 투표율의 비밀은 단순한 ‘세대전쟁’이 아니라 ‘지역투표’에 있다는 얘기다.
문제는 그들이 향후 20년간은 계속해서 주된 인구 집단으로 남아있을 거라는 점이다. 그들의 표심은 과연 지역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나이를 먹을수록 보수적이 되는 투표성향을 뒤집을만한 그나마 유력한 요소는 지역일 수밖에 없다. 이 부분에서 새누리당은 민주당에 비해 확고한 우위에 있다.
문제는 집행능력이다
한국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유권자들에게 집행능력을 인정받는 것이다. 이는 보수와 진보 사이의 정책적 차이가 작기 때문에 특히 그러하다. 1987년 이후 한국 대선에서 정책적 이슈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은 각 정당들이 내놓을 수 있는 정책 패키지의 한계가 굉장히 좁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정당들이 집권했을 때 어느 정도 잘 정책을 집행 할 수 있느냐이다. “집행능력(operation)이 곧 정책(policy)”(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 인 셈이다.
이번 선거에서 박근혜는 과감하게 복지와 경제민주화 이슈를 선점하면서 ‘좌클릭’을 시도했다. 그 결과 새누리당과 민주당, 그리고 안철수의 공약은 거의 비슷한 수준까지 접근했다. 모든 후보들이 복지 강화와 재벌 규제를 소리높여 이야기 했다. 이는 한국 사회의 핵심 문제가 양극화, 저출산 및 고령화, 실업, 수출대기업(a.k.a 재벌)의 과대성장과 나머지 섹터의 과소성장 등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한 ‘문제’가 정치권에서 해결해야하는 과제 내지는 시대정신으로 포착된 상황에서 내놓을 수 있는 해결책이란 것이 거의 대동소이할 수 밖에 없는 것도 여야의 중위수 정책 행보의 또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역대 어떤 선거보다 여야 간 공약과 의제가 공통적인 게 많”게 되었으며 “수도 이전, 대운하, 그린벨트 해제 등과 같이 여론이 양극단으로 갈리는 공약”들이 내걸렸던 이전 선거와 달리 여야는 같은 의제에서 비슷한 해결책을 내놓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두 정당의 집행능력에 대한 유권자들의 평가다. 박근혜를 지지한 4, 50대들은 특별히 그들이 안정적이어서가 아니라 두 정당이 비슷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 어떤 정당의 ‘어프로치’가 더 본인들의 문제를 잘 해결해줄 것으로 바라보았나로 보아야한다.
여기서 결정타를 날린 것은 바로 노무현 정부의 ‘실정’이다. 2007년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선출한 이들은 바로 “부동산 등 경제정책 실패, 불안한 외교정책, 북한 핵문제에 대한 부적절한 대응 등 ‘명분만 있고 실리는 없으며 수시로 바뀌는 노무현 정부의 실정’에 실망하다 못해 분노한 국민”들이었다. 문제는 5년이 지난 현재, 민주당이 과연 그때와 달라진 정책 역량을 보이고 있느냐의 것이다. 정책적인 측면에서 문재인과 민주당의 인적구성은 친노 Mk.2 정도의 평가를 받고 있다. 그리고 신뢰성과 안정성이 있다는 점을 내세우지도 않았다. 유권자들이 7~8년 전 경험한 정책적 대실패에 대해 어떠한 책임있는 애프터 서비스도 시도하지 않은 셈이다. 책임있는 정치세력이라는 점을 보여주지 못하면서 오로지 박근혜의 경제민주화와 복지정책이 거짓되었다는 점만 부각하는 네거티브 공세만을 했다.
인천과 경기지역에서 박근혜가 문재인을 앞지른 것은 단순히 민주당이 하우스푸어용 정책을 내놓지 않아서가 아니다. 예의 ‘욕망의 정치’의 탓도 아니다. 그것은 부동산 문제에 대처하는 데 민주당과 친노 그룹이 제대로 된 정책역량이 없다는 유권자들의 판단에서다. 똑같이 부동산 가격하락 문제를 겪고 있는 서울에서 박원순과 문재인에 대한 평가는 정말 다르다. 그리고 그 차이는 주로 정책 집행 능력에서 나온다. 민주당은 하다못해 후보자들의 자질론을 제기하지도 못했다. 그리고 박근혜는 ‘안정과 신뢰의 정치인’ 이라는 포지션에 대해 별다른 흔들림이 없었다.
민주당이 수도권에서도 예전처럼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정책을 실제 집행 하는 데 ‘불안하다’ ‘능력없다’는 평가가 내려져 있으면서도, 이 점을 어떻게 메꾸려고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박근혜가 ‘향수’와 ‘관성’을 키워드로 삼았다면, 문재인은 ‘공포’와 ‘세대’를 키워드로 삼았다. 그리고 문재인의 키워드에는 포지티브한 정책이 낄 여지가 없었다.
‘정체성’의 정치
경기도 남양주에 사는 직장인 이모(여·52)씨는…”50대는 진짜 불쌍한 세대예요. 50대에는 남은 게 없어요. 열심히 일했지만 손에 남은 건 없고, 쥐꼬리만큼 남은 것도 자식들한테 다 퍼줘야 하잖아요.”…”자식 세대한테도, 사회에서도 우리 50대는 그저 불쌍한 세대, 노후가 걱정되는 세대 아니냐”며 “우리 세대가 그런 처분을 받을 세대가 아니라는 걸 투표로 증명하기 위해 서로 투표하자고 진작부터 얘기했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투표로 뭉친 50대들)
이번 선거의 가장 큰 특징은 10년 전 노무현 당선의 주역 가운데 하나였던 베이비붐 세대들이 10년 뒤 대규모로 투표장에 나와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선택했다는 점이다 이는 민주당의 동원에 맞선 ‘역동원’이라 할만한 현상이 벌어진 셈이다.
이러한 현상은 새누리당조차 제대로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새누리당은 18일 저녁 자체 조사에서 박근혜와 문재인의 격차가 크게 좁혀졌으며, 19일 당일 투표율이 기록적인 수준으로 치솟자 패배할 것을 예상했다. “이날 내내 새누리당 의원과 선대위 관계자들은 “젊은 층 바람에 밀렸다”는 말만”했을 정도였다. 결국 이번 투표에서 박근혜 당선의 일등 공신은 50대들의 ‘풀뿌리 동원’ 이었던 셈이다.
이러한 50대들의 역동원은 일종의 ‘정체성’의 정치 성격을 강하게 띈다. 그들은 이번 선거를 통해 본인들의 ‘정체성’이 훼손되고 있다고 느꼈다. 위에서 인용된 어느 50대의 박근혜 지지 이유처럼 ‘자기네들의 삶이 송두리 째 부정당하고 있다’는 감성이 하나의 집단행동으로 나서게 된 주요한 배경이다.
이러한 집단 정체성의 기반은 50대들의 불안한 노후다. 그들은 이제 은퇴연령에 진입했다. 대기업에 다니던 50대들도 차츰 정리되면서 자영업 직군으로 변하고 있다. 능력이 있으면 자산소득을 수취하는 바람직한 은퇴를 선택하지만, 상당수는 다시금 노동시장에 진입한다. ‘은퇴’ ‘아파트 한 채’ ‘별도 저축 많지 않음’ ‘부양능력 없는 무능한 자식’ ‘고령화로 30년은 더 살아야’ ‘앞으로 뭐먹고 사나’ 등이 이들의 키워드다. 한마디로 ‘개고생해가며 이렇게 살아왔는데, 제대로 쉬지도 못하는 노후가 기다리는 끼인 세대’가 이들인 셈이다. 그들의 발언에는 일종의 ‘피해의식’이 강하게 깔려있다.
하지만 집단적인 정체성을 자각하는 것은 ‘상대방’의 존재가 있어야만 한다. 노동자가 노동계급이 되는 것은 다름 아닌 ‘자본가’의 존재가 명확해질 때인 것처럼 말이다. 여기서 이들의 대규모 동원이 일어나게 된 원인을 제공한 것은 박근혜가 아니라 바로 문재인이다. 박근혜가 박정희와 산업화를 연상시킬 때 그것은 ‘향수’에 불과하지만 민주당이 ‘20~40대들이 대접받는 세상’을 외칠 때 그것은 ‘자기 세대’에 대한 위협이 되는 것이다.
이는 개별 인구 집단(코호트)들이 불안한 경제 현실에 처해있기 때문에 극적인 형태로 증폭된다. 20~40대들 실업과 부동산으로 고통받는다면 50대와 60대는 고령화와 부동산으로 고통받는다. 더욱이 젊은 세대가 고통받는 가장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부동산이다. 세대별 자산 재분배 성격을 갖고 있는 부동산 영역에서 만족할만한 해결책을 내놓지 않은 상황에서, 수도권 중산층 30/40대를 을 겨냥한 ‘능력주의 사회’ 구호는 결국 ‘부동산 가격을 떨어뜨리자’는 얘기로 들릴 수 밖에 없다. 2030이 대접받는 세상’만’을 주장한다면 5060보고 나가 죽어라는 메시지로 치환된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문재인의 키워드는 ‘공포’와 ‘세대’다. 이 두 키워드가 만나서 일으키는 화학반응에 대해 나머지 계층이 어떻게 받아들이는 지 곱씹어 보아야 한다.
또다른 문제는 50대들의 대규모 정치적 동원이 향후 선거에 미칠 영향이다. 그들이 정치적으로 집단적인 목소리를 낸 것은 87년 6월 항쟁 이후 처음이다. 그리고 그들은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고 자부하고 있다. 이를 상쇄할만한 기제가 없을 경우 고령화에 따른 보수화와 맞물려 중도적인 후보로도 표를 얻기 힘든 집단으로 자리매김 할 가능성도 높다.
어서와. 5060의 카카오톡질은 처음이지?
이번 대통령 선거 최대 모바일 정치 혁명은 카카오톡 대화방을 통해 50대들과 아줌마들이 스스로를 조직화하고 동원했다는 것이다. 모바일이나 인터넷을 통한 커뮤니티 형성과, 이를 이용한 정치적 동원이 더 이상 20~40대들의 전유물이 되지 않게 된 셈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50대들의 스마트폰 보유 비율은 전체의 9.5%에 불과했다. 하지만 올해에는 46.8%로 치솟는다. 이동통신사들이 적극적으로 스마트폰 판매(곧 피처폰 비중 축소)에 나선 데다, 중장년층에서 스마트폰 이용에 대한 거부감도 사라졌기 때문이다.
다른 인구 코호트들이 그러하듯이, 50대 이상 장년층들의 스마트폰 생활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카카오톡이다. 그리고 그들의 스마트폰 이용은 ‘인터넷과 모바일은 진보의 아성’이라는 등식을 깨게 했다. 서울경제신문에 따르면 트위터에서 박근혜 공식 계정 팔로어는 25만명으로 34만명인 문재인보다 뒤진다. 하지만 카카오톡의 ‘플러스 친구’ 숫자는 박근혜는 68만명으로 문재인(53만명)보다 무려 15만명을 앞선다. 카카오톡을 통해 박근혜의 메시지를 받아보는 이들의 숫자가 문재인의 메시지를 받아보는 숫자를 능가한 셈이다.
게다가 카카오톡 대화방을 통해서 50대들은 정치적인 메시지를 적극적으로 주고받았다. “경기도 구리에 사는 이모(51)씨의 스마트폰은 온종일 조용할 틈이 없었다. 초·중·고 동창들과 문화센터 동기들끼리 만들어놓은 집단 채팅방에서 계속해서 메시지가 왔기 때문이다. 이씨는 “동창들이랑 문화센터 아줌마들이 서로 투표했는지 확인하는 메시지를 계속해서 보냈다”며 “투표 안 했다가는 ‘왕따’ 될 것 같아 오후 4시에 투표장으로 가서 투표했다”고 말했다”는 사례는 이를 잘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이번 대선을 계기로 보수와 진보 사이의 기술적인 격차는 좁혀지게 된 셈이다. 그것은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대중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대중의 정치 참여에 미치는 영향은 50대도 똑같이 받게 되었다.
마무리. 자민당식 장기집권은 가능할 것인가?
박근혜와 새누리당 지도부가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이번 대선 캠페인의 결과로 보수 정치 블록이 재주조됐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박근혜라는 특수한 매개체가 없이도 유지될 수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문제는 그 정치 블록의 내구도가 어느 정도 되는지, 그리고 계속 강력함을 유지할 수 있는 지 여부다.
불행히도 막 갖춰진 이 보수 선거 연합의 내구도는 상당히 높다. 가장 중요한 지점은 박근혜가 ‘한국의 네오콘’을 목표로 2000년대 초중반 미국 공화당을 모방했던 이명박 정부와 달리 중도적, 실용적 보수세력으로 포지셔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장집의 표현에 따르면 “1950~60년대의 이념적 틀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으려는 ‘신념화된 보수’의 길을 선택하기보다는 사회 다수의 요구에 순응하는 ‘실용적 보수’로 발전할 수 있는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이는 민주당이 ‘집토끼’라 할 수 있는 진보적인 지지자들을 붙잡고 좀 더 왼쪽에 있는 지지자들과의 단일화를 위해 ‘파당 내 중위수’에 몰입하고 이는 것과 대비된다. 윤여준이 지적하고 있듯이 민주당의 선거 과정은 중도층 지지자들을 붙잡는 데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파업이 연상되는 사람을 서울시 교육감 후보로 내세웠고 ‘친노’·‘종복’이란 단어들을 떠올릴 수 밖에 없는 이들을 가까이 했다.
두 번째는 새누리당의 확고한 지역 기반이다. 무엇보다 이는 민주당이 지역을 방기하다시피 하고 있는 것과 연관된다. 민주당은 지역 기반을 완전히 상실하다시피했으며, 수도권 중산층 정당으로 입지가 좁혀졌다. 이러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수도권 중산층 대상 전략 이외에 다른 전략을 내놓지 못할 정도로 시야가 좁다. 무어보다 민주당 핵심 구성원들이 수도권 중산층, 그리고 부산 출신의 재경 엘리트 일부로 좁혀져 있기 때문이다. 안철수와의 연대도 기실 수도권 중산층에 대한 장악력을 높이고자하는 시도일 뿐, 근본적인 판흔들기와는 거리가 멀다. 박근혜가 없더라도 충청과 강원 등에서 새누리당의 우세가 계속 될 가능성이 높은 이유다.
여러 차례 지적했듯이 새누리당의 강력함이란 민주당의 허약함과 비교했을 때의 이야기다. 이번 선거에서 50대의 ‘역동원’은 전혀 예상되지 않은 것이었다. 그리고 지역 정치를 장악하는 것도 민주당 세의 축소가 주요한 원인이다. 요컨데 민주당의 총체적인 무능력과 부실 덕에 새누리당이 계속 이니셔티브를 쥘 수 있는 것이다.
민주당의 문제는 무엇보다 재벌-저임금-부동산이라는 3대 축이 악순환을 일으키는 상황에서 적합한 정책적 대안을 내놓지 못하는 데 기인한다. 그리고 그 핵심적인 원인은 그들이 그 ‘체제’의 수혜를 받는 수도권 중산층이며, 기회주의적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민주당의 현재 상황에서 새로운 ‘집권 연합’을 구축할 수 있는 지도력을 확보할 가능성은 대단히 낮다.
박근혜의 앞날이 장밋빛인 것은 아니다. 박근혜 정부의 성패는 48%의 반대파들을 어떻게 포용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특히 수도권에 거주하는 30, 40대 중산층(a.k.a. 대기업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의 격렬한 반발을 어떻게 달랠 수 있느냐가 리트머스 시험지가 될 것이다. 하지만 박근혜 특유의 궁정적 리더십에서 유연성있는 조직 운용이 가능해보이지는 않는다.
그리고 박근혜가 실패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민주당의 부활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명박 정부의 실정이 결국 박근혜발 ‘정권교체’로 끝난 것과 같이 박근혜 정부의 실정도 또다른 보수 정치 그룹이 ‘심판’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것은 범보수의 계파간 항쟁 형태가 될 것이다. 민주당과 진보세력이 새로운 정치 블록을 주조할 수 있는 이념과 정책 그리고 조직을 내놓지 않는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