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군의 빛나는 승전 이야기와 해병대의 위용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빠지지 않는 것이 월남전이다. 필자의 작은 아버님도 월남전에서 소대장으로 근무를 하셨고, 장인 어른도 해병대 의무대 하사관으로 근무를 한 전쟁이기도 하여 개인적으로 이상하게 친밀감(?)을 가지고 있는 전쟁 역시 베트남 전쟁이다. 어떻게 보면 한국 전쟁 이후에 한국군이 실제 전투에 참전하여 전과를 올린 경험을 얻었던 쉽게 말해 실전 경험을 쌓았던 전쟁이 월남전이 마지막이기에 그럴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도 작전 장교로 근무하던 시절, 신정환이 파병 갔다온 아프리카 파병단에 지원을 심각하게 고민 했을 정도로 군인 생활에 매력을 느끼기도 했기에 월남전의 이야기는 다른 어떤 전사보다 흥미롭다. 하지만 월남전에서의 한국군의 용맹성과 뛰어난 전과에 가려진 패전의 이야기도 역시 간과할 수는 없다.
세상의 어느 군대도 백전 백승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 위대한 한니발이나 나폴레옹도 패전의 쓰라림을 겪었고, 징기스칸이 이끌던 몽골군 역시 쓰디쓴 패전을 겪었었다. (알렉산더 대왕, 줄리어스 시저, 중국의 오기와 같은 인물들은 전쟁에서 패전을 겪어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전쟁이 아는 정치에서 패전을 겪게 된다.) 20세기 최강의 군대로 떠오른 미군이나 러시아 군도 2차 세계 대전 이후 수 없이 많은 전투에서 패전을 겪었다.
하지만 패전은 숨겨야 하고, 미화하고, 다시 떠올리기 싫은 그런 역사이어서는 안 된다. 그 패전의 기록이 창피하고 치욕스러울수록 더욱 떠올리고 연구하고 알아야 한다. 그래야 그런 치욕스러운 과거가 다시는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군이 겪은 패전이자 해병 청룡 부대의 최대 패전으로 기록되어 있는 짜빈박 전투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전투 개전 이전 국군의 상황 인식
1966년 10월 월남에 파병된 해병 청룡 여단은 각급 중대들의 전술 기지를 재 배치 하기로 결정하고, 이 결정에 따라 짜빈박 지역을 담당하고 있던 10중대는 197 고지에 중대 전술 기지를 설치하고, 전술 기지 북쪽의 안디엠 (An Diem) 마을 인근에 1개 소대를 차출하여 대대 관측소를 설치했다.
10중대가 이 지역에 전술 기지를 설치하여, 베트콩을 비롯한 월맹군이 197 고지 남단에 있는 98고지 인근에 지속적으로 나타나 10중대의 병력은 98고지 인근으로 지속적인 출동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는데 197, 고지 인근의 지대가 험준하고 밀림이 발달해 이동시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이 문제로 지적되어 왔다.
이에 1966년 10월 18일 10중대는 197 고지에 있던 중대 전술 기지를 98고지 인근으로 이동시키고, 주변 지역에 수색 매복 활동을 증가 시켜 월맹군과 베트콩의 활동이 이 지역에서 급속하게 줄어들게 된다. 이와 같은 전술 기지의 이동은 당시 해병 여단의 중대 전술 기지 설치 원칙인 적 활동 중심부에 기지를 설치하고 이를 이용해 기지로 적을 유인하여 적을 괴멸 시킨다는 여단의 전술 원칙에 의거한 이동이기도 했다.
이와 같은 10중대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중대 전술 기지가 있는 98고지에서 대대 관측소가 위치한 안디엠 마을까지의 구간은 소수의 병사가 도보로 이동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고, 우기로 인해 헬리콥터를 활용한 물자 운반 및 보급이 힘든 경우에 대대 주 지휘소에서 대대 관측소로 차량으로 보급하던 것을, 소규모 병사들이 도보로 물자를 수송하기까지 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면서 이 지역은 안전지대가 되었다는 인식이 부대원들 사이에 퍼져 나갔다.
이후 98고지에 전술 기지를 운용하던 10중대는 임무를 청룡 부대 9중대에게 인수 하였지만 대대 지휘부를 비롯한 대부분의 3대대 인원들은 이 지역을 안전 지대로 인식하고 있었다고 한다.
전투가 벌어진 짜빈박 지역은 9중대가 새롭게 진지를 인수 받은 98고지에서 출발하여 북쪽으로 뻗은 능선을 따라 짜빈박이라고 불리는 폐허가 된 마을이 있었고, 그곳에서 다시 소로를 따라 좌측에 수로 지대인 좌측의 개활지와, 우측에 197 고지를 끼고 아래쪽으로 이동하게 되면 40고지로 불리는 지역에 도달하게 된다. 여기서 다시 우측으로 40고지를 돌아서면 다시 넓은 개활지를 지나 안디엠 마을로 갈 수 있었다.
이 거리는 약 3Km로 98고지 지역에서 안개가 없는 날씨에는 감제(상대적으로 높은 지점에서 관측하거나, 사격에 의해 적의 활동을 방해)가 가능한 지역으로 9중대 병력을 포함한 대부분의 병력은 197 고지를 포함한 이 통로에 대해 전혀 어떤 위험도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편 한국군 청룡 부대는 1967년 1월부터 현재 자신들이 점령하고 있는 지역내에서의 평정 지역을 확대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이를 “투망작전”이라 명령 예하 부대에 작전을 개시하도록 지시한다. 이에 따라 청룡 부대 3대대 지휘 사령부를 9중대 지역으로 이동하여 투망 작전에 참여하게 된다.
하지만 작전이 시작되고 나서 베트남의 우기가 시작되었고, 이에 따라 적이 점령하고 있는 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수색 섬멸을 위해서 필요한 헬리콥터 기동이 불가능해짐에 따라 작전의 연기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었다.
1967년 1월 10일 청룡 부대 3대대는 작전 지역 35 지역에 헬리콥터를 이용한 강습 정찰을 실시할 예정이었지만, 기상 악화로 인해 헬리콥터의 이용이 불가능한 상황이어서 작전의 연기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당시 3대대의 지휘관인 조형남 중령은 헬리콥터의 지원이 없이는 작전의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이에 따라 작전의 연기를 여단 본부에 건의하여 승인을 받게 된다.
이에 따라 대대 전술 지휘소를 9중대 전술 지휘 본부가 있던 98고지에서 철수하여 원래 대대 전술 기지가 있는 지역으로 철수를 결정한다. 이에 따라 대대 전술 지휘소 철수 요청과 함께 헬리콥터 지원을 요청하게 되지만 미군의 운영하고 있던 헬리콥터의 지원이 날씨상의 문제로 지원이 거절된다. 이에 3 대대 지휘부는 도보로 9중대 점령 지역을 북쪽으로 종단 대대 관측소가 있는 안디엠 마을까지 이동한 다음 그곳에서 차량을 이동해 대대 지휘소로 이동하기로 결정을 내리게 된다.
이와 같은 계획은 이미 이 지역에 월맹군과 베트콩의 활동이 없는 안전지대라는 믿음과 과신이 작용한것으로, 그 동안 이 구간을 이동하면서 물자를 배급하고 수송한 9 중대 병력의 경험에서도 이와 같은 믿음을 지지해주고 있었다.
비극의 시작
하지만 이는 크나큰 실책으로, 이 지역을 관할하고 있던 월맹군과 베트콩은 이 지역의 한국군의 이동 상황을 오랜 시간 동안 관찰 한 다음, 한국군에게 기습 공격을 통한 피해를 안기기 위해 약 1개 중대 규모의 병력을 197고지에 잠입시켜 놓은 상황이었다. 197고지에 배치된 적은 안디엠 마을에서 접근 할 수 있는 아군의 기동을 막기 위해 일부 병력을 40고지 인근에 배치 하고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9 중대 병력 이동을 관찰하여 9중대 지역에서 안디엠 마을까지 이동하는 지역에서 한국군의 경계 활동이 미약함을 확인하고, 안디엠 마을에서 9 중대 지역으로 이동하는 통로인 40고지에도 일부 병력을 배치하고 유선 통신선까지 양 지역간에 유선 통신선까지 매설을 완료하여 아군을 기습할 준비를 마친 상황이었다. 한편 이와 같은 첩보는 이미 짜빈동 지역의 인적 정보 네트워크를 통해 아군에게 알려진 상황이었다.
1967년 1월 9일 작전 지역 32에서 투망 작전을 실시하고 있을 무렵 안디엠 마을에서 민사 작전을 진행하고 있던 양영구 중위가 마을 부민으로부터 이 지역에 월맹군 1개 중대가 잠입해있다는 정보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3대대의 전술 작전 기지로 귀환한 양 중위는 이와 같은 정보를 당시 대대 상황 장교인 강용신 대위에게 전달 하였고, 이 정보는 다시 9중대 전술 작전 기지에 나가 있던 3 대대의 작전 지휘 본부에 있는 대대 작전 장교 진우현 소령에게 전달 되었다.
하지만 진 소령은 해당 정보의 가치에 신뢰성이 없다고 판단 정보를 대대장에게 전달하지 않음으로써 짜빈박 패전의 결정적인 상황이 연출되게 된다. 이와 같은 진 소령의 판단의 근거는 정보에 따르면 월맹군 1개 중대가 197 고지를 비롯해 40고지 인근에 침투해 있다는 것인데, 이들 지역은 9중대의 진지에서 약 1.9km에 불과한 지역이고, 대대 관측소로부터도 거리가 얼마 떨어지지 않은 지역으로 당일 3 대대가 작전을 수행안 작전 구역 32에서도 얼마 떨어지지 않은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작전 장교 진 소령은 이와 같은 근거리에 적의 중대 규모 병력이 잠복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아군이 알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 할 수 없다는 판단아래, 해당 정보를 대대장 및 상급부대에 보고할 가치를 못 느끼게 된 것이다.
위 사진의 소총은 M1 개런드 소총이다. 월남전 당시 한국군의 주력 소총으로 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국을 승리로 이끈 걸작 총이다. 세계 최초의 반자동식 소총으로 2차 세계 대전 당시만 해도 수동으로 총을 장전하던 다른 국가들에 비해 미군이 보병 전투에서 우위를 가질 수 있도록 해주었다.
하지만 한국 전쟁이후 공산권을 중심으로 AK-47을 활용하고 유럽 국가들이 Fn-Pal이라는 자동/ 반자동 겸용 돌격 소총을 제식화하자 빠르게 구형이 되어 버렸다. 고장이 없고, 거친 환경에도 잘 적응하는 신뢰성이 높은 소총이었지만 8발을 장전해서 사용하고 단발 사격만 가능한 화력은 정글전투와 같은 근접 전투에서는 절대적인 화력 열세를 가지고 오게 된다.
미군은 M1을 제식 소총에서 57년 은퇴 시키고 64년까지 M1을 개량해 자동 소총 기능을 추가한 M14을 사용하다가 65년부터 M16으로 교체하여 사용했다. 한국군은 68년도에 M16을 제식 소총으로 사용하고 M1을 예비군과 학도 호국단에 배치하기 시작했다.
본론으로 돌아가, 1967년 1월 10일 14:10분에 9중대의 전술 기지를 출발한 청룡 부대 3 대대의 지휘 본부 병력은 총 병력 31명에 9중대에서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여 차출하여 배치한 1개 소대 병력으로 구성되었고, 화기는 주로 M1 소총과 M1 카빈으로 무장되었고, 별도의 기관총이나 지원 화기는 배치되지 않았다. 또한 당시 한국군에게 지급되었던 M 16 신형 소총은 교육용으로 일부 배치가 되어있던 시기로 경계 부대에 한정 그리고 대대 지휘 본부에 1정씩 각각 배치되어 있었다.
지형적으로는 197 고지에 가까이 다가가게 되면 무전기의 전파를 197 고지가 가로 막아 통신이 9중대 전술 기지를 제외한 다른 지역과 불통이 되는 지역이 9 중대 전술기지에서 안디엠 마을까지 가는 길의 한 복판에 있었는데 이곳을 지나가는 14:30분경 적의 공격이 시작 되었다. 14시 30분 첨병으로 행군의 최선단에서 이동중이던 아군의 병사 한명이 앞쪽에서 포복으로 이동중이던 월맹군 3명을 발견 총을 발사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첨병이 전방에서 적 2-3명이 도망중이라는 보고를 받고 이를 추격하라는 명령을 내리기 무섭게 우측의 197 고지 방면에서 적의 총 사격이 시작된 것이다. 행군 행렬은 일시에 좌측에 있는 논두렁에 몸을 숨기고 적에게 응사하기 시작했으나 논두렁을 통과한 적탄과 유탄에 짧은 시간에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이에 개활지에서 고지에서 은폐 엄폐한 적을 상대로 전투를 벌이는 것이 불리하다고 생각한 전방 첨병 소대의 소대장 김태철 소위가 분대장들을 독려하여 40고지 방면으로 기동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부대가 기동을 시작하기 무섭게 40고지 방면에서 날라온 총탄에 김태철 소위가 머리와 등을 맞고 즉사하고, 근거리에 있던 적을 향해 수류탄을 던지려고 했던 대부분의 병사들도 전사함으로써 전위 첨병 소대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맞이하게 된다.
이후 현재 지형을 벗어나 계단식으로되어 있는 서쪽의 논 지대로 이동하려고 했던 마지막 시도도 괴멸되어 15:40분경 전위 첨병 소대원은 다음날 아군에게 구출된 이상운 일병 한명을 제외하고 전원 사살되고, 월맹군은 전방 소대 지역에 전개, 아군의 무기와 통신 장비를 탈취하고 물러났다.
위 사진은 BAR – Browing Automatic Rifle이다. M60이 소대 기관총으로 제식화 되기 이전에 분대 공용화기로 활용되었던 자동 기관총이다. 탄창에는 20발이 장전이 가능하며, 신뢰성이 높고 정확도가 좋은 돌격 소총의 원형이다.
1차 세계 대전 당시 참호전 상황에서 돌격부대에게 지급할 수 있는 자동 소총을 개발해달라는 요청에 따라 미국의 전설적인 총기 디자이너인 존 브라우닝이 1918년 개발해 제식화 되었다. 미군에서는 2차 세계 대전 당시 분대 지원화기로 활용 되어 위력을 떨쳤고, 1960년까지 제식 무기로 활용된 명총이다.
탄창에 20발이 들어가는 단점으로 인해 탄띠를 활용해 급탄이 가능한 M60으로 교체 되었지만, 90년대까지 유럽 일부 국가 군대를 비롯해 일부 자유 진영 군대에서 사용했다.
지휘체계와 전열의 붕괴
한편 대대 지휘본부 병력은 적의 기습 공격에 전방 첨병 소대와 후방의 논 지역에 물러나 적과 교전을 하고 있었지만, 절대적으로 부족한 화력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또한 전투 시작과 동시에 전방 첨병 소대의 통신병이 전사하고, 대대 전술 통신을 담당하던 통신병도 교전 초기전사 함으로써 다른 부대와의 통신이 두절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여단 통신망은 197 고지로 인해 운용이 불가능한 상황이었고, 중대 통신망을 이용해 겨우 9중대에 포격 지원과 함께 병력 지원을 요청하는 것이 최선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우기로 인해 시계가 너무 나빠 적의 위치도 확인이 불가능했고, 아군과 적군간의 거리 역시 지나치게 가까워 효율적인 포격 지원도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이 무렵 작전 지역을 이탈하려고 하던 미군 항공 연락 장교 오스왈트 대위가 다리에 총상을 입었고, 대대장은 추가 부대 투입만이 현 상황을 호전 시킬 수 있다는 판단을 내리게 된다. 하지만 추가 부대 투입을 요청하기 위해 대대장이 전투 지역을 벗어나 9중대 전술 작전 기지가 있는 98고지 방면으로 이동하면서, 대대 작전 지휘 병력은 더 큰 위험에 빠져들게 된다.
그 첫번째는 전투 지역내에 지휘 통제 체계가 완전히 무너져 버린 상황이 연출된 것이었고, 두번째로 대대장과 같이 전투 지역을 이탈한 대대 선임 하사가 대대 병력중 유일하게 M16 소총을 가지고 있어 대대 지휘 병력의 화력이 급격하게 약화되었다는 점이었다. 마지막으로 대대장과 대대 선임하사가 전투 지역을 이탈할 때 후미에 배치되어있던 대대 지휘 본부 병력도 같이 이탈하게 되면서 월맹군이 나머지 병력을 우회 차단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게 되었다.
한편 대대 지휘 본부 병력과 자신이 차출해 호위 임무를 맡겼던 전방 첨병 소대가 공격을 받고 있음을 알게된 9 중대장 김윤영 대위는 해당 병력들을 구출하고자 병력을 소집했지만 당시 중대 본부에 가용 병력이 3-4명에 불과해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가 중대에 배속되어 있던 81mm 박격포 병력까지 모두 차출해 짜빈박 마을까지 진출하게 된다.
이후 김윤영 대위는 이후 합류한 1소대 병력과 함께 대대 지휘 본부 병력과 전방 첨병 소대의 구출 작전을 시도하지만 전투 지역으로 진입하는데는 실패하고 후미 지역에 남겨진 일부 부상자만 구출하는데 그친다. 하지만 이때 구출한 오스왈트 대위가 미군 항공 지원을 요청 UH-1H 무장 헬기 8대가 도착, 적진을 공격하게 되고 이로 인해 월맹군이 퇴각을 결정하게 된다.하지만 이 작전에서도 월맹군의 공격으로 UH-1H 한대가 격추되고 조종사가 큰 부상을 입는 피해가 발생한다.
한편 대대 관측소 인근에 배치되어 있던 9중대 3소대는 중대장의 반격 명령을 받고 약 2개 분대 규모의 병력을 차출 40고지 방향으로 이동하다가 월맹군의 기습을 받고 소대장과 3명의 다른 병사가 그자리에서 즉사하는 피해를 입는다. 또한 3대대의 상황을 보고 받은 여단 사령부는 포병 통신 체널을 통해 상황을 인식하고 3대대와 통신을 확보하고 상황을 정확히 판단하기 위한 노력을 했지만 3 대대장의 전투 지역 이탈로 인해 이러한 노력 역시 수포로 돌아가고 있었다.
여기에 미군측에 지원을 요청한 항공 지원은 기상 악화로 불가능하다는 보고를 받았고, 여단의 가용 병력은 10중대를 제외하면 전무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전투지역으로 급파된 10중대 병력은 1개 소대 규모만이 최우선적으로 투입 될 수 밖에 없었고, 이후 1개 소대가 더 추가 되었지만 이들 병력은 야간 전술 기지 방어를 위해 투입됨으로써 별다른 효과를 내기는 힘들었다.
18:00경, 전투 지역에 헬리콥터를 이용해 접근한 10중대 1소대는 대대 통신망이 복구되지 않은 상황에서 육안으로 아군의 위치를 확인한 뒤 그때까지 생존하고 있던 대대 지휘부 병력들과 조우하는데 성공했고, 이후 40고지 인근으로 진출하면서 몰살당한 전방 척후 소대를 발견했다. 하지만 40고지에 도착한 10중대 1소대 병력은 이미 일몰이 되어 피아간 식별이 불가능하고 수색 작업이 불가능하다고 판단 병력을 40고지에서 철수 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40고지에서 10중대 1소대 병력이 이탈하기 위해 기동하던 도중 퇴각을 하고 있던 월맹군과 조우하면서 피아간에 육박전이 발생했고, 이에 퇴로가 차단된것으로 오판한 월맹군이 197고지 방면으로 물러남으로써 전투가 종결되었다. 다음날 아침 인근 지역을 수색안 아군은 월맹군이 197고지를 넘어 전투 지역에서 벗어났음을 확인했고, 아군은 전사 32명, 부상 30명에 자동소총 6정, M1소총 8정, M16소총 1정, 칼빈소총 8정, 권총 1정, M40유탄발사기 2정, AN/PRC-10무전기 3대, AN/PRC-6무전기 1대를 상실하는 피해를 입었으며, 3 대대의 투망 작전은 중단되게 된다.
짜빈박 전투의 교훈
“짜빈박 전투”가 보여주는 교훈은 몇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정보의 중요성이다. 짜빈박 전투 전날 안디엠 마을에 민사 작전을 수행하던 민사 장교가 해당 지역내에 월맹군 1개 중대가 잠입했다는 첩보를 이미 확보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지휘 계통을 통해 보고하지 않은 것이 가장 큰 문제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판단에는 해당 구역을 이미 아군이 수색 정찰을 통해 확인한 지역과 인접 지역이고, 기지와도 크게 거리가 있지 않아 적의 침투가 불가능할 것이라는 판단이 주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적의 행동에 대한 정보를 무시하고 현재 아군 상황에 대해 긍정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은 전쟁사를 거쳐 많이 나타나는 전형적인 형태로, 1944년 연합군이 네델란드 지역을 수복하고 독일의 루르 공업 지대를 공격하기 위해 수립 집행했던 <마킷 가든 작전>에서 연합군 육군 총 사령관이었던 영국의 몽고메리 원수와 그 수뇌부가 취했던 행동과 크게 다르지 않다.
위 사진은 2차 세계 대전 당시 최대 규모의 공수 부대 작전으로 기록되고 있는 마킷 가든 작전의 기록 사진이다. 이 전투에서 연합군 육군 총 사령관인 버나드 몽고메리는 자신이 세운 작전으로 전쟁을 빨리 끝낼 수 있다는 생각으로 네델란드 인근에 재 배치된 독일군 기갑부대에 대한 정보와 해당 지역이 공수 작전 및 기갑 부대를 공격적으로 운영하는데 적합하지 않다는 정보 당국의 보고를 무시했다.
이로 인해 영국군 제1 공수 사단이 전멸하고 연합군은 노르망기 상륙이후 최대의 패전을 기록하게 된다. <마킷 가든 작전>당시 연합군 정보부는 네델란드 레지스탕스로부터 아른햄 지역에 독일군 기갑 사단이 이동했다는 정보를 이미 받았음에 불구하고, 네델란드 레지스탕스의 정보를 신뢰하기 힘들다는 판단아래 작전을 개시를 밀어 붙였다가 그 지역에 투입된 영국군 제1 공수사단이 80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면서 괴멸된 사실도 있다.
또한 역사적인 진주만 기습이 있을 당시 미 태평양 함대 사령관이었던 키멀 제독은, 진주만 기습이 있기 약 2주전인 11월 24일부터 11월 27일 12월 3일까지 지속적으로 일본군이 태평양 연안에서 기습 공격을 가할 가능성이 있다는 정보를 받았으나 진주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의 머리속에 일본군이 기습 공격을 할 수 있는 태평양 연안의 지역은 필리핀이나 괌 이상을 넘어서는 구역은 아니었고, 더더군다나 미국 영해를 깊숙이 들어와야하는 진주만은 일본군의 능력으로는 불가능 하다고 믿었던 것이다.
짜빈박 전투 당시 3 대대 작전장교인 진우현 소령도 이와 같은 심리적인 안전감과,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무의식적인 신념 – 안디엠 마을 인근은 안전지대라는-에 반하는 정보를 받아 들일 준비가 안됐던 것으로 생각된다. 만일 그가 그 정보를 정보 분석 담당자인 정보 장교와 대대장에게 보고 했다면 짜빈박 전투의 상황은 많이 달라졌을 수 있다.
두번째로 작전 지역내의 지형 지물과 미군과의 협조의 문제에 있다. 특히 헬리콥터의 작전 운용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해당 기동 장비의 운용이 전적으로 미군에게 달려있었기 때문에 미군과의 협조가 필수적이었지만 짜빈박 전투와 같이 헬리콥터의 이용이 극히 제한이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하곤 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는 헬리콥터의 활용이 제한될 경우에 대한 대처 방안이 필요 했지만 당시 한국군은 이와 같은 대체 작전이나 수단을 운용하기에 장비나 물자에서 지나치게 제한이 많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여기에 정글 지형에서 사용이 제약되는 무선 장비 역시 문제로 지적되며, 이 때문에 항상 모든 작전 지역에서는 유 무선망을 동시에 개통하고 이용하여 유사시에도 통신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준비가 필요하다. (이와 같은 무선 통신의 문제점으로 인한 작전 통제권의 상실은 앞에서 말한 마킷 가든 작전 당시 영국군에서도 발견된다.)
마지막으로는 대대장을 비롯한 일부 중요 대대 지휘부가 전투 지역을 벗어난것에 문제가 있다. 당시 전투 지역을 벗어나 9중대 전술 기지로 이동한 대대 지휘부 인원에는 대대장을 비롯해, 대대 작전 장교, 대대 선임 하사관등 주요 지휘관이 모두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와 같은 상황에서 지휘부가 통신 복구를 위해 전투 지역을 벗어나는 행동은 이해하기 어렵다.
대대장이나 대대 작전 장교를 비롯해 일부 인원이 전투 지역을 벗어나 통신을 복구하는 노력했어야지 전원이 전투 지역을 벗어난 것은 전투중 전투 지휘체계 공백 현상을 발생시켜 남아 있는 인원들이 결국 각개 격파되어 몰살되는 결과를 만들어 내고 말았던 것이다. 전투중 지휘체계의 유지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전사라 할 수 있다.
원문 : 로빈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