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대학생, 다큐멘터리 제작에 입문하다
이승환: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박혜민: EBS 박혜민 PD입니다. 시즌 3 막판에 <위대한 수업>에 합류했습니다.
이승환: EBS는 어떻게 입사하셨나요?
박혜민: ADHD 성향이 있어서 책보다 다큐멘터리를 좋아했어요. 다큐멘터리를 통해서 세상을 배웠는데, 특히 EIDF, EBS 국제다큐영화제를 학생 때부터 즐겨 갔습니다. 다큐멘터리를 보러 다니면서 EBS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키웠어요.
이승환: 다큐멘터리라니, 뭔가 학생 때 좌빨 활동을 하셨던 건가요?
박혜민: 약간 운동권에도 발을 걸치고 있었지만, 운동권이 되기 싫은 마음도 한켠에 갖고 있는 소시민적인 학생이었어요. 뭔가 사회적인 활동을 하지 않으면 죄책감이 생겨서 기웃기웃거리는? 그렇지만 제 미래가 당장 급한 그런 평범한 학생이었죠. 그러다 영상에 관심이 생겨 ‘미디액트’라는 곳에서 다큐멘터리 수업을 듣고 만들게 됐습니다. 제가 04학번인데 그때만 해도 카메라 장비들이 굉장히 비쌌고 일반인들은 영상을 만들기 힘들었던 때였거든요.
이승환: 어떤 다큐를 만드셨나요?
박혜민: 마침 그때 다큐를 만들고 싶어서 모인 5명이 모두 여성이었어요. 공통의 관심사가 무엇인지에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여성으로서 겪는 어려움이나 억울함, 그런 차별에 대한 이야기가 공통적으로 나왔고 각자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옴니버스 다큐를 만들었어요. 목사님은 여성 목회자로서의 어려움, 한 분은 성형 수술 경험을 밝히시며 외모 지상주의에 대해서, 그리고 또 한 분은 여성 흡연자의 삶, 이런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사적이고 내밀한 ‘체모’를 주제로 다큐를 만들기까지
이승환: PD님은 어떤 주제의 다큐를 만드셨나요?
박혜민: 털에 대한 다큐였어요.
이승환: …… 다른 분들은 뭔가 사회적인 의미가 느껴지는데, 털이라니 특이하네요.
박혜민: 사적이지만 또 사회적인 의미가 있죠. 그때 당시 제가 팔에 털이 되게 많았어요. 털을 밀었더니, 더 억세게 자라나잖아요. 그런 팔을 보고 남자 선배들이 되게 되게 많이 놀렸었고, 제모 시술을 받게 됐어요. 2000년대 초반 당시만 해도 제모가 꽤 비쌌어요. 당시 거의 노트북 3~4대 가격을 제모에 쓴 것 같아요. 근데 제모하고 나서도 놀리더라고요. 제모했다고.
이승환: 2000년대만 해도 정신 나간 시대여서, 말 가리지 않고 막말하던 시대죠(…)
박혜민: 네. 처음에는 왜 여성들만 털을 밀어야 되지, 왜 우리는 털을 이렇게 터부시하지? 털 많은 여성들은 왜 놀림을 받아야 하지? 이런 고민에서 시작했어요. 근데 촬영하다 보니 저만 그런 생각을 가진 게 아니더라고요. 남자 동기는 털이 없어서 고민이었고, 남자 선배는 코털이 너무 빨리 자라서 매일 아침 깎는 게 성가시다고 하고, 성별을 떠나서 털에 대한 각자의 고민이 있더라고요. 그런 내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게 되게 재밌었고요.
이승환: 신기하네요. 남자들끼리도 그런 얘기를 사실 할 일이 없으니까…
박혜민: 네. 그때 경험을 통해 개인의 문제를 사회적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는 걸 배웠어요. 또 타인에 대한 이해와 공감도 얻을 수 있다는 것도요. 저만 해도 항상 화를 가지고 있었거든요. 하지만 뭔가 말하기엔 민망하고, 그런 걸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방법을 몰랐어요. 근데 카메라 앞에서 그냥 툭 터놓고 이야기하면서, 제 문제에 대해서 공감해 주는 사람도 생기고 각자의 고민도 공유하는 일련의 과정이 되게 재미있게 풀렸어요. 나의 고민에 대해 타인의 공감과 지지를 받으면서 심지어 웃길 수도 있다. 억눌린 분노를 웃으면서 해소했던 그 과정이 강렬했던 것 같아요.
사회초년생 , 감정노동의 어려움을 배우다
이승환: 그렇게 다큐 PD의 꿈을 키우게 된 거군요.
박혜민: 네. 근데 EBS뿐 아니라 다른 방송사도 다 떨어졌었요. 2009년 리만 브라더스 사태로 언론사 취업 문이 많이 닫혔거든요. 그래서 잠시 모 대기업 계열 백화점에 몸을 담았었습니다. 그런데 너무 안 맞았어요. 1년 정도 백화점 현장에서 근무하는데, 그때 정말 하루걸러 이틀에 한 번씩은 울었던 것 같거든요.
이승환: 상사가 꼰대였나요?
박혜민: 진상 고객들이 많았죠. 그때만 하더라도 ‘감정노동’이라는 단어가 사회적으로 많이 이야기되던 때가 아니었어요. 고객이 왕이다, 그러니까 따지지 말고 고객에게 잘해야 한다… 요즘은 그래도 많이 변한 게 전화하면 ‘응대하는 직원도 누군가에겐 소중한 가족일 수 있습니다’ 이런 안내 멘트가 나오잖아요? 2009년에는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어요.
이승환: 진상 고객들이 뭔 짓을 하던가요?
박혜민: 가죽 자켓을 세탁기에 빨고 와서는 교환해달라는 사람도 있고, 내가 이 동네 땅을 몇 평이나 갖고 있는 줄 아느냐. 제가 맞은 건 아니지만, 직원들을 때리는 고객도 있었고요. 근데 뭐 어쩌겠어요? 일단 ‘다 죄송합니다’라고 대응했죠. 고객이 왕이니까. 그때 눈물이 막 흐르는데, 또 매장에 나가서 일을 해야 하니, 눈물 멈추려고 웹툰 보면서 일부러 웃었던 기억이 나네요.
이승환: ……
박혜민: 실제 업무 평가도 좋지는 않았습니다. 미스터리 쇼퍼라고 고객인 척 가장해서 오시는 분들이 몰래 직원들을 평가하는데, 매뉴얼을 지키지 않으면 점수가 깎여요. 제가 60점이었거든요. 90점 이하면 서비스 교육을 받아야 하는데, 교육 담당자가 저였습니다;;; 그래도 거기 가지 않았으면 저는 EBS PD가 되지 못했을 수도 있어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자기소개서도 그렇고 EBS PD 시험에 나왔던 작문도 그때 백화점 서비스 노동 경험을 바탕으로 썼던 글이었고요.
극 내향형 인간의 EBS PD 생존기
이승환: 그토록 가고 싶은 EBS에 입사하니 어떻던가요?
박혜민: 당연히 좋았죠. 게다가 다큐멘터리의 명가EBS에 입사를 하다니, 매일 매일이 믿겨지지 않았죠. 또 EBS가 제일 잘 나갈 때여서 회사 분위기도 좋았습니다. 특히 제가 입사할 때 즈음 선배들의 문제제기로, 조연출과 젊은 PD를 같은 분야의 프로그램에 너무 묶어 두지 말자는 분위기가 있어서, 저희 기수부터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경험할 수 있었구요. 문제는 너무 바빴어요. 인력과 예산도 적은데 다른 방송사는 12주에 만들어야 할 걸 저희는 6~7주에 만들어야 했죠.
이승환: 힘든 점은 없었나요?
박혜민: 다른 방송국은 입봉할 때 큰 프로그램에 꼭지 PD로 들어가는 경우가 많거든요. PD로 이름은 올라가 있지만 프로그램 전체 50분이라고 하면, 그중에 5-10분 정도 꼭지 코너를 연출하는 식으로 프로그램에 적응할 시간을 주죠. 근데 EBS는 바로 알아서 하라는 식이에요. 조연출 1년, 1년 반 정도 경험했는데 방송에 대해 뭘 알겠습니까. 그렇게 입사 1년 만에 PD가 됐고, 또 1년쯤 지나 드디어 다큐 <하나뿐인 지구>를 맡게 됩니다. 30년 정도의 역사를 가졌던 환경 다큐예요.
이승환: 본격 다큐 PD가 되니까 어땠었나요?
박혜민: 이 자리를 빌어서 그때 같이 일했던 스태프들에게 정말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은데요. 모든 게 다 어려웠어요. 근데 PD로서 또, 그 어려움을 티 내면 안 된다는 생각에 아닌 척하다 보니 더 뚝딱거렸겠죠. 당시에는 몰랐는데, 제가 대문자 I형이거든요. 근데 PD는 사람을 만나고 설득하고, 팀으로 일을 해야 하는 직업이잖아요. 그런 모든 게 저한테 되게 힘들었어요. 그래서 촬영 장소에 가는 아침에 일어날 때,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너무너무 괴로웠고요.
이승환: 지금은 극복하셨습니까…
박혜민: 그래도 많이 하다 보니까 노하우도 쌓이고 사회성도 생기고, 이제 조금 E로 스위치 전환이 되는데요. 어렸을 때는 그게 어려워서 내가 왜 PD가 된다고 했을까, 적성검사 좀 제대로 할 걸 이런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EBS에서 만드는 프로그램들은 세상에 도움이 된다는 보람이었어요. 하지만 그것도 1000이라고 하면, 한 3~4 정도의 기쁨이었습니다. 근데 그 기쁨이 짧지만 커서 지금까지 올 수 있었어요. EBS에서 만든 모든 프로그램이 다 뿌듯하긴 합니다.
이승환: 일할 때 혼을 담는 스타일인가 보군요.
박혜민: 어린 연차 때는 한 편 한 편이 너무 소중해서, 항상 완벽을 추구하려고 했던 것 같고요. 근데 제가 제작 PD를 짧게는 20년, 길게 30년 정도 할 거잖아요. 연출할 방송도 많은데, 장기 레이스라 생각했으면 좋았겠다 싶어요. 어쩔 수 없이 제 선에서 안 되는 것들도 분명히 존재하는데, 어릴 때는 그걸 놓지 못했거든요. ‘안되면 다음에 하지, 뭐’라고 좀 가볍게 생각하는 게 필요하더라고요.
이승환: 스태프들하고 대판 싸우고 했나요?
박혜민: <세계 견문록 아틀라스>라는 프로그램에서 3주 정도 해외 촬영을 함께 한 출연자가, 저한테 쌍욕하고 짐 싸서 귀국하겠다는 거 말리고 한 적은 있어요… 그때 같이 했던 허성호 선배가 사비를 들여가며 출연자 관리하러 중국까지 날라왔었고요.(허성호 선배님 감사합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로 출연자 통제가 안 된다면, 그냥 이번 편은 망했다, 어쩔 수 없다, 촬영을 접고 다시 돌아왔을 것 같아요.(시말서 쓰고…) 그런데 그때 당시는 그래도 된다는 걸 몰랐어요. 그렇게 억울하게 욕먹으면서도, 출연자가 잘 나오는 방송으로 만들려고 애를 썼으니까요.
그렇게 열심히 완성한 다큐멘터리
인생 다큐로 남을 ‘교육격차’
이승환: 기억에 남는 다큐로는 무엇이 있나요?
박혜민: <다큐멘터리K>의 첫 프로그램인 ‘교육격차’예요. <하나뿐인 지구>같은 레귤러 다큐멘터리는 6~7주 텀으로 한 편을 만들었다면, <다큐멘터리K> 같은 장기 다큐멘터리는 1년 반 정도의 제작 기간에 3~5편 정도 만들거든요. 빠르게 찍어내는 다큐멘터리보다, 더 애정이 갈 수밖에 없죠. 저는 ‘교육격차’ 5부작 중 4부와 5부를 맡게 됐어요.
이승환: 나름 본격적으로 사회 비판 프로그램을 한 셈인데 어땠어요?
박혜민: ‘교육 격차’라는 주제가 사실, 연출자 입장에서는 좀 다루기 어려운 주제예요. 항상 얘기되어져 왔었던 주제인데, 뚜렷한 대안은 보이지 않죠. 이전의 프로그램과 차별 지점을 두기도 어려 울 뿐더러, EBS다 보니 사회에 어떤 메시지를 던져야 하나 고민할 게 많았죠. 또 시청자들이 좀 지겨워하는 주제일 줄 알았어요. 아무도 안 보면 어쩌지 걱정도 많았구요. 그런데 빵 터졌죠. 진짜 놀랐었어요.
이승환: 어떻게 빵 터진 거죠?
박혜민: 이미 영유아기 때부터 교육 격차가 유의미하게 나타남을, 부모의 사회경제적 격차뿐만 아니라 지역 격차, 정서 격차, 경험 격차, 문화 격차 등 전방위적으로 적나라하게 보여줬어요. 촬영이 어려워서 담지 못한 이야기도 있지만, 프로그램에 나온 이야기만으로도 많은 학부모님들이 관심을 가지고 보셨죠. 심지어 교육 관련 유튜버들이 라이브 방송을 할 정도로 이슈가 됐어요.
이승환: 5부작 중 4부와 5부를 맡았는데 마무리는 어떻게 지었습니까?
박혜민: 교육 격차는 ‘내가 아닌 우리 모두의 문제’라는 생각을 담으려고 했어요. 4부 제목이 ‘현수는 행복할 수 있을까’인데요. 현수는 부모님의 돌봄을 못 받는, 가장 취약 계층에 있는 어려운 아이에요. 우리 모두가 현수가 되지 않기 위해서 영유아기 때부터 교육 경쟁을 하는데, 누구나 예기치 못한 이유로 현수가 될 수 있거든요. 사고, 실직, 질병 등으로 현수의 부모가 될 수도 있고요. 우리 누구나 현수가 될 수 있기에, 이 아이를 그냥 방치해서는 안 된다, 학교 선생님들, 지자체와 정부의 역할이 필요하고, 현수가 개인의 노력으로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된다…
이승환: 5부는 어땠나요?
박혜민: 5부 제목은 ‘스포일러’였어요. 입시 경쟁의 상징인 ‘선행학습’과 우리 모두 이 게임(교육격차)의 결말을 알고 있다는 중의적 의미를 담았는데요. 교육 격차와 공정성에 대해서 다양한 배경의 청년들이 함께 모아았어요. 각자 교육격차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을 내다가 유일하게 똑같이 ‘아니다’라고 답한 질문이 있었어요. “내 자녀에게 내가 경험한 교육 시스템을 물려주고 싶은가?” 저출생 문제로 자연스레 이어지는 질문이었는데요. ‘이러다가 우리 모두 죽어!!’라는 메시지를 암시하면서 마무리했어요.
<위대한 수업>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것들
이승환: <위대한 수업> PD 일은 어떠셨나요?
박혜민: 제가 막 40대에 들어섰잖아요. 솔직히 몸을 갉아 넣는 삶을 버텨낼 자신이 좀 없었어요. 몸 여기저기에서도 이상 신호들을 보내고 있었고, 이렇게 사는 게 맞나 싶어서, EBS에서 10년 차 이상이면 쓸 수 있는 안식년을 신청할까 고민했어요. 그러던 차에 <위대한 수업>에서 오퍼가 왔어요. 어차피 인생을 돌아봐야 하는 시기라면, 위대한 석학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며 인생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이승환: 예로 어떤 분이 있을까요?
박혜민: 마사 누스바움이라는 법철학자가 ‘동물권’에 관해 강연을 했어요. 원래는 인간 윤리와 법철학을 연구하셨던 분인데 어쩌다 동물권에 관심을 갖게 됐는지 궁금했어요. 여쭈어보니, 따님이 동물권을 위해 싸우는 변호사였는데 안타깝게 의료 사고로 47살에 돌아가셨어요. 그 딸의 뜻을 이어가고자 관심을 갖고 연구를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고 이야기하시면서, 자기는 그때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을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더라고 이야기를 하시더라고요. 저는 그 한마디에 눈물이 펑 터졌었거든요.
이승환: ……
박혜민: 그러면서 나중에는 애도와 비극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사실 저도 주변에 한 분 한 분 돌아가시거나 아픈 분이 생기다 보니, 죽음과 슬픔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거든요. 아픈 일을 겪은 분에게 힘이 되고 싶은데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앞으로 다가올 나의 슬픔들은 어떻게 맞이하고 대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어요.
또 사회적으로도 그런 슬픔과 아픔들을 대하는 게 미성숙하다는 생각도 들고요. 세월호 참사나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을 조롱하는 댓글을 볼 때, 타인의 슬픔에 어떻게 이렇게 무례할 수 있을까 싶었거든요. 마사누스바움 선생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 문제는 인간 공통의 문제구나 싶었고, 나중에 이 주제로 다큐 한번 만들어보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위대한 수업>을 맡게 돼 참 다행이었죠.
이승환: 그밖에 또 기억나는 분이 있을까요.
박혜민: 청소기로 유명한 ‘다이슨’의 창업자 ‘제임스 다이슨’도 엄청난 포스가 느껴졌는데요. 다이슨이 너무 바빠서 저희에게 촬영 시간 50분, 세팅 시간 10분 정도의 시간밖에 주어지지 않았는데(실제 다른 촬영은 세팅이 4시간 걸림), 세팅하는 그 짧은 시간에도 다음 제품의 디자인을 연구하시더라고요. 그런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나에게 그런 몰입과 애정의 대상은 무엇이었는지 삶을 돌아보게 되더라고요.
이승환: <위대한 수업>이 어떤 프로그램으로 남았으면 좋겠나요?
박혜민: 사람들이 인생의 고민을 풀어가는 과정에서 이 프로그램을 참고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롱런했으면 좋겠다… 이 프로그램은 KBS, MBC는 물론이고 JTBC나 tvN이 할 수 있는 방송이 아니잖아요. 전 세계에서 EBS만이 할 수 있는 방송이에요.
최근 대니엘 데닛 선생님이 돌아가셨는데, 촬영하기로 한 날 이틀 전에 병원에 입원하시고 돌아가셨거든요. 석학들이 대부분 연세가 많으신데, 이분들의 마지막 대중 강연을 기록한다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계속 차곡차곡 지성 대백과처럼 쌓였으면 좋겠어요.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방송
이승환: 너무 쟁쟁한 분들이라, 내용이 어렵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박혜민: 사실 <위대한 수업> 되게 어렵거든요. 저도 어떨 때는 대학원 수업 듣는 기분이 들 때도 있어요. 보통 방송 제작할 때 중학교 2학년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쉽게 제작하라고 배워요. 그래서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시청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자료화면, CG, 자막 등 엄청 공을 들입니다. 강연 내용을 100% 소화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우리 프로그램을 통해 해당 석학에게 입문할 수 있는 통로는 될 수 있게 말이지요.
이승환: 하긴 한번 관심 가지면 또 다른 책도 보고 그렇게 되겠네요.
박혜민: 네. 예로 제가 시즌1에 출연하셨던 주디스 버틀러 교수님을 정말 좋아하는데요. 『젠더 트러블』이라는 책을 몇 번이나 읽으려고 했지만, 정말 너무 어려워서 한 챕터도 제대로 못 읽었거든요. 근데 <위대한 수업> 강연은 대중 친화적으로 하셨어요. 한국 시청자들이 ‘젠더’에 대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교수님이 정말 많이 애쓰셨구나 싶었어요. 저는 그게 이 프로그램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다양한 영역의 석학분들을 조금이라도 더 쉽게 접하고, 나아가 더 깊이 공부하고 확장할 수 있는 다리 역할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이승환: 마지막으로 아무 말 하고 싶은 거 있으면 해 주시면 좋습니다.
박혜민: 제가 극 I형 인간이라 PD 생활에 힘든 점이 많았는데요. 그래도 EBS PD 15년을 돌이켜보니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지점들이 있어요. EBS의 프로그램을 만들다 보면, 저의 성장과 성숙에 발맞춰 나간다는 느낌이 들어요. 인생의 어떤 숙제를 만났을 때, 그때 맡았던 프로그램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헤쳐나간다거나, 그 문제를 다시금 생각해 보게 하는 계기들을 마련해 줬거든요.
이승환: 예를 들면 어떤 게 있을까요?
박혜민: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를 만들 때, 개들에게 제 모습을 투영하게 되더라고요. 문제가 있는 개들의 공통된 특징이 있는데, 생후 2~3개월 때 어떤 경험을 하는지, 보호자나 모견과 건강한 상호작용을 했는지 여부에 따라, 좋은 개가 되거나 나쁜 개가 돼요. 그때 제가 부모님이랑 마치 사춘기 청소년처럼 싸웠는데요.(다행히 잘 화해했습니다) 저의 내면 아이를 돌보는 계기를 마련해줬던 것 같아요.
이승환: EBS에서 자체 교육도 받는 셈이군요…
박혜민: 네. 교육격차도 그렇고, 위대한 수업도 그렇고, EBS가 생애주기별로 저를 성장시키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요즘엔 <명의>와 <귀하신 몸> 보면서 건강 관리 열심히 하고 있고요. 시청자분들께도 EBS가 그런 존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같이 성장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도와주는 방송으로요. 앞으로도 좋은 프로그램 만들겠습니다. 많은 관심과 시청 부탁드리고요. <위대한 수업> 오래오래 지속될 수 있도록, 좋댓구알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