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책 읽기의 어려움
나처럼 철학하는 사람, 철학을 공부하는 학자 입장에서, 철학 텍스트를 읽는다는 게 다른 텍스트를 읽는 것과 차이가 있는지, 있다면 어떤 차이가 있는지 짚고 가는 것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철학 책을 읽으려면 굉장히 많은 장벽이 있습니다. 다른 텍스트들하고 단순히 비교하자는 건 아닙니다. 철학 책의 특징을 좀 알게 되면, 철학이 읽기에 가장 까다롭다는 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1. 다루는 문제를 파악하라
우선 철학 텍스트를 왜 읽느냐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소설이건 역사서건 철학 책이건, 아니면 연극이건 영화건 드라마건, 당대의 삶의 문제를 다룬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시대의 문제를 꿰뚫는 그런 거죠. 그래야 평가도 함께 따라가고요. 영화 〈기생충〉이 사람들에게 호소했던 문제가 분명히 있습니다. 가령 불평등이 그렇지요.
철학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철학도 시대가 겪고 있는 가장 심각하고 핵심적인 문제, 그래서 풀어야만 하는 문제를 다룹니다. 중요한 철학자마다 자기가 살았던 시대, 자기가 살았던 삶의 조건 속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그 문제를 문제로 잘 정리하고, 정리된 문제를 잘 해결하려고 시도했고, 그 시도가 어느 정도 수긍이 갔기 때문에, 철학 텍스트로서 살아남았다 이렇게 봐야 됩니다.
따라서 역사학이나 문학과 마찬가지로, 철학은 아주 구체적인 문제에 대한 답으로써 텍스트가 만들어졌다는 걸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독자로서 철학 텍스트를 읽을 때, 왜 이 철학자가 이 책을 썼을까, 이 사람이 풀려고 했던 구체적인 문제가 뭐였을까를 알아내지 못하면 읽을 수가 없습니다.
철학 책은 읽기 어렵다는 말을 합니다. 철학자가 책을 쓸 때 원래 풀려고 했던 문제를 이해하지 못한 채, 그러니까 문제와 문제를 풀려는 고민을 지우고 그저 써 있는 내용과 결과만 놓고 읽으려고 하니까, 이 얘기를 왜 했는지 모르겠고 그래서 어려운 지점이 생기게 됩니다. 특정 철학자의 문제는 그 사람에 대해 다룬 역사적인 문헌 속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가령 플라톤이 《국가》라는 책을 썼는데, 도대체 어떤 문제 때문에 썼는지, 플라톤이 살았던 당시 사회적인 조건은 뭐였는지 등을 2차 문헌으로 접해서 알 수 있습니다. 데카르트가 《성찰》을 왜 썼는지,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을 왜 썼는지 등도요. 그러니까 각 철학자가 갖고 있던 고유한 문제를 알지 못하면 철학 책을 읽어도 읽은 게 아닙니다. 그래서 우선 문제를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2차 문헌을 통해서, 그러니까 특정 철학자에 대한 사료라든지, 아니면 그 철학자에 대한 동시대와 후대의 해석을 통해 문제가 다 드러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철학자가 간파한 문제가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다른 사람에게 간파되지 않은 채로, (뭐라고 그러죠? 책을 읽을 때 눈으로 흘려 읽는다 그러죠? 건성으로 읽는 거예요,) 그러니까 글자만 따라가고 뜻은 파악하지 못한 채로, 그런 방식으로 수천 년 동안 읽혔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건 철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와 통찰을 읽어내지 못하는 채로 그냥 접할 때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따라서 어떤 독자건 간에, 특히 철학 연구자나 일반 독자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수백 수천 년 동안 간과됐을지도 모를 그 철학자의 통찰과 문제를 찾아내는 일입니다.
그리고 심지어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철학자 본인도 문제를 다 깨닫지 못한 경우요. 엄청난 영감이 떠올랐고 직관적으로 보긴 했지만, 미처 다 자각하지는 못한 거죠. 막상 글을 쓰다 보면 무의식적인 숨은 통찰이 숨어 들어갈 수 있거든요. 후대에 발견되는 거죠. 글 속에는 어느 정도 들어있는데, 충분히 자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냥 녹아들어 있기만 한 걸 찾아내는 것도 후대의 독자 몫인 거죠. 이런 일이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철학 텍스트를 읽을 때는 해당 텍스트를 쓴 철학자가 풀려고 했던 구체적인 문제가 뭔지를 포착해서 그 문제가 잘 풀렸는지 검토하고, 독자 본인이 살아가고 있는 지금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문제인지, 풀 수 있는 문제인지 따지고, 못 풀었으면 추가 작업을 더 해나가는 식으로, 그걸 생각거리 혹은 생각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합니다. 굉장히 중요한 일이고 본질적입니다. 그러니까 그 텍스트를 놓고 함께 생각했을 때 뭔가 우리 삶의 문제를 풀 때 도움이 되는 문제인지 알면 그 텍스트는 읽을 가치가 있는 거고, 더 파다 보면 열쇠 같은 뭔가가 나올 수가 있고, 실마리라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보통은 이런 과정이 생략됐기 때문에 철학 텍스트를 읽기 어렵다는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이건 다른 인문 고전도 비슷한 것 같아요. 보통은 책의 줄거리 정도 배우고 끝나는 경우가 많고요. 아이들도 두꺼운 책을 읽고 나서 고작 줄거리를 정리하는 정도죠.
2. 진짜 그 철학자가 쓴 걸까
철학자가 지금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그런 형태로 책을 쓴 게 아니라는 게 또 문제입니다.
두 번째로 철학 텍스트는, 특히 오래된 경우에, 원본 자체가 오늘날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책의 형태로 쓰지 않은 게 다수입니다. 우선, 언어가 다릅니다. 플라톤이 쓴 고전 《국가》는 한 기원전 3~4세기 희랍어로 썼어요. 지금 그리스에 가도 현재 그리스 사람도 잘 못 알아들을 희랍어, 아티카 희랍어로 썼습니다. 심지어 플라톤은 대문자로 썼고 띄어쓰기도 안 되어 있었습니다. 후대에 보기 좋게 다듬고 각색하고 편집한 판본이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이른바 ‘정본’입니다. 많은 고증과 연구를 거친 결과물입니다. 깔끔하게 책에 인쇄된 거, 그런 거 없었어요.
플라톤 당시에는 인쇄술이 없었죠? 게다가 문자가 탄생한 후 일반에 보급된 지 얼마 안 되던 시점이었습니다. 플라톤은 문자로 기록을 남긴 첫 세대에 해당합니다. 아시다시피 역사학자가 ‘축의 시대’라고 부르는, 동서고금의 성인들이 활동했던 시기에, 이분들은 죄다 문맹이었습니다. 문자를 몰랐어요. 문자가 나온지 얼마 안 됐거든요. 플라톤의 스승 소크라테스도 구라만 깠지, 기록을 남긴 건 제자인 플라톤이었어요. 공자의 말이 제자들을 통해 몇 백 년 후에 정리된 게 《논어》예요.
또 누구 있죠? 석가모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접할 수 있는 문자 형태로 정리된 건 상당히 후대예요. 가령 석가모니의 초기 텍스트인, 흔히 《법구경》이라고 부르는 ‘니까야’가 있는데, 이 텍스트도 처음엔 구전으로 전수됐어요. 인도 각지의 고승들이 모여서 1년에 한 번 경전을 암송하는 행사를 열었어요(노래가 아니면 이 긴 작품을 외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함께 합창 형태로 암송하다 보면 서로 잘못 알고 있던 부분들이 수정되겠지요. 이런 형태로 1년에 한 번씩 모여서 암송하는 행사를 몇 백 년 계속한 후에야 텍스트로 정착됐습니다. 그전까지는 다 구전으로 왔던 겁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도 다 구전이 나중에 텍스트로 정착된 겁니다. 플라톤은 텍스트로 뭔가를 남긴 첫 세대고, 인류 역사에서 비슷한 시기 다른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축의 시대는 아니지만 예수도 문맹이었습니다.)
더욱이 당시에는 글을 적을 수 있는 미디어(즉, 매체)가 활판 인쇄가 아니었어요. 당연히 전자 조판도 없었습니다. 다 파피루스나 양피지, 아니면 나무조각, 다시 말하면 쉽게 손상되는, 오래 보존되지 못하는 미디어에 기록했습니다.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기록물은 흙판이나 돌에 기록된 것들입니다. 쐐기 문자가 대표적이죠.
거기 뭐 기록됐는지 아세요? 그건 장부였습니다. 주로 돈 얘기만 잔뜩 있어요. 거의 모든 기록이 누가 누구한테 얼마를 빌렸네, 갚았네, 얼마에 어떻게 거래됐네, 이런 것들이었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경제 문제가 사람들한테 가장 중요한 주제였던 거죠. 그랬으니까 지워지지 않게 기록했던 거예요.
지식층에 문자가 보급된 게 기원전 3~4세기입니다. 앞서 말했던 플라톤 시대입니다. 그런데 파피루스, 양피지, 나무 같은 미디어는 대부분 썩어 사라졌습니다. 건조한 지역에서 보존된 것들이 가끔 발굴되기도 합니다만. 그렇다면 내용이 어떻게 전해졌을까요? 필사였습니다. 베끼고 또 베꼈지요. 언제까지 그랬냐면 인쇄술이 발명될 무렵까지 그랬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텍스트는 대부분 19세기 쯤에 정리되었다고 봐도 좋습니다. 그전까지는 기술의 한계와 관심의 한계가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텍스트가 성립된 과정을 살펴보면,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책 찾아서 읽으면 되지, 하는 식이 아니었던 거예요. 애로사항들이 많았습니다. 남아 있는 자료를 읽는 일은 비석이 오래돼서 비바람에 낡아버린 비문 읽는 것과 비슷한 작업입니다.
옛 문헌에 대해 문헌 자체와 역사적 과정을 연구하고, 언어적인 짜임을 분석해 원저자가 썼던 모습에 최대한 가깝게 복구하고 복원하는 작업을 보통 문헌학(philology)이라고 부릅니다. 오래된 고전 텍스트에 관련된 경우 고전 문헌학이라고도 합니다. 문헌학 작업은 동서양이 마찬가지예요. 생각해 보세요. 어렸을 때 베껴 써본 적 있죠. 요즘이야 ‘컨트롤 C, 컨트롤 V’ 하면 되지만 옛날에 손으로 일일이 베꼈지요. 베끼다 보면 누락과 중복이 엄청 많아요. 수많은 오류가 생깁니다. 당대까지 전수된 모든 문헌을 비교 검토하고, 전수 과정을 추적하고, 원본에 가장 가깝게 복원하는 작업이 필수적이었습니다.
문헌학은 텍스트의 진실성을 찾는 작업입니다. 말하자면 전수된 문헌 중에는 저자가 처음 썼던 게 아닌 내용이 많이 섞여 있습니다. 쓰다가 멋있어 보이면 자기 얘기도 좀 섞고 하는 경우도 많았고요. 그래서 지금 우리가 활자화된 후에 접하는 것과 원본이 다른 경우가 많을 수밖에 없고, 그건 필연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몇 줄 안 되는 노자 《도덕경》만 해도 판본이 엄청 많죠. 이런 식이예요. 그러니까 손에 쥔 철학 책을 읽고 고전 철학자의 생각을 과연 얼마나 알 수 있을까, 의문이 드는 건 당연합니다. 철학 책 중에 어지간한 것들은 아주 옛날 사람들이 썼기 때문에 이런 사정이 있습니다.
요약하면, 플라톤이 사용한 고대 희랍어, 데카르트가 사용한 라틴어와 프랑스어(출판된 것들은 사정이 낫지만, 당대 유럽 지식인과 주고받은 편지가 더 많아요), 이런 것들을 굉장히 여러 번 각색되고 편집된 형태로 우리가 접하고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읽고 있는 게 액면 그대로 그 사람이 사용한 그 언어, 그리고 그 언어가 전달하려고 한 의미를 담고 있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전제해야 합니다.
문헌학 작업이 철학 텍스트의 성립을 위해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었다는 것도 확인하고 갔으면 좋겠습니다. 철학 텍스트라는 아주 추상적인 텍스트가 아주 구체적인 문제에서부터 시작됐기 때문에 최대한 그 문제를 잘 알아야 하고 문제를 느꼈던 사람 가까이 접근하려는 시도가 필요하다 말씀도 드렸고요.
그러면 고전어인 희랍어, 라틴어는 그렇다 쳐도 근현대에 나온 책은 어떨까요? 솔직히 말해, 20세기 중반 이후에 쓰인 철학 텍스트 중에 중요한 건 그렇게 많지는 않아요. 이 이슈는 각자 평가하기 나름이니까 더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20세기 초반 무렵까지 쓰인 텍스트들의 상태인데, 생각보다 문제가 심각합니다. 그 무렵까지도 여전히 출판되지 않고 노트 상태로만 남아 있는 텍스트가 아주 많습니다. 맑스, 니체, 후설, 심지어 하이데거도. 하이데거 죽은 게 1976년인데도요. 이 사람들의 텍스트도 노트로 남아 있는 게 대부분입니다. 하이데거의 노트 중에 반유대주의를 강하게 담고 있는 《검은 노트》가 있는데, 2014년에야 출간되었어요. 그러니까 뭐냐면 현대 텍스트라고 생각하는 상당히 많은 텍스트조차도 의문의 여지가 있다는 겁니다.
맑스나 니체가 쓴 글씨를 보통 사람은 알아볼 수가 없어요. 문서 보관소에 가보면 필체가 정말 엉망입니다. 검색하면 사진으로 볼 수 있어요. 누군가 이걸 깔끔한 활자체로 바꿔주는 작업을 하는 거죠. 그런 문헌학 연구자들에게 고마움을 표현해야 합니다. 노트의 보존 상태가 좋아 학자들이 정확히 복원했다고 봐야겠지만, 아직 출판되지 않은 것도 많다는 점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3. 언어적인 문제도 크다
연관된 문제가 하나 더 있습니다. 잘 복원된 텍스트라고 칩시다. 서점에 가서 플라톤이 쓴 《국가》를 뽑아서 읽으면 플라톤이 품었던 문제가 보일까요? 칸트가 쓴 《순수이성비판》은? 데카르트의 《성찰》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이 얘기는 뭐냐면, 우리가 접하는 철학 텍스트의 대다수는 해당 철학자가 쓴 그 내용이 아니라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한국의 철학자 또는 철학 연구자가 현대 한국어로 번역한 텍스트라는 겁니다. 이게 중요한 문젯거리입니다. 물론 번역자가 주석을 아주 잘 달아주고 잘 읽히게 번역했을 수 있다고 기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충분치는 않습니다. ‘아’ 다르고 ‘어’ 다르거든요. 무엇보다도 철학에서는 뉘앙스가 문제가 돼요.
이건 한국적 현실인데, 대체로 번역본으로 읽어야 합니다. 근데 번역하다 보면 원래 의미와 한국어 번역 사이에 차이가 너무 많이 납니다. 한 문장이 한 문단이 되고 책 한 권이 되는데, 이 과정에서 원본과는 완전 다른 얘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걸 차단하는 작업이 굉장히 어렵습니다. 철학 책이 잘 읽히지 않을 때, 가장 중요한 이유가 번역이 부실해서라고 봐도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책을 읽는 게 철학 책을 읽는 것일 수 있을까? 여기에 대해 많이 고민하게 됩니다. 책을 소개해 달라고 해도 마땅히 추천할 만한 게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현실이 척박합니다.
그럼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철학 텍스트가 얼마나 되겠나? 생각해 보면, 진짜 얼마 안 됩니다. 왜냐하면 불행하게도, 또 여러 가지로 유감스러운 부분이지만, 한국어로 철학 텍스트를 쓴 선학(先學)이 별로 없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잠깐, 지폐에 나오는 얼굴들, 퇴계도 있고 율곡도 있지 않냐, 물어볼 수도 있습니다. 그분들은 한국어로 글을 쓰지 않았죠. 우리가 알아먹을 수 있는 한글로 쓴 게 아니죠. 그분들이 쓴 것도 우리한테는 외국어입니다. 원효도 그렇고 정약용도 그렇습니다. 누가 아주 잘 번역해 줘야 읽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언어적인 문제가 굉장히 크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게다가 우리가 외국어를 배우기 시작하는 게, 영어는 그나마 좀 빠르지만 희랍어, 라틴어는 중고등학교 때 어림도 없고 독일어, 프랑스어를 좀 배우긴 하는데 요즘엔 잘 안 배웁니다. 그래서 영어 아닌 외국어는 대부분 대학에 와서 배우기 시작합니다. 대학생 쯤 되면 자기 생각을 책으로 쓸 정도 되는 나이인데, 우리는 비로소 그때 아빠, 엄마를 배우기 시작하는 거죠. 적어도 학술장에서는 분명히 짚고 가야 할 문제입니다. 인문 교육 전체가 그렇지만 철학은 특히 더 심하다고 봐요. 물론 문학적인 글의 맥락과 뉘앙스를 파악하는 것도 쉬운 문제는 아니에요. 하지만 철학은 제일 까다로운 사고를 끝까지 붙잡고 있어요. 이 문제를 파악하기 어렵게 하는 장벽이 언어인데, 이 장벽을 넘는 일이 만만치 않습니다.
전반적으로 두 가지 차원의 문제, 그러니까 첫 번째는 철학 텍스트를 읽을 때 해당 철학자의 구체적인 문제를 파악해야 한다는 점, 두 번째는 거기에 도달하는 데 굉장히 장벽이 많다는 점, 특히 한국 사회는 연구 인력도 별로 없었고 연구 역사도 짧고, 게다가 요즘은 연구도 안 하고 하는 문제 때문에 굉장히 난관에 부딪혀 있다는 점을 알고 나시면 철학 텍스트를 일반 독자가 읽는 게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4. 그러므로, 원전을 비교해 읽어라
끝으로, 이렇게 좋지 않은 조건에서 철학 책을 읽으려면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요? 무엇보다도 먼저 번역된 ‘원전’을 ‘비교’하며 읽으라고 하고 싶어요. 요약된 책을 보는 건 안 보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발췌된 구절들일지라도 원전을 읽어야 합니다. 해설이나 설명이 붙어 있으면 더 좋아요. 또한 2개 이상의 판본이 있으면 반드시 비교해서 읽으라고 하고 싶어요. 번역한 사람마다 원문에 대한 이해나 해석이 다를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비교하며 읽다 보면 원문이 해석될 수 있는 몇 가지 가능성이 확인되기도 해요. 바로 그런 지점에서 자기 나름으로 생각을 해 보는 거죠.
실제로 참 난감해요. 내가 철학 쪽에 오래 종사했기 때문에 좋은 철학 입문서를 추천해 줄 수 있느냐는 요청을 많이 받게 되는데, 유감스럽게도 별로 없어요. 물론 외국 책을 번역한 것 중에서도 찾아보기 쉽지 않아요. 이른바 일반인들이 아니면 공대생들이 읽을 만한 그런 게 있느냐? 일반 독자가 아니면 고등학생 이상의, 한글을 읽어낼 수 있는 독자가 철학을 어떻게 입문하고 공부해야 할까요? 어떤 책을 읽어야 되고 어떻게 읽어야 될까요?
문제거리입니다. 요령 있는 답은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직접 책을 썼고 또 쓰고 있습니다. 만약 서양 철학을 처음 공부해 보려고 한다면 내가 쓴 《생각의 싸움》을 권합니다. 서양 철학 입문서로 손색이 없다고 자부합니다.
마치며: 한국의 역사적 특수성을 이해하자
마지막으로 이 문제와 관련해서, 한국에서 그동안 학자들이 뭘 했느냐, 하는 의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별로 한 게 없어 보이는 거죠. 학자들의 게으름과 무능함을 꼽는 사람도 많은데요. 부인할 수는 없지만, 사정이 단순하지만은 않습니다. 이 문제 역시 한국적인 현실과 굉장히 밀접한 측면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역사적인 배경이라는 게 있거든요. 한국의 역사적 특수성을 고려해야 합니다.
우선 오늘날 우리가 쓰는 한국어와 한글이 보편화된 것이 20세기 초반임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전까지 대부분의 문헌은 한문이었다는 뜻입니다. 현대 한국어로 번역하지 않으면 읽을 도리가 없습니다. 동시에 이 시기가 일제 강점기였다는 점도 기억해야 합니다. 제국주의 일본은 한국어 말살을 꽤했지요. 결국 한국어가 보편화되기 시작한 것과 한국어가 억압된 것이 거의 동시라는 뜻입니다.
다음으로 분단과 독재가 있었습니다. 남북을 통틀어, 한국에서도 어지간한 학자들이 성장하고 있었는데 대부분 살해됐습니다. 감옥 가거나 고문당해 죽거나 해외로 망명하거나 아니면 중도에 포기하거나 이런 일이 허다했습니다. 사상의 장이 성숙할 수 없는 사회 풍토였습니다. 사상의 자유를 탄압했던 굉장히 오랜 역사가 있었습니다. 해방 이후 20세기 후반 내내 그러했지요. 이 문제가 충분히 해소됐다고 얘기할 수도 없는 상황이죠. 지금도 이념을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지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철학을 포함해서 흔히 말하는 인문학의 전통적인 연구 분과들이 제대로 성장할 기회를 갖지 못했던 겁니다.
결국은 식민지와 분단이라는 문제로 한국의 20세기 역사 전체가 왜곡됐기 때문에 현대 한국어로 좋은 철학 텍스트를 생산해낸 철학자 혹은 철학 연구자가 별로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단순히 학자들의 게으름 문제로 치환할 게 아니라, 한국 현대사 전체와 관련된 문제라고 인식해야 하고 거기서부터 문제를 풀어가야 되는데, 결국은 한반도 평화가 전제돼야 풀릴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접할 수 있는 철학 책이, 읽어야 할 또 읽자고 권할 만한 책이 빈약한 데는 이런 배경이 있습니다. 앞으로 읽을 독서 목록을 더 많이 만들어야 한다는 시대적인 과제를 함께 짊어져야겠습니다. 한국인 혹은 한국어 구사자가 한국어로 집필하는 것이 한국어 철학 책을 읽을 수 있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획을 그었던 외국의 유명한 철학자들의 성과물을 한국어로 번역하더라도 잘 읽히지 않는 게 정상이라는 걸 전제로 출발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한국 연구자들이 해설도 쓰고, 관련된 문제를 짚어서 논문도 쓰고 해야겠지요. 이게 미진한 것도 사실이고, 좀 아쉽습니다. 널리 읽히는 논문이 생산되지 않은 게 한 30년 넘게 지속된 현실이어서, 이것도 풀어야 합니다. 국가의 연구 지원이 한국연구재단(KCI) 등재지에 수록된 논문 위주로 진행되다 보니, 정작 읽히고 토론되기 위해 논문을 쓰는 게 아니라 평가 받기 위해 논문을 쓰는 상황으로 이어져오고 그런 관행이 정착되어 버렸지요. 연구자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는 능력도 떨어졌고요. (이 문제도 따로 다루어야 합니다.)
지금 시점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인문학의 학문 연구 분과들에서 학문 후속세대가 재생산되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학문 연구의 대가 끊길 위기입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가령 철학을 공부해 대학원 가서 박사를 받았다 치면, 그다음에 바로 굶어야 합니다. 이런 일이 기초 인문학 분과들에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학원 진학을 꺼리거나 포기합니다. 이 상황이 20년 정도 지속되면, 학문 전통 자체가 내부에서는 사라지는 거죠. 지금 거의 절멸 직전에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나마 대학원을 가더라도 다 미국으로 갑니다. 그래서 한국어를 쓰는 한국인이라 할지라도 미국 학풍의 후예로 길러집니다. 미국적 특수성을 보편으로 수용하면서 한국적인 것이 필요 없다는 태도를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한국적인 학문이 뭔지는 논의할 거리가 많지만, 이런 풍토에서 지금 이곳의 문제를 다루는 텍스트가 나오기는 어렵습니다.
미국에 유학 갔다 온 경제학 박사가 한국 경제를 제일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한국 데이터를 다룬 적이 없기 때이라고 합니다. 이 사람들은 미국에 복무하는 미국 학자지 한국에서 강의한다고 해서 한국 학자라고 할 수는 없다고 봐요. 도대체 이 현실에 대해 뭘 얘기할 수 있겠어요?
한국 학문의 미래와 관련한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굉장히 획기적인 해결책이 마련돼야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른 자리에서 깊게 논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