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제작비가 100억이 넘는 한국영화 대작들이 여름 시즌에 맞춰 개봉된 것에 대해, 익스트림 무비 스탭들이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여 대담을 진행했습니다. 또한 2014년 상반기 영화들에 관한 정리도.
한국영화들의 문제점과 앞으로의 개선 방향 등에 대해 솔직한 의견들을 나눴습니다.
대담 날짜: 2014년 7월 31일
참석자: 김종철(다크맨), 김봉석(makeneko), 이용철(ibuti), 정민아(산호주)
대담 정리: golgo
김종철: 최근 한국산 블록버스터 빅 4, <군도> <명량> <해적> <해무>(개봉 시기 순)가 거의 일주일 간격으로 개봉이 시작되면서 영화계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빅 4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우선 2014년 상반기에 개봉한 한국영화들에 대해 먼저 짚어볼까 한다. <우는 남자> <하이힐> <인간 중독> 등이 화제를 모으며 개봉했는데, 흥행 성적은 기대에 못 미쳤다.
김봉석: <신의 한수>는 그래도 성공했지. (웃음)
이용철: 2000년대 초반까지는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몇몇 감독들이 좋은 작품들을 만들어 전 세계적으로 많이 알려졌고,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다. 하지만 그들의 유일한 문제점은 우리나라에서 장르를 확립시키지 못했다는 점이다. 봉준호표, 박찬욱표, 홍상수표 영화 등 자기 고유의 영화는 만들었지만, 장르를 완성시키진 못했다.
그런 까닭에 최근 10년 전후로 나온 장르 영화들을 좋게 봤다. <해운대> <써니> <과속 스캔들> 등으로 대중적인 장르가 어느 정도 완성되지 않을까 기대했다.
한국영화의 전체 파이가 커지면서 독립, 예술영화 쪽도 같이 커질 거라고. 하지만 예상과 다르게 대기업 영화사들의 손만 커진 것 같다. 감독들의 이름은 사라지고, 대기업이 주물럭주물럭한, 아무 특색이 없는 영화들만 나오고 있다. 흥행에 성공했지만 <관상>이나 <수상한 그녀>가 그 감독들의 전작들에 비해 진보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이전 영화들이 그 감독들에게 더 걸맞은 영화였지.
매년 그해의 한국영화 베스트 10편을 뽑는데, 작년엔 정말 뽑을 게 없더라. 올해도 벌써 상반기가 지나갔는데 좋았던 영화는 두어 편 정도다.
김종철: <우는 남자>, <하이힐>, <황제를 위하여> 등 스타들이 출연한 영화들이 망한 것도 그래서일까?
이용철: 지난해 개봉한 <미스터 고>는 재밌게 봤는데 왜 망했는지 잘 모르겠더라. 하지만 <하이힐>이나 <우는 남자>는 왜 망했는지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지. 그냥 안 좋으니까.
김종철: 그래도 100만 관객도 못 넘어서 좀 놀랐다.
김봉석: 요즘은 SNS를 통해 영화에 대한 입소문이 10~20대들에게 급속도로 퍼진다. 늘 하는 말이지만 영화를 홍보하는 쪽에서는 사람들이 극장에 왜 가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야 해.
사람들이 어떤 영화를 보러갈 때면 기본적으로 그 어떠한 제목의 무슨 영화가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그 다음에 그 영화에 볼만한 요소가 있는지를 따진다. 볼만하겠다, 라고 생각하면, 사방에서 그 영화가 개판이라고 해도 보러 간다. 심하게 말해서 <군도>도 “강동원 멋있대” 그거 하나에 보러들 가지 않나.
<명량>도 “해전이 좋다더라”에 꽂힌다. <트랜스포머> 역시 평론가들이 아무리 욕해도 관객들을 본다. <우는 남자>의 경우, 장동건이 요즘 10~20대들에게 먹힐만한 배우가 아니고, 영화 자체의 특별한 매력 요소가 없다. 개인적으로 <하이힐>은 좋았지만… (웃음) 어쨌든 사람들이 좋아할 영화가 아니라서 안 본 거지.
장르 편향이 심했던 90년대로 돌아갔다
정민아: 장동건, 송승헌, 차승원은 모두 스타지만 그들이 아직도 티켓 파워가 있다고 여기는 건 착각 아닐까? 스타들의 세대교체가 이뤄지고 있어서, 2~30대도 그들에게서 더 이상 매력을 못 느낄 거다. 지난해 개봉한 <은밀하게 위대하게>는 영화의 퀄리티가 떨어져도 김수현이라는 인기 스타가 나오니 많이들 보러 갔지.
과거 90년대 한국영화계도 대기업 자본으로 제작된 로맨틱 코미디, 조폭 영화 등 장르 편향이 심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관객들이 식상해하면서 대기업들이 철수했다.
그렇게 2000년대 중반까지 가다가, 지금 다시 대기업 중심이 되면서 그 시절로 되돌아간 느낌이다. 구태의연한 제작 방식의 영화들이 다시 생산되는 걸 보니 말이다.
이용철: 그래도 과거에는 대기업들이 배급은 했을지라도 명필름, 싸이더스, 영화사 봄 등 제작사들이 인상적인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지금은 그렇게 네임 밸류 있는 제작사가 만드는 독특한 색깔을 가진 영화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우는 남자> <하이힐> 같은 영화를 만들고 당연히 성공할 거라고 생각하는 문화가 이상해. 그렇게 자신하는 사람이 누군진 몰라도 거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유명 배우를 캐스팅해서 수백억 들여서 만들면 1년 365일 어느 시즌에 나와도 대박칠 거라고 착각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관객들이 외면하는 걸 보니, 더 이상 넘어가지 않기로 선언한 것 같다.
그리고 자기들은 힘들게 영화 만든다고 하는 거, 더 이상 변명거리가 되지 않는다. 요즘 세상에 누군들 안 힘들겠나. 솔직히 대낮에 놀러 다니는 사람들 중 영화판 사람들이 많지 않나. (다들 웃음).
김봉석: 과거에도 대기업이 영화를 제작했지만 인하우스 방식으로 융통성 있게 만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회사에서 모든 걸 다 통제한다. 시나리오도 각 씬 별로 점수를 매겨서 평균치를 낸다는 얘기도 있다.
자기들만의 흥행 공식으로 마치 시험 문제 채점하듯 만드니까 영화들이 적당히 볼만은 한데, 감동은 없는 거다. 게다가 또 문제는 캐스팅에 따라 영화가 만들어지거나 엎어진다는 거다. 공식대로 만든 영화에 적당한 배우면 무조건 오케이. 만드는 쪽의 자만도 자만이지만 이런 시스템이 문제다.
<우는 남자>의 첫 부분에서 장동건이 어린 소녀를 보면서 물을 마시다가 갑자기 입을 벌려서 흘리는 장면이 있다. 이건 ‘개그 콘서트’식 유머인데, 영화 전체의 장동건 캐릭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다. 그 장면을 왜 굳이 넣었을까? 그냥 웃는 표정만 보여줬어도 됐을 텐데. 아마도 장면마다 점수를 매기면서 “여긴 코미디, 이 부분은 신파” 식으로 짜 맞췄기 때문일 거다.
최근에 본 <해적>에서도 이경영의 마지막 행동은 이전까지의 그 캐릭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냥 억지 감동을 주기 위한 것일 뿐. 요즘 한국영화가 다 그런 식이다. 개별 장면들은 좋을지 몰라도 각 장면들이 제대로 안 이어진다.
김종철: 영화 관련 매체들이 요즘 대중들에게 외면 받는 것도 그와 비슷한 것 같다.
“영화를 이렇게 만들면 관객이 오겠지”라는 생각으로 만들지만 관객이 외면하는 것처럼, 영화 매체들도 독자가 보고 싶은 기사를 쓰는 게 아니라, 자기들이 쓰고 싶은 기사를 쓰는 식이다. 아무튼 대형 스타를 캐스팅하고 큰 자본을 들인 기획 영화들이 망하는 상황이, 앞으로의 한국영화 제작 방식에 어떤 변화를 줄 거라 생각되나?
이용철: 시나리오를 영화사 입맛대로 고치는 건 사실 할리우드가 더 할 거다. <플레이어>(1992)란 영화를 봐도 알 수 있듯이. 하지만 거기엔 다수의 영화사가 존재한다는 게 우리와는 다른 점이다.
이번에 블록버스터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를 찍은 감독도 여러 작은 영화사를 거치면서 자기 개성을 살려왔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는 영화사들이 한정돼 있다. 아는 지인이 대기업으로부터 개발비 천만원을 받고 시나리오를 썼다. 처음 써낸 건 아주 신선하고 재밌었는데, 대기업에서 이렇게 고쳐라, 저렇게 고쳐라 요구하는 대로 고치다보니 나중엔 재미도 사라지고 밋밋해졌다.
문제는 그렇게 완성한 시나리오를 결국엔 영화화하지 않는다는 거다. 개발비를 받아서 만든 시나리오라서 해당 대기업 소유가 됐기 때문에 다른 데 가서 만들지도 못하고. 영화를 만들 기회를 없애버린 거다.
정민아: 영화뿐만 아니라 요즘 사회 전체가 돈이 중심이잖아. 성형 미인이라는 게 얼굴 각각의 부분들은 예쁘게 만들더라도 모아두면 괴상한 것처럼. 영화도 전체적인 하나의 텍스트로 보면서 그 안에 여백도 넣고, 지루함도 넣고, 작가의 개성도 들어가 하는데, 좋은 것들만 쑤셔 넣으면 천박한 분위기가 되는 거지.
몇몇 영화들은 망하더라도 <연가시> 같은 영화가 뜻밖에 대박을 치듯이, 간혹 성공하는 영화들이 있으니 그런 경향이 당분간 계속될 것 같다.
이용철: 영화에서 기술적인 측면이 중요시된 것이 원인일 수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보면 제작에 투입되는 CG 스탭들의 규모가 어마어마하지 않나. 그런 사람들을 하나의 영화에만 쓰고 버릴 수는 없으니 다음 영화에도 계속 투입하면서 수레바퀴처럼 끝없이 블록버스터를 만든다.
한국 영화도 재미는 둘째 치고 요즘 기술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아시아 최고 수준이라고 할 만하다. 그런 기술 스탭들을 계속 쓰려면 영화도 시스템적으로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좋은 기술에 연출과 연기도 좋으면 명작이 되지만, 기술만 좋고 나머진 꽝이니 영화가 더 안 좋아 보이는 거다. 이건 스탭들이 많이 들어간 것을 비난하는 게 아니라, 영화들이 불균형적으로 기술만 좋아진 것이 오히려 독이 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좋은 안목을 가진 프로듀서의 부재가 아쉬워
김봉석: 한국 사회의 문화예술 분야 전반에 새로운 흐름 같은 게 없다. 창조성, 상상력을 키워주는 교육이 전무한 상황에서 기술에만 투자해서 나름 발전은 했지만. 요즘은 창조력 있는 감독이 대기업을 설득하기가 힘들어진 것 같다.
과거에는 그들 중간에서 프로듀서가 조율을 잘했었는데. 전에 <세븐>(1995)을 제작한 할리우드 프로듀서 아놀드 코펠슨와 인터뷰한 적이 있었다. 원래 <세븐>은 시나리오는 다들 좋다고 했지만 영화가 너무 어둡고 해피엔딩이 아니어서 다들 꺼려했던 프로젝트였다. 그 프로듀서도 영화가 흥행이 안 될 거라 판단했지만, 자기가 마음에 들어서 당시 할리우드의 중급 감독, 배우들(지금은 일급이지만)을 고용해서 만들었더니 대박을 친 거다.
그 사람 말이 “<세븐> 이후에 할리우드에서도 배드엔딩이 가능해졌다”고 하더라. 우리도 그런 식의 혜안과 결단력을 가진 프로듀서가 필요하다. 영화를 중심으로 생각하며 투자를 받아내는 사람 말이다.
김종철: 얘길 들어보니 당분간 한국영화계에 변화는 없을 것 같다. (웃음)
이용철: 더 심해지면 심해졌지 좋아지진 않을 거다.
김봉석: 참신한 영화들이 히트하면서 사회적으로도 평가를 받으면 조금씩 변화가 생길지도.
이용철: 2003년 한해에 <살인의 추억> <올드보이> <지구를 지켜라> 같은 명작들이 쏟아져 나왔다. 지금은 그런 개성 있는 영화들이 히트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작년에 <테러 라이브>나 그런 축에 속할까.
정민아: 2003년은 영화 산업이 다시 대기업 중심으로 전환되는 시기여서 감독들이 큰 간섭 없이 자기 역량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었다. 그 이후로 대기업들이 좌지우지하면서 투입되는 예산은 점점 커지고, 그만큼 실패가 용납되지 않으니 영화 제작이 점점 비즈니스적으로 흘러갔다.
이런 상황이면 독립영화가 더 힘을 발휘해야 하는데, 그쪽도 몇몇 성공작들을 제외하면 쉽지 않은 상황이다. IMF 때도 그랬지만 아무리 경제가 어려워도 사람들은 극장으로 몰리게 돼 있다. 하지만 성공해선 안 될 영화들이 성공하니 구태의연한 관행이 계속되는 거다.
김종철: 2014년 상반기 한국영화 정리는 이쯤으로 하고, 이번 빅 4 영화들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우선 각자가 생각하는 빅 4 영화들의 순위를 밝혀보자.
이용철: 개인적으로 순위 나열은 의미가 없는 것 같다. 모두 좋은 영화들 가운데서 순위를 매기는 것이 아니라, 몇 편은 아무 관심도 없는 영화라서. (웃음) <해적>은 나름 재미를 느꼈지만 영화적으로 말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고. (주위 웃음)
<명량>에 대해서도 글로 쓰고 싶지 않다. <해무>도 4편 중 좋은 영화라고 의견을 모았지만, 2003년 영화들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베스트 축에도 못 낀다. 그런 <해무>가 수작이라면 나머진 얼마나 못한 건가. (웃음) 개인적으로 윤종빈 감독에게 관심이 가서 가장 마음에 드는 영화는 <군도>. 나머지 순위는 내겐 의미가 없다.
정민아: <명량> <군도> <해무> 순. <해적>은 언급하고 싶지 않다.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웃음)
김봉석: 완성도와 상관없이 개인적 선호도라면 <해무> <명량> <군도> <해적> 순이다.
김종철: 개인적 취향으론 <해무>가 제일. 하지만 스트레스 받을 때 극장서 아무 생각 없이 즐길 수 있는 <해적>이 좋았다. <명량>은 사실 영화적 완성도가 좋다고 할 순 없지만 보면서 뭔가 울컥하게 하는 힘이 있다. 그 힘이 관객에게 잘 전달이 되면 크게 성공할 것 같다.
<군도>는 보기 전에 기대가 많았는데 거기에 못 미쳤다. 맘에 안 들었던 건 고예산에, 스타들이 출연하는데 이 정도에 머문다 말인가 싶어서 인상적이지 않았다. 자, 그럼 <군도>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해보자.
<군도> 흥미로운 주제, 혹은 스파게티 웨스턴 짝퉁
이용철: 봉준호, 박찬욱, 김지운 등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감독들 이후의 주자로 나홍진과 윤종빈을 꼽는다.
윤종빈을 주목하는 이유는 기존의 한국영화들이 다뤘던 것과 다른 주제를 다루기 때문이다. 이전의 한국 남자영화들이 의리, 조폭 등 한국의 보수적인 문화를 보여준다면, 윤종빈은 데뷔작부터 꾸준히 자기 세대와 자기 아버지 세대에 대한 영화들을 찍고 있다. 아버지와 자신의 죄의식 같은 것들에 대해 계속적으로 탐구를 하는 것 같다. 그러한 이유로 그의 영화에서 중요한 여성 캐릭터를 찾아보기가 힘들다.
시대적으로 가장 멀리 가보려 한 <군도>에서도 마찬가지다. 일부로 소외시킨 것이 아니라, 자기가 다루려는 주제가 여자랑은 상관이 없는 거다. <군도>의 주인공인 강동원은 미남인데 여자가 없고, 다른 주인공인 하정우 역시도 성적인 매력이 넘치는데 역시나 여자와 인연이 없다.
그럼에도 그 둘은 마지막에 서로 아기를 원한다. 그냥 무심히 보면 왜 아기를 안고 싸우는지 이해가 안 간다. 이건 아기가 죄를 지은 두 사람 중에서 자기 아버지를 택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영화의 주제가 흥미로웠다.
많은 평자들이 영화가 스파게티 웨스턴의 짝퉁이라고 비판하는데, 솔직히 한국 사람들이 세르지오 레오네 영화 외 스파게티 웨스턴을 얼마나 많이 봤는지 의심스럽다.
대부분의 스파게티 웨스턴 영화들은 완성도가 높지 않다. 열악한 환경 안에서 나름의 장르를 만들어 보려는 피 끓는 의지로 만들었다. <군도>에 대기업 돈이 많이 들어간 게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영화가 망하면 돈 대준 사람이 괴롭지, 보는 사람이 배 아플 이유는 없으니까. 윤종빈 감독이 제작비를 왕창 써서 자기 뜻대로 자신감 넘치는 영화로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모든 면이 대구(對句)로 이루어져 있다. 늙은이와 젊은이, 관료와 무사, 마을과 산골 등을 퓨전식으로 엮어냈다. 젊은 감독의 건방지다 싶을 정도의 자신만만함이 드러난다. 틀에 짜인 영화보다는 덜컹거리더라도 이처럼 자신감 넘치고 거친 영화가 나는 좋다.
정민아: 아이디어 자체는 훌륭했다. 가지지 못한 자들이 가진 자들로부터 승리한 적이 없는 우리의 역사 중에서 1894년 갑오농민전쟁을 재평가해야 할 시점에, 판타지적으로 약자들이 승리하는 통쾌함을 줄 영화로 기대했다.
하지만 ‘민란의 시대’라는 제목이 주는 강렬한 느낌, 시대적 배경에서 예상했던 기대치에 턱없이 못 미쳤다. 남는 건 강동원과 하정우 두 배우들 뿐. 깊이 있는 역사의식도 없고 대중들이 원하는 욕망의 지점을 건드리지 못했다.
<변호인>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그 영화가 영화적으로 뛰어나서라기보다는 개봉된 시점에서 시원하게 건드리는 부분과 영화 속의 용감한 발언들이 많은 이들의 공감을 샀으니까 평론가들도 손을 들어준 거다.
<군도>는 너무 표면적인 스타일만 보여준다. 타란티노식 스파게티 웨스턴 패러디 이상을 담지 못해 아쉽다. 깊이 있는 시대극을 만들기엔 감독이 너무 젊어서 그런 게 아닐까.
그래도 마음에 들었던 건 윤지혜, 김해숙 등의 지저분한 복장과 분장이 실제로 그 시대의 여성들을 재현한 것처럼 리얼했다는 거다.
여배우들의 몸을 사라지 않은 변신과 연기에서 오히려 아름다움을 느꼈다. 또 로맨스로서 설득력은 부족했지만 윤지혜와 마동석이 마지막으로 시선을 주고받는 장면에서, 마치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의 보니와 클라이드처럼 감동을 받았다. (웃음)
이용철: 이 영화가 시대 배경을 특정 시켜놓은 건 이해가 안 간다. 음악도 전통음악과 서양음악이 대구를 이루고 있고, 마지막에 석양을 등지고 말을 달려 유토피아로 달려가는 모습도 무국적성을 띄는데, 시대성을 벗어나는 편이 오히려 나았을 것 같다. 굳이 왕조 이름까지 박아놓고 시대를 규정한 건 답답했다.
김봉석: 장르적으론 스파게티 웨스턴인데, “군도: 민란의 시대”라는 제목이 안 어울린다. 액션 활극으로는 재밌게 잘 만들었다.
윤종빈 감독은 자기 영화에서 비밀스런 유착 관계 같은 걸 잘 그린다. <비스티 보이즈>도 호스트와 호스티스의 물고 물리는 관계, 밤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정교하게 잘 그렸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조윤(강동원)과 관아의 유착을 굳이 그릴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원래 스파게티 웨스턴은 정교한 영화들이 아니다. 세르지오 레오네는 잘 만들었지만 <장고>나 <무숙자> 같은 영화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보여준다. 스토리를 보다 단순하게 액션 위주로 갔으면 더 좋았을 텐데, 복잡한 이야기들을 넣다보니 전체적으로 이상해진 것 같다.
이용철: 나는 <군도>에도 그런 장면들이 나와서 좋았다. 윤종빈 감독은 캐릭터들이 서로 밀착해 사기 치는 과정을 상세하게 그리는데 도가 텄다. 이 영화에서도 강동원이 재물을 축재하고 백성들의 땅을 빼앗는 과정을, 거의 과거 역사의 복원처럼 보여준다.
한편으로 그 대척점에 무정부주의적인 하정우 캐릭터가 있다. 아까 말했듯이 아기가 두 사람 중 더 나은 아버지를 선택하기 위해서는, 두 아버지의 형성 과정을 구체적으로 그리는 과정이 필요했다고 본다.
김봉석: 영화에서 또 마음에 안 들었던 건 이경영 캐릭터다. 원래는 의적떼의 브레인으로서 모든 걸 미리 계산하는 영리한 캐릭터로 나오다가, 나중엔 눈앞의 소수를 살리기 위해 다수를 희생시키는 실수를 한다. 난 그런 식의 장면이 싫더라. 짜증날 정도로. 스파게티 웨스턴에 나오는 반영웅상과도 안 어울리는 것 같고.
정민아: 아무리 그래도 아기를 안고 싸우는 게 이해가 안 가.
이용철: 과거에 <아들을 동반한 검객> 같은 영화도 있지 않나.
김종철: 영화를 적극 옹호해주고 있다. (다들 웃음)
이용철: 이 영화가 윤종빈 감독에게 손해는 안 된 거 같다. 관객도 많이 들었고.
김종철: 처음에 제작비 문제를 언급한 건, 대놓고 활극 액션을 추구함에도, 늘 봐오던 액션 스타일에서 벗어나질 못했기 때문이다. 왜 새로운 액션을 만드는 것에 주저를 하는걸까? 그런 불만에서였다.
많은 홍콩 액션 영화들의 경우, 액션 그 자체가 오래 기억에 남는다. 반면 <군도>도 그렇고 요즘 한국 영화들의 액션은 강한 인상을 남기지 못한다. 기억에 남는 건 <아저씨> 정도랄까? 하여튼 <군도>의 액션 장면들은 금방 잊혀진다. 지금은 어떻게 싸웠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기술적으로 완성도는 높을지 몰라도 보는 맛이 떨어지고 특색이 없다. 또 악당 강동원이 지나치게 아름다워서 “힘들게 살면 좀 어때. 저런 사람이 다스리는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민초들의 고통이 와 닿지가 않았다. 윤종빈 영화들 중에서 <군도>가 가장 약한 것 같다.
이용철: 실제 현실이 그렇지 않나. 가난한 사람들이 선거 때 여당 다 찍잖아. (웃음) 영화가 강동원에게 비중을 많이 줬다.
김종철: 그럼 다음 영화 <명량>으로 넘어가보자. 개봉 날 관객 동원 신기록을 세웠더라. (현재는 최고 기록 경신 중) 개봉 전에는 너무 진지해서 <해무>와 함께 가장 힘을 못 쓸 것이란 의견들도 꽤 있었다. 익무 게시판에서 흥행 예상 설문을 했을 때는 회원들이 <명량>에 손을 많이 들어주었다.
해전 자체에만 집중한 <명량> 득이냐, 실이냐?
김봉석: 영화를 좋게 보진 않았지만, 밀고나가는 힘이 좋은 것 같다. 김한민 감독의 영화들 중에서 가장 좋았던 건 <극락도 살인사건>. 하지만 <최종병기 활>이나 <명량>은 이야기나 인물이나 좋은 게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 이순신 장군의 일대기나 임진왜란의 전체 과정을 다룬 게 아닌, 명량해전 하나만을 뚝심 있게 그렸다.
우리는 이미 역사적으로 이순신 장군이 고초를 겪고 돌아와서 이긴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순신 외에 다른 캐릭터들의 설정 같은 건 사실 필요가 없다. 류승룡이 맡은 왜군 장수도 아무나 연기해도 상관없다. 왜군들 간의 성격 차이를 보여줄 필요조차 없었다.
사람들이 보고 싶은 건 이순신이 절박한 상황에 몰리다가 결국에 이기는 모습이다. 벙어리 캐릭터를 연기한 이정현이 나오는 클라이맥스 장면도 크게 설득력 있는 장면은 아니지만 어쨌든 보고 있으면 끓게 만든다.
정민아: <군도>는 일단 캐스팅, 주제, 제목 등으로 보고 싶게 만들었다. 반면 <명량>은 화석화된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라서 관람 전에는 흥미가 없었다. 또 전 국민이 존경하는 인물을 잘 그리지 못하면 그만큼 안티가 생기는 위험한 프로젝트였다. 많은 사람들이 영화에서 인물과 이야기가 실종됐다고 하지만, 전쟁의 한 부분만 다루더라도 영화가 된다는 걸 보여준 것만으로도 대단하다.
감독의 상상력을 가미한 61분간의 해전에 기승전결의 드라마가 다 있다. 상상만 했던 역사적인 전투를 눈앞에서 실현시켜준데 굉장히 큰 의미가 있다. 지금 같은 시기에 승리의 역사를 보여줌으로써 관객을 위로해준다. 다만 감독이 민초들의 활약상을 강박적으로 활용해 감동을 주려한 것은 아쉬웠다. 이야기에 좀 더 부드럽게 녹아들었으면 좋았을 텐데.
이용철: 보면서 눈물도 나고 감동적이긴 했으나, 영화 자체가 주는 감동은 아니었다. 김한민 감독이 과거 단편 영화를 찍을 때부터 그의 팬이었다. 장편 데뷔작 <극락도 살인사건>도 좋았고 두 번째 영화 <핸드폰>도 나 혼자서 별 넷 반을 줬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 영화는 흥행에 실패했다.
영화가 망하면 다음 영화 만들기가 쉽지 않다고 하는데, 김한민 감독이 <핸드폰> 이후 사람이 바뀐 것 같다. (웃음) 전에는 아기자기한 이야기를 만드는데 뛰어났는데, <최종병기 활>을 만들 때부터 시각적인 화끈한 액션에 치중하게 된 모양이다. <최종병기 활>이 대중적으로 성공했지만 영화적으로 난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명량>도 그와 마찬가지인데, 그냥 이순신이라서 울었던 거다. 그가 왜적과 싸워서 이겼기 때문에 눈물 났던 거지, 영화적으로 좋은 장면이 있거나 구상이 좋아서 느꼈던 감동이 아니다. 후반부 해전 장면에선 어떻게 이겼는지 지금도 미스터리하다. 이순신이라는 위인이 존재하긴 했지만 영화만 보면 그냥 운빨 좋은 사람으로 여겨진다. 거친 해류 속에서 어떻게 조선 해군만 유리하게 싸울 수 있었는지.
김봉석: 당시 조선의 판옥선이 왜군 배보다 더 크고 안정적이라서 유리했다고 하더라.
이용철: 영화에서 그런 부분들의 설명이 부족했다. 어제 두기봉 감독의 <참새>(문작)를 봤는데, 그 영화에선 소매치기들이 범행을 저지르는 10분간의 과정을 슬로우 모션으로 대단히 정밀하게 보여준다. 그런 게 바로 예술이다. 소매치기가 소매치기하는 게 당연하지만 그걸 영화적으로 제대로 보여주는 거. <명량>처럼 “그냥 싸워서 이겼어. 이겼으니까 감동 받아.” 이건 아니다.
김종철: 보면서 울었다면서. (웃음)
이용철: 이긴 거야 감동적이지. 하지만 보고 나서도 미스터리는 남는다.
김종철: 해전이 시작되기 전에는 별 재미를 못 느꼈다. 인물도 이순신 외에는 딱히 눈에 들어올 만한 캐릭터가 없었다. 이정현이 연기한 말 못하는 아낙네가 <태극기 휘날리며>의 어머니를 떠올리게 했다. 왜군 장수들 같은 경우는 “저 배우들이 왜 저런 연기를 하나. 일본 배우들이 제대로 했으면 좋았을걸.” 싶었다.
반면 해전 장면은 기술적으로 굉장했다. 그리고 장시간에 걸쳐서 뚝심 있게 그렸다는 점에서 대단히 높게 평가한다. 누가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또 이순신이라는 인물을 떠나, 모두가 진다고 여긴 전쟁을 자기 신념대로 밀고나가서 이겨내는 과정에서 다른 영화들에선 못 느낀 감동과 울컥함이 있었다.
전체적인 짜임새가 좋지는 않지만 감정적으로 확실히 건드리는 부분이 있더라. 그 점이 관객에게 어필한다면 크게 될 것도 같고.
이용철: 김한민 감독의 팬으로서 덧붙이자면. (웃음) <핸드폰>의 실패 이후 시각적 액션을 시도를 해보겠다고 결심했을 것 같은데, 그게 말이 쉽지 보통 일이 아니었을 거다.
보통의 다른 감독들은 안 하려는 영화에 도전한다는 점에서 요즘 드문 감독이다. 올드하면서도 대중친화적인… 내 취향은 아니지만 좀 더 모던한 감각의 ‘리틀 강우석’이란 느낌이 든다. 요즘 빤한 상업영화들을 찍는 감독들과는 다른 특색이 있어서 맘에 든다. (웃음)
김봉석: <활>이나 <명량>이나 하나의 주제만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영화인데, 계속 이런 식으론 못할 거다. 다음 영화는 어떻게 찍을지 궁금하다.
정민아: <명량>은 한국인만 감동적으로 느낄 것 같은데.
김봉석: 아니지. 이순신이 어떤 인물인지 모르는 사람도 하나의 전투만 집중적으로 보여주니까, 우리랑은 다르게 느끼더라도 좋게 받아들일 거라고 본다. 인물이 중요한 영화는 아니지.
이용철: 어찌 보면 영악한 영화다. 해전에 인물이 가린 게 아니라, 해전에만 집중한 거다.
병맛 코미디 <해적>, 순수한 웃음은 아냐
김종철: <해적>은 포스터부터가 쌈마이했고, 실제 영화도 쌈마이했는데 ‘병맛’ 코미디랄까. 그것도 은근슬쩍이 아니라 대놓고 시작부터 끝까지 그런 식으로 가더라. (웃음)
대작으로서 비주얼도 좋았고, 캐릭터도 <군도>보다 오히려 좋았다. 김남길이 돋보였고, 손예진은 그냥 어부지리, 혼자서 유머씬을 거의 다 책임진 유해진 등, 주조연들의 균형도 잘 맞아떨어진 것 같다.
물레방아 장면 같은 경우 <캐리비안의 해적>의 짝퉁처럼 보였지만 패러디처럼 재밌게 와 닿았다. 같이 본 관객들의 반응도 가장 좋았고. 여름 시즌에 이렇게 순수하게 재미와 웃음을 주는 영화가 계속 나왔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민아: 딱 중학교 2학년 수준의 코미디로 관객을 우습게 아는 영화다. (다들 웃음)
김종철: 대놓고 날 저격하다니. (웃음)
정민아: 대놓고 빤하게 만든 상업영화다. 특히 조선이란 나라를 너무나 형편없게 그렸다. 도적들에게 정당성을 주기 위해 조선왕조 사람들을 사악한 수괴처럼 만들었다. 조선을 너무 명나라의 속국처럼 다루고 우리 스스로에 대한 굉장한 열등감을 주면서, 그걸 웃음 코드로 만든 건 불쾌하기까지 했다.
예쁜 척만 하는 여성 캐릭터는 과도하게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여전사 캐릭터를 만들기 위한 강박 이상으로 안 보였다. 또 영화가 심하게 무국적성이라 레게 머리에 가죽 바지를 입은 남자 캐릭터들도 어색했고.
이용철: 나는 사실 보면서 엄청 웃었다. 옆에 앉은 관객이 옆에서 째려볼 정도로. 여름철에 순수하게 웃음을 주는 영화라고 했는데, 그 웃음이 순수하지가 못하다. 관객을 웃기기 위해 하는 짓들이 너무 진상이다.
유해진에게 바보 같은 소리 내뱉게 하고 진상짓을 시켜서 배우를 소모시키는 건 문제라고 본다. 웃을만한 상황을 자연스럽게 만들어줘서 웃음을 유발시켜야 하는데, 이건 웃고 나면 쪽팔리는 영화다.
어디 지적인 자리에서 <해적> 보고 웃었다고 하면 사람들이 얼마나 비웃겠나. (다들 웃음) 바다를 배경으로 한 액션씬은 정말 좋았다. <명량>이 갑갑하면서 그 과정을 이해하기 힘들었다면, <해적>의 액션씬은 호탕하고 할리우드적이고 CG도 수준급이었다.
또 한 가지 <해적>의 문제는 영화 끝에 가서 교훈질을 하는 거다. 우리나라 감독들이 괜히 민중을 끌어들여서 어리석은 지도자들을 비판하려고 하는데, 그런 강박관념에서 벗어났으면 좋겠다.
김봉석: <해적>의 제일 큰 문제는 손예진이 하나도 안 예뻐. 하나도 안 멋있고. (다들 웃음). 김남길은 매력적이지만 원래 관심 없는 배우여서 도움이 안 되고. (웃음) 나 역시 말장난하는 억지스런 코미디가 짜증나더라. 이 영화에서도 이경영 캐릭터가 마지막에 갑자기 확 변해서 교훈질 하는 것도 앞뒤가 안 맞고. 또 손예진 뿐만 아니라 설리도 하나도 안 예쁘게 나왔다. (다들 웃음)
김종철: 아무 생각 없이 극장가서 실컷 웃고 나와서 잊어버려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최근 유행하는 병맛 코미디를 잘 집어넣어서, 툭툭 던지는 대사들조차 나랑 잘 맞더라고. 손예진, 설리 등 여자 캐릭터들이 어색했지만 김남길, 유해진의 연기는 좋았다. 요즘 대중들이 가장 좋아할만한 코미디 같다. 몇 년 전 <7급 공무원>처럼..
이용철: <해적>에 비하면 <7급 공무원>은 수준이 한참 높지. (다들 웃음)
<해무>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영화를 찍은 것 같아
김봉석: <해무>가 과연 걸작인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어둡고 암울한 상황을 끝까지 밀고 가는 미덕이 있다. 원래 연극이 원작이어서 연극적인 상황과 현실성이 약한 부분들이 있지만 그런 과장된 느낌이 오히려 좋았다.
이용철: 한국 사람들은 리얼리즘을 좋아하고, 리얼리즘 영화들 가운데 걸작이 많다. <해무> 역시 그런 자장 안에 있다. 리얼리즘에 충실한 영화지. 누군가 트위터에 “이 영화는 놀랍도록 깊이가 없다”라고 지적했는데, 난 오히려 반대라고 봐.
이 영화의 문제는 깊이가 있는 척 한다는 거다. <살인의 추억>을 예로 들면, 그 영화는 엄청나게 깊이 있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겉으로는 그런 티를 안 내. 하지만 <해무>는 ‘IMF 당시의 상황, 아버지 혹은 리더의 상, 배와 현실’ 같은 주제가 선원들의 이야기를 억압하는 게 너무 드러난다. 그게 오히려 영화에 마이너스라고 생각한다.
정민아: 이 영화가 IMF로 침몰하는 대한민국호를 은유하면서, 그 고립된 배 안에서 인간들이 온갖 추악한 면을 드러내는 게 매력이라고 본다.
하지만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1992) 이후 어선을 배경으로 한 영화로서 큰 의미가 있지만, 상황과 인물을 효율적으로 활용하지 못했다. 작년 영화 <감기>를 보면서 “수애는 언제 죽나” 싶을 정도로 캐릭터가 답답했는데, 이 영화도 전반부는 좋았지만 후반부는 공감하기 힘든 캐릭터와 이야기 때문에 보기가 불편했다.
이용철: 서구 영화들은 광기의 상징으로 ‘달’ 같은 걸 보여주면서 사람이 미쳐가는 걸 보여주는데, 이 영화에선 그 역할을 ‘안개’가 맡았다. 하지만 안개 때문에 사람들이 미쳐가는 걸 잘 표현해내지 못했지.
때문에 특정 사건을 계기로 사람들이 일제히 돌아버리는 모습이 별로 설득력이 없다. 영화의 전반부는 치밀하면서도 지루하지 않게 잘 쌓아가다가, 나중에 2~30분 안에 영화가 서둘러 마무리되는… 영화 전체의 밸런스가 안 좋더라.
김종철: 어둡고 암울한 이야기라 영화는 딱 내 취향이었다. 점점 최악으로 치닫는 과정 속에서 김윤석의 연기, 캐릭터는 정말 훌륭했다. 하지만 지적대로 광기로 빠지는 사람들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게 아쉬웠다.
해무가 배를 지배할때, 얼마나 분위기가 좋은가. 그 속에서 돌아버리는 캐릭터에 대한 묘사가 제대로였으면 좋았을 텐데. 또 자기만 옳은 척 하는 민폐 캐릭터는 정말 맘에 안 들더라. 그래도 빅 4 영화들 중 완성도는 가장 높은 것 같다.
김봉석: 영화가 너무 불균질해서 제작 과정 중 문제가 있었다는 게 눈에 보여. 연극적인 느낌을 그대로 살렸는데, 연극은 원래 사실적일 수가 없지. 시공간이 제한적이니까. 영화에서 해무가 몰려오는 부분부터 장면들이 딱딱 끊어지고 컷과 컷의 연결도 부자연스럽다.
이용철: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명이 영화를 찍은 듯한 느낌이다. 단순히 이미지 톤이 고르지 못한 걸 떠나서, 인물을 다루는 방식, 전개 등이 너무 고르지 못해서 내가 보기에 세 사람 정도가 감독을 한 게 아닌가 싶다.
김윤석 캐릭터가 마지막에 가서 대사 한 마디로 상황을 다 퉁쳐보려는 것도 이상하고. 민폐 캐릭터도 원래는 그런 인물이 아니었을 거다. 휴머니즘을 가진 인간적인 캐릭터가 진상처럼 된 건 연출 미스였다고 봐.
김종철: 그 진상 캐릭터가 애초에 배에 탔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돼. 김윤석 같은 카리스마적인 선장 밑에 그렇게 제멋대로인 캐릭터가 있다는 게 너무 작위적이다. 다른 미친 캐릭터들보다 그 캐릭터의 행동이 더 이해가 안 가더라.
김봉석: 그래도 결국에 한 여자가 살아남아야 이야기가 되고, 그러기 위해선 여자를 죽어라 보호하는 남자가 있어야 해. 안 그러면 영화 자체가 성립이 안 되지. 설득력 없는 캐릭터가 되긴 했지만.
정민아: 김윤석의 마지막은 정말 멋지더라. 너무 인상적이어서 다른 단점들이 많이 상쇄됐다.
이용철: 대사도 김윤석 것이 가장 좋았다. 다른 배우들의 대사는 다 안 좋고. 빅 4 영화들에 나온 배우들 중 김윤석의 연기가 최고였지.
반면 가장 민망했던 연기자는 류승룡 같다. (다들 웃음). <해무>의 박유천은 연기가 좋고 나쁨을 떠나서 좀 무모한 배역을 맡았다. 데뷔작치고 힘든 영화에 도전해서, 못했다기보다는 함량 미달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우리나라 영화계에 좋은 배우들이 많은데 그들을 잘 활용 못 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경영은 <군도> <해적>에 동시에 나와서 연기자로서 손해를 보고 있잖아. 겹치기 출연처럼 안 보이게 스케줄 관리를 했어야 하는데.
김종철: 같은 시기에 나온 대작 영화들에서 똑같은 배우가 극과 극의 연기를 하니 캐릭터가 안 와 덯더라. 자, 그럼 이제 마무리로 한 마디씩.
김봉석: 최근 한국영화의 가장 큰 문제는 좋은 여성 캐릭터가 없다는 거다. (다들 끄덕). <해적>의 손예진 뿐만 아니라 다른 영화들에서도 좋은 여성 캐릭터가 없다.
김종철: 사건이 여자 중심으로 이뤄져야 하는데, 그냥 묻혀 가기만 하고.
정민아: 여자가 중심인 영화들이 다들 망했으니 뭐. 한국영화 자체가 여자가 실종된 상태로 흘러가는 거지. 최근 <수상한 그녀>의 심은경만 독보적인 존재였고.
이용철: 여름철에 메이저 배급사들이 제작비 100억 넘는 큰 영화들을 일주일 간격으로 잇달아 개봉시키는 건 정말 비이성적인 행동이다. 상반기에도 <인간중독> <신의 한 수> 같은 영화들이 관객이 없어서 밀려난 게 아니라 다른 대작들 때문에 억지로 극장에서 사라졌다.
이번에 빅 4 영화들이 각각 최소 6~700만 관객은 들어야 본전일 텐데, 현실적으로 그건 무리야. 영화나 배우를 죽이는 멍청한 행동이라고. 우리나라 제작사나 배급사들이 건방져 보이는 것도 그런 이유 탓이다. 다른 영화랑 무작정 경쟁하려 하지 말고 시기를 조정했으면 각자 관객몰이를 할 수 있을 텐데.
정민아: 일주일 만에 승부를 보겠다는 생각 같다.
김봉석: 여름에 뭔가를 내보여야 한다는 경쟁, 강박인가 봐.
정민아: 일단 네 작품이 4인4색처럼 각각 특색이 있는 건 맘에 든다. 여성 캐릭터들이 실종된 건 아쉽지만. 또 바다를 배경으로 한 영화가 3편이 한꺼번에 나온 게 단순한 우연의 일치인지 한번 생각해보고 싶다.
이용철: 하반기에도 몇 편의 대작 시대극이 개봉될 예정이다. 예산이 높다고 해서 무조건 나쁜 영화는 아니지만 볼륨, 기술보다는 감독의 개성을 존중하는 영화가 좀 더 나왔으면 좋겠다.
김종철: 제살 깎아먹기 대작 영화들의 경쟁과 사극 영화들 위주의 쏠림 현상이 자제됐으면 좋겠고. 또 대작들 사이에 작고 개성적인 영화들이 섞여서 취향에 따라 다양한 영화를 골라보는 환경이 됐으면 한다.
원문: 익스트림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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