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적인 것, 기술적이지 않은 것
지구 밖 우주 공간에서는 중력이 거의 없어 볼펜에서 잉크가 떨어져 내리지 않는다. 그래서 우주 공간에서 필기를 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NASA는 고가의 기술 투자를 하여 우주펜을 개발했으나, 같은 문제를 소련에서는 연필을 쓰는 것으로 쉽게 해결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사실 나는 이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기술에 대한 그릇된 이해를 확산시키기 때문이다.
우리가 현대에 와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연필은 18세기 말에서야 등장한 필기구이다. 저마다 다른 인상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기록된 인류의 역사를 대략 5,000년으로 본다면 연필은 매우 최근에 발명된 기술인 셈이다. 결국 우주펜과 연필은 기술적 복잡도에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우주 공간에서 필기를 하기 위해서 상당한 수준의 기술에 기대야 했다는 점에서는 같다.
사람들이 기술이 무엇인지 생각할 때 연필을 쉽게 배제하는 이유는 그것이 신기하지도 않고 많은 점에서 원리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무엇이 기술적인지를 판가름할 때 자신에게 얼마나 생소하게 여겨지는지, 자신이 금방 이해할 수 있는지를 따져본다. 주판은 별로 기술적이지 않은 것이다. 10진수와 2진수를 서로 바꿔서 나타내는 것은 기술적이지 않은 것이다. 계산기를 이용하는 것은 기술적이지 않은 것이다. 계산기를 제조하는 것은 여전히 기술적인 것이다.
컴퓨터를 켜면 눈 앞에 보이는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실행해서 네이버에서 뉴스를 보는 것은 기술적이지 않은 것이다. 네이버처럼 뉴스를 볼 수 있는 웹사이트를 만드는 것은 기술적인 것이다. 워드프레스를 설치하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기술적인 것이지만, 웹 개발자에게는 기술적이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웹 브라우저를 만드는 것은 웹 개발자에게도 기술적인 것이다.
사람들이 이런 기준으로 기술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맥락과 이유가 모두 있지만, 기술은 원래 저런 것이 아니다.
기술이 무엇인지 곱씹기 위해서는 기술과 대비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 기술은 인간이 처한 어떤 문제를 풀기 위한 해결책이다. 하지만 모든 해결책이 기술인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사실 이 점을 구태여 생각하지 않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 종종 “혁신은 기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라거나 “문제의 핵심은 기술로 풀어낼 수 없다”는 둥의 얘기를 즐겨할 정도로.
기술과 대비되는 다른 해결책은 “특정 문제에만 적용할 수 있는 해결책”이다. 가령 내가 체했을 때마다 취하는 나만의 요법이 있다고 하자. 이것이 다른 사람이 체했을 때에도 똑같이 작동한다면 기술이 될 가능성이 있다. 이론화하여 널리 퍼뜨린다면 기술이 된다. 하지만 혼자서 체했을 때만 그 요법을 쓰고 넘어간다면 그것은 해결책은 될 수 있을지언정 기술이 되지는 못한다. (물론 실제로는 기분탓이었고 듣지도 않는 요법이었다면 애초에 해결책조차 아닌 셈이다.)
보편으로서의 기술
반대로 얘기하면, 기술은 “여러 문제에 두루 적용할 수 있는 해결책”을 뜻한다. 나는 기술을 “보편적인 해결책”이라고 생각한다. 이 점을 놓치면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기술에 그렇게 집착하는 것이 어리석게 여겨지게 된다.
하지만 실제로는 많은 사람들이 기술을 다른 관점로 바라본다. 바로 “신탁”이다. 신탁이라 함은 이해할 수 없는/이해해서는 안되는 존재로부터, 이해할 수 없는/이해하려 해서는 안되는 원리에 의해 제공되는 해결책을 뜻한다. 기술을 이렇게 바라보기 시작하면 기술에 매달리는 모든 행동이 그릇되고 어리석어 보인다. 애가 아프다는데 기도나 하고 있는 부모를 보며 한심하며 답답하게 쳐다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사람들이 기술을 신탁으로 여기는 데에도 이유는 있다. 보편성은 쉽게 블랙박스로 치환되기 때문이다. 무슨 뜻이냐면, 기술은 그 보편적이라는 성질 때문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가 구태여 이해하거나 고민할 필요 없이 갖다 쓰기만 할 수 있게 해준다. 사실, 기술의 보편성은 그렇게 쓰일 수 있기 때문에 좋은 것이다. 화이트헤드가 An Introduction to Mathematics(번역서 제목은 화이트헤드의 수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쓴 표현을 빌리자면:
문명의 발전은 되새기며 생각하지 않고서도 사용할 수 있는 중요한 연산규칙의 수가 증가함으로써 이룩된다.
Civilization advances by extending the number of important operations which we can perform without thinking about them.
기술을 갖다 쓰기만 한다면 점점 신탁과 구분 불가능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나 역시 소프트웨어 개발자로서 내가 기대고 있는 다른 과학적 기술들을 신탁으로 대하는 착시 현상을 겪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세상의 모든 기술 자체를 아예 신탁이라고 여기는 것은 곤란하다. 착시는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영영 잘못 이해하고 있어서는 안된다.
돌아가서 우주 공간에서의 필기구 얘기를 이어서 하자면, 연필은 우주 공간에서 쓸 때 연필촉이 무중력 상태에서 이리저리 흩어져 민감하고 정교한 주변 기계들의 오작동 원인이 되는 문제가 있었다.
우주펜은 정확히는 NASA에서 직접 개발된 것이 아니라 다른 필기구 전문 업체에 외주를 주는 형태로 개발되었고, 약 반 세기 전의 이야기이다. 지금 우리가 쓰는 볼펜은 이 일화에서 말하는 볼펜과는 다른 것으로, 실제로는 우주펜에 더 가까운 형태이다. 어찌됐든 한번 개발된 우주펜 기술은 인류에게 보편적인 형태로 혜택이 돌아간 것이다.
해결책을 기술로 만드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흑마법적 성질이 아니라, 보편성이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이 점을 알아채줬으면 좋겠다.
아, 마지막으로 기술이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진심으로 믿는 분들께, 매년 새롭게 개발되는 의학/제약 기술들이 직접적으로 살려내는 인구 수가 얼마나 되는지에 대해서 조사해보기를 권하고 싶다. 기술은 전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인류의 행복에 매우 큰 영향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