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보험에 ‘과실책임주의’ 도입? 겁낼 필요 없습니다
사례. 일방적인 후방 추돌 사고를 당해, 한 달 넘게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고통받고 있는 C씨. C씨는 통증이 충분히 좋아질 때까지 치료를 받고 싶습니다.
그러자 처음에는 과실 비율이 10:0이라며 사과하던 보험사가, 사실 C씨 쪽 과실도 있다며 과실비율을 9:1로 산정해야 한다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계속 치료를 받는다면 C씨의 과실 비율 10%만큼은 직접 진료비를 내야 한다며, 빨리 치료를 종결하라고 반 협박까지 하는데요.
2023년 1월부터 자동차보험 사고에 ‘과실책임주의’가 도입됐다는 얘기, 들어보셨나요? 쉽게 말해, 내 사고 책임만큼 ‘자기부담금’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건데요.
‘과실책임주의’라고 하면 겁이 나는 것도 사실 당연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이게 너무 어려운 개념이란 점인데요. 환자 입장에서는 쉽게 이해하기 어렵고, 어쨌든 ‘자기부담금’이라는 게 나간다고 하니, 일단 보험사 직원의 말을 따르게 되는 것이죠.
이를 빌미로 일각에서는 치료를 받으면 받을수록 환자 본인이 내야 할 돈도 늘어난다거나, 보험료 할증이 늘어난다거나 하는 이유로 조기 합의를 종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모두 사실이 아닙니다.
복잡한 개념 대신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과실책임주의 적용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자동차보험 가입자들에게는 바뀐 게 없습니다. 환자가 받아야 할 치료를 도중에 중단해야 할 까닭도 없습니다. 어째서인지는 이제부터 설명드리죠.
자동차보험 얘기부터 해 볼까요?
자동차보험에 대해서 어디까지 알고 계신가요? 자동차를 몰지 않는 분들도 ‘책임보험은 무조건 들어야 하는 보험이다’, ‘책임보험 차량한테 사고를 당하면 정말 운이 없는 것이다’, ‘요즘 대물은 10억은 해야 한다’ 같은 얘기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텐데요.
위의 표는 책임보험과 종합보험, 대인과 대물보상의 개념을 간략히 정리한 것입니다.
자동차를 몰려면 누구나 ‘책임보험’이라 불리는 의무보험에 가입해야 하죠. 이 보험은 거의 최소한의 피해만을 보상합니다. 신체상 피해에 대해서도 한도가 빡빡하게 걸려 있고, 재산상의 피해는 2천만원까지밖에 보상하지 않죠. (웬만한 소형차도 2천만원을 넘어가는 시대에 말입니다.)
그래서 ‘책임보험’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추가적인 부분을 보상하기 위해 ‘종합보험’이 있습니다. 부상에 대한 치료비는 보통 무한대까지 보장되며, 재물상의 피해는 1억, 5억, 10억 하는 식으로 한도를 높여 적용하게 됩니다.
우리는 환자 얘기를 하는 중이니까, ‘대인보상’에 대한 이야기에 집중해 보겠습니다. ‘대인보상’은 다시 또 두 가지로 나뉩니다. 심플하게 ‘대인배상1’과 ‘대인배상2’라고 부르는데요.
대인배상1은 법률적으로 가입이 강제된 보험입니다. 책임보험의 영역이죠.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대인배상1은 보상한도가 법적으로 딱 정해져 있는데요, 예를 들어 척추가 삐었다면 120만원이 한계입니다. 치료비와 합의금을 모두 포함해서요.
하지만 실제 자동차 사고 피해자들은 이보다 더 많은 치료비를 쓰게 됩니다. 사고로 척추가 나갔는데 120만 원으로 치료가 끝난다는 건 말이 안 되죠. 여기에 위자료와 사고로 일을 못 해서 생기는 손해까지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대인배상2가 있습니다. 대인배상1의 한도를 초과하는 치료비와 위자료, 손해액은 대인배상2를 통해 보상하는 것이죠. 그래서 지금까지는 사고를 당하더라도 치료비만큼은 걱정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다친 것도 억울한데, 이런 부분이라도 잘 챙겨 받아야죠.
‘과실책임주의’의 도입, 이게 대체 무슨 뜻이죠?
기존에는 내 과실이 일부 잡혔다고 해도, 상대방의 과실이 있는 경우 상대측 보험사에서 치료비 전액을 지급하는 방식이었죠. 환자 입장에서는 편하게 진료를 받을 수 있었지만, 일각에서는 이로 인해 경상 환자가 불필요한 치료를 계속 받는다는 지적도 있었습니다. 때문에 2023년부터 ‘과실책임주의’가 도입된 거죠.
과실책임주의가 도입되면서 어떤 점이 변했을까요? 우선 대인배상 1, 즉 책임보험에서 보상하는 부분은 그대로입니다. 예를 들어 척추가 나갔다면 120만원까지, 이 한도에서는 예전처럼 과실비율과 관계없이 치료비를 전액 보상받을 수 있습니다. 바뀐 부분은 그 다음부터인데요. 대인배상1을 초과하는 부분, 즉 대인배상2로 보상되던 부분을 사고 책임 비율에 따라 나누어 산정하기 시작한 겁니다.
자동차 사고로 척추를 다친 환자를 생각해 봅시다. 과실 비율은 7:3으로 산정되었습니다. 환자의 실제 치료비가 200만원이었다면, 기존에는 대인배상1에서 120만원, 대인배상2에서 80만원을 부담했습니다. 실제로 환자가 부담해야 할 비용은 없었던 거죠. 하지만 이제부터는 대인배상2 부분, 즉 80만원을 과실 비율에 따라 피해자가 나누어 부담하기 시작했습니다. 과실 비율이 3으로 책정되었으니 80만원의 30%인 24만원을 환자가 내야 한다는 것이죠.
그럼 앞으로는 사고도 당하고 치료비도 내가 내야 한다고요?
사실 과실책임주의의 명분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어쩐지 찝찝한 기분도 들죠.
우선 ‘과실 비율’의 문제입니다. 사회 상규상의 기준으로는 선량한 피해자이더라도, 과실 비율이 2~3까지 책정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사고에 치료비까지 내 돈을 써야 한다는 건 아무래도 억울합니다.
특히 한국에서는 원만한 사고 처리 등을 명분으로, 사고 양측에 모두 일정 정도의 사고 책임을 분배(?)하는 관례 아닌 관례가 있어왔는데요. 그나마 최근에는 상황이 많이 개선되었다 하나, 과실 산정을 둘러싼 갈등은 여전히 첨예합니다.
그러다 보니 보험사 직원이 과실비율을 갖고 환자와 합의금 줄다리기를 하진 않을까, 합의를 종용하기 위해 환자에게 불리한 과실비율을 산정하진 않을까 하는 우려가 나옵니다. 다행히 이럴 때를 대비해 ‘과실비율 인정기준’이라는 공식 기준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과실비율정보포털(링크)를 통해 직접 내 과실비율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사실 이런 서비스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과실비율 산정을 사람들이 잘 믿지 않는다는 방증이겠지요. 결국 과실책임주의 도입에는, 보험사의 투명한 행정이 무엇보다 필수적인 선결 과제인 겁니다.
그럼에도 일부 보험사 직원들은 이미 과실책임주의를 합의를 종용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고 있다 하는데요. 물론 일부겠지만, 보험료 할증이나 자부담금으로 환자를 위협하며 아직 치료가 필요한 환자에게 합의를 종용한다는 얘기도 들립니다. 나머지 치료는 건강보험을 통해 받으면 된다면서요. 모두 부당행위입니다.
과실비율을 두고 과실책임주의에 대해 제대로 설명해주는 경우는 찾기 힘들고, 심지어 환자를 속인다는 얘기마저 들려오는 형편입니다. 사고에 대해 환자의 책임을 제대로 따져 묻겠다는 과실책임주의. 하지만 과실책임주의가 제대로 자리잡으려면, 보험사 역시 환자에 대한 책임을 다해야 하지 않을까요.
환자에겐 충분히 치료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어떤 불이익도 없이요.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과실책임주의 적용에도 불구하고, 환자의 주머니에서 추가적인 돈이 나갈 일은… 대부분 없다는 겁니다. 치료 당시는 물론, 그 후로도 쭉이요. 바로 자상, 자손보험이 있기 때문인데요.
대부분의 운전자는 종합보험을 이미 드셨을 텐데요. 아마 그럼 자손, 자상보험에도 자연히 가입하셨을 겁니다. 심지어 그게 뭔지 모르시더라도, 종합보험에 대부분 기본적으로 포함돼 있거든요. 실제 통계에 따르면 96%의 운전자가 자손, 자상보험에 가입했다고 하네요.
과실책임주의에 따라 내 과실만큼의 치료비는 내가 내게 된다고 해도, 이는 자손보험 또는 자상보험으로 처리됩니다. 대부분의 종합보험 가입자가 과실책임주의니 뭐니 크게 신경쓸 필요가 없는 까닭이죠.
혹 보험료 할증을 걱정하실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일부 보험사 직원들은 계속 치료를 받으면 보험료 할증이 늘어난다며 치료를 조기 종결할 것을 종용하고 있다고도 하는데요. 이는 명백한 거짓입니다. 치료를 많이 받는다고 보험료 할증이 늘어나지는 않거든요. 자손 또는 자상은 금액과 무관하게, 사고건수에 따라서만 할증이 이뤄집니다.
그럼 또 이렇게 물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럼 어쨌든 할증이 이뤄지는 건 맞으니, 위에서 얘기했던 허리 염좌 환자를 다시 예로 들자면, 120만원 내로 치료비와 합의금을 모두 처리하는 게 유리하지 않느냐고요. 실제 이런 식으로 ‘할증되기 싫으면 이 안에서 끝내자’며 120만원 내에서 치료비와 합의금을 모두 처리하려는 경우도 있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이것도 왜곡입니다. 왜냐하면, 기존에도 치료비 이외의 합의금 항목 – 위자료, 휴업손해 등에는 과실책임주의가 적용되어왔거든요. 보통 교통사고 합의금을 계산한다고 하면 향후의 치료비 뿐 아니라 이런 위자료, 휴업손해 등을 모두 포함하여 계산합니다. 쉽게 말해, 교통사고 후 합의금을 받으셨다면, 이미 그 사고에 대해서는 자손, 자상보험상 보상건수 1건이 책정된 상태라는 것이죠. 여기에 치료비가 더 붙는다고 해서 할증이 추가로 늘지는 않습니다.
만일 운전자가 아니라서 자동차보험에 가입하지 않았다면요? 더욱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동승자나 보행자 등은 과실책임주의 적용에서 자유롭습니다. 이쪽은 자기부담금이 나갈 일이 전혀 없습니다. 혹 과실이 있더라도, 기존과 마찬가지로 걱정 없이 충분히 치료받으시면 됩니다.
부당하게 합의를 종용한다면, 1332 또는 1372로 신고하세요
작년, 그리고 올해 이뤄진 자동차보험 지침 및 약관 개정에 대해 많은 오해가 있었습니다. 과실책임주의가 시행됨으로써, 치료기간이 길어질수록 합의금은 줄고 보험료가 할증된다… 는 건 대표적인 오해입니다.
명분은 마땅합니다. 일부 ‘나일롱 환자’의 불필요한 장기간 치료를 막고, 자동차보험 재정 누수를 막는다는 것이죠.
하지만 실제 현장에 이 지침이 적용되는 과정에서 혼란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환자들은 제대로 된 정보를 제공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부 보험사 직원들이 실적을 위해, 환자에게 치료비를 최대한 덜 지급하기 위해 오해를 부채질하기도 했습니다. 단순한 기우가 아니라, 실제로 곳곳에서 들리는 증언들입니다.
빨리 치료를 종결하고 건강보험으로 치료받으라는 얘기도 어폐가 있습니다. 이건 윗돌을 빼 아랫돌을 괴는 일에 불과합니다. 자동차보험 재정을 아끼는 대신, 건강보험 재정과 이를 메우기 위한 국민 세금이 새어 나갑니다. 오히려 자동차 사고는 자동차보험으로 치료받아야 한다는 원칙이 무너지는 셈이기도 하고요.
새로 변경된 지침이나 약관은 자동차보험으로 치료받을 환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나일롱 환자를 잡는 것,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러자고 무고한 진짜 환자들의 권리가 빼앗긴다면, 이건 선후관계가 뒤집혀도 너무 심하게 뒤집힌 게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