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이 흥행 잠재력을 폭발시키고 있습니다. 예견됐던 일입니다. 방학 시즌에 가족 관객들이 동반 관람할 만한 안전한 선택이라는 점은 큰 이점입니다. 게다가 그 어느때보다 리더십이 화두에 올라 있는 상황, 모든 비난과 고난을 한몸에 담고 묵묵히 실천을 통해 아랫사람의 분발을 이끄는 명장 이순신의 모습을 찾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명량’을 보면서 여러 차례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김한민 감독의 전작인 ‘최종병기 활’에서 보여졌던 많은 강점들이 실종된 작품이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 영화는 단 한 사람의 ‘진정한 영웅’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고, 이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도 ‘성웅 이순신’에 대한 감동을 소감으로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과연 ‘명량’이 그 ‘영웅 만들기’에 성공한 작품인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결과를 놓고 보면, 많은 사람들이 ‘감동했다’고 고백하고 있으니 성공이 아니라고 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 물론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 개인적으로는 매우 아쉽습니다. 그 아쉬움에 대한 내용입니다.)
정공법과 단선적인 인물의 경계
많은 평자들이 ‘명량’의 강점을 ‘정공법’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영화를 재미있게 하기 위한 많은 장치들을 배제하고, 그저 ‘위대한 영웅 충무공 이순신’으로 승부를 걸었다는 의미로 보입니다. 동시에 이 ‘정공법’이라는 말 안에는 다른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굳이 교과서 텍스트 이상을 표현하려 하지 않은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입니다.
이 영화의 알파요 오메가는 바로 ‘이순신이라는 영웅을 어떻게 그릴까’ 입니다.
‘난중일기’를 읽고 나면 많은 사람들이 뜻밖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고 놀랍니다. 특히 통제사 해직 – 고문과 백의종군 – 칠천량의 패전 – 통제사 복직 – 명량해전에 이르는 참담한 기간의 일기에서는 고뇌하고, 분노하고, 실망하고, 괴로워하는 인간 이순신의 면모가 가슴을 때립니다. 말도 안 되는 명령을 내리는 조정, 말도 안 되는 상황, 말도 안 되게 강한 적, 그 절망을 뚫고 나가려는 초인적인 의지.
그런데 영화 ‘명량’의 이순신은 아쉽게도 매우 단선적인 인물로 그려졌습니다. 옳고 바른 영웅이라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만, 우선 이 인물에게는 소통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가장 그를 믿고 의지하던 부하 안위조차도 퇴각을 주장하지만 영화 속 이순신은 단 한번도 그들에게 왜 여기서 싸워야 하는지 설득하지 않습니다.
전략은 내 머리 속에 있고, 너희는 싸워야 한다는 식입니다. 혼자 고뇌하고, 혼자 불면의 밤을 보내고, 탈주자를 엄벌에 처할지언정 누구와도 공감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영웅입니다.
다음. 12대 133(또는 300)의 치명적인 열세 상황에서, 그래도 부하들은 이순신이 홀로 앞에서 혈투를 벌이며 북을 치자 달려나와 호응하고 전선에 합류합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고 ‘감동했다’고 하는 부분은 바로 이 부분의 솔선수범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대장선이 공격당하는 순간 뱃머리를 돌려 달아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데에도 주목해야 합니다(물론 대장선이 격침당했다면 바로 다들 달아났겠죠). 이런 상황에서 부하들이, 그리고 백성들이 그를 믿고 달아나지 않은 것은 대체 무엇 때문일까요. ‘명량’에서처럼 ‘소통’ 조차도 하지 않았다면, 대체 왜 그들은 그를 믿고 따를 수 있었을까요.
이 영화의 가장 주된 텍스트인 ‘난중일기’에는 그 이유까지 나와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한번 더 생각해 보면, ‘난중일기’에 그런 설명이 있었다면 충무공은 지금까지 이렇게 추앙받는 영웅이 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당연합니다. 있었다면 그건 자화자찬이었을테니 말입니다.^^)
충무공이 혼자 힘으로 분투할 때 부하들이 멀지 않은 곳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앞으로 치고 나와 전투에 합류해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할 수 있었던, 백성들이 피난을 가기는 커녕 열두척의 전선 뒤에서 군선을 가장하고 허장성세를 펼쳐 전투를 도울 수 있었던(‘난중일기’에는 나오지 않지만 이항복이나 윤휴가 쓴 충무공 행장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일부러 백성들의 배를 뒤편에 배치해 우리 편의 수가 많은 것 처럼 꾸몄다” 이 때문에 명량해전을 다룬 일본 쪽 기록은 조선 수군의 전력이 열두척 뿐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요인, 바로 충무공과 아랫 사람들 사이의 절대적인 신뢰가 이 영화를 봐선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 부분에선 어느 정도 상상력이 발휘되었어야 하는 게 아닐까요. 이상의 내용에 대해서는 다른 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곧이 곧대로’ 표현된 이 영화의 이순신은 고집불통의 노장으로 보일 뿐이고, 희대의 지략가라기보다는 그저 불굴의 투사로만 보이는 것입니다.
최민식이라는 당대 최고의 배우가 이 역할을 맡음으로써 그나마 어느 정도 입체적인 인물 상이 그려질 뿐, 배우의 역량을 빼 놓고 본 ‘명량’의 이순신 캐릭터에게선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냥 역사나 바른생활 교과서에서 뚝 떼어낸 듯한 재미없는 인물일 뿐입니다.
완전히 묻힌 주변 인물
이순신이 그렇게 되고 나니 다른 인물들은 차마 말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류승룡, 조진웅, 김명곤, 진구, 이정현 등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총출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인상에 남는 인물이 누구냐는 질문을 받으면 뭐라 말하기가 망설여집니다.
이순신 다음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구루시마 역의 류승룡이 ‘나, 왜장. 당신들이 생각하는, 임진왜란 사극에서 늘 보던 바로 그 왜장. 잔혹하고 피에 굶주린 그런 왜장’ 에 그쳤고 보면 말입니다. 나오는 장면 장면이 모두 인상적이었던 ‘최종병기 활’의 쥬신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심심한 캐릭터입니다.
물론 ‘명량’의 최대 강점은 해전 장면의 스펙터클에 있습니다. 바다 위를 수놓는 치열한 전투가 시작되면서 ‘명량’은 비로소 기지캐를 켭니다. 전투의 세세한 상황이 실제 역사와 부합하는가를 따지기에 앞서, ‘명량’의 전투 신이 매력적이라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좋은 배우들과 엄청난 물량이 투입된 결과가 현재의 ‘명량’이라면, 아무래도 아쉽다는 느낌이 앞서게 됩니다.
하긴 현재 상태에서도 많은 관객들이 ‘명량’을 본 뒤 ‘애국의 열정이 샘솟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가슴이 뛰었고, 영화의 진정성을 깊이 느꼈다’고 하더군요. 물론 이런 평가를 내리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평가의 가장 큰 이유는 이 영화가 ‘한민족 역사에 길이 남는 명장’과 그 명장의 위업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 기인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영화 ‘명량’에 대한 평가는 이런 관중의 대대적 호응과는 조금 분리해서 생각할 필요도 있을 듯 합니다.
결론
로빈 윌리엄스 주연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앞부분에는 키팅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유명한 문학 교과서의 첫 페이지를 찢어 버리라고 명령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시의 이해 Understanding Poetry’ 라는 이 교과서에서는 한 시 작품의 위대성을 판단하기 위해 두 가지의 기준을 제시합니다.
하나는 시가 얼마나 예술적으로 완성도 있게 쓰여졌는가, 그리고 또 하나는 ‘시가 다루고 있는 대상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키팅 선생님은 바로 이 설명을 찢어버리게 합니다. ‘중요한 대상에 대해 묘사하고 있으면 위대한 시라고 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 얼마나 헛된 것이냐는 이유 때문입니다.
‘명량’은 바다 위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그린 작품으로는 한국 영화사에 충분히 기억될 만한 그런 영화입니다. 하지만 ‘성웅 이순신’을 묘사한 작품으로는 그만한 평가를 받기 힘들 듯 합니다. 스필버그의 ‘링컨’이나 TV 사극 ‘뿌리깊은 나무’, ‘정도전’ 처럼 ‘모든 사람에게 잘 알려진 영웅을 다룰 때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있어 각각 다른 방식의 전범을 보여준 작품들을 생각한다면 ‘명량’이 그려낸 이순신의 모습은 지금보다는 훨씬 더 입체적이어야 했을 것 같습니다.
원문: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louis vuitton taschenWhy Buy Wholesale Fashion Jewel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