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휘’는 화자의 내심과 의도를 드러낸다
이태원 핼러윈 참사(10.29.) 이후,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의 발언이 여론을 데우고 있다. 재난관리 주무 부서의 책임자이지만, 참사를 바라보는 그의 시각은 정부의 면책을 의식하는 듯 상식과 책임을 위태하게 넘나들었다.
참사 다음 날인 10월 30일, 그의 제일성은 “경찰과 소방을 미리 배치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던 것으로 파악한다”라는 것이었다.
이태원 참사, 정치적 책임론 경계하는 정부여당
그는 30일 오후 정부서울청사 브리핑에서 ‘많은 인파가 몰릴 것으로 예상됐다’라는 기자 질문에 “그 전과 비교했을 때 특별히 우려할 정도로 많은 인파가 몰린 것은 아니다.” “서울 시내 곳곳에서 소요와 시위가 있어 경찰 경비 병력이 분산됐던 측면이 있었다”라고 말했다.
‘경찰과 소방을 배치하였어도 사고는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라는 속내가 엿보이는 발언인데, 이는 참사가 정부의 책임으로 이어지는 걸 막으려는 의도를 은연중에 드러낸 것이었다. 이 첫 발언에 여론이 술렁이고 비판이 이어졌지만, 그는 여전히 비슷한 태도를 이어갔다.
31일 오전에도 서울시청 광장에 마련된 이태원 사고 사망자 합동분향소에서 조문한 뒤 “경찰·소방력 대응으로 사고를 막기에 불가능하다고 말했는데 무슨 뜻인가”라는 질문에 “(경찰과 소방의 대응으로) 사고를 막기에 불가능했다는 게 아니라 과연 그것이 원인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라고 답했다.
또 “경찰의 정확한 사고 원인이 나오기 전까지는 섣부른 예측이나, 추측이나, 선동성 정치적 주장을 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의 말”이라고 전하며 “경찰의 병력 부족으로 인한 사고였는지, 그런 그것을 더욱 깊게 연구해야 하며, 섣부른 결론을 내고 원인이 나오기도 전에 이런저런 추측을 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라고 입장을 전했다.
이에 시민사회와 야권은 물론 여당 내에서도 적절치 않다는 비판이 나오자, 그는 한발 물러나 ‘유감’을 표시했다.
재발 방지를 위해서는 정확한 사고 원인을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국민께서 염려하실 수도 있는 발언을 하여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비판이 강도를 더해가자, 그는 다음 날인 1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에 출석해 사과와 더불어 고개를 숙였다. 참사 사흘 만이었다. 그는 사고 발생에 대해서는 ‘사과’하면서도 국민의 마음을 살피지 못한 데 대해서는 다시 ‘유감’이라고 했다.
국가는 국민의 안전에 대해 무한 책임이 있음에도 이번 사고가 발생한 것에 대해 국민 안전을 책임지는 주무 부처 장관으로서 이 자리를 빌려 국민 여러분께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유가족과 슬픔에 빠져 있는 국민의 마음을 미처 세심하게 살피지 못했습니다. 이점 다시 한번 깊은 유감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 장관이 즐겨 쓴 ‘유감(遺憾)’은 ‘마음에 차지 아니하여 섭섭하거나 불만스럽게 남아 있는 느낌’이라는 뜻이다. 현실 언어에서 이는 ‘사과’와 대체할 수 있는 낱말이 아니다. 게다가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빎”이라는 뜻의 ‘사과(謝過)’와는 꽤 거리가 있다.
‘유감(遺憾)’의 수사학
실제로 정치권에서 흔히 쓰이는 이 말은 원치 않는 사과를 해야 할 처지에 놓인 이가 쓰는 타협의 수사다. 잘못의 인정이나 용서와는 달리 이 말은 상대방이 아니라, 자기 심경의 일단을 드러냄으로써 자신이 맞닥뜨린 상황에 마뜩잖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교묘한 수사이다.
국민의 마음을 살피지 못했으면 사과하면 될 일이지, “마음에 차지 아니하여 섭섭하거나 불만스럽게 남아 있는 느낌”은 무언가. 이는 내용으로는 사과의 의미를 담되, 완곡한 표현으로 상황을 서로 눙쳐서 터는 형식이다. 다분히 권위주의적 어법이어서 민주 사회에서는 걸맞지 않은 표현이다.
이런 교묘한 방식의 외교적 수사의 으뜸은 1990년 당시 아키히토 일왕이 당시 노태우 대통령의 방일을 환영하는 만찬에서 한일 간의 과거 문제를 언급한 형식적 사과다. 아키히토는 당시 이렇게 말했다.
일본에 의해 초래된 이 불행했던 시기에 귀국의 국민이 겪으셨던 고통을 생각하며 통석(痛惜)의 염(念)을 금할 수 없다.
‘통석(痛惜)’은 ‘애석하고 아깝다’라는 뜻의 한자어니, ‘통석의 염’은 ‘애석하고 아까운 마음, 생각’쯤으로 풀이할 수 있다. 마치 무슨 선문답과도 비슷한 이 모호한 형식으로 한국을 식민 지배한 일왕의 유감을 표현하여 한일 간 외교는 통과의례를 간신히 거쳤다.
모든 낱말은 화자의 속내를 드러낸다
모든 낱말은 화자의 의중을 일정하게 드러난다. 낱말은 그 생성 과정에서 특정한 의미를 포함하면서 그 말을 사용하는 언중들의 이해와 태도를 은연중에 표출하기 때문이다. ‘노동(勞動)’ 대신 ‘근로(勤勞)’를 즐겨 쓰는 것이나, 성차별적 세계관을 담고 있는 낱말들이 그 좋은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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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압사 사고와 그 피해자를 가리키는 말로 ‘사고’와 ‘참사’가, ‘사망자’와 ‘희생자’가 서로 맞선 형국도 마찬가지다. 정부나 여당 쪽에선 가능하면 이른바 ‘중립적’인 표현으로 사고에 내재한 문제를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은 속내를 정부 공문서로 공식화한다. ‘희생자’ 대신 ‘사망자’를 고집하던 속내도 다르지 않다.
정부·여당의 태도에서 정치적 이해 관계나 책임의 부담 따위에 얽매이지 않는, 대상을 공감하는 태도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세월호 참사에서 드러났듯이 그들은 공감 능력은 면책 등 정치적 이해에 짓눌려 있다. 이른바 ‘무한 책임’을 되뇌면서도 특정 낱말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이유다.
‘참사와 희생’의 정치적 트라우마를 겪은 탓일까, ‘사고’와 ‘사망자’를 고집하던 이들의 변명은 궁색하게 느껴진다. 여미면 여밀수록 속내는 더 노골적으로 드러나면서 문제해결의 전제인 신뢰를 점점 잃어가고 있다. 모두가 아는 사실인데 그들만 모른 척하는 현재 상황은 한국 정치가 빠진 늪이고, 딜레마다.
역사의 교훈조차도 외면하게 하는 이 지독한 맹목의 정치는 언제까지 이어질 것인가.
원문: 이 풍진 세상에
표지 이미지 출처
-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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