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사진은 제가 올 가을 파리 여행 갔을 때 찍은 노트르담 성당입니다. 그때 오전에는 루브르 박물관을 휘리릭 둘러본 다음이었던지라, 사실 다리가 무척 아픈 편이었고, 점심 때 들렀던 식당도 뭐 그다지 푸짐하거나 맛이 있지는 않아서 더욱 지친 상태였습니다. 게다가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지요. 저희 가족은 루브르에서 생-제르맹 어쩌고 성당을 거쳐, 노트르담이 있는 시테 섬까지 그냥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다소 처량하고 다리도 많이 피곤했습니다.
그런데, 막 노트르담에 도착하자 거짓말처럼 날씨가 개면서 파란 하늘과 밝은 햇살이 나오더군요. 게다가 노트르담은 어찌나 멋있던지 ! 노트르담 건축 당시 프랑스는 동양과 별 다를 바 없는 농업 국가였을텐데 프랑스 인들은 대체 무슨 재원으로 저렇게 거창한 건물을 지을 수 있었는지 신기하더군요. 우리나라는 구한말에 대원군이 경복궁을 (새로 만든 것도 아니고) 보수 공사한 것 만으로도 국고가 파탄날 정도였다고 하는데 말이지요.
그런데 시테 섬으로 들어가는 퐁뇌프 (Pont Neuf, 새 다리) 교를 건너자 마자 뭔가 커다란 관공서 같은 건물이 나오더군요. 이 건물은 Cour de Cassation, 즉 파기법원으로서, 우리나라로 치면 대법원에 해당하는 기관입니다. 뭐 그리 대단한 예술적 건축물로 보이지는 않아서 그냥 지나쳤는데, 그 앞을 지나다 보니 작은 출입문 위에 새겨진 문구가 눈에 들어와 사진을 찍게 되었습니다. 바로 Liberte, Egalite, Fraternite 입니다.
프랑스 대혁명만큼 프랑스 정치와 역사에 강렬한 인상을 준 사건이 없을 정도로, 1789년의 혁명은 대단한 의미를 가집니다. 제가 연재하는 나폴레옹 이야기도 그 부산물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폴레옹 본인은 자신의 쿠데타로 인해 혁명은 끝났다라고 선언한 바 있지요. 즉, 나폴레옹의 생각으로는 프랑스 혁명 기간은 1789년 바스티유 요새 습격 사건부터 1799년 브뤼메르 쿠데타까지의 10년간이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역사가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프랑스 대혁명은 10년이 아니라, 약 100년 간 진행되었다는 것이지요.
이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프랑스 혁명은 1870년 제3 공화국 (La Troisieme Republique, La IIIe Republique)의 성립 때 되어서야 비로소 완성이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사이에 일어났던 많은 사건들, 즉 나폴레옹의 제1 제국, 부르봉 왕가의 복위, 7월 혁명, 루이 필립 왕정, 2월 혁명에 의한 제2 공화국, 나폴레옹 3세의 제2 제국, 그리고 1870년 보불 전쟁의 뼈아픈 패배는 모두 프랑스 대혁명의 진통이었던 것이지요.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혁명 속에서 19세기를 보낸 덕분에 프랑스가 과거의 영광을 모두 잃고 영국이나 독일에 비해 크게 암울한 20세기를 맞게 되었다고들 합니다. 사실 제 세대는 학교 교과서에서 대략 그렇게 배웠습니다. 실제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19세기 동안 독일이나 영국의 인구가 크게 증가할 때, 유럽의 인구 대국이었던 프랑스의 인구 증가율은 크게 정체된 편이어서, 이 현상 자체가 하나의 연구 과제가 될 정도였는데, 일부에서는 19세기 프랑스의 정치 혼란이 그 원인이라고 탓하기도 합니다. 물론 반대론도 많지요. 하지만 프랑스가 19세기의 혼란기를 겪어나가면서, 국가적으로 얻은 것이 있습니다. 바로 저 파리 대법원의 작은 출입문 위의 새겨진 Liberte, Egalite, Fraternite 입니다.
자유와 평등에 대해서는 다들 익숙하실 텐데, 정작 저 3번째의 Fraternite에 대해서는 다소 생소한 느낌이 드실 것입니다. 이는 영어로도 fraternity이고, 형제 관계, 형제애, 동포애, 남학생클럽 등의 의미를 가집니다. 저는 이걸 그냥 ‘박애’라고 번역합니다. 이 ‘박애’에 대해서는 생소한 느낌이 들 수 밖에 없는 것이, 이것이 프랑스 혁명의 원래 모토가 아니라 훗날 정립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혁명 초기부터 리베르테와 에갈리테, 즉 자유와 평등에 대해서는 워낙 이야기가 많이 되었지만, 세번째 모토는 처음부터 명확히 프라테르니테라고 정의가 되지 않았고 다른 개념이 대신 끼어들기도 했으며, 어떤 때는 그냥 자유와 평등만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자유와 평등에 대해서는 그에 대한 정의도 1789년의 인권 선언 (Declaration des droits de l’homme et du citoyen)에 다음과 같이 내려져 있었습니다.
“자유란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그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권리를 뜻한다. 사회의 다른 구성원이 같은 권리를 누리는 것을 보장하는 한, 모든 남녀가 타고난 권리를 누리는 데 아무런 제약이 없어야 한다.”
“평등이란 법이 모든 사람에 대해, 그것이 보호이건 처벌이건,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을 뜻한다. 모든 시민들은 법 앞에 평등하며, 모든 시민들은 그들의 능력에 따라 고위 관직 및 공직, 일자리에 있어 동일한 기회를 가지며, 그들의 덕성과 재능 외에는 어떠한 차별도 받아서는 안된다.”
사실 자유와 평등이라는 것은 서로 양립하기가 조금 아리송한 개념이기는 합니다. 애초에 인간은 평등하지가 않습니다. 외모이건 신체적 능력이건, 그리고 특히 지적 능력과 사업 수완에 있어서 많은 차이가 납니다. 이런 소양 차이는 필연적으로 성과의 차이를 만들어낼 수 밖에 없으므로, 어떤 사람은 부와 권력을 손에 쥐게 되고, 어떤 사람은 가난과 잉여라는 불명예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프랑스 대혁명은 18세기 말의 계몽 사상에 기반을 둔, 유식한 부르조아 계층이 주도한 것이었으므로 이런 부조화스러운 조합을 나란히 두는데 별로 거북함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즉, 평등이란 결과의 평등이 아니라, 기회의 평등이자 법 앞의 평등이라는 다소 소극적인 개념이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자유라는 개념은 무척 난해한 것입니다. 전에 자유로운 그리스인이 가질 만한 직업 편에서 인용했듯이, 원래 자유로우려면 경제적인 독립성이 먼저 확립이 되어야 합니다. 생각해보십시요. 자신과 가족의 생계가 어떤 권력자에게 달려있다면, 자신이 그 권력자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겠습니까 ? 따라서 최소한의 경제적 자립이 없는 자유는 허울 좋은 개살구일 뿐입니다. 가령 산업 혁명 당시 맨체스터 공장 지대의 일용 노동자는 명색은 자유인이지만 정작 미국 남부 흑인 노예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았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가난한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경제적 지원이 없다면 자유라는 것은 의미가 없어지게 되었고, 그렇게 가난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려다보니 부자들로부터 더 높은 세금을 걷는 등 남의 자유를 빼앗는 결과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가령 최저 임금제라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요. 제가 당장 라면이라도 끓여먹기 위해 한달에 50만원이라는 박봉으로라도 좋으니 어떤 공사장 경비원 자리를 구하고 싶은데, 국가가 (도와줄 것도 아니면서) 최저임금 이하의 금액으로 고용 계약을 맺는 것은 불법이라고 이 고용 계약을 취소한다고 하면, 저와 그 고용주가 서로의 사정에 따라 계약을 맺을 자유를 국가가 빼앗는 것이 됩니다.
또,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서, 대기업은 두부를 만들어 팔면 안된다 라든가, 대기업의 대형 마트는 일요일에 영업을 하면 안된다 라는 것이 이치에 맞는 일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제가 로마 방문했을 때 뵐 기회가 없었던 프란체스코 교황입니다. 현지 가이드 이야기를 들어보니, 로마 현지에서나 전세계에서나, 전임 베네딕트 교황에 비해서 인간미가 넘치고 약자에 대한 배려를 우선시하여, 인기가 폭발적이라고 하더군요.
프란체스코 교황은 최근에 ‘규제받지 않은 자본은 또 하나의 독재’라는 발언을 하여 특히 미국의 보수파 (자칭 신자유주의파)로부터 비난을 받았고, 급기야 교황이 ‘나는 마르크스 주의자가 아니다’라는 해명 발언까지 해야 했습니다. 전세계적으로 종북 빨갱이몰이는 공통된 현상인가 봅니다.
이렇게 자유와 평등은, 경제적 문제에 들어가게 되면 정말 양립하기 어려운 개념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제3의 구호, 박애라는 개념이 들어가게 되면 이야기가 좀더 원활하게 돌아갈 수 있습니다. 저 자유와 평등은 기본적으로 개인의 문제인 것에 비해, 박애라는 개념은 행복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기본 전제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은 홀로 살 수 없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개인이라고 할 지라도, 그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다른 ‘별로 안 뛰어난’ 개인들로 이루어진 사회가 필요합니다.
‘내가 혼자 잘나서 이렇게 부를 이루었는데, 왜 내가 무능력한 가난뱅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고율의 세금을 내야 하느냐’라고 묻는 것은 기본적으로 맞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의 부나 돈이라는 개념은 홀로 있는 무인도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고, 오직 다른 평범한 사람들과 함께 사는 사회에서나 의미를 가지는데, 사람의 사회라는 집단에는 항상 가난한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거든요.
박애라는 개념은 같은 피가 흐르는 같은 영장류 동물로서, 당연히 동족에게 가져야 할 최소한의 연민과 사랑이지요. 결국 자유와 평등이라는, 서로 상반되는 개념을 묶어주는 접착제 역할을 해주는 것이 박애라고 저는 저 나름대로 정의를 합니다.
바티칸에 있는 4대 복음서 저자 중 한명인 마태 Matthaeus의 석상입니다. 마태가 기록한 예수님 어록에 아래와 같은 말이 있지요. 저는 전에 어느 분의 장례 미사에 갔다가, 신부님이 읽어주시는 이 글귀를 듣고… 감동도 좀 먹었지만 사실 좀 무섭기도 했습니다. 저는 정말 지옥에 갈 죄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랬지요.
세상에 어려운 처지에 빠진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제 가족의 행복과 안녕이 더 급하고 더 귀하기 때문에 기부도 많이 안 하는 편이거든요. 아마 그때부터였나… 저는 복지를 위한 중과세에 적극 찬성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25장 41~45절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이런 자유-평등-박애의 구호는 그냥 막연히 떠드는 구호는 아닙니다. 근 100년 간의 혁명을 거치면서 프랑스 사회가 내린 결론이지요. 이 구호는 1870년 이후 성립된 프랑스 제3 공화국에서 국가 이념으로 내세우면서 확실히 정립이 되었고, 1880년 이후 지어지는 관공서 등의 건물의 박공 등에 이 문구를 새겨 놓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이번 파리 여행에서 시테 섬의 파기법원 출입문 위에 새겨진 저 문구를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때 꽤 지치고 (비까지 와서) 처량한 기분이었으나, 저 문구를 보고 괜히 저혼자 흥분했었어요. 그래서 별로 관심도 없고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우리 애에게 저 문구의 의미를 설명해주려고 막 떠들다가 핀잔만 들었지요. 하지만 프랑스 정부는 저 구호의 가치를 국민들에게 심어주는데 무척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자유-평등-박애의 상징은 프랑스 곳곳에서 자주 눈에 보입니다. 프랑스 공화국을 상징하는 마리안느(Marianne)라는 여자의 모습과 프랑스 삼색기와 함께, 이 구호는 마치 프랑스와 불가분인 것처럼 지금도 외쳐지고 있지요.
프랑스의 학생들은 어릴 때부터, 프랑스의 국가 이념이 바로 이 Liberte-Egalite-Fraternite라는 것을 반복해서 배운다고 합니다. 흔히 프랑스 사회를 관용의 사회라고 하지요. 물론 현대 프랑스가 이런 자유-평등-박애가 잘 구현된 이상 국가는 아닙니다. 프랑스 시민들에 대한 최근 설문 조사 결과를 봐도, 프랑스 사회가 현재 그런 점을 만족시키느냐에 대해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라는 응답이 압도적으로 많았다고 합니다.
결과적으로, 프랑스는 지금도 그런 이상의 구현을 위해 계속 혁명이 진행되는 상태라고 할 수 있지요.
오히려 요즘 프랑스에서는 극우 정당인 국민 전선의 세력이 늘고 있고, 아랍이나 흑인, 아시아 인들에 대한 혐오 범죄도 늘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그런 세력들이 정권을 잡지 못하는 것은 어릴 때부터 배워 온 자유-평등-박애 정신이 살아 있기 때문이라고 봐요. 가령 9살 짜리 프랑스 여자 아이가 지은 시가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데, 내용이 대략 이렇습니다. 제목은 ‘우리는 모두 평등하다’ 입니다.
여러분이 카톨릭이건, 무슬림이건, 유대교인이건,
혹은 여러분이 그중 아무것도 아닐지라도, 우리는 모두 평등합니다 !
여러분이 십자가를 목에 걸건, 키파 (kipa, 유대인들이 쓰는 둥근 캡)를 썼건 베일을 둘렀건,
혹은 여러분이 그중 아무것도 안 둘렀을지라도, 우리는 모두 평등합니다 !여러분이 교회를 가건, 유대회당에 가건, 모스크에 가건,
혹은 여러분이 그중 아무곳에도 가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모두 평등합니다 !
제가 제 국민학교 시절을 돌이켜 보면, 저는 자유-평등-박애 같은 것보다는 ‘반공’과 ‘국가에 대한 충성’ 등을 열심히 배웠던 것 같습니다. 반공에 대한 포스터 그리기, 반공에 대한 글짓기 대회, 아침에 등교하면서 태극기를 향해 경례를 하며 국기에 대한 맹세문을 외우던 모습이 기억나네요. 프랑스 꼬마 여자애가 저런 시를 지을 나이에, 저는 북괴에 대한 증오와 공포를 표현하는 그림과 글짓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항상 우리나라는 ‘분단 국가라는 특수성이 있기 때문에 개인의 자유를 제한할 수 밖에 없다’라는 설명도 들었던 것 같습니다. 저나 제 윗 연배되시는 분들은 그런 교육을 반복해서 받으며 자랐습니다. 자유-평등-박애 ? 그건 진짜 바다 건너 프랑스 이야기였지요.
요즘 철도 민영화 관련되어 철도 노조 파업으로 나라가 시끄럽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이번 사태에 대해 뭐라고 편을 들 만큼 사정을 잘 알지 못해서 거기에 대해서 뭐라고는 말을 못 하겠어요. 다만, 제가 알기로는 분명히 파업은 국민의 신성한 권리 중 하나인데, 제가 어릴 때부터 ‘합법적인 파업’이라는 것은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이번 파업도 어떤 점 때문에 불법으로 찍혀서 경찰들이 저렇게 사람들을 체포하러 다니고, 왜 철도 공사가 조합원들을 징계하는지, 그에 대한 설명은 들어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합법적으로 파업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라는 것도 전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전에 뉴스를 보면 프랑스에서는 여기저기서 파업을 하여 비행기나 철도가 멈춰서도 시민들이 불편하지만 그냥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 좀 의아하게 여겼던 것이 기억납니다.
요즘 우리나라의 국가 이념은 무엇인가요 ? 창조 경제와 종북세력 척결인가요 ? 우리나라의 진짜 비극은 이런 국가적 이념의 정립이 없다는 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라가 제대로 서려면 기초가 튼튼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얼마전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었던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입니다.
이 양반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레지스탕스로 활약을 했던 프랑스 외교관입니다. 이 분이 이 책에서 남긴 말을 요약하면 대략 이렇습니다. 분노하라, 등돌리고 모른 척 하지 마라, 포기하지 마라, 너희들 하나하나는 개인으로의 책무가 있다 !
원문 : Nasica의 뜻은?
chanel espadrilles flatsDramatic History of Ed Hard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