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아전은 이미 최후에 돌입하고 말았습니다. 이 전쟁이 이미 3년, 지나사변 이래 자(兹)에 7년, 아니 미영이 동아의 침략을 시작하여, 이미 수세기에 걸친 장구한 전쟁의 최후의 막이 이제 바야흐로 닫쳐지려고 하는, 실로 역사적인 숨 막히는 순간입니다. 중대한 순간입니다.
그리하여 전쟁의 귀추는 이미 명백한 것입니다. 침략자와 자기 방위자의, 부정자(不正者)와 정의자(正義者)의, 세계 제패의 야망에 붙들린 자와 인류 상애(相愛)의 이상에 불타는 자의, 일언이폐지하면 악마와 신의 싸움인 것입니다. 정의는 태양과 같고, 사악은 흑운과 같아서, 구름은 마침내 태양의 적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의이며 정의자가 일어설 때 그 승리는 명백한 것입니다.
생각하면 역사발전의 법칙은 아이러니컬한 것입니다. 아시아의 오래된 쇄국의 기간에, 기계문명의 이기를 갈고 닦아 신대륙을 약취하고 아프리카를 분할하고, 인도를 정복하고, 드디어 아시아의 중심에까지 침략의 조아(爪牙)를 뻗쳐 온 앵글로색슨은 그 사려 깊은 타산에서 우선 아시아의 거세를 시도하여, 아시아의 각국에 개국을 강요하고, 종교를 강매하고, 자기문화의 이식을 기도한 것이었습니다만, 결과는 도리어 희망한 대로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 적국항복문인대강연회(1944. 8.17) 연설 ‘우리가 반드시 승리한다’(<신시대>1944. 9) 중에서
유진오, 작가에서 법학자, 정치인까지
현민(玄民) 유진오(兪鎭午, 1906~1987)는 작가 이전에 법학자로, 그리고 정치인으로 먼저 기억되는 이다. 경성제국대학 수석입학과 수석 졸업을 자랑하는 이 당대의 수재는 자신이 가진 재능을 다해 일제에 부역했다. 그는 독립된 후에는 신생 대한민국의 제헌 헌법을 기초한 뒤, 초대 법제처장을 역임했고, 대학 교수와 총장을 지냈다.
그는 제1공화국 당시 한일회담의 수석대표와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이후 국가재건국민운동본부장을 지냈다. 야당인 신민당의 총재를 역임했고, 1979년 10·26 군사 쿠데타가 발생한 후에도 국토통일 고문과 국정 자문위원에 위촉되기도 했다. 한 마디로 삶의 전 기간을 주류로서의 삶을 살았던 사람이다.
대부분의 친일 부역인사들이 그러했듯 그도 초기에는 민족주의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던 듯하다. 그는 경성제대 법문학부에서 수학하면서 대학 내 좌익모임인 ‘경제연구회’를 조직하고 활동했다. 졸업 후에도 조선인 졸업생 모임인 ‘낙산구락부’를 조직하여 학술잡지<신흥(新興)>을 발간했다. 1930년에는 <동아일보>에 이지휘란 필명으로 당시 운동의 상황과 문제점을 정리한 ‘년간 조선 사회운동 개관’을 발표했다.
그가 작가로 등단한 것은 1927년 5월 단편소설 ‘스리’를 <조선지광>에 발표하면서부터다. 1930년 만주를 여행하고 돌아온 후 ‘마적’, ‘귀향’, ‘송군 남매와 나’ 등의 ‘동반자적 경향’이 짙은 작품을 발표했다.유진오는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작가동맹)로부터 가입 권고를 받았으나 카프가 조선의 식민지적 현실을 등한시한다고 판단하고 거리를 두었다.
‘동반자(同伴者)’란 본래 러시아 문학에서 온 개념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카프에 가입은 하지 않았으나 작품 활동에 있어 카프의 이데올로기에 동조하고 있는 작가’를 이른다. 카프에서는 유진오를 이효석과 함께 동반자 작가로 규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경성제대 법문학부에서 강사 생활을 시작한 후 1931년 9월부터 이강국 등과 함께 ‘조선사회사정연구소’를 설립해 활동했다. 1932년 5월께는 근로 대중의 이익을 위한 연극을 표방하는 극단 ‘메가폰’을 결성했다. 1933년부터 <동아일보>의 객원기자를 지냈으며, 1936년 원산청년회가 개최한 강연회에서 발언한 내용이 문제가 되어 경찰조사를 받았다. 1937년 보성 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했으며, 1939년부터 법학 연구를 중단하고 창작활동에 몰두했다. 같은 해에 <유진오 단편집>(학예사)을 펴냈다.
유진오의 좌파적 민족주의 활동은 거기까지였다. 보성전문 법과 과장을 맡고 단편집을 발간하던 1939년 그는 잡지 <삼천리> 7월호에 ‘북지황군(北支皇軍) 위문단’을 격려하는 ‘신질서 건설과 문학’이라는 글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친일활동에 나섰던 것이다.
“동아 신질서 건설을 위하여 대륙의 전선에 분전하는 용사를 위문하기 위하여 금차 도지(渡支)하는 제위의 건강을 빌며 이 중대한 사명을 무사히 다하시기를 바랍니다. 전쟁이란 실로 인간의 가장 심오한 금선(琴線)을 울리는 가장 절실한 인간 활동이라 금차의 제위의 전선 위문은 반드시 위대한 문학적 성과로 나타날 것을 아울러 기대합니다.”
유진오는 조선총독부 외곽단체인 조선문인협회가 결성될 때까지 발기인과 간사였다. 그는 11월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한 ‘전선에 위문문·위문대 보내기 행사’를 주도했고 12월, 조선문인협회 간사로서 사업부 조직의 임무를 맡았다.
1940년 11월부터 12월까지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한 순회 시국강연회의 연사로 평안도에 파견되어 ‘신체제와 국어보급’이라는 연제로 강연했다. 모국어인 한글로 글을 썼던 작가가 식민지 종주국의 언어를 ‘국어’라 지칭하며 그 보급의 중요성을 주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것은 작가로서의 자기 부정, 정체성의 파탄이었지만 ‘국어’로 일제에 부역한 숱한 시인·작가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손쉽게 현실과 타협했다.
1941년에는 조선인의 전쟁 협력을 위한 전시체제기 최대의 민간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1월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주최로 지원병 독려 연설을 했다. 동포 청년들에게 일왕을 위해 전쟁터에 나가라고 부추긴 것이다. 그 역시 뭇 친일 부역자들이 간 길을 따랐던 셈이다.
대동아공영권 건설과 내선일체를 위해
유진오가 문학 활동을 통해 적극적으로 주장했던 친일논리는 대동아공영권 건설과 내선일체였다. 그는 몇 편의 친일 글을 통해 ‘동아 신질서 건설’을 전면에 내세우며, ‘대동아공영권’ 건설에 조선의 지식인들이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조선 민족의 일본국민화와 내선일체를 주장하면서 “내선일체는 내선 무차별 평등 일체화를 목적으로 하고, 그것을 위해서 조선인의 국민적 자각과 문화적 교양을 내지인과 동일한 수준으로까지 끌어올리는 것”이라고 진정한 의미의 민족일치를 향한 방법론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는 내선일체를 위해 “반도인은 일본국민이고 국어는 일본어”(‘조선 문단 1년을 돌아본다’ <경성일보>1942.12.2.)라는 명제를 세우고 일본어 보급과 일본어 창작에 전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모국어를 버리는 데 그치지 않고 식민지 종주국의 언어를 자기 창작의 수단으로 쓰기 시작한 것이었다.
특히 일본어 보급은 “단순히 언어를 깨닫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동양정신을 최고로 순수한 형태로 보지해 온 일본정신을 체득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 지역문화의 수준을 향상시키는 것”(‘일본어의 보급’<경성일보>1942.11.15.)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작가로서뿐 아니라 민족으로서의 정체성도 기꺼이 버렸다.
유진오는 전쟁 수행의 도구로서 문학의 역할을 강조했다. 당시의 문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국민문학’으로 지정하고 일본어 창작을 평가했고 이는 자연스레 일본의 침략전쟁 미화와 학병·지원병 지원의 독려로 이어졌다.
“우리들 마음은 이미 하나가 되어 미영 격멸을 위하여 불타고 있습니다. …… 편협한 개인주의의 미영 문학을 격멸하고 웅대하고 장려한 동양의 오래고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 나가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사명” – ‘거대한 융화’(<문학보국> 1943. 9.10)
“현하의 최대 문제인 내선일체도 또한 그러하다. 내선일체를 최종적으로 해결하는 것도 다른 사람이 아니라 조선인 자신인 것이다. 조선 사람이 지금 내지인과 다른 경우에 처해 있는 것이 사실이라 하면 그것은 조선 사람이 내지인에게 지지 않는 힘을 가짐으로써 비로소 해결될 것이다.……이번 특별지원병제도는 조선 사람에게 이러한 힘을 주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병역이 단순한 의무가 아니라 특전이라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용이히 이해될 것” – ‘병역은 곧 힘이다’(<매일신보> 1943.11.18.)
동포를 대상으로 한 침략전쟁 선동은 마치 강박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는 이미 패전으로 기울기 시작한 전쟁에 더욱 매진해야 한다고 하면서 전쟁 동원에 참여하지 않은 동포들에게는 ‘총후봉공’의 자세를 독려했다. 조부가 모아 놓은 쇳조각을 나라에 바치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등장인물을 통해 총후봉공의 필요성과 필연성을 강조한 소설 ‘조부의 철조각’(<국민총력> 1944년 3월호)은 그 절정이었다.
“싸움은 이미 우리의 것입니다. 어째서? 우리가 이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전쟁에서 반드시 이길 운명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필승에의 신념은 결코 헛된 맹신이 아닙니다. 실로 이와 같이 필승의 이(理)를 자각하고,‘대화일치’, 서로 굳세게 최후의 단계를 돌파하고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 ‘우리가 반드시 이긴다’(<신시대>1944년 9월호)
유진오는 기고·좌담·대담 등 갖가지 형식으로 일제의 식민정책을 옹호·지지하고 침략전쟁을 미화·찬양하는 활동을 활발히 전개했지만 역사는 진전되고 있었다. 침략전쟁의 승리를 강변한 지 1년도 되지 않아 일제가 패망하면서 해방이 된 것이다.
해방 후에도 누린 ‘주류’의 삶
해방 직후인 1945년 8월 16일 새벽에 문학단체에 동참하라는 임화의 부탁을 받고 문인들의 모임에 나갔다가 이태준 등의 항의로 쫓겨났다. 그게 친일 부역으로 인한 그의 유일한 굴욕이었을까. 그는 문학활동을 접고 교육가, 법학자, 관료, 그리고 정치가의 길로 나섰다.
그리고 이후 그는 여전히 한국사회의 주류로서 별다른 굴곡 없는 평탄한 삶을 살았다. 교수를 거쳐 총장까지, 헌법 기초위원으로 대한민국 헌법의 초안을 작성하는 동시에 초대 법제처장을 지내는 등 사법과 교육 분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주류 중의 주류였다.
권력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데도 그는 여전히 발군의 능력을 보였던 듯하다. 그는 5·16 군사쿠데타 후 국가재건최고회의 간사를 역임했고 박정희에 의해 설립된 범국민 중앙행정기관이었던 ‘국가재건국민운동본부’의 본부장이 되었다. 국가재건국민운동본부는 뒤에 민간부문이 새마을운동중앙회로 흡수된 조직이니 그 성격은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1966년 유진오는 민중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다. 이어 민중당과 신한당이 합당한 신민당 대표위원이 된 뒤 6월 국회의원에 당선했다. 1년 후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사임하긴 했지만 1967년에 그는 신민당 당수가 되었다.
박정희 군부독재에 맞선 야당 총재로의 변신은 1974년 민주회복국민회의에 참가한 점과 함께 그의 인생 역정에서는 꽤나 이질적인 부분처럼 보인다. 1979년 전두환 등 정치군인들에 의해 자행된 10·26 군사쿠데타 후에 국토통일 고문과 국정 자문위원에 위촉되면서 다시 예전의 순응주의로 돌아가긴 했지만.
유진오는 1983년 12월 뇌혈전증으로 쓰러져 1987년 8월 30일에 사망했다. 향년 80세. 총장을 지냈던 고려대학교에 빈소가 마련되었으나 일부 교수와 학생들이 반발해 이른바 ‘현민 빈소 사건’이 일어났다. ‘고려대가 친일행위자나 국정자문위원회 빈소가 될 수 없다.’며 철거를 주장한 것이다. 그게 일제 부역 때문에 그가 겪은 두 번째 굴욕이었으나 다행스럽게도 그는 이미 고인이었다.
우리 사회는 유진오의 삶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그는 대체로 일제 식민지 시기의 친일 부역자, 민족 반역행위자가 아니라 제헌 헌법의 기초자로, 민주주의의 수호자를 자처한 야당 총재로만 기억되는 듯하다. 여전히 청산되지 못한 식민지 역사 앞에서 민족사적 평가 또한 뒤집혀 있기 때문이다.
원문: 이 풍진 세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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