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준의 석사 논문 「인터넷 커뮤니티 ‘일베저장소’에서 나타나는 혐오와 열광의 감정동학」이 8년 만에 단행본 『보통 일베들의 시대』가 되어 손에 쥐어졌다.
석사 논문이 발간된 당시에도 뜨거운 화제였다. 당시에 ‘일베’는 누군가에게는 패륜 집단으로, 또 누군가에게는 망해가는 우파의 새로운 담론장이자 주체로서 급부상하였으나 대부분의 글들은 인상비평이나 도덕비평의 수준에 머물렀다. 그때 방법론적 엄밀함과 학문적 담론으로서의 체계를 치밀하게 갖춘 김학준의 논문이 등장하였고, 믿거나 말거나 석사논문 중에서는 가장 많이 읽힌 글이 되는 영광을 누렸다.
논문 발간 이후 나는 김학준에게 빨리 그 논문을 단행본으로 낼 것을 종용하였다. 주제 의식과 담론의 신선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지금은 ‘문송’하다는 말이 유행하고 있지만 나는 사회과학 담론이 방법론적으로 체계적이고 치밀한 담론을 대중들에게 선보이는 것은 그 자체로 한국 사회과 학담론에 큰 기여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대부분의 ‘비평’이라는 이름으로 써진 글들이 글 쓰는 이의 비상한 재주에 기대는 경우는 많으나, 김학준의 논문처럼 양적 방법론/질적 방법론 양쪽 모두를 아우른 다음 그것을 다시 정확하게 조합하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주제 의식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사실 사회에서 한 집단, 혹은 주제가 급부상하였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그렇기에 아무리 방법론적으로 엄밀하고 담론적으로 체계적이라고 하더라도 주제에 대한 사회의 흥미가 사라지고 나면 담론은 생명력을 다한다. 나는 이 멋진 논문이 시대와 함께 퇴색되기 전에 빨리 출판되기를 바랬고 김학준에게 기회가 닿는 대로 종용하고 호소하고 협박했다.
그리고 8년의 시간이 지났다. 사실 아쉽다. 더 일찍 나왔어야 했다. 언제적 ‘일베’인가. 일베는 사실 연구주제로서도, 사회현상으로도 한물갔다. 저자가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냉정하게 말해서 ‘ㅎㅌㅊ’다. 실제로 책이 나오고 난 다음 알라딘 첫 번째 댓글이 이거였다.
일베 망한 지 5년이 넘어가는데 아직도 이런 허수아비치기를 하니 진보진영이 선거서 3연속으로 탈탈 털리지
별점 달랑 한 개 줬다. 읽어보지도 않고 이런 별점 테러를 한 것에 유감이지만 솔직히 저 말을 한 사람의 마음은 이해가 간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서 나는 몇 가지의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동시대에 이 책이 던지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논문 이후 전개된 양상에 대해 김학준은 질문의 끈을 놓치지 않았고, 논문을 쓸 당시에 그가 제안한 ‘고통의 평범 내러티브’에 이어 ‘웃음’의 위상과 의미를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이 글에서 이 두 키워드를 중심으로 김학준의 이 책의 의미를 집중적으로 조망하고자 한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일베를 담은 그의 석사 논문을 넘어, 일베 ‘이후’의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 한국의 담론장과 그 안에서의 주체성(subjectivity)에 대한 책이다. 일베적 현상이 어떻게 일베를 넘어 적어도 인터넷상에서는 새로운 정상적(normal) 활동이 되었는지, 그 ‘뉴노말(new normal)’을 가능하게 한 장치(dispositif)들에 대한 문화 연구적 분석이다. 흔히 사회과학에서 분석하고 찾는다고 하는 원인이나 이유가 아니라 장치에 대한 분석, 특히 담론적 장치에 대한 분석이다. 그것은 시작 ‘이후’ 어떤 장치들이 어떤 배치를 통해 다른 담론들을 무력화하거나 오염시키며 확장되었는가.
이 책에서 밝히는 가장 중요한 담론적 장치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웃음’과 ‘평범함’이다. 그리고 이 둘이 합쳐서 만들어내는 주체성의 효과로서, 자유인으로서의 개인에 대한 의지다. 저자가 밝히고 있는 것처럼 일베는 그 열광에도 불구하고 결코 ‘연대’를 만들어내지 않는다(아니, 만들어낼 수 없다).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보기에 ‘연대’는 사실상 나약한 자들의 ‘친목질’에 불과하고 그것은 자유의 타락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디씨에서부터 시작된 유구한 이 ‘자유’에 대한 상상계적 주체의 전통을 일베는 더 과격하게 계승하고 있다. 그렇기에 그들은 일체의 사회적인 것에 적대적이면서 동시에 냉소적이다.
웃음과 카니발적 에로티시즘
모든 것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시작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말과 소리 둘 모두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소리만 내는 동물과 달리, 인간은 말하는 존재이며 말하는 것을 통해 사람은 인간이 된다. 사람이 인간이 된다는 것은 다른 사람과의 사이-안(in-between)을 만드는 것이 말이며 동시에 말은 사이-안에 위치할 때만 말로서 가치를 가진다는 뜻이다.
홀로 산에서 외치는 말은 말이 아니다. 대나무 숲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친 말은 말이 아니다. 소리다. 그 말을 대나무가 받아서 사람들에게 들리게 돌려줬을 때 비로소 말이 된다. 즉 내가 말하는 것을 누군가가 들을 때 비로소 말이 된다. 말에는 반드시 청중이 필요하다. 청중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건 말이 아니다.
따라서 말을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사회적이고 정치적이다. 말은 청중을 모아낸다는 점에서 사회적이고, 청중을 모아낼 수 있는 힘 즉 권력이 작동한다는 점에서 정치적이다. 내 말을 들을 청중을 모아내는 힘이 있어야 비로소 말하는 존재, 다른 말로 하면 ‘들릴 수 있는 존재(to be heard)’가 되며 그래야 사람에서 인간으로 바뀐다.
말한 사람은 인간이 되고, 말은 사회를 만든다. 그렇기에 권력자들은 말을 두려워하고, 사람들은 말을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잘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아무런 권력이 없더라도 말에 가치가 있으면 사람을 모을 수 있고, 사람이 모이기에 그것은 권력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가난한 사람들이, 힘없는 사람들이 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원동력이며 권력을 가진 자들이 말을 경계하는 가장 큰 이유다.
들을 만한 말, 보탬이 될 만한 말은 말한 사람과 듣는 사람 모두에게 기운을 고양시킨다. 거창하게 말하면 들을 말한 말은 사람의 ‘코나투스’를 발동시킨다. 귀한 말을 들은 사람에게는 의지가 발생한다. 새로운 걸 시도해보겠다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것을 시도해보겠다는, 한번 해보자는 의지와 용기가 생긴다. 그렇기에 사람들을 모으고, 그 사람들의 생의 의지를 발동시키는 말은 근본적으로 에로틱하다. 기분을 좋게 하고 사람의 기운을 고양시킨다는 점에서 말이다.
사람은 말을 하고, 내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있을 때 인간이 된다고 했다. 인터넷이란 내가 아무리 이상한 주장을 한다고 하더라도 세상 어디선가 누군가 한 명은 내 말에 동의할 수 있는 네트워크를 의미한다. 인터넷의 등장과 함께 모든 사람은 모두 인간이 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토포스에 인간이 묶여 있을 때와는 아주 다르다. “에이,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 이것이 토포스에 가장 흔하게 사람을 인간에게서 배제하는 말이었다면 인터넷은 “님 말씀에 동의합니다.”라는 응답이 지구 어디선가에서는 들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었다.
모두가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것, 여기에 모든 사람들은 환호하고 황홀해했다. 토포스에서라면 감히 이야기를 걸어보지 못했을 사람에게 직접 이야기를 할 수도 있고, 그 사람을 비판하고 조롱할 수도 있다. 내 비판이 예리했을 때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내 조롱이 신랄했을 때 사람들은 웃음을 터뜨린다. 이것보다 말하는 이를 기쁘게 하는 것은 없다. 내가 누군가를 조롱함으로써 누군가가 기뻐하는 것, 그것만큼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이 없다.
조심할 것은 ‘조롱’과 ‘혐오’에만 초점을 맞추면 사태의 진상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조롱과 혐오는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역으로 말하면 조롱과 혐오가 목적인 사람은 지나치게 진지하게 웃음으로부터 멀어지고 이런 조롱과 혐오는 오히려 또 조롱당한다. 진지‘충’으로 말이다. 그렇기에 일베가 한참 승승장구하던 시절 일베에 이런 게시물이 올라왔었다.
요즘 일베도 이전 일베와 같지 않다.
이 진지한 글의 밑에 달린 댓글은 당연히 조롱이었다.
조롱과 혐오는 그 자첵로 목적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는 데 있다. 상대의 기분을 고양시켜 웃게 하는 데 있다. 서로를 웃고 기쁘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 이게 에로스다. 그렇기에 조롱과 혐오를 주고받는 관계는 에로틱한 관계이다. 안도현 시인은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냐”며 에로스를 물었지만 이 시는 이렇게 바뀌어도 무방하다.
드립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웃기는 사람이었냐?
그렇기에 ‘조롱’과 혐오‘는 조롱당하는 자를 번제물로 삼은 향연의 공간이며 이 공간에서 터지는 웃음은 카니발적 웃음이다. 김학준이 이 책에서 현재 인터넷 담론장의 정동, 동학, 장치를 분석함에서 가장 핵심을 찌른 것이 바로 이 카니발적 웃음의 문제다. 인터넷에서 혐오와 조롱이 어떻게 웃음과 연결된 담론적 장치이며 그 웃음은 어떤 효과를 생산하고 있는지를 질문하고 분석한다.
카니발적 웃음은 ‘몰락’과 관련이 있다. 누군가가 몰락하는 것, 즉 하강하는 것이야말로 사람에게 웃음을 유발한다. 여성이 남장을 하면 웃기지 않지만 남성이 여장을 하면 그 자체로 웃기다. 남성중심사회에서 남성은 여성보다 우위에 있고 그 우위가 몰락, 즉 하강하는 것이 웃음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남성이 게이 흉내를 내는 것은 이중적으로 더더욱 몰락을 보여주기에 더 큰 웃음을 유발한다. 지금은 그나마 자제하고 있지만 코미디에서 흑인 분장을 하는 것, 이주 노동자 흉내를 내는 것, 마찬가지다. 모든 웃음이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웃음은 하강에서 발생한다.
한병철의 책 제목처럼 사랑에서도 에로틱이 종말을 고한 시대에, 오로지 카니발적 웃음만이 에로티시즘을 보존하고 실현하고 있다. 역설적으로 이것은 누군가의 몰락이 아닌, 누군가를 환대하고 축복하며 상승하는 것으로서의 사랑이 사라져 버린 시대의 현상이다. 누군가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해야 한다. 거기 나를 웃기는 자가 있고, 나로 인해 웃어주는 자가 있기 때문이다. 거기 웃음이 있기 때문이다. 한편에 고통의 평범 내러티브가 있다면 다른 한 편에는 바로 이 ‘웃음’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 웃음은 ‘과장’을 특징으로 한다. 과장이 특징인 웃음은 그 어떤 공격도 무력화한다. “웃자고 하는 일에 죽자고 덤비지 마라” 이 말에 반박할 수 있는 말은 없다. “너는 그게 웃기냐?”라는 말 말고는 할 말이 없으며 이 말은 곧 웃음을 죽이는 말이다. 에로틱한 관계를 공격하는 말이며, 에로티시즘을 금지하는 말이 된다. 『장미의 이름』에서 이미 보았지만 웃음을 제거하려는 자, 그들이야말로 인간의 적이며 삶의 파괴자들이고, 최종적으로 그들은 고립되고 패배자가 된다.
그것은 웃긴 것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이렇게 일베의 웃음에 고통으로 맞선 것은 도덕적으로 옳은 길이었지만 대중들로부터 외면받기 딱 좋은 위태로운 길이었다. 다시 강조하지만 사랑이 죽어버린 시대에 유일하게 남은 에로티시즘은 카니발적 웃음이다. 그 웃음을 제거하는 것은 곧 에로티시즘의 제거이며, 삶의 제거이기 때문이다. 다른 웃음을 돌려주지 못하는 한 이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도덕적으로 옳은’ 웃음에 대해 한 번도 웃어본 적이 없다. 그건 결정적으로 웃기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럼 어째야 하나? 조롱에 조롱으로 맞서고, 카니발적 에로티시즘에 우리도 카니발로 맞서야 하나? 아니면 ‘대안적’ 웃음을 만들어야 하나.
여기에 이 책이 말하는 이 싸움이 정말 어려운 이유가 있다.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의 ‘기대’부터 그렇다. 아마 이 책에 호기심을 가지고 집어 드는 독자들은 일베가 얼마나 ‘못난 놈’들인지 듣고 싶을 것이다. 김학준이 이들을 하나하나 해부해서 ‘하강’시키는 언어를 통해 담론적으로 파산시켜 ‘몰락’에 이르게 하는 것을 공유하고 싶을 것이다. “역시 그렇지!”하며 웃고자 하는 그 카니발적 에로티시즘이 똑같이 작용할 것이다. 웃는 순간 똑같아지고, 웃지 않는 순간 재수 없는 존재가 되어 패배한다.
조롱과 혐오의 정당화: 고통에 대해 말하는 순간 자격을 잃어버린다
웃음을 통해 기쁨의 관계를 형성하는 사회적 존재감을 만들고, 사회적 저명인사까지 ‘저격’하며 몰락시킨다. 하지만 이러한 정치적 효능감이라는 단어만으로 조롱과 혐오가 광범위하게 대중적인 서사적 장치가 되는 것이 설명되지는 않는다. 여기에는 ‘정당성’이라는 또 하나의 장벽이 있다. 어떤 행위가 집단 내에서 충분히 도덕적으로 정당해야 한다는 점이다. 정당성의 문턱을 넘어야지만 대중들이 도덕적 부담 없이 일상적으로 편하게 쓸 수 있게 되고, 대중화된다.
따라서 혐오와 조롱이 어떻게 정당성의 문제를 ‘해결’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김학준이 이 책에서 탁월하게 분석하고 제시한 것이 바로 이 정당성을 해결하는 ‘고통의 평범 서사’다. ‘고통의 평범 서사’란 평범한 사람들 대부분이 우리 모두가 자신을 피해자로 인식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피해와 고통에 대해 말할 때 “너만 힘든 줄 알어? 다 힘들어. 그만 징징대”라고 말한다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평범이란 아무 생각 없이, 아무 특별한 노력 없이 살아도 도달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특별한 생각과 노력은 ‘탁월한 존재’가 되기 위해 하는 것이지 ‘평범한 존재’가 되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생각과 노력이 평범하게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 되었고, 그렇지 않으면 ㅎㅌㅊ가 되는 세상이 되었다. 평범에서 탈락할지 모른다는 공포가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
‘평범’에 대한 강박은 강력하다. 전연령, 전계층, 전성별에서 다 나타나고 있다. 의사들도 끊임없이 서로 비교하며 자기가 ‘평균’에 도달하는 ‘평범’인지 아닌지 걱정한다. 사람의 외모 역시 마찬가지다. 고등학교 몇 학년 몇 살인데 지금 키와 몸무게가 얼마나, 결혼 못하는 ‘평균 미만’이냐는 질문을 올린다. 다시 말하지만 계급/계층, 재력/외모, 나이/몸무게 등등을 전 영역에서 우리는 평균과 평범에 대한 강한 압박을 받고 있다.
모두가 기를 쓰고 ‘평범’을 달성해야 하는 시대. 그래서 역설적으로 ‘평범’은 불가능하다. 보통 사람들이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힘을 가진 사람, 즉 ‘강력크’한 사람만이 도달할 수 있다. 사실 이 정도면 평균은 되는 거냐고 묻는 말에는 중간값으로서의 평균에 만족하지 못하고 상위 20%에는 들어야 탈락하지 않는다는 인식이 공유되어 있다. 20대 80의 사회에서 평균은 50%일지 모르지만, 평범은 20%에 들어야 한다. 그렇기에 평범에 들지 못하는 80%는 늘 주눅 들고 위축되어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평범에 대한 강박은 김학준이 이 책에서 말하는 ‘고통의 평범 서사’로 전환된다. ‘평범’은 특별한 사람들이 도달하는 것이고, ‘보통 사람’은 보통의 노력으로 불가능하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에게 공유되는 것은 ‘평범한 존재가 되지 못하는 고통’이다. 따라서 이들 사이에 만연하는 보편적 서사는 고통에 대한 서사가 된다. 고통이야말로 유일하게 평범한 것이다.
고통에 대한 평범 서사는 고통을 ‘진부하고 지루하고 흔한 것’으로 만들었다. 모두가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시대이기에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가장 일상적인 서사가 되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가장 흔한 것’이 되어 듣기 싫은 말이 되어버렸다. 사람들은 점점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 예민해지지만(평범한 삶에 대해 갈망할수록, 불안해할수록)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는 둔감해(고통이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것이 될수록)진다.
이것이 이 책에서 김학준이 조롱과 멸시가 약자들에게 향하는 서사 장치라고 말하는 ‘고통의 평범 서사’다.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자신의 미성숙과 나약함의 반증일 뿐이다. 그것은 왜 그가 ‘평범’에 도달하지 못했는지 그 이유를 말해준다. 평범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강려크’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강인함이 없어 징징거리며 남에게 의존하려고나 하는 존재가 어떻게 ‘평범’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고통에 대한 서사야말로 그의 자격 미달을 보여준다. 고통에 대해 말하는 순간, 그는 고통에 대해 말할 자격을 상실한다. 그러니 그에게 합당하게 돌아갈 것은 조롱과 멸시, 비아냥과 조리돌림 뿐이다. 이것이 고통이 평범한 것이 된 시대에 왜 고통에 대해 말하는 자가 공격받는지, 그 역설이 작동하는 이유이다.
피곤한 것이 아니라 힘든 것이다
모두가 피해자라고 생각하며, 동시에 고통을 호소하는 피해자를 나약한 자로 비난하는 서사 장치는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는 자유인으로서의 개인을 이상화하는 효과를 만든다. 김학준이 말하는 것처럼 일베는 그 열광에도 불구하고 결코 ‘연대’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보기에 ‘연대’는 사실상 나약한 자들의 ‘친목질’에 불과하고 그것은 자유의 타락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길호가 디씨에 대한 분석에서 밝힌 것처럼 유구한 이 ‘자유’에 대한 상상계적 주체의 전통을 일베는 더 과격하게 계승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들은 정치적인 것에 열광하지만 일체의 사회적인 것에 대해서는 적대적이면서 동시에 냉소적이다.
물론 이 ‘냉소적 열광’은 유튜브로 미디어가 바뀌면서는 분명히 양상이 달라지고 있다. 이 책의 ‘제목’이 일베가 되면서 내가 아쉬워하는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인터넷 ‘글쓰기’로서의 일베와 말하기와 이미지, 영상이 합쳐진 ‘방송’으로서의 유튜브가 달라지는 지점이 이것이다. 글이라는 매체와 말/방송이라는 매체가 요구하고 만들어내는 감각/정동의 차이는 ‘열광’이 왜 일베에서는 좀 더 냉소적이었던 반면, 유튜브에서는 ‘동원’까지 가능할 정도로 더 뜨거운지를 설명한다. 이것은 글과 말/방송이 요구하고/생산하는 주체성의 매체적 차이다. 글은 어떤 경우에도 최소한의 차가움을 요구한다. 그렇지 않으면 쓸 수 없는 것이 글이고, 일베는 유튜브 극우들과는 달리 글에 기반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일베에서 유튜브에 이르기까지 이 ‘극우’들에 맞서는 것(사실은 극우들뿐만 아니라 지금 문제시되고 있는 일단의 과격화된 정치 훌리건들 모두의 문제이겠지만)이 매우 ‘힘들다’는 점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다. 김학준은 ‘웃음’과 ‘평범’을 담론적 장치로 활용한 서사에는 대항하고 이기기가 ‘힘들다’고 말한다. 오히려 이것을 힘든 문제가 아니라 피곤한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 거기에 대응하는 사람들의 문제가 있다.
나는 이것을 추천사를 쓰기 위해 편집본을 읽으면서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처음 이 책의 제목으로 생각한 것은 『저들과 싸우는 것은 왜 이리 피곤한가?』였다. 일베를 보면서, 그리고 그 이후 진보와 보수를 넘나들며 등장한 이 서사 주체들을 대하면서 사람들이 가지게 된 궁금증은 이게 왜 이렇게 힘들고 내가 왜 이렇게 피곤한지였다. 책의 제목은 책의 내용을 요약하는 게 아니라 책을 읽으려는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이어야 한다면 이게 제목으로 딱 좋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김학준이 이 책에서 분석하며 제시한 저들의 서사는 대응하는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처럼 ‘피곤한’ 것이 아니라 대응하기 ‘힘든’ 것이었다. 김학준은 이 책에서 정성을 다해 이 점을 규명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이들의 ‘존재’가 아니라 이들의 ‘서사 전략’과 ‘담론 장치’를 분석하는 데 공을 들였다. ‘피곤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착각이며 대응을 불가능하게 한다는 것을 말이다.
‘힘들다’와 ‘피곤하다’ 사이에는 주체의 자존심과 관련된 결정적인 것이 걸려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말해 ‘힘들다’는 말하는 주체의 역량 부족에 초점이 가 있다면 ‘피곤하지’는 문제가 내 역량이 아니라 상대의 태도나 방식이 된다. 그래서 ‘피곤하지?’라고 말하면 싸울 수 있는데 가치 없고 피곤해서 안 싸운다는 말이 되고 이것은 듣는 이의 기분은 좋게 한다. 그러나 기분은 좋을지 모르지만 대응은 불가능하게 한다.
‘피곤하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보다 진실은 ‘힘들다’는 점에 있다. 이 책의 의미와 가치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일베로 대표되는 조롱과 혐오가 패륜적 집단의 문제적 하위문화로 간단하게 치부될 수도 없고, ‘우리 안의 일베론’처럼 모두의 성찰 문제로 환원될 수도 없다는 것을 직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김학준은 대항 담론의 서사적 ‘무능’을 직면해야 탈출구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며, 나는 이것이 실천적으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대응 방법은 없는가?
힘들다는 것을 직시할 때, 대응하는 자들은 두 가지 나르시시즘의 유혹을 넘어설 수 있다. 하나는 저들을 패륜 집단으로 타자화하며 이쪽의 도덕적 우월에 머무르는 나르시시즘이다. 다른 하나는 ‘우리 안의 일베’론처럼 우리도 저들과 다를 바가 없음을 성찰하자고 촉구함으로서 저들에 비해 성찰력이 있는 성찰적 존재로서의 자신을 표상하는 나르시시즘이다. 이 두 나르시시시즘을 넘어서지 못하는 한 대응은 불가능해진다. 나르시시즘으로는 그 어떤 관계도 만들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면 저 주체형식은 ‘관계’를 만들고 있다. 그것도 ‘에로틱’한 관계 말이다. 여기에 주목해야 한다. 한 편에서는 타자를 번제물로 삼아 서로를 웃고 즐겁게 하는 에로틱한 관계를 형성하여 사회적 존재감을, 다른 한 편에서는 일체의 권위에 위계를 무력화하는 강력한 정치적 효능감을 주고 있다. 게다가 도덕적 ‘정당화’까지 되기 때문에 여기에 ‘희열’을 느끼지 않을 방법이 없다. 그 정당화가 정말 정당한가는 별개의 문제지만 말이다.
타인을 잡아먹는 ‘기쁨’을 나누는 ‘기쁨’이 지배적인 시대에 여기에 맞서는 사람들은 어떤 에로스를 제시하고 실천하고 실현할 수 있을 것인가? 결국 이것은 조롱과 혐오의 문제를 넘어 에로스가 종말을 고한 시대에 어떤 웃음과 기쁨, 그리고 에로스를 보여줄 수 있는가의 문제다. 평범한 사람들이, 평범한 관계에서, 평범한 실천으로, 카니발이 아닌 방식으로 서로를 기쁘게 할 수 있는가? 그런 기쁨을 일상화할 수 있는가? “사랑은 혐오를 이긴다”고 말했지만 그 말을 하는 사람들의 관계는 정말 에로스적인가? 이 말을 하는 사람들조차 사실은 에로스를 조롱하고 불신하지 않는가?
이 점에서 참조할만한 사람이 프랑스의 철학자인 뤽 페리다. 좌파가 아니라 중도 우파이며 교육부 장관을 역임했던 뤽 페리는, 인간의 구원에 대한 담론이 우주론적인 원리에서 출발하여 신학적 원리, 인본주의의 원리, 그리고 해체를 거쳐 사랑의 원리로 넘어왔다고 말한다.
그는 하버마스의 체계에 의한 ‘생활세계의 식민화’나 지그문트 바우만의 ‘정치가 사생활에 의해 지배되어 가십으로 전락한다는 테제’에 맞서 사적 영역의 원리인 사랑이 공적 영역에 굴절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비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유례가 없을 정도로 비공리주의적인 사랑의 원리가 미래에 대한 염려 속에 경계를 넘어선 시민들 간의 연대로 나타나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의 생 ‘안’에서 의미 있는 것을 찾아야 하는 시대에 그것은 ‘사랑’의 원리라는 것이다.
나는 이 점에서 김학준이 언젠가 웃음과 기쁨이 있는 일상적 에로스의 관계에 대해 글을 쓰기를 기대한다. 사실 기대를 넘어 김학준에게 쓰라고 강권하고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일상에서 사랑과 돌봄의 에로틱한 관계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야기다. 거기에 웃음과 기쁨이 있다는 것을 제시하고 실천하며 실현하는 삶을 살고 있는 몇 안되는 한국의 ‘남자’이기 때문이다.(물론 누군가는 그게 바로 ‘퐁퐁남’이라고 또 비웃겠지만 말이다).
방법론적 엄밀함과 학문적 체계를 갖추고 있는 그가 자기와 같은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 연구하여 에로스가 종말을 고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것은 불멸하며 사회란 바로 거기에 기초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업을 해줄 것을 기대한다.
PS.
이 글에서의 카니발은 (바흐친의) 카니발(carnival)과 카니발리즘(cannibalism)의 카니발(cannibal) 양쪽의 의미를 교차하여 사용한다. 정확하게 지금의 웃음은 카니발리즘적 카니발의 양상을 띄고 있다. 이것은 금기, 위반, 죽음, 도착과 관계하는 에로티시즘과도 연결되지만 이 관계를 정교하게 체계화하는 건 아주 정교한 논증이 필요하여 이 글의 한계를 넘어선다. 이 글에서는 가볍게 의미를 오고가며 읽어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