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1.
리: 간단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김효진 본부장: ‘건축의 경계를 확장하는 최고의 전문가 그룹’을 모토로 한, 유선엔지니어링건축사사무소(이하 유선)의 김효진 본부장입니다. 현재 직원은 280명 가까이 되고, 저는 그중 설계5본부를 맡고 있습니다.
리: 280명이라니, 엄청나군요… 회사에서 맡은 주요 프로젝트로는 어떤 게 있을까요?
김효진: 최근 일반인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건축물로는 국립익산박물관이 있습니다. 2020년 건축문화대상 본상을 수상하기도 했죠.
리: 아, 저도 기억에 납니다. 그런데 제가 건축에 문외한이라… 어떤 점이 높게 평가받은 건가요?
김효진: 당시 저희가 잡은 컨셉이 ‘보이지 않는 박물관(invisible museum)’이었어요. 첫인상으로는 건물인지 공원인지 구분하기 어려워요. 내비게이션 찍고 차를 끌고 들어와도, 박물관이 보이지 않아 당황하는 분들도 있지요.
리: 구체적인 형태를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김효진: 바닥에 납작 엎드려 지하로 파고드는 형태로 설계되어 있습니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약간의 경사로가 있는 넓은 대지처럼 보여요. 하지만 지면에서는 지붕의 능선을 따라가야 메인 진입로인 경사로를 볼 수 있죠. 이를 따라 내려가야 로비부터 연결되는 전시 공간이 나와요.
리: 왜 그런 컨셉을 잡은 거예요?
김효진: 바로 옆에 세계문화유산인 ‘익산 미륵사지 터’가 있거든요. 오랜 세월을 겪은 문화재가 주가 되도록 만들고 싶었어요. 인위적인 건축물이 시각적으로 방해하는 걸 원하지 않았죠. 그래서 지형을 최대한 활용하여 박물관이 눈에 보이지 않게끔 만들었습니다.
리: 이 프로젝트를 본부장님께서 직접 리드한 건가요?
김효진: 제가 속한 설계5본부에서 기본 설계부터 사용 승인까지 진행했습니다. 설계 단계에서는 정말 많은 인원이 단계별로 투입됩니다. 발주처와 협의하면서 디자인 과정부터 각종 심의 및 인허가, 현장 관리까지 많은 단계를 거쳐야 하죠. 건축은 그만큼 여러 사람의 생각과 전문성이 모인 결과물입니다.
Part 2
리: 이번 대원의 오산세교지구 프로젝트는 어떠셨나요?
김효진: 오산세교2지구 남측 끝단에 위치한 곳이었어요. 북서쪽으로는 가감이산을 비롯한 자연 요소가 있고, 대지 인근에는 오산 초등학교와 가수 초등학교이 있죠. 반경 3킬로미터 이내에는 오산역 및 경부고속도로 1호선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교육과 교통 인프라의 이점이 많은 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택지 지구임에도 불구하고 제약 조건이 많은 편이었어요.
리: 제약조건에는 어떤 것이 있나요?
김효진: 북측 20m 도로변으로 직각배치구간과 연도형 배치구간(※ 도로와 수평으로 도로와 가깝게 배치)이 설정되어 있었어요. 또 오산초등학교와 연계해서 학교 가는 길인 공공 가로를 단지 내에 두게 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일반주거지역은 정북일조권을 적용하는데, 지침상 택지지구 내에서는 정남일조권을 적용하게 되어 있어서 단지 위, 아래 제약사항을 고려해야 했죠.
리: 그러면 FM대로 딱 가게 되는 건가요?
김효진: 그건 아니에요. 제약 상황을 고려하여, 최대한 좋은 결과물을 내놓는 거죠. 예로 북측 20m 도로변으로는 연도형 배치보다는 도로와 수직으로 배치해야 했어요. 도로변의 소음이나 진동 등의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한 조치죠. 여기에 정남일조권을 고려해서 여러 동이 모두 정남향의 빛을 잘 받을 수 있도록 건물을 적절히 배치해야 했죠.
리: 직각, 남향. 이 두 가지만 맞춰도 별로 개성을 드러낼 부분이 없어 보이는데요?
김효진: 그렇죠. 이 제약조건이 너무 고정적이어서 틀을 깨기가 힘들었어요. 그렇게 고민하다 떠올린 게, 제약조건을 역으로 이용하자는 거예요.
리: 제약조건을 역으로 이용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요?
김효진: 보통 직각 배치부터 생각하는데, 저희는 최대한 남향을 면(面)하는 세대가 많게끔 안을 배치했어요. 중앙 마당의 통경축을 확장시켜 열린 단지를 만들고, 가감이산과 연계되는 녹지축을 단지 내부로 연결했죠. 그렇게 지구 경관 흐름에 부합하는 열린 배치를 계획했습니다.
리: 그렇게까지 신경 쓰며 설계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김효진: 왜냐하면 아파트는 집이기 때문이에요. 과거에는 아파트를 단순히 부의 잣대로만 평가했다면 앞으로는 삶의 변화에 맞춰 다양한 기능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변해나갈 거예요. 그래서 다양한 사회적 요구사항과 복잡한 규정, 대지 여건, 지역성까지 고려해야 해요. 거기에 도시의 공공적 측면까지 고려해서 다채로운 도시 경관을 상상하고 현실화해야 하죠. 그래서 통합설계에는 아주 많은 고민이 필요합니다.
정남세대를 최대 확보한 초기스케치 안
Part 3
리: 하지만 할 수 있는 건 얼마 없고, 지켜야 하는 건 많고… 아파트가 그리 재밌는 작업 같지는 않네요?
김효진: 음… 자율성은 낮지만, 공동주택 설계만의 재미가 있습니다. 동 조합을 어떻게 하는지에 따라, 단지의 여러 시설을 어떻게 설계하는지에 따라 거주하는 사람들의 환경이 달라져요. 사람들의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 수 있지요. 트렌드를 분석하고 이를 설계에 녹여내는 과정이 힘든 과정이긴 하지만, 그만큼 보람되고 재미를 찾을 수 있죠.
리: 오… 예를 들자면 어떤?
김효진: 이 아파트는 4호 조합, 즉 한 층에 4세대가 사는 건물 형태예요. 보시다시피 무척 컴팩트하게 구성되어 있어요. 그래서 공용공간 내 환기 및 자연채광을 확보하기 위한 창을 설치하기 위해서는 여러 대안을 모색해야 했죠. 당연하지만 작은 차이 하나하나에 만족도가 달라지거든요.
리: 단지 설계는 어떤 점을 신경 쓰셨나요?
김효진: 공동공간, 즉 커뮤니티 존에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걱정 없이 이웃과 소통할 수 있도록, 단지 내외 양쪽 모두 디자인적 요소에 힘을 들였죠. 크게 3개의 존으로 나뉘어 있어요. 서쪽의 키즈 존, 동쪽의 액티비티 존, 그리고 남쪽의 커뮤니티 존이지요.
리: 하나하나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김효진: 먼저 키즈존은 아이들의 놀이터이자 소통의 공간이에요. 어린이들이 안전하게 등하교할 수 있도록 학교 가는 길의 공공보행로와 마주하도록 했죠. 에듀타운은 도서관, 어린이집, 경로당 같은 시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학교와 이어져 있어요. 아이와 어머니들이 어울려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신경썼습니다.
리: 다른 둘, 액티비티 존과 커뮤니티 존은 어떻지요?
김효진: 오산시는 2~3인으로 구성된 30~40대를 중심으로 전입인구가 증가하고 있는 추세에요. 거기에 맞춰서, 주민들이 편히 교류할 수 있는 엑티비티 존을 만들었습니다. 설계 초기에는 플레이라운지 스퀘어를 지상에 두었어요.
그러다 설계가 구체화되는 과정에서 선큰(지상 1층 지붕을 오픈해서 지하로 나아가는 개방된 공간)과 연계해서 지하로 나아가도록 설계했어요. 그래서 전체 아파트 경관이 더욱 트여 보이게 되었죠. 마지막으로 중앙광장의 커뮤니티 존은 유선형 형태로 아파트의 브랜드 이름에서 모티브를 얻었어요.
리: 어… 그러고보니 차가 다니는 길을 제외하면 진짜 곡선을 많이 쓰셨네요.
김효진: 그렇죠. 동과의 동선이 단지내에 곡선으로 부드럽게 어우러지도록 했어요. ‘칸타빌’이라는 이름 자체가 음악 용어인 ‘칸타빌레(노래하듯이)’에서 따온 거잖아요? 그래서 노래 부르는 것처럼 일상의 행복을 표현하자는 의도를 실었어요. 노래의 흐름처럼 단지도 곡선을 최대한 살린 디자인을 만들려고 했죠.
리: 컨셉이 칸타빌레인가요?
김효진: 네, 맞아요. 일상에 활기를 더할 수 있는 요소가 가득한 단지, 순간순간 노래가 절로 나오는 행복한 단지를 창출하겠다는 디자인 목표를 세웠어요. 이곳에서의 삶이 만들어내는 연주곡이 “라이프 칸타빌레”, 즉 “오산세교 대원 칸타빌”인 거죠.
Part 4
리: 건축 일은 어떻게 시작하셨나요?
김효진: 친척분이 건축을 하셨습니다. 그분을 보면서 자연히 건축에 관심을 가지게 됐죠. 그런데 막상 일로 접하니 힘들었어요. 설계는 설계안으로서만 끝나지 않더라고요. 시공과 준공으로 이어져야 10년, 20년, 혹은 100년 뒤까지 주변 도시와 함께 살아 숨 쉬는 공간이 되죠. 시작이 설계라는 건 참 매력적이지만, 또 뒤의 모습까지 생각해야 하는 책임감이 뒤따르는 일이더군요.
리: 졸업 후 실제 건축설계사 생활은 어떠셨나요?
김효진: 졸업 후 작은 아틀리에에 입사해서 현상 설계 및 청계천 관련 전시 기획 프로젝트에 참여했고, 이후에는 명승건축에서 근무했어요. 운 좋게 프로젝트의 PM을 맡아 포이동에 위치한 6층 규모의 디자인 회사 사옥을 건축할 수 있었어요. 아는 건 많지 않았지만 건축주의 의견을 반영하기 위해 열심히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도 포이동 사거리의 칼국수집 맞은편에 위치해 있어요.
리: 시작부터 건물 하나를 만들라니, 하드 트레이닝이군요…
김효진: 설계 단계부터 현장까지 컨트롤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거죠. 무척 좋은 경험이었어요. 이후에는 송파에 위치한 한국루터센터 프로젝트를 포함해 많은 공공현상과 턴키에 참여했었어요.. 그 후 또다른 다양한 경험을 하고 싶어서 유선에 오게 됐어요.
리: 실제로 다양한 일을 많이 맡게 되셨나요?
김효진: 네. 유선은 다른 곳보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잘 받아들여 주는 곳이었어요. 입사 이후 다양한 프로젝트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설계5본부가 전에 ‘디자인 연구소’라는 이름이었어요. 이름대로 최신 트렌드를 반영한 설계, BIM 설계 등 체계적인 업무를 이어 갈 수 있었죠.
리: 그런데 큰 조직에서 큰 프로젝트를 맡는 재미도 있지만, 본인 이름의 프로젝트를 하고픈 욕심도 있지 않으세요?
김효진: 물론 제 이름의 프로젝트를 하고픈 마음은 있습니다. 하지만 개인 사무실을 운영한다는 것은 또다른 의미인 것 같아요. 지금은 대형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는 경험, 협업하는 과정 등 다양한 기회를 접할 수 있다는 장점이 더 큰 것 같아요.
Part 5
리: 이번 대원 칸타빌은 최고의 작품이 될 것 같습니까?
김효진: 글쎄요, 최고일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많은 고민을 담은 건 사실입니다. 한 예로 주변의 인접 단지와 연계해서 ‘보행자 전용 도로’를 확장했습니다. 기존의 아파트와 선을 긋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도록 만들었죠. 그래서 지역 주민끼리 교류도 할 수 있고, 주변의 자연 녹지와도 어울릴 수 있도록 했어요. 자연스럽게 폐쇄감 없이 열린 광장이 형성되었죠.
리: 정말 많은 걸 신경 쓰셨군요.
김효진: 네. 이게 다른 단지와 차별화되는 지점인 것 같아요. 블록에 맞춰 설계하고 끝내지 않고, 주변과 연계해서 많은 부분들을 고려했죠. 설계가 구체화 되는 과장에서도 대지 주변의 자연 요소, 도시적 요소, 일상적 요소의 장점들을 적극적으로 담아냈어요.
리: 대원이랑 일하는 건 어떠셨나요?
김효진: 설계하면서 많은 것을 시도해 볼 수 있어서 좋았어요. 시간과 노력이 절대 헛되지 않은 보람찬 과정이었죠. 사실 500세대 정도의 아파트 단지는 그렇게 큰 단지가 아님에도, 특색 있는 설계를 받아들여 주셨죠. 하나하나 세부적으로 파고들었을 때, 이 정도로 디테일함이 많이 녹여진 단지는 많지 않을 겁니다.
리: 반대로, 이번 프로젝트를 하시면서 힘드셨던 점이 있다면?
김효진: 음. 인허가 협의 과정이었던 것 같아요. 특히 인접 단지의 민원 사항을 해결하는 과정이 힘들었어요. 대지 경계부에 설치된 기존의 옹벽을 철거해 달라는 내용이었는데, 택지 준공과 관련된 사항이라 관계자분들과 몇 차례 협의를 거쳐야 했어요. 협의 자체는 원만히 해결되었지만 이로 인해 설계 기간이 많이 길어지게 되었죠.
Part 6.
리: 알겠습니다. 혹시 젊은 건축학도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김효진: 건축은 건축 분야의 지식뿐만 아니라 문학, 철학과 같은 인문학적 지식, 타 예술 분야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는 호기심, 사회 트렌드 변화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가 필요한 것 같아요. 그래도 기대를 품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면 좋은 결과로 돌아올 것입니다.
리: 이번 대원 프로젝트를 정리하는 마무리 멘트를 부탁드립니다.
김효진: 비록 2년이란 긴 시간을 쏟고 있지만, 대원은 좋은 클라이언트예요. 원래는 74, 84타입의 562세대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주거 환경을 끌어 올리기 위해서 전체를 84타입으로 바꾸고 514세대로 줄이자고 건의했거든요. 그러면서 25층 높이가 20층으로 낮아지고, 한 층에 5개 가구가 거주하는 5호 조합이 4호 조합으로 바뀌었죠. 꽤 어려운 제안이었을 텐데, 이걸 받아들여 주셨어요.
리: 와, 수익이 그 정도로 줄어든 것이면… 눈물 좀 나겠는데요.
김효진: 네. 단기간의 수익을 버리고 더 좋은 아파트와 주거환경을 만드는 데 동의해 주신 거죠. 그래서 오산 세교 칸타빌 프로젝트는 정말로 좋은 프로젝트예요. 저도 그만큼 애정이 느껴져요. 처음부터 이 프로젝트에 관여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거라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제 관심 너머로 정말 많은 노력들이 집약되어 있어요. 그래서 성과도 아주 좋게 나올 거라고 봐요. 그것을 바라고요.
리: 쉽지 않은 작업이셨을 텐데, 참조가 된 건축물이 있다면?
김효진: 참조라기보다는 영감이랄까요? ‘침묵과 빛’의 건축가 루이스 칸을 좋아합니다. 건물을 단일체로만 접근하지 않고, 전체 환경에 맞추어 도시 계획적으로 접근하려는 시각과 재료의 본질에 대한 탐구가 많은 영감을 줬어요. 특히 공간, 구조, 빛을 이용한 기하학적인 디자인과 재료의 물성을 잘 보여주는 ‘솔크 연구소’가 인상 깊었어요.
리: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김효진: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덕분에 여러 가지 생각을 다시 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라이프 스타일 매거진 ‘칸’은 사람 냄새가 나서 좋아합니다. 앞으로도 끊임없는 탐구로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실 거라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