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크라이나 전쟁이 키이우, 마리우폴 공방으로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초기 국면에서 자주 거론되었던 선례가 1956년 헝가리 혁명[1]이다. 헝가리의 너지 임레[2] 수상은 소련군 투입에 결사적으로 맞섰다가 결국 축출, 처형당했다. 러시아가 전통적으로 영향권이라고 생각하던 영역의 독자 행보에 대해 무력을 정권교체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헝가리 혁명과 우크라이나 전쟁은 많이 닮아 있다.
헝가리 혁명은 왜 일어났을까? 1956년은 소련의 흐루쇼프가 연초 스탈린 격하운동을 시작한 해이다. 헝가리 혁명 역시 우연한 봉기가 아닌,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에서 일어난 스탈린 격하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나 흐루쇼프는 스탈린 격하운동이 반소련 운동으로 이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10월에 일어난 헝가리 혁명은 소련군에 의해 진압당했다.
헝가리 혁명 대목에서 주목을 덜 받은 부분은, 너지 수상 역시 근본은 공산주의자였다는 점이다. 오히려 초기 국면에서 소련은 헝가리 정권이 불안해지자, 기존의 ‘스탈린의 충실한 제자’를 자임하던 라코시의 철권 통치가 헝가리 내정을 악화시킨다고 판단하여 자신들이 신뢰하는 온건파인 너지를 등장시켰던 것이다. 그렇게 너지가 정부 수반으로 등극한 것이 10월 25일이다. 그러나 너지는 소련의 기대와 달리, ‘인민민주주의’, 이를테면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프라하, 1968)’의 프로토에서 멈추지 않았다.
이 대목에 있어서 헝가리는 비로소 지금의 우크라이나와 비교할 만한 대목이 생긴다. 우크라이나에게 나토 가입이 있었다면, 헝가리의 결정적인 국면은 너지의 바르샤바 조약기구 탈퇴와 헝가리 중립화 선언이었다. 바로 전 해인 1955년 번갯불에 콩 볶듯 창설된 바르샤바 조약기구였지만, 흐루쇼프는 너지의 탈퇴를 소련에 대한 전면 도전으로 생각하였다.
결국 11월 4일, 소련군은 재투입 되었다. 너지의 집권 후 불과 열흘 만이었다.
2.
너지의 각료들도 모두 동의하진 않았던 것 같다. 그 가운데 가장 상세한 기록을 남긴 것이 마르크스주의 철학자로 명성이 높은 루카치 죄르지(1885~1971)이다.
루카치 죄르지는 철학자이자 투철한 공산주의자였지만, 인민민주주의를 통한 공산주의의 발전을 지지했고, 너지가 향후의 ‘프로그램’이 없는 인물이라고 내심 평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공산주의의 틀을 지키리라 믿었기에 내각에 입각했다.
루카치는 너지의 결정에 반대하여 문화부 장관에서 사퇴했는데, 이것이 루카치가 숙청을 당적 박탈 수준으로 그치게 하는 원인이 된다. 루카치는 바르샤바 조약기구에서 탈퇴하지 않아야만 서구와 소련의 간섭을 모두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가입하지 않아야 했다는 시각으로 빗대면 쉽게 이해가 갈 수도 있겠다).
부다페스트 함락이 임박하자, 너지와 루카치는 함께 유고슬라비아 대사관으로 피신한다.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 사이에서 제3세계를 지향하던 유고 공화국의 지도자 티토였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결국 소련군에 체포되어 루마니아로 모두 끌려가게 된다. 루카치는 다음 해 부다페스트로 돌아왔지만, 너지는 1958년 비밀리에 처형당한다.
말년의 루카치는 인터뷰어인 외르시의 말대로 ‘노회’[3]했다. 그는 귀국 직후 당에 ‘지금부터 나 자신을 당원으로 여기겠다’라고 선언했으나, 스스로의 표현으로 ‘목에 걸린 가시’와 같은 존재였기에 당은 별도의 반박 없이 그를 명부에서 삭제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루카치는 10년이 지난 1967년에 복권되었다. (흐루쇼프는 1964년 실각했다). 그다음 해 일어난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의 봄’은 68년도 격변의 절정이었다. 루카치의 노회함은 극에 달한다. 그는 개인적으로는 프라하의 봄을 지지하고 프라하에 개입하는 당의 노선에 반대를 표시했지만, 외신들에게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오스트리아 빈의 철학자 대회에는 고의적으로 참석하지 않았다.
루카치의 이러한 태도에는 역사적 경험(나쁘게 말해 민족감정)도 있었다. 1918년 체코슬로바키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게서 독립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국부 토마시 마사리크는 1919년 헝가리 공산혁명[4]에 개입하였던 것이다. 루카치는 ’민주화된 체코슬로바키아가 다시 헝가리의 인민공화국을 공격할 수 있다면, 그것은 나쁜 민주주의’라고 평가했다.
3.
12년의 차이를 두고 일어난 헝가리 혁명과 프라하의 봄에는 결정적인 차이점도 있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바르샤바 조약기구에서 탈퇴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쩌면 헝가리의 교훈을 얻었던 것일까?) 그럼에도 소련군은 프라하를 침공하였다.
제자인 외르시(1931~2005)의 질문이 핵심을 찌르는 것 같다.[5] 프라하의 봄의 결과를 생각해본다면, 헝가리 역시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잔류했더라도 소련의 침공을 피할 수 없었던 것 아닌가. 프라하의 봄 때문에 기존 입장이 바뀐 것이 있느냐고.
그러나 ‘여우’ 루카치는 당시엔 어차피 체코가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탈퇴하는 것은 불가능했다고 술회하며 자신은 프라하의 봄에 대해 ‘동반자’적 입장[6]에 있었다고 말한다. 그 직후 상술한 마사리크의 ‘나쁜 민주주의’에 대해서 설명하는데, 새삼 그의 노회함을 느낄 수 있었다.
짧은 시간 글을 훑으면서도 무수하게 거론되는 학자들의 이름에서 헝가리의 깊은 지적 풍토와, 소련의 정치적 격변이 헝가리에 그대로 영향을 주는 모습에 큰 인상을 받았다. 예컨대 헝가리가 중근세 조선 왕조라면, 소련은 중국이고 공산주의는 유교에 대응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루카치는 새로운 혁명을 목도하고서도 자신의 공산주의를 포기하지 않았다. 인민민주주의가 이끄는 사회주의를 희망하고, 스탈린주의의 전술 집착을 거부했지만, 공산주의가 (사회)민주주의로 ‘희석’되는 것을 더 두려워했다.
필자는 한국에서 알려진 사상가, 문학 비평가로서의 루카치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순전히 헝가리 혁명에 대한 가장 접하기 쉬운 관찰자로서 역사적으로 찾아본 것이고, 그의 사상에 대해서는 이전에나 앞으로나 호기심 이상을 가지기 어려울 것 같다. 더 접하게 되더라도, 그의 삶에 기반해서 그의 사상을 해석하게 될 것 같다. 다만 오늘 얻은 인상은, 지식인이 살아남는 어떤 하나의 방법과 그 삶의 무늬였다.
루카치는 허다한 숙청을 목격했다. 철저한 스탈린주의자였던 러이크 라슬로가 ‘티토주의자’라는 빌미로 처형되는 것을 보았고, 자신의 수상이었던 너지 역시 처형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에게 허락된 자유는 역시 지적 세계였을 것이다. 오늘날 헝가리가 극우의 나라로 변신한 건, 어쩌면 이런 시대의 먼 반작용은 아닐까 하는 허튼 생각을 해보게 된다.
4.
글을 마무리하면서 현실의 우크라이나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오늘 헝가리 혁명을 훑어보면서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가입하려고 해서 러시아가 침공한 것인가라는 판단에 상당히 회의적이 되었다. 물론 소련과 러시아를 동일시할 수 없고, 그때의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와 지금의 우크라이나를 동일시할 수는 없겠지만.
아쉬운 것은 너지에 대해서 좀 더 다른 시각의 증언이 없나 하는 점이다. 루카치의 입장이 비교적 이북으로 구하기 쉽다보니 그것만 읽었는데, 루카치가 묘사하는 ‘계획없는’ 너지만으로는 그를 설명하기 부족해 보인다. 헝가리 혁명에 대해 더 공부하고 싶어지는 인터뷰였다.
끝으로, ‘프라하의 봄’의 슬로건인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에 대한 루카치의 평가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우리는 12년의 차이를 두고 벌어진 두 사건을 비슷하다고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헝가리 혁명 당시, 너지나 루카치는 인민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정책을 추진하였다. 게다가, 혁명의 실패를 겪고 난 루카치는 프라하의 슬로건에 회의적이 되었다. 유독 흥미로운 질문이라서 그대로 옮긴다.
외르시: 어쩌면 완전히 비변증법적이고 비역사적일 수도 있는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루카치 동지, 현재의 시각에서 보실 때 당신은 국외 정치적 요소들이 그렇게 심각하지 않았더라면 완전히 내적인 힘으로 인민민주주의가 발전하여 사회주의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루카치: 예.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물론 소련에 스탈린주의가 없었을 경우에만 말입니다. 스탈린주의적인 방법들로는 그런 발전은 생각도 할 수 없었을 겁니다. 미미한 뉘앙스에서조차도 공식노선에서 벗어날 수 없었으니까요.”
[1] 헝가리 혁명에 대해서 간략하게 요약한 글로는 이 링크를 참고하면 좋다. (헝가리 혁명 60년 기념 특별사진전 소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2016년)
[2] 헝가리는 동양과 성명순서가 같다. 즉, 너지가 성이고 임레가 이름이다. 한국에서도 너지 수상은 오랫동안 서구식 성명 순서로 도치된 ‘임레 너지’로 알려졌었다.
[3] 외르시는 회고에서 스승에게 “노회(listig)”나 “늙은 여우”라고 묘사하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역자는 이것이 한국 정서와 거리가 있을 수 있다고, 애써 변호하는 긴 각주를 달아놓았다. 그러나 필자로서는 오히려 본문 인터뷰를 읽으면서 들었던 심증을 이 단어를 통해 확신하게 되었다. 그야말로 스승에 대한 애증을 담은 단어가 아니었을까.
[4] 헝가리 공산혁명은 비단 체코만이 아니라 외세의 적극 개입으로 1년도 안 되어 실패한다.
[5] 외르시 역시 20대의 나이에 헝가리 혁명에 참여하였고, 1960년에야 석방되었다. 루카치는 수감 중인 외르시를 한동안 지원했지만, 그 지원이 당에게 시빗거리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을 받은 뒤 지원을 끊었다. 루카치다운 태도였다고 할 수 있다.
[6] 이는 동지가 아니란 심정적인 연민이란 뜻의 ‘동반자’이다. 비사회주의자이지만 혁명에 우호적인 문학가들을 ‘동반자 문학가’라고 하는 식이다. 즉, 루카치의 애매모호한 태도를 대변하는 단어인 것이다.
※ 참고 도서
- 『삶으로서의 사유 : 루카치의 자전적 기록들 – 루카치 다시 읽기 02』 (김경식/오길영 편역, 산지기, 201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