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와 관련된 약간의 공부, 약간의 생각만 해도 이미 알고 있는 너무나 뻔한 이야기지만 장애는 사회적인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불편한 것을 우리는 ‘장애’라 하고, 이를 가진 이를 ‘장애인’이라 한다. 예컨대 안경이 발명되지 않았다면, 혹은 안경 맞추는 데 1억 원쯤 든다면, 나를 비롯하여 이 글을 보고 있는 사람 중 상당수는 시각장애인의 영역에 들어갈 것이다.
지금 심하지 않은 평발을 장애라 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짚신과 미투리의 시대라면, 교통수단이 없어 도보 이동이 필수인 시대라면 평발은 대단한 장애이다. 자식을 생산해야만 가족이 먹고살 수 있는 집약적 농업 사회라면 불임은 엔간한 신체의 장애보다 더 큰 장애이고, 수면제가 없는 시절 불면증 환자들은 모두 장애인이며, 건물 천장 높이가 2미터가 되지 않는다면 키 185cm 이상은 모두 장애인이고, 의자 폭에 따라 몸무게 70kg 이상은 모두 장애인이 될 수 있다.
사회적 조건에 따라 장애가 될 수 있는 것은 너무나 많아서, 우리가 지금 우리 모습 그대로여도 사회적 조건의 변화에 따라 우리는 얼마든지 장애인일 수 있다.
흔히 말하는 ‘발전’이란 장애를 느끼는 경우의 수를 줄이는 것이다. 우리가 찬양하는 모든 발전이 이 방향과 연관이 있다. 그리고 흔히 말하는 ‘선진국’이란 인간이 가진 어떤 조건이 장애가 되는 정도가 적은, 덜 불편한 사회를 말한다고 생각해 왔다.
지하철역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것은 그닥 오래된 일이 아니다. 그 증거로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지하철역에는 ‘장애인을 위한 엘리베이터 설치 공사’를 하고 있다.
엘리베이터가 설치됨으로써 지하철을 이용할 수 있게 된 이들은 휠체어 사용자만이 아니다. 발목 깁스를 한 사람, 무릎이 아파 계단을 오래 걷기 힘든 사람, 노인과 어린이 등은 그 사실만으로 지하철 이용에 ‘장애’를 겪은 장애인이었고, 엘리베이터로 인해 비로소 (그들이 말하는) ‘정상인’이 될 수 있었다.
원문: 박기태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