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동안 50개국을 여행하고 돌아온 내게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은 딱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어디가 가장 좋았어요?” 그리고 “여행 후 무엇이 달라졌나요?”라는 질문이다.
두 번째 질문을 듣고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정말 달라졌을까? 질문 안에는 마치 여행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고 변화시켜줄 만능열쇠 같은 영험함이 들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나의 대답은 늘 같다. “사람은 쉽게 안 변하더라고요!” 기대했던 답이 아니었는지 표정에서 아쉬움이 묻어났지만 적어도 나는 180도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지 않다. 여행이 인생에 있어서 큰 변곡점은 맞지만, 여행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지도, 변화시키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내 멋대로 30년 인생을 살아 놓고 하나의 계기로 사람이 바뀐다면 정말 좋겠지만 사람도 삶도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물론 여행을 통해 많은 경험과 성찰로 변화된 자신을 경험하고 삶을 살아가시는 분도 정말 있다. 하지만 그 변화는 내 안에서 스스로 아주 조금씩 변화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삶이 교향곡이라면 여행은 마치 재즈처럼 약속된 길로 가지 않는다. 그래서 현실이라면 마주치지 않을 다양한 상황에 놓인 나 자신을 발견한다. 근사하고 멋진 나만 존재할 것 같지만 실상은 찌질하고 세상 못난 나 자신을 보게 된다.
남미에서 어느 여행자가 공원 의자에서 잠깐 잠이 들었고 그사이 가방을 도난당했다. 그 가방 속에는 여행자에게 중요한 노트북이 들어있었다. 생각만 해도 아찔한 순간인데 그 여행자는 다시 숙소로 가서 충전기를 챙겼다. 그리고 가방을 잃어버렸던 그 의자에 노트북 충전기를 놓고 갔다고 했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했냐고 물어봤다. “나에게는 필요 없지만, 그 노트북 가져간 사람에게는 필요하니까”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남미 여행에서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 이야기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나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아마도 울고불고 공원이 떠나가도록 욕을 했을 것이다. 충전기는커녕 그 도시를 증오하며 오래도록 미워했을 것이다.
나에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브라질에서 강도를 만나 귀중품을 도난당하고 그 사실이 너무 억울해서 구글 번역기를 이용해 알지도 못하는 브라질어를 그려서 도난당한 그 장소에 대자보를 붙였다. 그 내용이 잘 먹고 잘 살아라 하는 이야기는 당연히 아니었다. 내게 있어 가장 찌질하고 쿨하지 못한 모습이고 장면이었다.
이렇게 여행은 예상하지 못하는 일 투성이며, 몰랐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뿐이지 지금의 고민을 해결해 주거나 답을 정해주지는 않는다. 여행하기 전에 하던 고민을 지금도 하고 있고 앞으로도 할 것 같다.
여행하기 전에는 정말 몰랐다. 여행이 끝나면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 같은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다. 그래서 여행 후 삶을 간과했다. 그렇게 나는 여행 후 현실에 떨어졌고 현실에 발을 붙이고 매일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며 서울에 이렇게 집이 많은데 ‘왜 내 집은 없나?’ 하는 의문을 품은 채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여행 후 달라진 것이 있다면? 힘들거나 지칠 때마다 여행을 생각한다. 현실의 무거움은 추억 속을 거닐다 보면 가벼워졌다. 나에게도 하루하루가 일요일뿐인 그런 시간이 있었지 하며, 현실의 무게보다 가벼운 배낭을 멘 것처럼 현실을 여행한다.
그러다 생각했다. 그 많던 세계 일주 여행자들은 모두 어떻게 지낼까? 나와 같은 현실을 마주하고 있을까? 아니면 삽질은 나만 하는 걸까?
그래서 책을 쓰기로 했다. 여행이 아닌 오늘을 사는 여행자를 통해 화려하고 부러움 가득한 사진 속 한 장면이 아닌 앨범 속 사진을 추억하며 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나의 이야기를 써야겠다.
어쩌면 너무 당연하고 알고 싶지 않은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그랬던 것처럼 여행 후 모든 것이 다 잘될 거라는 막연한 생각이 아닌, 나의 이 삽질이 누군가에게는 이정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부터 출발했다.
그렇게 책은 여행의 시작이 아닌 2년여의 모든 여행이 끝나는 인천공항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여행이 아닌 여행 후의 오늘을 살아가는 여행자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렇게 글이 끝난다면 해피엔딩이 되었을 텐데 하필 코로나 시국에 책이 출간되었다. 아무도 여행이라는 말을 쉽게 꺼낼 수도 없고, 여행의 설렘이 사라진 시절에 여행 에세이는 관심 밖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긴 터널을 함께 지나는 중에도 더 멋진 여행이 우리 삶 속에 있다고 믿는다. 잠시 멈춘 ‘여행’에게 여행이 나를 크게 변화시키지는 못했지만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울림이었다고 말해주고 싶다. 다시 돌아올 멋진 여행을 기다리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