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는 세상에 실망했다. 바야흐로 X-세대가 난립하던 시기였다. 고등학생이던 그는 당당히 공교육에 반항했다. 290명 중 280등을 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세상에 공부가 왜 필요한지 알 수 없었으니까.
전공은 국어국문학과였다. 이름과 다르게 문학이 아니라 구강 구조부터 가르치는 곳이었다. 경악한 남자는 복수전공으로 서양철학을 골랐다. 하지만 거기에도 온전히 자신을 바치지는 못했다. 대학 사회 바깥을 맴돌며 도서관에 앉아 하루 한 권씩 책을 읽었다. 책이 좋아서 읽은 건 아니었고, 불편한 자신의 감정을 독서로라도 해소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그의 반항심은 군대에서 정점을 찍었다. 그는 관심 장교가 되어 굴욕적인 군 생활을 마쳤다.
그렇게, 세상의 아웃사이더가 되었다. 어느 한 가지 직업에 정착하지도 못했다. 화장품과 옷을 팔기도 했고, 학원에서 강사 일을 하기도 했고, 야심 차게 창업도 했지만 곧 망했다. 그는 자신의 골방에 틀어박혀 주식만 사고팔았다. 하루에 0.5%의 수익만 얻으면 미련 없이 컴퓨터를 껐다. 짧고 빠른 단기매매의 세계. 모순으로 가득 찬 그의 세계 인식은 그렇게 끝나는 듯싶었다. 그날, 그 사고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죽음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친구들과 여행으로 떠났던 제주도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 같이 탔던 친구 2명이 죽었고, 1명은 장애 판정을 받았다. 남자는 곧 상처에서 벗어났지만, 그 후로 지옥같은 환영에 시달렸다. 그때 생각했다.
내가 사는 이 세상은 어떤 곳인가?
언제나 불안했던 세상. 그 세상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는 그때부터 자신이 외면해 왔던 세상을 공부하기로 결심한다. 세상이란 어떤 것인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는 자신의 생각을 맹렬히 써나갔다. 글이 완성될 즈음, 그는 서서히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책이 바로 2014년 세상을 뒤흔든 베스트셀러,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이하 『지대넓얕』)이다.
책은 대성공했으나, 그를 사로잡던 갈증을 해소하지는 못했다
『지대넓얕』의 대성공은 모두가 알 것이다. 애초에 ‘지대넓얕’은 팟캐스트 시장에 등장할 때부터 핫했다. 팟빵에 입성하자마자 총 6,000개 채널 가운데 바로 800위를 했다. 7월에는 100위권으로 올라갔고, 12월에는 20위권으로 진입한다. 그 이후로는 장기간 팟캐스트 순위 1위를 기록하며, 팟빵의 대표 팟캐스트가 되었다.
책도 센세이셔널했다. 인문학은 무겁고 딱딱하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깔끔하면서도 신선하게 지식을 전달했다. 자신의 본명에서 따온 ‘채’와 지식을 파는 상점의 주인이라는 뜻인 ‘사장’을 결합해 만든 닉네임 ‘채사장’처럼, 그의 글은 통통 튀었다.
밀리언셀러 행진도 그치지 않았다. 현실의 인문학을 다룬 『시민의 교양』과 성장의 인문학을 다룬 『열한 계단』, 관계의 인문학을 다룬 『우리는 언젠가 만난다』까지 대히트를 기록했다. 그는 이제 보유한 베스트셀러만 6권인 최고 인기 작가가 되었다.
그러나 시대는 변한다. 팟캐스트의 시대는 너무나 빨리 저물었다. 팟캐스트 채널 ‘지대넓얕’은 2017년 마지막으로 업로드한 후 멈추었다. 다음 편은 기약이 없다. 채사장은 자신의 유튜브 채널 ‘채사장 유니버스’를 오픈했다.
팟캐스트와 책을 종횡무진하며 채사장은 수많은 공부를 했다. 철학과 종교, 서양미술과 현대물리학, 사회와 경제. 『지대넓얕』이 건드린 분야는 너무나 많다. 그러나 단 한 분야, 건드리지 못했던 미지의 영역이 있었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무엇인지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는 장르로 불리기도 한다. 그 장르는 바로 문학이다.
채사장은 2021년, 새로운 도전을 하기로 한다. 바로 문학을 통해서 인간의 삶과 인생을 보여주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소마』, 채사장이 인간에 대해 내린 하나의 답
그간 채사장의 행보를 보면 『까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같은 소설을 쓸 것 같다. 그런데 그의 신작 『소마』는 뜻밖에도 판타지 소설이다. 그것도 정통 판타지 소설이다.
판타지는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핫한 장르다. 어쩌다 이세계에 떨어진 주인공이 온갖 고난을 겪다가 엄청난 능력을 통해 세상을 접수하는 스토리가 주를 이룬다. 흔하지만 재미있는 판타지 소설이다. 채사장의 『소마』도 비슷한 공식을 따른다. 의외다. 채사장은 왜 이런 소설을 썼을까?
그러나 이러한 편견은, 책의 첫 페이지를 펴는 순간 깨지게 된다.
아버지는 밤새 신을 태웠다.
- 8쪽
그의 판타지는 같지만, 다르다. 주인공 소마는 작은 부족 마을에서 태어난 어린아이로, ‘젊어서 세상을 호령하고 늙어서 깨달음에 이르리라’는 신탁을 받은 바 있다. 아버지가 보낸 심부름을 해결하러 나갔다가 돌아온 소마는, 불타버린 마을을 보게 된다. 다 타버린 재와 시체 사이에서, 소마의 거친 인생역정이 시작된다.
갈비뼈가 보일 정도로 마른 등에는 순간 선명한 핏자국이 새겨졌다. 공기를 찢어내는 소리와 함께 뜨겁고 날카로운 통증이 등으로 파고들 때마다 그녀는 비명 섞인 울음을 터뜨리며 자신의 죄를 생각했다. […] 벽에 걸린 십자가 고난의 성화와 교부 오리게네스의 초상이 살아 있는 듯 흔들렸다.
- 58쪽
『소마』에서 도드라지는 부분은 다양한 역사적 지식이 어우러지는 세계관이다. 소마의 고향 마을은 학살로 인해 사라져 버린 네이티브 아메리칸들의 마을을 떠올리게 하고, 소마가 몸을 맡기게 되는 입양 가정은 엄숙한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진 중세를 떠올리게 한다. 두 개의 세계는 독특한 색깔로 어우러진다.
주인공 소마는 입양가정에서 마치 『폭풍의 언덕』의 히스클리프처럼 차별과 고난으로 얼룩진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된다. 종교의 이름 아래 인권이 짓밟히는 잔혹한 광경을 보며, 그곳에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녹아들 수 없는 차별을 깨달은 그는, 결국 그 세계를 떠나게 된다.
“당신께서 부활한 아틸라이십니까?”
아틸라가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잿빛 수염과 사방으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은 그를 마치 먹잇감을 발아래 둔 맹수처럼 보이게 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호수처럼 차분하고 고요했기에, 나이 든 포로는 무언가 어긋나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가 답을 주었다.
“가서 소마가 왔다고 전하라.”
4부의 시작은 등골이 섬찟할 정도로 잔인한 장면으로 시작한다. 군대는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격파되고, 부대장은 이민족의 수장에게 목숨을 빼앗긴다. 그 수장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 독자는 가벼운 반전을 보게 된다. 그는 3부에서 죽기 직전의 몰골로 초라하게 쫓겨난 소마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소마는 자신의 운명에게 승리를 거둔 것처럼 느껴진다. 보통의 판타지 소설이었다면 이 지점에서 이야기가 멈췄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채사장이 그리는 진정한 영웅의 서사는 그때부터 시작된다. 인생의 최정점에 올라선 후, 그때부터 인간이 겪는 하락의 드라마와 깨달음의 마무리에 다다르는 것이다.
이야기 속에서 지식을 읽다
이 스토리를 읽다 보면, 채사장이 다른 장르도 아닌 판타지를 선택한 이유를 알 수 있다. 판타지라는 형식은 이런 장점이 있다.
- 다양한 역사적 지식을 부담 없이 이야기로 가공할 수 있다.
- 인간의 장대한 서사시를 자유롭게 쓸 수 있다.
『소마』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작가인 채사장이 가진 다양한 지식이다. 그러나 채사장은 지식을 뽐내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의 지식은 자연스럽게 소설 속에 녹아든다. 이는 『소마』의 중요한 포인트다.
원래 소설가가 아니기 때문에 문장도 깔끔하다. 스토리는 빠르고 속도감 넘친다. 빠르게 기승전결을 밟으며 달려온 속도는 마지막 한 문장까지 긴장감을 놓치지 않는다. 마무리에서 몇십 페이지에 걸쳐서 펼쳐내는 내면세계 탐구는 이 소설의 백미다. 마지막 장을 덮을 때, 독자는 생각하게 될 것이다.
소마의 삶은 끝났다. 그렇다면 내 삶은 어떻게 될 것인가?
삶을 담아내기 위해 철학책이 아니라 픽션을 선택한 이유
삶이란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채사장은 늘 언제나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좇았다. 방황을 거듭하던 학창 시절에도 그랬고, 말 그대로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왔던 사고 당시에도 그랬고,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어 종횡무진 바쁜 나날을 보낼 때도 그랬다. 그 유명한 『지대넓얕』 시리즈마저도 채사장이 삶을 탐구하기 위해 했던 탐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소마』는 그 수많은 연구 끝에 채사장이 내린 삶에 대한 답이다.
언제나 알고자 했던 것은 인간이었다. 세상의 모든 나라는 존재는 어디에서 오는가. 무엇을 하고, 어디로 가는가. 인문학을 쓰며 나는 인간을 알게 되었고, 소마의 인생을 따라가며 나는 인간을 사랑하게 되었다.
- ‘저자의 말’ 중
유행을 세련되게 녹여내는 작가가 취향이라면, 이 책은 당신의 책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최근의 지긋지긋한 양산형 판타지 소설에 지친 사람이라면, 한 인간의 삶을 다루는 거대한 영웅 판타지가 읽고 싶다면 추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만약 당신이 대한민국을 풍미하는 인문학 작가 채사장이 내린 삶이라는 답이 궁금하다면, 『소마』는 분명히 당신을 위한 책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