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유행한 ‘사이다 썰’도 해답이 아니었습니다
소처럼 묵묵히 일하는 아버지. 가끔 술 한잔 취해 〈아빠의 청춘〉을 부르는 아버지. 어릴 적에는 그런 모습의 아버지가 평균 직장인의 초상이었다. 몇십 년을 묵묵히 일하면서 가족을 먹여 살리는 게 직장인의 모범적인 모습이었다.
시간이 흘러 밀레니얼 세대가 나타났다. 이들은 저 서글픈 아버지의 초상에 반대했다. 왜 말도 안 되는 대접을 받으면서 꾸역꾸역 일해야 하지? 이들에게 회사를 ‘그만두기만’ 하는 것은 갑갑한 선택지에 가까웠다. 여태까지 자신을 괴롭힌 직장을 향해 ‘사이다 퇴사 썰’을 날리는 게 유행했다. 바야흐로 2010년대 후반에 일어난 일이었다.
2020년, 코로나19가 찾아왔다. 고용시장에 한파가 불기 시작했다. 그때 ‘사이다썰’을 날리던 그 직장인들은 어디로 갔을까. 도비 배경화면을 깔아놓고 퇴사한 동료는 레퍼런스 관리가 엉망이 되면서 업계 재취직이 어려워졌다거나, 컴퓨터를 포맷하고 퇴사한 동료는 회사로부터 소송을 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어쩐지 뒷맛까지 씁쓸해지는 일이었다.
먼치킨이 다 쓸고 다니는 웹소설이 유행하는 시대다. 하지만 현실의 직장에서는 먼치킨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완벽한 ‘고구마’로 가득 찬 것도 아니고, 속 시원한 ‘사이다’만 날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직장인들은 늘 조금씩 눌러 참다가도, 좋게 구슬려 할 일을 한다. 그렇게 버티며 회사를 조금씩 개선해 나간다.
세상은 한 방에 나아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머물러 있지는 않는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지금 우리 세대가 다니는 회사가 아버지 세대의 답답한 회사와 동일한 곳이라고는 할 수 없다. 조금씩이라도 회사 문화를 개선해 갔던 사람들의 흔적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새로운 담론이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일잘러가 되는 법을 알려주는 에세이는, 그냥 살아남고만 싶은 직장인에게는 필요가 없다. 퇴사하고 해외여행 다니는 에세이는, 퇴사할 생각이 없다면 아무 소용도 없다(코로나19라서 해외로 나갈 수도 없고…).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담론은, 이 애매하기 짝이 없는 회사에서 어떻게 살아남느냐는 이야기다. 적당히 비위도 맞추고, 적당히 대들고, 적당히 나의 자아를 실현해 나간다. 우리는 모두 이 회색지대에 서 있다.
길진세 작가의 『더 이상 무리하지 않겠습니다』는 바로 이 회색지대에서 오랫동안 고민해왔던 작가의 회사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다. 작가의 입사 썰은 정말로 신입사원들이 꿈꾸는 ‘사이다 썰’이다.
그러나 꿈 가득한 신입사원은 누구나 그렇듯이 갑갑한 회사 생활에 부딪치고 만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는다. 선배들이 신입사원에게 바라는 예절은 누구보다도 나서서 챙긴다. 그리고 집에 돌아가서는 자신의 자아를 실현하는 글쓰기를 한다. 그 결과물이 바로 이 책이다.
입사는 누구보다도 사이다 넘쳤던 어린 시절
머나먼 옛날, 세상에는 ‘압박면접’이라는 게 있었더랜다. 공격적인 분위기와 무례하다 싶은 질문들로 면접자의 멘탈을 쥐고 흔들며 순발력과 대처력을 보겠다는 개소리면접의 한 방식이었다.
10여 년 전 작가도 유명 통신 기업에서 이 방식의 면접을 봤다. 그리고 이런 질문을 맞이하게 된다.
(겨우) 이 점수 나온 토익 외에 다른 외국어 자격증은 없나?
지방에서 학교 나오면 훨씬 더 특출난 무언가가 있어야 하지 않겠나?
지금이었으면 기업 갑질로 뉴스 나오기 일보 직전이지만, 당시만 해도 이런 질문들이 용인되었다. 최선을 다해 대답하던 작가는, 결국 참지 못하고 질러버리고 만다.
저를 안 뽑아 주셔도 됩니다. 대신 저도 하고 싶은 말을 좀 하고 가도 될까요?
작가는 당시 엄청난 가격대를 자랑하던 얼리어답터 전용 물품 PDA폰을 쓰면서 ‘통신 오타쿠’로서 살고 있던 때였다. 오타쿠보다 그 회사의 물건과 서비스를 잘 아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그 이후에 이어진 말은 다음과 같다.
저는 이 회사의 서비스를 좋아하지만 이 회사는 이런 식으로는 영원히 2등일 것입니다. 이 회사의 유선 인터넷 모뎀 장비에는 큰 문제점이 있습니다. 유선과 무선의 과금 체계도 문제가 있습니다. 특히 WIFI 서비스는 아주 심각합니다.
아쉬운 게 있으면 주눅 드는 게 사람이다. 하지만 곧 떨어질 걸 코앞에 둔 면접자? 무서울 게 없다. 면접장 뒤돌아 나가면 그대로 고객이 되는데 뭐가 무섭단 말인가. 그렇게 비판을 쏟아내자 면접관들의 얼굴이 점점 시뻘게졌고, 결국 면접 자리는 면접자와 면접관이 얼굴 붉혀가며 의견을 내세우는 토론장이 되었다.
그렇게 일말의 기대도 없이 돌아간 작가는, 약 2주 뒤 합격 소식을 듣는다. 심지어 점수가 너무 높아서, 2차 면접은 거의 프리패스 하다시피 통과된 것이었다. 그렇게 그는 우리나라 굴지의 대기업에 입사하게 된다.
… 여기까지는 멋진 사이다 썰이다. 그렇게 한바탕 회사를 뒤집어놓은 용사는, 이제 K-직장인으로서 겪어야 하는 미션… 아니 직장생활을 거치게 된다. K-승진, K-예의범절, K-자아실현이 바로 그것이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해?: K-예의범절, 그랜절
그랜절. 예절 중의 예절, 절 중에서 가장 큰 절이다. 상대방을 극도로 존중할 때 이 절을 한다. 웹툰 〈쌉니다 천리마마트〉에서 등장한 이후로 수많은 작품에서 그 존재감을 과시해 왔다.
K-직장생활은 물구나무만 안 섰다뿐이지 ‘그랜절’의 향연이다. 입사할 때는 시대의 풍운아였는가? 그래도 직장인으로 산다면, 본인의 출세와 입신양명을 위해서 한 번쯤은 시도해 보아도 좋은 ‘그랜절 리스트’를 소개한다. 물론 더 자세한 내용은 책에서 확인 가능하다.
1. 식당에서의 그랜절
- 자리에 앉자마자 수저통과 물통을 자신의 앞으로 가져온다.
- 고기는 핵심 종목이다. 미리 굽는 연습을 해두자. 고기를 잘 굽는 사람이 눈도장을 찍는다.
- 계산서를 찾지 않았는데 갖다주는 것은 무례한 행동이다. 조용히 카운터에 뒤따라가서, 주인이 계산서를 찾는다면 그때 내민다. 안 찾고 계산이 끝난다면, 카운터 어딘가에 살포시 놓아두자.
- 식당에서 나오자마자 큰 소리로 “감사합니다!”라고 외친다. 빠르게 실행하는 사람이 예의 넘친다는 평가를 가져간다. 부끄러울 것 없다. 그랜절은 스피드전이다.
2. 자동차 탈 때의 그랜절
- 가장 전통적인 상석은 조수석 뒷자리다. 타고 내리기 편한 자리이기 때문이다.
- 만약 상석이 기억나지 않는다면, 상사분 오시는 길에 자동차 문을 직접 열어드리자.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어디에 앉으실지 여쭤볼 것.
- 군대에서 운전병을 했던 사람이라면 색다른 ‘그랜절’을 할 수도 있다. 말로 알려주는 것이다. “전방에 과속방지턱이 있습니다.” “신호 때문에 정차합니다”라는 말을 하면서 운전한다. 옆에서 볼 때는 당연히 웃기지만, 그랜절을 추구한다면 남의 웃음 따위는 신경 쓰지 말자. 백 명의 동기가 웃어도 한 명의 상사가 눈여겨본다면 그랜절은 성공한 것이다.
3. 회식 시의 그랜절
- 기본적으로 직원이 아니라 ‘고깃집 알바’라는 마음으로 임하자.
- 가능한 문 쪽으로 착석하자. 잔심부름하기 좋고, 자리도 가끔 비우면서 쉬기 좋고, 술도 덜 마실 수 있다.
- 계산을 챙기자. 술잔이 오고 가다 보면 소주 맥주를 몇 병이나 마셨는지 가게 주인만 알게 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한다. 이때 병을 잘 세면 일 잘한다는 소리를 듣는다.(분명 일이 아니지만, 원래 상사분들은 일보다도 이럴 때의 일머리를 높게 치는 경향이 있다)
- 고위 임원이 참석하신 경우 술을 드셨다면 대리를 부르거나 기사에게 전달해야 한다. 이것까지 능숙하게 챙긴다? 그랜절의 그랜드마스터가 된 것을 축하한다.
사실 이 그랜절 리스트는 농담에 가깝다. “이렇게까지 해서 먹고살아야 해?”라는 푸념을 승화시킨 농담이다. 당연히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단 하나 기억해야 할 진리는 있다. 당신이 회사를 자신의 싸움터로 정했다면, 든든한 우군을 얻는 데는 따뜻한 말 한마디, 배려 한 번이 더 효과적이라는 사실이다. 적어도 그랜절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자잘한 노력으로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아무리 노력해도 운수가 따르지 않을 수 있다: K-승진
승진 누락이 인생의 실패는 아니다. 이 책의 작가는 남들보다 빠르게 승진하고 난 뒤, 두 번이나 연거푸 승진 실패를 겪는다. 기나긴 방황 끝에 깨달은 진리는, ‘승진하고 싶다는 욕망 자체가 주입식 교육 때문에 생긴 안 좋은 버릇’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의 직장인들은 승진을 시험과 동일시한다. 그러나 시험은 허들을 넘어 원하는 목표를 이루는 과정이다. 반면, 승진은 회사가 이 사람을 더 중히 쓰겠다 결정하는 것에 가깝다. 주어가 다르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일했다 한들, 내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조직이 날 알아보는 눈이 없다면 조직이 손해를 보는 것이다. 그러니 당당하라. 훨씬 더 운에 가까운 영역인 것이다.
세상에는 많은 승진이 있다. 모르는 사이에 얻어걸리는 승진, 용을 써도 안 되는 승진, 정치를 잘해서 승진, 그랜절을 기가 막히게 잘해서 얻는 승진 등등 수많은 경우의 수가 있다. 우리가 이 모든 경우의 수를 따져가며 승진을 노릴 수는 없다. 우리가 노릴 수 있는 건 단 하나, 정직하게 준비한 성과와 실력을 바탕으로 올라가는 승진뿐이다.
성과와 실력은 결코 거짓말하지 않는다. 정작 진짜 문제는, 실력을 준비하지 못했을 때다. 승진을 못 하는 것에 우울해하지 말고, 우리가 낸 성과만큼 인정받는 것을 고민하자.
회사 밖에서의 나는 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K-자아실현
회사는 내가 아니다. 회사에서 시간을 돈으로 바꾸기 위해 회사에 다니는 것이다. 그렇게 늙어간다. 지극히 평범한 삶이다.
문제는 지금의 시대에서 정보가 너무 넘친다는 사실이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비교당하며 살면서 불행한 삶을 이어간다. 여기에서 벗어날 방법은 하나뿐이다. 회사 밖에서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자기만의 콘텐츠’를 꾸리는 것이다.
남들과는 다른 자신만의 콘텐츠를 가꾸자. 그것이 그림이든, 글이든, 사진이든 상관없다. 자신만의 오리지널리티를 담은 콘텐츠가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멘탈 관리에 큰 힘이 된다.
이 작가는 「분식집 사장님은 한때 인사담당자였습니다」라는 글을 통해 회사 내에서의 지위와 권력이 얼마나 덧없는지 고발한 적 있다. 회사는 우리에게 크나큰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회사에 대한 평가가 자신의 삶에 대한 평가라고 착각하게 되고, 회사의 고민이 자신의 고민인 양 착각하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회사는 내가 아니다. 회사라는 계급장을 떼는 순간, 나는 독립적인 개인으로 존재하는 사람이다. 그것을 빨리 깨닫는 사람이, 회사에서의 자신과 진정한 자신을 잘 구분할 수 있게 된다.
회사 생활은 회사와 나 사이의 끝없는 줄다리기
회사는 원수도 아니다. 그렇다고 친구도 아니다. 회사에서 도망 나오는 게 그렇게 축하받을 일도 아니지만, 거기에서 아득바득 이를 꽉 깨물고 끝의 끝까지 버텨야 성공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회사원이면서도 건강한 한 개인으로서 살아남아야 한다. 너무 힘들어하지 말고, 묵묵히 맡은 바를 해내며, 개인의 자아실현을 조금씩 해나가면서. 그렇게 우리는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고, 더 나은 회사를 만들 수 있다. 그것이 MZ세대라고 퉁쳐지는 넓은 분포의 직장인을 모두 만족시킬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만약 그래도 가끔 길을 잃는다면, 이 에세이 『더 이상 무리하지 않겠습니다』를 펼쳐보자. 작가가 직접 몸으로 부딪치고 버텨가며 미리 겪었던 일들이 쓰여 있으니, 그의 체험을 바탕으로 옳은 답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