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점의 자리 잡기
노점상의 3대 거짓말. 어떤 노점상이 오늘 장사 쉬고 놀았다고 하면 그건 80% 거짓말이다. 어떤 노점상이 노점해서 옛날에 돈 엄청 벌었다고 하면 그건 90% 거짓말이다. 어떤 노점상이 우리 지역에 노점 할 자리가 있으니 와서 장사하면 된다고 하면 그건 100% 거짓말이다.
노점을 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노점의 위치이다. 두 번째도 세 번째도 중요한 건 위치이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거기가 거기 같은 장소이지만 노점은 1미터만 달라지면 장사의 판세가 달라진다고들 한다.
나는 시흥사거리에서 2미터 간격안의 세 곳에서 장사를 했다. 사거리 횡단보도와 횡단보도 사이의 각진 모퉁이에 차도를 등대고 인도 쪽을 바라보며 하는 곳. 단속이 나올 때 피하는 공사장 입구 쪽은 차도와 한쪽 횡단보도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곳. 마지막으로는 공사장 입구를 살짝 피해 공사장 펜스에 등을 대고 차도 쪽을 바라보고 하는 곳. 정말 비슷비슷한 것 같지만 조금씩 분위기가 다르다.
첫 번째 장소는 시장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많이 닿는 곳이라 시장가는 사람이 잉어빵을 사고, 두 번째 장소는 횡당보도 정면이라 횡단보도를 건너오는 사람들이 손님이고, 세 번째 장소는 시장에서 나와서 옆쪽 횡단보도를 이용하려는 사람이 제일 많다. 그만큼 노점의 자리는 노점에게 있어서는 90%를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점에게 위치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있다면 품목이다. 어떤 장사를 할 수 있는 곳이냐는 것이다. 주변에 학교가 있는지, 역 주변인지, 주택가인지, 회사 밀집지역인지 등에 따라 품목이 달라질 것 같지만 사실 현장에서 더 중요한 것은 이미 있는 노점상과 주변 상가와 겹치지 않는 품목을 찾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다.
거리에 곳곳이 노점 없이 비어있는 것 같아도 이미 장사가 될 만한 곳은 이미 노점이 다 자리 잡고 있다고 보면 된다. 장사가 잘 될 곳임에도 노점이 없다면, 그곳은 노점이 있다가 노점절대금지구역으로 단속을 받은 곳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여기에 신규 노점은 무조건 단속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누군가 우리 지역에서 노점을 하라는 것은 지역에서 함께 싸워준다는 의미와 같다. 어느 노점상이 좋아라 하겠는가. 신규 노점이면 단속도 심할 테니 같이 싸워줘야 하고, 그 장소가 노점상이 모여 있는 곳이라면 원래 있던 노점상에게도 여파가 있을 테고, 품목 여하에 따라 경쟁도 될 수 있는데 말이다.
나는 처음에 시작할 때 알바를 할 생각이었다. 당시 노점노동연대 사무실에서 노점 알바 없냐고 묻다가 그냥 본인이 노점을 하라는 이야기가 오갔다. 그러나 정작 아무도 여기서 하면 된다는 얘기가 없자, 금천지역장님이 금천에서 해보려냐고 해서 들어온 곳이 시흥사거리이다. 첫 날부터 단속이 심했지만 내심 한 달이면 끝나겠지 싶었다.
금천은 지자체에서 조금 독특하게 노점관리를 하고 있었다. 2009년엔가 일정기간 노점을 한 노점상들이 마차를 가판대 형태의 박스로 바꾸고 구청이 준허가 형태로 전기 공급을 허가한 것이다. 금천이 새로 맞춘 박스의 특징은 지붕이 내려온다는 것인데, 장사할 때는 지붕이 올라가서 박스 안으로 사람이 들어가서 장사를 하고 장사를 안 할 때는 엘리베이터처럼 지붕을 내려서 상가의 간판이 보이도록 만들었다.
내 생각은 이랬다. “단속이 좀 있더라도 버티면 가을쯤 나도 준허가 마차로 바꿀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안정만 되면 주변에 활동가들이랑 공동장사를 하는 노점으로 만들어야지!”
뭐 생각은 기특했다만, 단속은 계속되었다. 위안 아닌 위안이라면, 이렇게 단속이 심하니 장사가 안 되는 곳은 아니야, 단속만 끝나면 떡볶이를 해볼까 닭꼬치를 해볼까, 하는 궁리 정도였다.
예전에 노숙인 단체에서 활동하던 사람이 노점을 시작했었다. 처음에 자리를 잡기위해 추운 겨울이었는데도 며칠 동안 마차와 몸을 쇠사슬로 연결하고 노숙을 했다. 그때 그 사람의 시커먼 얼굴과 부리부리한 눈이 새파랗게 보이는 게 추워서인 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하니 마차를 지키겠다는 결기였는지도 모른다. 내가 노점을 하고 단속을 받아서야 그 때 생각이 다시 났다. 그랬었지. 그랬었구나.
구로역과 애경백화점 통로에서 핸드폰케이스를 하는 구로지역장님은 매일 오전에 내가 장사하는 곳으로 나오셔서 본인이 장사하러 가야 할 시간까지 함께 있어주신다.
그러면서 듣게 되는 구로지역장님의 노점자리 확보사는 그야말로 처절하다. 육교처럼 되어 있는 통로이기 때문에 한쪽 벽에 좁고 긴 판넬을 대고 장사를 하는데, 그 자리를 지키느라 1년 반을 그 좁은 공간에서 잤다고 했다. 1년 반이었단다. 아무도 도와주는 이 없이 혼자 싸운 시간들이다. 547일 13,000여 시간이다.
노점상들은 그렇게 버티고 싸워서 자리를 잡고 노점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과거가 나의 현재였다.
단속 피하기
처음에 단속이 나오면 사유지로 도망갔다가 단속반이 돌아가면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잽싸게 피하면 싸움 없이 넘어갈 수 있는 방법이지만, 마차의 고정을 풀고 옮기고 다시 고정하는데 시간과 힘이 너무 많이 들었다.
그러던 중 지역장님이 새 마차 하나를 구해주셨다. 악세사리를 팔던 마차인데 모양도 예쁘고 색깔도 예쁘다. 재료상에서 빌려준 마차를 반납하고 처음으로 내 마차가 생긴 것이다. (이게 뭐라고 가슴이 두근거리기까지 한다.)
그런데 마차를 바꾸고 나서 발생한 문제는 새 마차가 디자인을 고려해서인지 잘 굴러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전의 마차보다 훨씬 무겁기도 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하루에 일곱 번씩 메뚜기를 하는 일은 불가능했고, 이때부터 나는 단속이 와도 피하지 않고 버텼다.
내게 ‘아줌마’라는 호칭을 과도하게 마구 날리며, 간간히 ‘아, 아줌마 아니라고 했죠’를 덧붙이는 얄미운 공무원이 계고장을 들고 왔다. 계고장을 그냥 주고 가도 되는데, 사진을 찍어야 한다며 천막에 붙인다. 살짝 위만 붙여도 될 것을 스티커로 되어 있는 계고장을 창의 역할을 하는 천막의 투명한 비닐 부분에 철썩 붙인다.
노점 단속이 있을 때 구청은 계고장으로 선전포고를 한다. ‘언제까지 치워라. 아니면 강제철거 한다’가 요지이다. 보통은 일주일 정도의 시간을 준다. 그러면 노점 쪽은 집회를 하기도 하고, 구청과 면담도 하는 등 그 시간을 이용해 대책을 마련한다.
내가 계고장을 받은 날은 27일. 계고장에 쓰여 있는 기한도 27일. 볼 것 없이 바로 치우라는 소리다. 법으로 정해진 것이 없으니 기한을 정하는 건 담당 공무원 마음이다. 나는 잘 떨어지지 않는 스티커 계고장을 긁어내며 궁시렁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단속은 동빵이 들어오고 나서 더욱 심해졌다. 동빵의 충격을 억지로 무시하는 일도 쉽지 않았는데, 계고장을 붙이고 간 구청에서 마차를 옮겼는지 다음날 아침 일찍 나와서 사진을 찍는다고 한다.
마차를 아예 안보이는 곳으로 옮겨야 한다. 옆의 골목 안에 음식점 앞 주차장에 하룻밤만 두기로 했지만, 마차 지붕 폭만 한 굽이진 골목에 마차를 혼자서 끌고 들어가는 건 불가능했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을 때보다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이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의 그 절실함이라니.
구청에서 자체 단속이 아니라 민원이 들어와서 단속이 나온 것이라면 무언가 했다는 증거를 남겨야 한다. 처음에는 계고장만 주고 안 붙이고 간다. 계고장을 붙였다는 사진을 찍고 가는 것. 또 민원이 들어오면 계고장을 또 붙이거나 마차가 신고된 곳에 없다는 증거 사진을 찍어야 한다. 구청이 나오면 피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마차를 실어가려는 의도라면 끝까지 싸워야 하지만, 민원 때문이면 피했다가 나오는 게 상책이다.
마차 찾아오기
나름 단속에 협조하며(?) 마차를 옮기는 등의 노력을 했건만 결국 구청에서 마차를 가져갔다. 얄밉게도 2월 29일에 가져가고 3월 2일엔 출장을 가버린 공무원. 삼일절과 주말을 내내 쉬고 3월 5일이 되어서야 공무원을 만날 수 있었다.
일단 지역의 노점상 여럿이 구청의 담당부서 사무실로 시끌벅적하게 들어간다. ‘마차를 왜 가져갔냐. 당장 안 돌려주면 우리는 여기서 농성하겠다!’는 기세로 눈을 부릅뜨고 서로 앞 다투어 한마디씩 한다. 그러고 나면 지역장님과 담당 공무원이 차분하게 이야기를 시작한다.
담당공무원은 마차 들여놓던 날에는 신규라 절대 안된다더니, 이제는 시흥사거리 내가 있던 장소는 죽어도 안된다는 게 단속 이유라고 말한다. 그곳은 안된다는 얘기를 어찌나 강조하는지, 거기만 아니면 어디서 노점을 하건 인정해줄 기세다.
지역장님의 귀띔으로는 내가 마차를 둔 곳이 구청장이 마을버스 타고 출근하는 길목이어서란다. 마을버스타고 출근하는 구청장이 마차를 보고 뭐라 하지는 않았을 것 같고, 담당공무원의 과장된 배려심이리라.
한바탕의 소동과 담당공무원과의 면담 비슷한 것이 끝나면 대략 협상이 끝난 것이다. 나는 처음 빼앗긴 거라 그날 바로 찾기로 이야기가 되었다. 공무원이 과태료를 부과하기 위해 인적사항을 적으라고 한다. 과태료를 부과하고 납부 영수증을 내야 마차를 돌려주기 때문이다.
나는 마포구에 산다. 공무원이 인적사항을 보더니 싸늘하게 한마디 한다. 주민도 아니면서 왜 여기서 먹고 살려 하냐고. 나에게는 ‘왜 여기서 빌어먹냐’는 이야기로 들렸다. 나는 부르르 떨며 ‘금천으로 이사 올 거라 여기서 한다’고 듣지도 않는 소리를 던져놓고는 속으로 생각한다. 구청 공무원 중에 금천에 살지 않는 사람만 있어봐라! 이쯤 되면 나도 치졸하다.
그런데 과태료 금액은 공무원이 정한다. 원래 법으로 크기에 따라 정해진 액수가 있으나 마차크기를 정하는 건 공무원 마음이니까. 내 마차야 제일 작은 크기이니 문제될 것이 없지만, 떡볶이 마차 정도 되면 과태료가 30만 원 정도 나온다.
상황이 이러하니 마차를 뺏기고 구청에 쫒아온 노점상은 공무원에게 화를 내다가도 과태료를 깎기 위해 아쉬운 소리를 할 수밖에 없게 된다. 내 마차 크기로는 가장 낮은 금액이 나올게 뻔하다 이러한 상황에 익숙한 노점상 한 분이 나 대신에 말랑말랑해진 목소리로 구청 공무원에게 이야기한다.
“먹고 살기도 힘든데, 과태료 좀 싸게 맥여 주세요”
나는 얼굴이 확 붉어졌다. 이런 일에 창피해하다니, 나는 노점상 되려면 아직 멀었다.
구청에서 과태료 용지를 받아 은행에 과태료를 내고 영수증을 들고 견인차 보관소로 간다. 금천은 가산동의 견인차 보관소 안쪽에 정비된 마차 보관소가 있다. 용달을 부르고 마차를 싣고 시흥사거리에서 안양 쪽으로 좀 더 내려간 시흥 홈플러스 건너편에 도착했다. 여기에서 다시 자리를 잡을 계획이다.
용달에서 마차를 내리고 있는데 나는 참 운도 없다. 마침! 지나가던 가로정비과 공무원이 나를 봤다. 공무원은 차에서 내려 소리를 지른다. “뭐하는 짓이야!”
공무원은 단속반을 부르고, 나는 지역장님을 부르고 서로를 기다리고 있는데 공무원이 큰소리로 내뱉는다. “있는 거 가지고 먹고살지, 뭐하는 짓이야!”
이 말에 발끈한 사람은 바로 용달아저씨. 갑자기 큰 소리로, “있는 놈들이 자기 입장에서만 얘기하지 어려운 사람에 대해 뭘 알아! 있는 거 가지고 먹고 살 수 있으면 누가 노점을 해! 있는 거 가지고 먹고 살아? 있는 거? 있는 거어?”
용달아저씨의 부르짖는 듯 한 목소리가 화면을 점점 느리게 돌리는 것처럼 처언~천히 울려 퍼졌다. 나는 그 자리에서 내 처지보다 아저씨의 말이 서러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결국 구청공무원들과 노점 분들이 도착하여 몸싸움까지 벌어졌다.
용달비 달라는 얘기도 못하시고 옆에서 큰 소리로 거들던 용달아저씨. 싸움이 대충 정리되고 내가 5만 원짜리를 드리며(용달비는 4만원이었다) 더 드려야 하는데 더 못 드려 죄송하다 했더니, 용달아저씨 당신도 과일노점 했었다며 거스름돈 만원을 내 주머니에 넣고 힘내라며 가셨다.
공무원과 노점상
담당공무원과 수시로 부딪히며 싸우거나 애원해야 하는 노점상. 노점단속 공무원도 괴롭기는 매한가지일 것이다. 오죽하면 공무원노조가 생겼을 때, 집회에 전노련 깃발과 공무원노조 깃발이 나란히 있는 것을 보며 눈물을 흘린 노점상이 있었을까.
대학교 1학년 때 ‘노태우 정권 타도하자!’를 외치며 가두투쟁을 벌이는 일이 익숙해졌을 즈음. 나는 동아리연합회 회장 언니와 단둘이 골목 사이로 도망치다가 전경과 사수대가 대치하고 있는 중간으로 나오게 된 적이 있다.
해질 무렵 석양과 사수대의 빨간 머리띠와 그들이 던지는 불붙은 빨간 화염병이 빙글빙글 타원을 그리며 전경 쪽으로 떨어지는 광경을 지켜보게 되었다. 화염병이 직선으로 던져지지 않았던 건 격렬한 싸움이 아니라 전경이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게 막기 위함인 것 같았다. 나는 선배에게 물었다. 노태우 타도면 노태우랑 싸워야지, 왜 전경이랑 싸우냐고.
그 때 그 선배, 내게 ‘비적대적 모순’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물론 나는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세미나에서 ‘비적대적 모순’이 나왔을 때, 잠시 1학년 때의 그 장면을 떠올렸던 것 같기도 하다.
그 이후로 학생회와 학생과, 시위대와 정보과, 그리고 지금은 노점상과 공무원의 관계를 거치면서도 처음의 적대감은 언제나 한결같다.
공무원을 미워할 문제가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머리로 잘 알고 있지만, 내 눈앞에서 내 마차를 빼앗아가려는데 어느 누가 눈에서 불똥이 튀지 않겠는가 말이다. 멱살이라도 잡고 흔들고 싶은데 애원해야 하는 상황이라도 벌어지면 차라리 몸에 상처가 나는 게 덜 아프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말이다.
어디로부터 문제를 풀어야 할지 모를 때, 우리는 쉬운 방법으로 사람을 미워하고 사람과 싸운다. 나는 그 공무원이 밉다. 사람을 미워하는 일처럼 힘든 일이 없는데도 누구 탓이라도 하지 않으면 더 힘들 것 같아서 마음은 더 유치하게 ‘두고 봐라’를 곱씹는다.
공무원도 용달아저씨도 구경하던 사람들도 떠난 뒤, 나는 마차를 가로수에 쇠사슬로 묶어두며 내가 제일 싫어하는 구호가 떠올랐다.
“질긴 놈이 승리한다. 끝까지 투쟁해서 반드시 승리하자!”
원문: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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