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의 프랑스 군이 ‘폴란드 땅’이라고 할만 한 도시에 처음으로 입성한 것은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 이후 얼마 지나지 않은 1806년 11월 어느날 저녁 즈음 포젠 (Posen, 또는 포즈난 Poznan)에 에젤망 (Exelmans) 대령이 이끄는 제1 엽기병 대대 (Chasseurs-Cheval)가 입성할 때였습니다.
처음에는 먼저 입성한 선발된 기병들이 군도를 뽑아든 채 시내 요소요소에 배치되어 삼엄한 경계를 펼쳤으나, 곧이어 보병 부대들이 외곽에 집결한 뒤 시내 광장으로 질서정연하게 행군해 들어올 무렵에는 상당수의 시민들이 몰려 나와 이들을 환영하고 있었습니다. 지휘관인 에젤망 대령의 눈에, 상황은 매우 명료해 보였습니다. 프랑스 군은 완전히 우호적인 지역에 들어온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들은 고국 프랑스 도시에 들어올 때보다도 더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습니다. 곧이어 병사들이 몇명씩 나뉘어 시민들의 주택에 숙소를 배정받을 때, 프랑스 본토에서라면 집주인 가족들은 뚱한 표정으로 이들을 맞았을텐데 이 폴란드 시민들은 매우 흥분된 환대로 이들을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지난 폴란드의 짧은 역사 편에서 정말 간략히 보셨듯이, 폴란드는 1794년 코시우스코 (Andrzej Tadeusz Bonawentura Kosciuszko)의 봉기가 러시아 군에 의해 진압된 뒤 1795년 제3차 폴란드 분할에 의해 완전히 국가로서의 존재가 사라진지 약 10년 밖에 지나지 않은 때였습니다.
폴란드 인들은 조국을 갈갈이 찢어 나눠가진 주변 강국들, 즉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그리고 러시아에 대해서는 깊은 원한을, 그리고 이들을 차례로 꺾으며 진격해온 프랑스에 대해서는 적의 적이면 나의 친구라는 우호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프랑스라는 국가의 위대함이 개인의 모습으로 발현된 존재였던 나폴레옹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요즘의 인기 연예인 또는 스포츠 스타 이상의 전율을 느끼고 있었지요. 어쩌면 이 프랑스 황제가 폴란드의 독립을 되찾아 줄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으니까요.
폴란드 인들의 이런 열기는 1807년 1월 1일, 휴식과 행정 업무 처리를 위해 바르샤바로 들어오는 길이던 나폴레옹에게도 그대로 전해졌습니다. 바르샤바 근처의 블로니 (Blonie, 혹은 Bronia)라는 마을로 접어들자, 많은 바르샤바의 폴란드 시민들이 자신의 얼굴을 보고자 미리 나와서 열광적인 환영을 보냈던 것입니다.
하지만 마차를 타고 있던 나폴레옹은 그런 군중들 앞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환호에 답할 기분은 아니었습니다. 원래 그는 약간 중2병 기질이 있었던지라, 일반 대중 따위는 상대하고 싶지 않아 하는 성격이었고, 특히 바로 직전의 풀투스크 전투에서 개운하지 못한 결과를 맛보고 돌아오던 참이었기 때문이었지요.
그러던 중, 그의 마차 옆을 호위하던 장교가 어떤 숙녀 한명을 데리고 마차 창문으로 다가 왔습니다.
“폐하, 보십시요. 이 아름다운 숙녀분이 폐하의 용안을 뵙기 위해 이런 군중들 속을 뚫고 나오는 용기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 숙녀는 나폴레옹의 눈길을 단번에 사로잡았습니다. 그 여자는 눈부신 외모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유창한 프랑스 어로 자신이 폴란드에 온 것을 천번만번 환영하며, 자신이 가져다 줄 폴란드의 구원에 대해 열정적인 목소리로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즉각 마차 좌석에 마침 있던 꽃다발을 들어 그 숙녀에게 건네주며 ‘이것을 나의 선의의 표시로 받아달라. 바르샤바에서 또 만나기를, 또 그때 내게 개인적인 감사의 말을 해주기를 바란다.’ 라고 너무나 노골적인 의사 표시를 했습니다.
바르샤바로 돌아온 이후, 나폴레옹은 바르샤바의 내노라하는 귀족들과 귀부인들이 베푸는 만찬에 참석했는데, 특히 그 자리에는 미인들이 가득한 것이, 바르샤바에서 가장 아름다운 귀부인들이 선발되어 만찬에 참석한 것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바르샤바의 귀족들은 나폴레옹의 손에 폴란드의 운명이 달려 있다고 생각하여 나폴레옹의 비위를 맞추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기세였으니, 당연히 귀족 가문의 가장 아름다운 숙녀들을 총동원했던 것이지요.
실제로 나폴레옹도 이렇게 ‘눈에 띄게 아름다운 숙녀분들이 비정상적으로 많이 모인 것’에 대해 치하의 말을 할 정도였습니다. 바르샤바 귀족들은 영웅호색이라고 당연히 나폴레옹의 입이 귓가에 걸릴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만찬이 끝나고나서, 나폴레옹의 궁정 장관(Grand Marechal du Palais)인 뒤록 (Geraud Christophe Michel Duroc)으로부터, ‘폐하로부터 직접 꽃다발을 받았던 블로니의 금발 숙녀분은 대체 왜 나타나지 않았는지’에 대한 불만을 듣고 놀라야 했습니다.
바르샤바의 귀족 사회는 당장 그날 밤부터 그 블로니의 금발 숙녀의 정체를 찾아 나섰습니다. 그리고 그다지 오래 되지 않아 그 정체를 찾아냈습니다. 바르샤바의 귀족 사회가 그다지 넓은 동네가 아니었던 것이지요. 대체 이 숙녀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요 ?
다들 아시다시피, 이 여인의 이름은 마리아 발레프스카 (Marie Walewska) 백작부인이었습니다. 1786년 12월 생이니까, 나폴레옹을 블로니에서 처음 만났을 때는 막 20살이 된 어린 나이였지요. 이 여자는 몰락한 귀족 가문 출신으로서, 결혼한지 2년도 안되었고, 이미 아들 하나를 둔 젊은 엄마였습니다.
아버지인 라친스키 (Mathieu Laczynski)는 가난한 백작 가문 출신이었으나, 어머니인 에바 (Eva Zaborowska)는 부유한 자보로프스키 (Zaborowski) 출신이었지요. 덕분에 마리아는 괜찮은 교육을 받고 자랐습니다. 가령 마리아에게는 니콜라 쇼팽 (Nicolas Chopin)라는 이름의 프랑스 어 가정교사도 있었는데, 이 사람의 아들이 바로 유명한 폴란드 작곡가인 프레드릭 쇼팽 (Frederic Chopin)이 됩니다.
이 모자랄 것 없어 보이는 젊고 아름다운 백작부인에게도 문제가 있었으니, 바로 그 남편이었습니다. 남편인 발레프스키 백작 (Athenasius count Colonna-Walewski)은 결혼 당시 이미 70을 바라보는 노인네였던 것입니다. 아무리 가난한 귀족 가문이라고 해도, 그렇게 아름답고 젊은 귀족 아가씨가 왜 그렇게 오늘내일 하는 노인네에게 시집을 가야 했을까요 ?
여기에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 있었습니다. 이 마리아라는 아름다운 아가씨는 그렇게 얌전한 아가씨는 아니어서, 18살이 되기도 전에 이미 임신을 했었다는 것입니다. 가문의 스캔달과 딸의 미래를 걱정했던 어머니 에바가 서둘러 흥정을 했고, 그 결과로 노친네인 발레프스키 백작과 서둘러 혼사가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발레프스키 백작은 이렇게 태어난 아이를 자신의 아이로 쿨하게 인정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발레프스키 백작에게나 마리아에게나 이익이 되는 흥정이었을 것 같기도 합니다. 특히 비슷한 일이 몇년 뒤 다시 벌어질 운명이었으니, 더더욱 그럴싸한 이야기이긴 합니다.
발레프스카 백작부인이 된 마리아가 그다지 얌전한 젊은 귀부인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1807년 1월 나폴레옹과의 첫대면에서도 드러납니다. 당시 바르샤바 전체가 다가오는 나폴레옹의 존재에 대해 마치 월드컵 전야제처럼 흥분한 상태였긴 하지만, 귀족 가문의 젊은 아가씨 또는 유부녀가 신사의 보호 없이 자기들끼리 그런 환영 행렬에 나설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굉장한 일탈이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 예쁜 아가씨에게는 항상 있기 마련인 무수리 여자 친구 한명과 함께 마차를 타고 무작정 나폴레옹을 보러 떠난 것이지요. 여기서 잔뜩 몰린 군중들의 틈 속에서 마리아와 그녀의 무수리 친구는 거의 압사당할 뻔 하다가 그녀의 유창한 프랑스 어와 아름다운 외모 덕분에 나폴레옹 근위대 장교의 눈에 띄어 나폴레옹 마차 옆까지 안내를 받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으로 만족했을 뿐, 자신이 나폴레옹을 다시 만나 그런 영웅의 주목을 받는다는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르샤바 시내의 아름다운 귀부인들을 닥치는 대로 긁어모았던 나폴레옹을 위한 만찬에도 참석을 사양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녀의 미모에 대한 나폴레옹의 인상은 너무나 강하여,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의 비위를 맞추기 급급했던 폴란드 귀족들이 그녀를 찾아 나섰던 것이지요. 그녀를 찾는 것은 쉬웠습니다. 그녀를 따라 나폴레옹 마차 곁까지 갔던 그녀의 무수리 친구가 발레프스카 백작부인이 나폴레옹에게서 꽃다발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이미 동네방네 떠들고 다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로부터 며칠 뒤, 마리아 발레프스카는 당시 바르샤바 시민들 중 최고위층이라고 할 수 있는 유제프 포니아토프스키 (Jozef Poniatowski)의 방문을 받고 무척 놀랐습니다. 포니아토프스키는 폴란드의 마지막 왕이었던 스타니슬라브 2세 (Stanislaw August Poniatowski)의 친조카로서, 폴란드의 마지막 분할 때까지도 폴란드의 독립을 위해 싸웠으며, 폴란드가 그렇게 망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폴란드의 다음 왕이 되었을 진짜 거물이었기 때문이었지요.
마리아 발레프스카는 그런 거물이 자신을 만나러 온 이유에 대해서 더욱 놀라야 했는데, 그 내용이 ‘나폴레옹이 원하는 여자가 바로 당신이라는 것을 온 바르샤바가 알고 있다. 나폴레옹의 한마디에 폴란드의 운명이 걸려 있다. 조국을 위해 나폴레옹의 애정을 만족시켜 달라’는 너무나 뻔뻔스러운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발레프스카는 수치스러워하며 그를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친구라는 사람들이 번갈아 그녀를 방문하여 그녀에게 나폴레옹의 정부가 되어 줄 것을 요청했고, 특히 놀랍게도 그녀의 남편인 발레프시키 백작이 앞장서서 그녀의 방에 들어와 이렇게 야단을 치는 바람에 결국 나폴레옹에게 가야만 했습니다.
“당신은 지금 폴란드 최고의 귀족들을 모욕하고 있는거요 ! 지금 우리 집 현관에 누가 와서 기다리고 있는 줄 아시오 ? 바로 프랑스의 원수인 뒤록 장군이오 ! 이런 대인물을 현관에서 기다리게 한다는 것은 우리 조국의 운명을 쥐고 있는 프랑스 황제를 모욕하는 일이오. 남편으로서 명하건데, 당장 일어나 당신을 데리러 온 사람들을 맞아들이시오 !”
그런 초상류층 유부남 유부녀의 불륜이 구체적으로 어떤 절차에 의해서 벌어지는지 자세히 다루지는 않겠습니다만,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런 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발레프스카는 위엄을 지키며 쉽게 나폴레옹에게 자신을 허락하지 않았고, 나폴레옹은 황제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능수능란하게 ‘밀땅이란 이런 것이다’라는 것을 보여주며 며칠에 걸쳐 혹은 차갑고 점잖게, 바로 다음날은 불처럼 격정적으로 반응하며 발레프스카를 정복해 나갔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많은 신사 숙녀들이 참석하는 만찬에 발레프스카 부인을 초대하고, 밤이 늦어 다른 손님들이 돌아갈 때 따로 시종이 발레프스카 부인에 ‘잠시 여기서 기다려주시길 바랍니다’ 라는 전언을 하며 나폴레옹의 침실로 그녀를 인도해가는 방식을 취했습니다. 아마 같이 만찬에 참석했던 폴란드 귀족 남녀들은 발레프스카가 뒤에 남는 것에 대해 애써 모르는 척 하며 자기들끼리 ‘성공입니다 성공이에요 !’ 라는 눈빛을 주고 받았겠지요.
이렇게 외국의 권력자에게 자기 나라의 미녀를 갖다 바치며 그 비위를 맞추려는 행동이 역사적으로 드문 것은 아닙니다만, 그렇다고 자랑스러운 행동은 절대 아니지요. 특히 남편으로서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정말 굴욕스러울 것 같은데, 의외로 발레프스키 백작이 앞장 서서 아내를 그렇게 내몰았다는 것은 현대적인 기준으로 보면 무척 놀라운 일입니다.
사실 당시 기준으로도 그런 일은 결코 대놓고 이야기할 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나폴리 스캔들 – 엠마 이야기에도 이런 장면이 나오지요. 그 경우에도 엠마의 남편인 해밀턴 경은 평소 존경하던 넬슨 제독과 아내 엠마의 불륜에 대해 모르는 척 눈감아 주다가 나중에는 아예 대놓고 한집에 이 두 남자와 한 여자가 동거하는 무척이나 불건전한 모습을 연출했었지요. 당시 이 사건은 영국 사회 전체를 수치스럽게 만든 불륜 스캔들이었습니다.
당대에 이런 스캔들이 2건이나 있었다고 해서 당시 도덕 기준에는 이런 일이 흔히 받아들여지는 일이라고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가령 엠마 부인의 경우, 넬슨이 죽는 순간에도 엠마에게 충분한 연금이 지급되도록 구질구질하게도 여러 차례 반복하여 유언을 남겼지만, 점잖은 영국 사회는 철저하게 엠마 부인을 무시했습니다.
또 나중의 일입니다만, 나폴레옹과 발레프스카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은 발레프스키 백작이 자신과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자신의 아이라고 선언하고 그렇게 키웠습니다. 만약 그렇게 자신의 아내가 나폴레옹의 정부였다는 사실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면 그렇게 행동할 이유가 없었겠지요.
이렇게 남편의 묵인 혹은 종용에 의해 이루어진 고위층들 스캔들의 여주인공 엠마나 마리아 발레프스카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둘다 젊어서 자유분방한 삶을 살았다가 할아버지 뻘의 귀족과 결혼한 여자였다는 점이지요.
엠마는 서민층 출신의 사실상 화류계 여자였다가 늙은 해밀턴 경과 결혼을 했고, 마리아 발레프스카도, 비록 확인되지 않은 소문에 불과하지만 어린 시절 불장난에 의해 혼전에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갖게 되자 어쩔 수 없이 늙은 발레프스키 백작에게 시집을 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쩌면 이 두 여자들은 남성 귀족들이 전체 사회를 쥐고 흔들던 시대에 남자들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역할을 해야 했던 불행한 희생물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또 꼭 그렇게만 볼 수는 없습니다. 넬슨 제독이나 나폴레옹이나 각각 엠마와 발레프스카를 열정적으로 사랑했고, 또 이 두 여자들도 넬슨 제독과 나폴레옹을 열렬히 사랑했습니다. 조국이 원하지 않았던 사랑을 했던 엠마 부인의 경우는 더욱 그랬습니다만, 조국이 강요한 사랑을 해야 했던 발레프스카의 경우도 못지 않게 나름 애절한 사랑이었다고 합니다.
처음에 나폴레옹과 발레프스카의 불륜은 이 어린 미녀가 나폴레옹의 애간장을 쏙 빼놓아, 프랑스 황제로 하여금 ‘이렇게 사랑스러운 여자에게 나라 하나 정도 쯤이야 뚝 떼어 주지 뭐’ 하는 마음이 들기를 기대했던 폴란드 귀족 사회의 기대 때문에 발레프스카에게 강요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폴란드 귀족들이 간과했던 사실이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비록 그때 즈음해서는 상당히 살이 찌고 여자 밝히는 추잡한 30대 후반의 아저씨였으나, 한때 날렵한 턱선을 자랑했던 미남으로서 이탈리아 남자들의 바람둥이 DNA가 박혀 있는 남자였습니다. 나폴레옹이 발레프스카를 사랑한 것은 처음부터 확실한 사실이지만, 나중에는 폴란드 귀족들의 바램과는 정 반대로, 발레프스카가 나폴레옹을 더 사랑해버리는 사태가 벌어졌던 것입니다.
그리고 미녀로 나폴레옹을 유혹하여 빼앗긴 나라를 되찾겠다는 폴란드 귀족들의 계획은 애초에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무척 여자를 밝히는 사람이었으나, 어디까지나 여자를 노리개 취급했을 뿐, 결코 여자를 위해 자신의 야망에 조금이라도 손해끼칠 일을 하는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처음에 발레프스카를 유혹할 때는 ‘자신의 한마디면 폴란드가 다시 예전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다’ 라고 호언장담했지만, 사실 그 모든 것은 처음부터 다 거짓말이었습니다.
나폴레옹 군 내에서 서열 2위 정도에 해당하는 뮈라 (Murat)가 1806년 말 바르샤바에 맨 처음 들어와, 독립에 대한 청원을 하는 폴란드 귀족에게 둘러 싸였을 때, 뮈라는 ‘프랑스는 한번도 폴란드 분할을 승인한 적이 없다, 폴란드가 자기 자신을 지킬 용기를 증명해 보인다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다’ 라는 정도의 아리송한, 그러나 긍정적인 립 서비스를 폴란드 귀족들에게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소식을 들은 나폴레옹은 뮈라에게 ‘쓸데없는 말을 했다’며 뮈라를 크게 질책했습니다. 나폴레옹은 폴란드를 독립시킬 생각이 조금도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처음부터, 프로이센이나 러시아와의 전쟁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단순 무식한 장군이 아닌, 노련한 정치가이자 지식인이었던 그는 프로이센 정도의 2류 국가야 가볍게 밀어버릴 수 있을지 몰라도, 러시아와 같은 대국은 싸우기 보다는 화친해야 할 상대라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폴란드 독립을 선언한다는 것은, 폴란드 분할 때 그 영토의 가장 큰 부분을 떼어갔던 러시아와 갈 때까지 가보자는 소리 밖에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관록의 제국 오스트리아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설령 프로이센이 차지한 폴란드 땅만을 대상으로 독립 폴란드를 선언한다고 해도,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에 점령된 폴란드 영토에서도 소요 사태가 일어날 가능성이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폴란드를 위해 프랑스의 피를 흘릴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발레프스카가 자신에게 넘어온 상태라고 확신이 되자, 침대에서 ‘나는 당신의 연인이기 이전에 프랑스의 황제요… 나 개인의 사랑을 위해 프랑스의 국익을 희생시킬 수는 없단 말이오’ 라며 고뇌하는 척 하며 발레프스카의 양해를 구했습니다.
비록 독립국가는 아니었지만, 폴란드 귀족들의 독립에 대한 염원은 바르샤바 공국 (Duchy of Warsaw)으로 구현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이 프로이센이 점거했던 폴란드의 옛 영토를 기반으로, 바르샤바 공국을 세워 준 것입니다. 이 공작령(duchy)라는 것은 왕이 아닌 공작이 다스리는 땅으로서, 자치권을 가진 독립된 지역이긴 했으나, 외교권과 같은 독립 국가가 누려야 할 외교권이 없었습니다.
공작이 다스리는 땅이니 이 나라의 주인인 공작이 있을텐데, 그건 누구였을까요 ? 당연히 아들 없이 사망한 전 국왕 스타니슬라브 2세 (Stanislaw August Poniatowski)의 친조카이자 이름난 장군이었던 유제프 포니아토프스키가 적격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도면밀한 나폴레옹은 전혀 엉뚱하게도 작센의 왕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투스 1세 (Frederick Augustus I of Saxony)에게 폴란드 공작이라는 작위를 새로 부여하고, 작센의 왕이라는 직위에 더해 이 바르샤바 공국의 주권자로 임명합니다.
이는 작센 왕국에게 바르샤바 공국을 떼어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작센 왕이 개인적인 직위와 영토를 따로 갖는 형태였지요. 간단히 말해서, 작센 왕 아우구스투스는 명의만 빌려주는 바지 사장인 셈이었지요. 나폴레옹은 왜 포니아토프스키를 따돌리고 이런 조치를 취했던 것일까요 ?
포니아토프스키가 특별히 나폴레옹에게 밉보였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나폴레옹보다 먼저 뮈라와 만났었는데, 매우 용감한 군인이자 젋어서 오스트리아 군에서 장군까지 지냈던 진짜 귀족 포니아토프스키는 뮈라의 마음에 쏙 드는 사람이었고, 뒤이어 만난 나폴레옹에게도 무척 좋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인물이 바르샤바 공국의 실질적인 주인이 된다면 그건 주변국에 대한 도발이 될 가능성이 많았습니다. 게다가 이 바르샤바 공국이 포니아토프스키의 지휘 하에 정말 제대로 된 국가 형태로 발전해 나가는 것을 나폴레옹은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바르샤바 공국을 세운 것은, 폴란드 귀족들의 독립 국가에 대한 염원을 들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필요할 때마다 병력과 자금을 뽑아 쓸 수 있는 전진기지를 동부 유럽 한복판에 건설하기 위해서였을 뿐이었습니다. 실제로, 바르샤바 공국이 설립되면서, 폴란드 귀족들의 자존심은 충족되었을지 몰라도, 그 자존심의 댓가는 상당했습니다. 그 댓가는 끊임없는 전쟁과 재정난으로 다가왔지요.
원래 폴란드는 러시아, 독일, 오스만 투르크 등 주변에 워낙 강적들이 많았고 게다가 폴란드 내부에서도 귀족들간의 내전이 잦아 크고 작은 전쟁이 많은 나라였습니다. 따라서 국민들의 전쟁 경험이 많을 것 같지만, 의외로 폴란드는 인구 대비 병력의 비율이 상당히 작은 나라였습니다. 아직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기 전인 1781년 경, 유럽 주요 국가의 성인 남성 인구 대비 훈련된 병력의 비율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폴란드 1/472
프랑스 1/153
오스트리아 1/90
러시아 1/49
프로이센 1/26
프로이센 같은 경우 워낙 군국주의가 판을 치는 나라이고, 러시아는 카자흐처럼 세금 대신 수년간 짜르의 군대에서 기병으로 복무를 해야 했던 유목 민족의 존재 때문에 이 비율이 비정상적으로 높게 나타났다고 쳐도, 폴란드는 비교적 평화로운 프랑스에 비해서도 이 비율이 지나치게 적은 편이었습니다. 대체 폴란드처럼 전쟁이 많았던 나라에 이게 어찌된 일이었을까요 ?
그 이유는 폴란드의 낙후된 사회 구조 탓이 컸습니다. 미국 역사가인 슬로안 (Sloan)이 당시 폴란드 인들에 대해 ‘폴란드 인들은 멍청하고 게으른 촌뜨기 아니면 쾌락에 탐닉하는 우아한 귀족들이다’라고 쓰기도 했듯이, 폴란드는 중산층 시민 계급이 발달하지 않은, 지배층 귀족들과 피지배층 농민들의 격차가 큰 신분 사회였습니다.
원래 전쟁을 담당했던 귀족들은 당연히 날개달린 후자르 (winged husaar)의 로망을 잊지 못하고 귀족스러운 기병의 육성에만 심혈을 기울였지요. 덕분에 폴란드의 창기병 울란 (Ulhan, 폴란드 창기병의 전성시대)은 유럽 전역에서 명성이 자자했지만, 그런 일류 기병들만으로는 폴란드를 지킬 수 없었습니다. 특히 18세기 중반 이후의 전장은 잘 훈련된 보병과 포병이 지배했기 때문에, 기병 위주의 군사력은 낡은 시대의 유물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자존심 강하고 케케묵은 폴란드 귀족들은 기병을 포기하고 냄새나는 농민들을 긁어모아 군사 훈련을 시키는 것이 귀족의 체면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지요.
게다가 폴란드의 지배층인 귀족들은 그들이 살고 있던 근대 시대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낡은 사상에 젖어 살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당시 폴란드 귀족들은 ‘폴란드 인이여 단결하라’를 외칠 때, 그 폴란드 인이라 함은 어디까지나 폴란드 귀족들을 이야기하는 것일 뿐, 전체 국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민들은 폴란드 인이라고 인정하지도 않았지요.
농민들도 폴란드 국민이라고 인정한 것은 제2차 폴란드 분할 바로 다음 해인 1794년 코시우스코(Kosciuszko) 봉기 때 코시우스코 장군이 선포한 폴라니에치 (Polaniec) 선언문이 최초였습니다. 이때 많은 농민들이 코시우스코 봉기에 가담했는데, 이들은 무장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여 고작 풀베는 큰 낫 등으로 무장한 상태로도, 러시아 군과 싸워 이기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습니다.
비록 병력과 무기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은 패배하긴 했으나, 이렇게 1년 반 동안이나 러시아 군과 맞서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코시우스코가 내건 구호, “Gli uomini liberi sono fratell” 즉 자유인은 모두 형제다 (Free men are brethren) 라는 평등 사상이 폴란드 농민들에게 희망과 애국심을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폴란드 농민들은 세금을 걷어가는 사람들이 폴란드 귀족이건 러시아 귀족이건 사실 별 상관이 없었으므로 뾰족하게 지킬 것도 없었던 것이지요.
아무튼 이렇게 근대 계몽 사상에 입각한 자유와 평등이 어떤 위력을 가지는지 이해 못했던 귀족들 때문에 결과적으로 넓은 영토와 결코 적지 않은 인구에도 불구하고, 폴란드의 군사력은 그다지 위력적이지 못했고, 그 결과로 나온 것이 바로 3차례에 걸친 폴란드의 분할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이러했던 폴란드 인들의 군사력을 완전히 프랑스 식으로 환골탈태를 시켜놓습니다. 그는 바르샤바 공국을 세우고 자신이 작성한 바르샤바 공국 헌법을 선포함과 동시에, 21세부터 28세 사이의 모든 남성들이 6년 동안의 의무 복무를 하도록 징집제를 실시합니다.
그러나 이런 징집제는 폴란드의 자유를 수호하기 보다는, 프랑스의 이익을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가령 처음에 약 2만이 넘는 병력으로 시작한 바르샤바 공국의 군대는 징집 서류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인 1807년 8월, 각 사단 중 가장 훈련과 장비 상태가 좋은 연대를 뽑아 머나먼 스페인으로 파병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어서 벌어진 러시아와의 전투에서도 적극 활용되어 2천명이 넘는 희생자를 내야 했습니다.
폴란드 인의 피를 흘려야 한다면 최소한 그 싸움이 폴란드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또 참전할지 말지 여부를 폴란드 인들이 결정해야 할텐데, 바르샤바 공국 중 어느 누구도 그 결정권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이미 결정된 내용이 파리에서 파견된 프랑스 대사에 의해 일방적으로 통보되었던 것입니다. 이를 두고 폴란드 인들은 자신들의 기묘한 반쪽짜리 나라가 ‘작센 왕에, 프랑스 법에, 프로이센 화폐에, 군대만 폴란드 인들로 채워져 있다’ 라고 씁쓸한 농담을 주고 받았습니다.
이런 병력 착취는 점점 정도가 심해져서, 1812년에는 전체 인구가 430만 밖에 안되는 작은 공국에서 무려 10만이 넘는 병력이 나폴레옹을 따라 두번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러시아로 떠나야 했습니다. 위에서 언급했던 대로, 전체 성인 남성 중 군사 훈련을 받은 인구의 비율이 1/472였던 나라에서, 이젠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전체 인구의 1/43이 현역으로 복무하는 사태가 벌어졌던 것입니다.
이는 당연히 엄청난 젊은이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르샤바 공국의 국방부 장관직과 프랑스 군의 원수직을 겸직하던 포니아토프스키 본인의 목숨까지도 결국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희생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나폴레옹의 수탈은 젊은 남자들을 병사로 끌고 가는 것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워낙 많은 젊은이들이 군대에 끌려 갔으므로 농업 생산력이 떨어졌고, 게다가 대륙 봉쇄령에 의해 곡물 수출길이 막히자 당장 경제도 어려워졌습니다.
거기에 한술 더떠 나폴레옹은 그야말로 벼룩의 간을 빼먹는 짓도 서슴치 않았습니다. 즉, 1807년 틸지트 (Tilsit) 조약에서 프로이센으로부터 뜯어낸 전쟁 배상금 채권을, 당장 현금이 필요하다면서 폴란드에게 채권깡을 해서 넘긴 것입니다. 즉, 바르샤바 공국에게 이 4천3백만 프랑 상당의 채권을 2천1백 프랑의 현금을 받고 넘겼습니다.
어떻게 보면 좋은 투자를 한 것 같지만, 사실 그렇게 좋은 투자라면 나폴레옹이 폴란드에게 넘길 리가 없었겠지요. 이 채권이 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빚을 진 프로이센이 빚을 제때 갚을 능력이 되어야 했지만, 패전의 충격에서 헤어나기 위해 허우적거리던 프로이센은 이 빚을 갚지 못했습니다. 이는 곧장 신생 바르샤바 공국을 재정 공황 상태에 빠뜨렸고, 폴란드 인들은 심각한 인플레와 과중한 세금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이야기를 다시 발레프스카에게 되돌려 보시지요. 나폴레옹의 인생에서 큰 위치를 차지한 여자들 셋을 고르라면 (어머니와 여동생 같은 가족은 빼고) 뭐니뭐니해도 전처 조세핀과 후처 마리 루이즈, 그리고 정부 발레프스카를 뽑을 수 있습니다.
조세핀에 대해서야 따로 말이 필요없겠고, 마리 루이즈는 오스트리아와의 유대 관계를 맺어준 정략 결혼녀라는 점, 그리고 나폴레옹의 모든 애정이 다 결집된 존재였던 로마 왕 나폴레옹 2세를 낳아주었다는 점을 빼면 사실 나폴레옹의 애정을 차지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발레프스카는 나폴레옹이 정말 순수하게(?) 사랑한 여자였습니다. 그는 바르샤바에 있는 내내 발레프스카를 처소로 불러들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행궁을 동부 프로이센으로 옮겨갔을 때는 아예 발레프스카를 함께 데려갈 정도였습니다. 1809년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벌여 다시 한번 비엔나 쇤브룬 (Schonbrunn) 궁전을 점령했을 때도, 나폴레옹은 그녀를 불러들여 쇤브룬 궁전 옆의 주택에 살게 했지요.
이때 매우 중요한 일이 벌어집니다. 바로 발레프스카가 임신을 하고 나중에 사내 아이를 낳은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조세핀에게서는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당시 의학으로는 그것이 나폴레옹의 문제인지 조세핀의 문제인지 밝힐 수가 없었지요. 특히, 조세핀이 전남편 보아르네 장군과의 사이에서는 아이를 2명이나 낳았으므로, 나폴레옹은 더욱 자기 자신의 문제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했을 겁니다.
나폴레옹은 조세핀보다 더 부지런하게 끊임없이 외도를 했고, 그 중 여배우 하나가 나폴레옹의 아이라고 주장하며 아이를 출산하기도 했습니다. 나폴레옹도 실제로 그 아이가 자신의 아이일 것으로 생각하긴 했지만, 그 여자의 평소 생활을 생각하면 반드시 그렇다는 것을 확신할 수는 없었지요.
그런데, 이때 태어난 아이는 모두가 100% 확실한 나폴레옹의 아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자신이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을 100% 확신할 수 있었고, 자신의 제국을 영원히 이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실 황후에게서 태어난 적자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바그람 전투에서 오스트리아를 다시 한번 꺾은 나폴레옹은 이를 계기로 조세핀과 이혼하고 합스부르크 황실의 마리 루이즈를 맞아들이게 되지요.
발레프스카는 나폴레옹의 아이인 알렉상드르 (Alexandre Joseph)를 데리고 1810년 나폴레옹을 따라 파리로 왔습니다만, 나폴레옹은 이미 마리 루이즈와의 결혼에 정신이 팔려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녀에게 파리 시내 몽모랑시 가(Rue de Montmorency)에 저택 하나를 주어 거기서 나오는 연간 12만 프랑의 임대 소득을 얻을 수 있도록 했지만, 그건 ‘이거나 먹고 떨어져라’라는 신호에 불과했습니다.
나폴레옹은 마치 선심이라도 쓰는 듯이 발레프스카에게 파리 시내 모든 황실 박물관에 무료 입장할 수 있는 특권을 주었습니다만, 아마도 그건 발레프스카에게는 모욕으로 받아들여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이때 나폴레옹과 발레프스카의 관계는 사실상 끊어지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레프스카는 나폴레옹을 무척 사랑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1812년 발레프스카는 자신을 나폴레옹에게 팔아먹은 남편 발레프스키 백작과 이혼합니다. 사실 이미 오래전부터 서류상으로만 부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을 뿐이었던 결혼이었습니다.
그녀는 이혼할 때 발레프스키 백작의 재산 절반을 받아왔는데, 아마도 바르샤바 공국의 설립에 몸바쳐(?) 도움을 준 그녀에 대한 남편의 선물이었나 봅니다. 그녀는 1814년 나폴레옹이 폐위되어 초라한 엘바 섬에 유폐되자, 그의 여동생 외에는 아무도 찾아주지 않았던 그를 찾아 엘바 섬까지 찾아감으로써 변치 않은 그녀의 사랑을 역사 앞에 증명해 보입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끝까지 개자식이었습니다. 한동안 그녀를 자신 곁에 두었으나, 나폴레옹은 그녀를 결국 쫓아보내다시피 돌려 보냈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 그녀가 곁에 있을 경우 정실 황후 마리 루이즈가 자신을 찾아 오지 않을 핑계거리가 된다는 것이었지요.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사실 나폴레옹이 원했던 것은 마리 루이즈 본인보다는 그녀가 가진 오스트리아 황실과의 연줄,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적자인 아기 로마 왕이었습니다. 물론 마리 루이즈는 오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이미 오스트리아 귀족 장군 나이페르그 (Adam Albert von Neipperg)와 바람이 난 상태였던 것입니다.
나폴레옹에게서 끝내 버림받은 그녀는 1816년 나폴레옹의 먼 친척인 또다른 코르시카 출신의 프랑스 귀족인 도르나노 (Philippe Antoine d’Ornano) 백작과 재혼을 합니다. 이 결혼은 오래 전부터 발레프스카를 사모해온 도르나노 백작의 구애에 발레프스카가 응한 결과였습니다. 그녀는 그 다음해 도르나노의 아이를 낳고는 신장병으로 인해 병사합니다. 아직 31세의 젊은 나이였습니다.
그녀가 낳은 나폴레옹의 아들인 알렉상드르 발레프스키 백작 (Alexandre Joseph Colonna-Walewski)은 처음에는 폴란드의 백작으로서 살아가다, 나중에 프랑스 외인부대의 장교직을 지내며 프랑스 국적을 취득한 뒤, 2월 혁명 때 루이 필립을 지지하는 오를레앙 파가 되어 그 밑에서 관직에 올랐고, 이어 나폴레옹 3세의 정부 하에서는 영국과의 외교 관계일을 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그가 나폴레옹의 친아들임을 알고 있었으나 정작 자신은 자신의 아버지가 발레프스키 백작이라고 줄기차게 주장했다고 합니다.
원문: Nasica의 뜻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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