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건국의 정치” 저자이자, 드라마 “정도전”의 고증을 맡으신 김영수 교수님의 강의를 편집한 것입니다.
스스로 독재를 거부한 왕, 세종
본격적으로 세종의 공론정치를 살펴 보자. 태종은 세종이 어려서부터 다스림의 도리를 알아, 국가의 중대사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고, 보통 사람은 생각하기 힘든 뜻밖의 생각을 많이 했다고 이야기했다. 태종 때 이미 정도전이 간관은 법적으로 면책 특권이 있는 정치 체제를 만들었지만, 실제 다 그렇게 시행되지는 않았다. 간관이 왕을 비판하면 막 매로 쳤다(…). 그러니 간관에 임명되면 친척과 친구들은 참 불쌍하게 여겼다.
태조 이성계는 의견을 잘 들은 편이었지만, 태종 이방원 때는 간관에 대한 억제가 심했다. 태조 때까지만 해도 의정부 서사제가 살아 있었다. 그런데 태종 때 육조 직계제로 바뀐다. 육조(六曹)는 오늘날 정부 각 부처 격이다. 여기에서 나온 의견과 정책이 오늘날의 국무총리실에 해당하는 의정부로 가서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등 재상이 몇 개로 압축하여 왕에게 올렸다. 왕은 이를 골라서 결정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태종은 의정부의 권한을 빼앗아 육조에서 직접 왕에게 보고하게끔 했다. 그래서재상이 할 일이 없어졌다. 육조직계제는 오늘날 책임 총리제와 반대다.
왕권과 재상, 언론권의 충돌은 계속 반복된다. 이성계 때 의정부서사제 하다가 태종 때 육조직계제, 세종 때 의정부서사제, 세조 때 또 돌아 육조직계제로 돌아간다. 특히 세조는 여기에 대해 매우 완강했다. 사육신 중 하나인 하위지가 의정부서사제의 부활을 주장하자 세조는 “재상에게 위임한다는 것은 임금이 죽었을 때의 제도이다. 너는 내가 죽은 것으로 생각하느냐?”라며 목을 베라고까지 했다. 겨우 살아나기는 하지만 죽도록 맞았다.
세종으로 돌아오면, 그는 매우 너그러운 사람으로 공론정치를 잘 해나갔다. 즉위해서 처음 한 이야기가 “내가 인물을 잘 알지 못하니, 좌의정·우의정 과 이조·병조의 당상관과 함께 의논하여 벼슬을 내리고자 한다.”였다. 오늘날에도 이런 정신은 필요하다. 의논 좀 해서 좋은 사람 써야 하는데, 수첩 인사로는 한계가 있다.
신하들 사이에도 의정부서사제와 육조직계제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김점은 “온갖 정사를 전하께서 친히 통찰하시는 것이 당연하고 신하에게 맡기시는 것은 부당하옵니다.”라며, 육조직계제를 주장했다. 이에 허조는 “어진이를 구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인재를 얻으면 편안해야 하며, 맡겼으면 의심을 말고, 의심이 있으면 맡기지 말아야 합니다. 전하께서 대신을 선택하여 육조의 장을 삼으신 이상, 책임을 지워 성취토록 하실 것이 마땅하며, 몸소 자잘한 일에 관여하여 신하의 할 일까지 하시려고 해서는 아니 됩니다.”며 의정부서사제를 주장한다. 여기서 세종은 허조의 손을 들며 본격적인 공론정치를 열어 나간다.
동료 같은 신하를 원하며 공론장을 이끌어내다
세종이 의정부서사제를 살린 것은 그의 추진력을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세종은 아버지가 한 일에 대해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심지어 세종 원년 세종의 장인을 죽이고, 장모를 천민으로 만든 것에 대해서도 손을 대지 않았다. 이는 외척정치를 사전에 제거한 것이지만, 사실상 무고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자기 아버지가 한 일이니 시정조치를 하지 않았다. 그 정도로 아버지가 한 일을 지키려 했으나, 의정부서사제는 도저히 아니라고 본 것이다. 그래서 의정부서사제는 태조께서 제정하셨다는 명분을 내세워 살린다.
이 역시 오늘날에도 적용될 수 있는 교훈이다. 대통령은 기본적으로 장관 20명, 수석비서관 10명하고 정치하는 것이다. 나머지 일은 위임해야 한다. 대통령이 과장 일까지 하면 안 된다. 그러면 일이 감당도 안 되고, 일하는 사람이 흥도 안 난다.
세종은 동료 같은 신하를 원했다. 같이 국정 의논하는 신하들이 왕 앞에 걸어 들어가는 게 아니라, 엎드려 기어서 들어갔다. 엉덩이 보이면 안 되니 문워크마냥 나올 때도 기어서 나왔다.. 세종이 왕이 돼서 보니까 이렇게 해서 어찌 공론정치하겠나 싶었다. 말이란 건 1:1로 하는 것이며, 직위가 달라도 함께 국사를 보는 사실상 동료의 입장이다. 중국도 그렇게 안 하는데 우리가 왜 이러냐며 하지 말자고 했다. 또 예전에는 신하들이 왕에게 이야기할 때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했사옵니다~”식으로 말했다. 태종 같으면 목소리 크면 건방지다 봤기 때문이다. 세종은 이에 대해서도 잘 안 들리니, 당당하게 이야기하라고 했다.
이런 건 드라마 속 이야기일 뿐(…)
훗날 조광조도 “우리나라의 경우 임금과 신하가 만나는 예가 너무 지나치니… (중략) 연산군 때 심순문의 죽음은 전적으로 올려다 본 데 원인이 있었습니다.”며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신하들은 눈 깔라는 문화가 공론정치를 이루지 못한다 본 것이다. 연산군 때는 이게 좀 심해서, 신하가 말을 못 할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세종 때도 마찬가지였다. 태종 시기를 지나다 보니 말을 좀 제대로 하라고 해도, 신하들이 말을 잘 안 했다. 잘못하면 죽으니까 당연한 일이다. 세종이 하도 답답해서 의정부부터 6조 판서 다 불러서 특별히 말할 일 없을 때도 임금 옷자락까지 붙잡고 강력하게 간언하던 당 태종 때 위징의 일화까지 이야기하며 자기 잘못 좀 지적하라고 부탁했다. 말기에도 자기 잘못을 그릇 지적했다고 해서 벌 준 적 없었으니, 제발 간언 좀 하라고 했다.
일찍부터 민의를 반영한 민주주의 왕정
그런 세종의 공론정치는 좋은 정책의 꽃을 피운다. 세종 이전 세금제도는 손실답험제라고, 직접 고을을 답사하며 세금을 결정한 방식이었다. 그런데 이게 가장 정확하지만, 세금 걷는 사람이 마음을 잘못 먹으면 부정 소지가 컸고, 실제 부정도 많았다. 세종은 이가 국가 100년 대계를 이룰 세금제도가 아니라 판단하여, 인정과세가 아닌 정액제로 고치려 했다.
이게 바로 전분 6등, 연분 9등제다. 땅을 비옥도에 따라 6개로 나눴고. 풍년, 흉년 등 기후 따라 또 9개로 나눴다. 모델링 하면 총 54개가 나왔다. 이를 위해서는 날씨는 물론, 전국 토지조사를 하여 비옥도를 측정해야 했으니, 그 당시 기술력으로 실행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심지어 집현전 학자들까지도 반대했다. 그러자 세종은 학자들을 불러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는데, 오히려 자기가 잘못한 게 많다는 이야기를 했다. 즉위 이래 입법한 게 많은데, 법과 현실을 잘 몰라서 좋은 뜻으로 시작했다 훗날 폐단이 있는 것 까지도 인정했다.
의도는 좋은 제도가 좋지 않은 결과를 낳은 사례는 많다. 조선에서는 환곡제가 그 대표적 케이스다. 가뭄 때 백성 구하려 만든 제도가, 나중에 국가가 이자 받는 제도로 변질된 것이다. 다산 정약용은 이 제도를 만든 사람은 자손이 없을 거라고 극언까지 했다.
그래서 세종은 세금제도를 만들 때도 그냥 만들지 않았다. 책상 앞에서만 만들지 않고, 제도에 대해 백성 의견을 직접 물어봤다. 세금제를 바꾸기 전, 당시 17만명의 백성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 결과 찬성자가 9만 8천 명, 반대자가 7만 4천 명이 나왔다. 사실상 세계 최초의 여론조사다. 그만큼 국가 정치를 왕이 깊게 생각했다. 백성에게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민의를 수렴하려 한 것이다. 그만큼 개방적으로 생각한 이가 바로 세종이다.
세종은 이 제도에 대한 반대가 심하자 많이 실망했다. 자신도 병도 많은데 하기 싫지만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며 명언을 남긴다. “몸이 수고로움을 당하여 편안한 것을 뒷사람에게 물려주라.”는 옛사람의 말을 인용했다. 반대가 많으니 자신도 힘들지만 내가 고집을 부리는 게 아니라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여러 폐단에 대해 이야기를 죽 듣고서는 폐단은 인정하나 문제는 반드시 해결해야겠다며, 최종 결정을 미룬다. 이때 시간이 이미 2경(二更; 밤 10시)이었다고 한다.
신하에게 끌려다니지 않는 추진력을 갖춘 세종
그렇지만 세종은 모든 걸 다 위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위임은 방임이 아니며, 왕은 정치에 관심 가지고 모든 사항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고 봤다. 의정부서사제 부활도 그렇지만, 세종의 추진력을 보여주는 최고의 일화는 훈민정음 창제다. 훈민정음은 신하들 모두가 다 반대했다.
그럼에도 세종은 공론정치를 버리고 독단으로 했다. 이는 500년이나 지나 독립신문부터 사용된다. 우리 민족은 300-400년 정도 한글 가치를 모른 것이다. 나중에는 신하들 반대가 워낙 심하니 최만리를 불러서, “니가 음운학 아는 게 뭐 있냐? 내가 소리 가지고 글자 안 만들면 이 일 누가 할 거냐?” 식으로 다그치며, 일을 추진해 나간다.
4군 6진 개척 강행도 마찬가지다. 북쪽 끝에는 산밖에 없는데 개척해서 뭐 쓰냐며, 모든 신하들이 반대했다. 황희 정승조차 여진족 때문에 인명 피해가 클 테니 하지 말자고 간언한다. 그럼에도 세종대왕이 반드시 해야 한다며, 김종서를 불러 7년 동안 돌아오지 말라고 한다. 이는 매우 위험한 일이다. 아무리 훌륭하고 충성심이 강한 장군이라도 오래 보내면 위험하기 때문이다. 중국만 봐도 국가 방위, 국방 관점에서 절도사에게 전권을 줬다가 반란을 맞은 경우가 많았다.
반대로 변방 장군이 왕에게 하나하나 결재 받으면 전쟁이 안 된다. 당나라가 전권을 줬다가 반란을 맞았다면, 송나라는 감시 붙이니까 아예 전쟁이 안 됐다. 그래서 김종서에게 전권을 주면 안 된다는 투서가 많았지만, 세종은 김종서한테 다 맡긴다. 나중에 세종이 말하기를 자신이 없었어도, 김종서가 없었어도 4군 6진 개척이 안 됐다고 이야기한다.
한글을 만든 것과, 4군 6진은 독단적 결정이었다. 정치는 신하들의 의견을 듣는 것과 결단, 양쪽이 다 있어야 한다. 정치는 시간이 제한되어 있다. 무조건 민주적이고 의논 많다고 좋은 게 아니다. 어느 정도 의견이 나오면 합치가 안 되더라도 결정해야 한다. 대통령한테 언제까지나 소통하라고 하면 안 된다. 어느 정도 의견이 충분히 나왔다면, 대통령이 결정해야 한다. 대통령이 의논과 결정, 둘 다를 존중하고 균형을 이뤄야 국가 정치가 잘 된다. 그 점에서 세종은 뛰어난 정치가였다.
그렇다면, 세종이 어떻게 군을 믿고 맡길 수 있었을까? 세종은 장군들에게 정말 잘 해줬다. 하경복 장군은 오랫동안 북방을 담당하니, 경상도 진주에 있는 어머니를 모시지 못했다. 그러자 세종이 하경복의 어머니 앞으로 당신 아들이 국가 위해 헌신하고 있다는 편지를 보낸다. 옷과 음식도 극진히 보내니 어머니가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하경복한테 걱정하지 말라고 또 편지 보낸다. 그러니 장군도 울고 어머니도 울고 다 감동한다.
장군들한테 똥별이라고 하면 안 된다. 대통령 앞에서는 말 못해도 돌아서면 당연히 부정적 감정을 가진다. 대통령은 철저한 안보관을 가져야 하고, 또 군사에 대해서도 깊은 조예가 있어야 한다. 청와대 안보실장은 단순히 군사문제만 알면 안 되고, 국제정치를 넓게 보는 시야를 갖춰야 한다. 강국에 둘러싸인 우리나라는 특히 그렇다.
율곡은 왕들에 대해 비판과 불만을 많이 토로했다. 심지어 율곡이 쓴 제왕학 <성학집요>에는 “왕은 자기가 잘난 줄 안다…”라는 말까지 나온다. 이외 다른 책에도 “왕들은 대개 사대부 주장이 너무 이상적이고 실정에 맞지 않는다며 의심하고 등용 안한다… 부모가 자식을 자애하는 이는 많지만, 임금이 백성에게 仁을 행하는 이는 적다…” 등 비판이 많다.
세종 시대 공론정치: 의논을 통한 정치
세종 시대는 우리 역사상 보기 드문, top-down이 아니라 bottom-up 리더십의 전성기다. 그만큼 의논을 통한 정치를 잘 했다. 신하에게 솔직하게 자신을 비판해도 좋다고 하고, 좋은 의견이 있으면 힘을 실어줘서 집행했으니 정치가 잘 된 것이다.
그는 왕위에 오른 후 가장 먼저 “의논”을 내세웠으며, 그 후에도 끊임없이 신하들에게 “진언”과 “직언”을 요구하였으며, 또 이들의 “언론을 의논”하게 했다. 김홍우 교수에 따르면 “더불어 의논한다”(與議)는 표현은 <세종실록>에서 가장 빈번하게 마주치는 말 중의 하나이다.
이처럼 의견이 잘 유통되었기에 신하들이 신나게 이야기를 잘 했다. 허조는 황희와 함께 세종 때 대표적 정승이다. 하지만 성격은 정반대였다. 황희는 너무 관대한 사람이었다. 누가 잘못해도 허허… 하며 넘어갔다. 대신 판단력은 비상했다. 황희는 태종과 세종, 두 사람이 모두 인정할 만큼, 판단력만큼은 누구도 비할 데 없는 이였다.
반면 허조는 매우 엄격한 사람이었다. 인사를 총괄하는 이조판서만 10년 넘게 했다. 어느 날 세종이 그대 친한 사람만 추천한다는 말이 있는데, 사실이냐고 따진다. 그러자 허조는 “그렇다. 내 친척이래도 현명한 사람은 쓴다.”라고 답했고, 세종은 허조의 말을 받아들였다. 허조가 죽을 때 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태평한 시대에 나서 태평 세상 죽으니 부끄러움이 없다. 재상도 됐고, 훌륭한 임금의 은총을 만나, 간하면 행하시고 말하면 들어주시었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다.”
이 역시 성군의 모습을 보여주는 일화다. 허조는 밤낮 없이 직무에 충실하면서도, 말할 것이 있으면 지위고하를 떠나 간언할 수 있었다. 덕택에 국가 일을 자기 임무로 여길 수 있었다. 예컨대 말단 과장이 장관에게 국가 중대정책에 대해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장관이 그 말을 잘 들어주면, 과장은 몸 바쳐 일하지 않겠는가? 세종은 허조가 분수를 벗어나 뭐라 해도 잘못됐다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신하의 말을 다 들어주니, 신하가 국가 일을 자기 일로 여겨 혼신의 힘 다할 수밖에 없다.
공론이 죽어버린 현대 한국 정치
우리나라는 지금 공론정치가 잘 안 된다. 역대 대통령들이 모두 불통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물론 청와대 안에서 보면 억울한 면도 있다. 실제로 역대 대통령들이 제일 고심하는 일이 소통이다.
하지만 우리 정치문화가 좀 딱딱하다. 상하 관계가 강하고, 평등 문화가 약하다. 지금 정부도 국무회의 때 다 받아쓰고… 수첩 정치, 받아쓰기 정치, 이런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국무회의 회의장 가면 장관마다 마이크가 있다. 그런데 다 받아쓰기만 한다. 장관이 누구인가? 그 분야에서 가장 유능한 사람들이다. 대통령이 각 분야를 어찌 다 알겠는가? 그런데도 마치 학생들이 선생 두려워하듯, 장관들이 대통령 질책을 두려워한다.
미국 정치도 잘 돌아가는 정치는 아닌데, 그 점에서 우리랑 다르다. 빈 라덴 체포 때 실무자인 안보 담당 보좌관이 가운데에 있고, 대통령은 구석에 쭈그려 앉아 있다. 일이 있을 때 딱 맡기는 거다. 우리나라는 그런 전통이 약하다.
조선시대도 세종 이후로 공론 정치에 좀 문제가 생긴다. 조광조 이후를 흔히 사림정치라 한다. 사림정치에서 공론정치는 공론과 도덕을 연결시키는 것으로 퇴보한다. 세종 때 공론 정치는 모든 사람이 이야기해서 의견을 뽑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림정치 들어온 후 가장 도덕적인 것을 공론이라 봤다. 도덕은 옳고 그른 게 있다. 도덕에만 얽매이면 종교전쟁과 비슷한 쪽으로 간다. 사림정치의 도덕적 면이 조선에 좋은 점도 가져왔지만, 공론을 너무 좁게 갔다. 그 결과가 당쟁이다. 당쟁은 의견 다른 사람과는 전혀 소통을 하지 않는 결과를 낳았다.
당쟁의 폐해는 이중환의 택리지에도 잘 드러나 있다. “오늘날 붕당의 환난처럼 심한 적이 없었으니, 이대로 나가고 고치지 않는다면, 장차 어떤 세상이 될 것인가? 한 모퉁이에 있는 탄환만한 나라로서 작다고는 하지만, 백성이 수백만인데, 그 심성을 모두 잃어버려서 구제하지 못하게 된다면 그 또한 서글픈 일이다.”
옳고 그름의 정치에서 대화와 타협의 정치로
공적 삶(public life)의 기초는 서로 다름(difference)을 인정하는 것이다. 정치세계의 가장 중요한 근본적인 입장은 다른 것, 차이가 존재하는 걸 인정하는 것이다. 나와 다른 사람은 나와 다르게 보고 다르게 듣는다. 그걸 인정할 때 공적인 삶이 가능하다. 조선의 사림, 당론 정치처럼, 자신들 의견만 옳고 다른 거 다 틀리다 생각하면 정치가 불가능하다.
한나 아렌트는 공적 삶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공론 영역의 실재성’은 수많은 측면과 관점들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기초해 있다. 이러한 측면과 관점들 속에서 공동세계는 자신을 드러내지만, 이것들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척도나 공통분모는 있을 수 없다. … 타자에게 보이고 들린다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은, 각자 다른 입장에서 보고 듣기 때문이다. 이것이 공적 삶(public life)의 의미이다.”
노무현 대통령도 이렇게 이야기한 적이 있다. “‘저 사람, 좌파냐 우파냐?’ 선택할 것이 아니라, 항상 반대편에 대한 공격을 일삼는 정치 노선이냐, 아니면 어느 노선이든 간에 대화와 타협으로 포섭과 절충을 하자는 그런 정책 노선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의 구분이 좀더 중요한 시기 아니냐, 그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 정치는 옳고 그름의 정치에서 좀 더 개방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반대편에 대해 공격을 일삼고, 좌파냐 우파냐를 따지는 정치를 넘어, 대화와 타협이 있는 열린 정치로 나아가야 한다. 정치를 노선으로만 생각하면 국가는 분열로 갈 수밖에 없다. 우파에서는 좌파가 아무리 좋은 이야기 해도 나쁘다 하고, 반대도 마찬가지인 게 우리 정치다. 이래선 나라가 잘 될 수가 없다. 세종 정치 전통, 진정한 공론 정치가 오늘날에 필요하다.
짤방, 동영상, 소제목 편집: 리승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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