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소한의 전쟁 준비도 없었던 조선
우리 민족의 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공부하다 보면 자랑스러운 승리의 역사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치욕스러운 패배가 있으며, 굴욕적인 장면들도 많다. 그 중에 대한 민국의 건국 이전에 존재 했던 조선은 치욕스러운 전투중 최악의 전투를 두개나 가지고 있다.
고려의 경우도 몽고의 침략 시절과 여진족과의 강화와 같은 부분에 있어서 국내 정치 상황의 불안정과 지배 계층의 도덕적 해이로 인한 치욕적인 전쟁 이야기가 남겨져 있다. 하지만 조선은 두번의 대규모 전쟁에서 각각 한번씩 세계사에 길이 남을만한 전투를 남겨 놓았다. 문제는 조선의 승리가 아니라 조선의 패전이라는 것이다. 그 첫번째 전투는 임진왜란 초기에 조선 정규군과 일본군간에 벌어졌던 용인 전투이다.
1592년 4월 13일 도요토미 히데요시 아래의 일본은 명을 정벌하기 위해 길을 빌린다는 명분을 들고 조선을 침략 했다. 20만명으로 구성된 일본군은 부산진성을 지키던 첨사 정발과 동래성을 지키던 부사 송상현을 죽이고, 북진을 거듭했으나, 200년 동안의 평화로 군비 준비가 부족했던 조선군은 제대로된 반격을 하지 못했다.
결국 조선군의 첫번째 반격 작전이었던 상주 전투에서 약 1000명의 병사를 이끌던 이일이 패전하고, 충주에서 경기도 – 충청도 연합군 1만명을 이끌던 신립마저 패배하고 전사하자 조선의 임금인 선조가 한양을 버리고 의주로 피난을 떠나게 된다.
당시 조선의 문제는 문을 숭상하고 무를 천시하는 풍조가 지나칠 정도로 만연하였고, 이러한 기조는 단순한 지배 계급만의 문제가 아닌 일반 민중에서도 발견되고 있었다. 특히 임진왜란은 일본의 침략이 전격적인 기습이 아닌 수년전부터 직접적인 경고가 있었던 것이였지만 이에 대한 대비가 전혀 되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정치적으로 동인과 서인으로 나누어져있던 집권 사림의 분열이 가장 큰 문제였다.
하지만 여기에 중앙 정부의 명을 받아 전쟁 준비를 하고자 했던 관료들 역시 일반 민중들의 큰 저항에 부딛쳐 전쟁 준비를 하지 못했다. 가장 큰 문제는 조선의 남부 지역은 대규모 전란을 겪지 않은지가 오래되어 전쟁 준비에 대한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했으며, 이에 따라 병력을 훈련 시키고, 징집하는 것과 성곽을 수리하는 지방 관리의 부역에 대해 중앙 정부에 대해 상소 및 불만이 끊이지 않았다.
겉만 화려했던 삼도 근왕군
이렇게 전쟁에 대한 준비가 전혀 되지 않고 있던 조선이 일본의 공격을 받자 초전에 패배를 거듭한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한편, 일본군의 침략의 1차 대상에서 벗어나 있었던 전라도의 지방관들은 일본군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들은 신립이 충주에서 패배하고 한양이 함락되자, 전라 감사 이광이 전라도와 충청도, 경상도의 군사를 모아 한양을 탈환한다는 작전 계획을 수립 선조에게 보고한다.
5월 19일 경상 감사 김수와 조우한 전라 감사 이광은 자신의 휘하의 병력을 데리고 먼저 출발하면서 시작된 삼도 근왕군의 진격은 6월 3일에 수원에 도착하면서 본격적인 한양 탈환 작전을 준비하게 된다. 전라도 (약 4만명) 충청도 (약 8000 ~9000명), 경상도 (약 100명)으로 구성된 삼도 근왕군은 전라 감사 이광, 경상 감사 김수와 함께 충청 감사 윤선각, 전라도 방어사 곽영, 광주 목사 권율, 동복 현감 황진등이 군을 이끌고 있었으며, 여기에 이지시, 백광언과 같은 당시 여진족 격퇴에 이름이 나있던 무장들도 참여했다. 하지만 삼도 근왕군은 몇가지 큰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문제점은:
1. 지휘 체계가 일원화 되지 않아, 군 명령 체계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특히 군의 핵심을 맏고 있었던 전라도 군 역시 이광과 곽영으로 지휘체계가 이원화 되어 있었다. 여기에 직책상으로 이광보다 위에 있었던 김수는 실질적인 병력을 갖추지 못하고 참전해 군의 사기에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2. 군을 지휘하고 있던 최고 지휘관 대부분이 문관 출신이고 무관 출신들이 이들을 지원하는 형태를 취했지만, 문관 출신들은 작전의 수립이나 시행에 있어 지나치게 소극적인 면모를 보이는 한편 무관 출신들은 이런 문관 출신들의 행동을 겁쟁이라 부르면서 업신여기고 있었다.
더욱이 이광은 개전 초기 모집된 군사 8000명을 이끌고 한양으로 올라가다가 함락 소식을 듣고 한번 후퇴 하려 한 경험이 있었다. 당시 조방장으로 이광을 따라 나섰던 백광언은 이광이 후퇴하자 칼을 꺼내 들고 그 자리에서 죽거나 다시 진격할 것을 결정하라고 위협하여 삼도 근왕병을 모으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니 문관과 무관 사이의 반목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 할 수 있다.
3. 병사들 대부분은 근왕병이라면 명목으로 모집된 병사들로, 군인이 아닌 일반인들이었다. 대부분 지방 수령들이 전시 동원 체제에 따라 강제 징집한 농부나 일반 백성이 대부분으로 전투를 수행할 능력은 고사하고 의사도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였다. 기록에 따르면 일부 병사들은 일본군을 피해 도망치던 피난민들이 많은 사람들이 질서 없이 움직이는걸 보고 모여들어 병사의 수가 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기도 할 정도로 군율이나 기강이 전혀 잡혀있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문제에도 불구하고 이광의 삼도 근왕군의 위세에 눌린 일본군은 수원을 버리고 한양으로 후퇴함으로써 근왕군의 사기를 한껏 올려준다. 수원의 독산산성에 진을 마련한 근왕군은 이후 작전 계획을 마련하는데, 이때 한양에서 왜군 1000여명이 용인쪽으로 이동해왔다는 첩보가 도착 이에 대한 대비책도 논의를 하게 된다.
광주 목사 권율은 한양 탈환을 위한 결전을 해야하는 상황에서 작은 규모의 적과 교전을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라고 반대 하였지만, 눈앞에 적을 두고 갈 수 없다는 의견에 따라 용인의 왜군을 격파하기 위한 선봉대 2000명이 구성되었다. 선봉 부대의 지휘는 백광언과 이지시, 이지례가 맡았고, 이들은 북방에서의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왜군을 몰살 시키고자 했다.
6월 5일 아침 백광언과 이지시가 이끄는 부대는 20-50 명 단위로 구성되어 용인 인근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에 대한 전면 공격을 시작했다. 이 소식은 즉각 한양의 후방 방어를 맡고 있던 와키자카 야스히루에게 전해졌고, 그는 즉각 자신의 정예보병과 기병 1000명을 이끌고 조선군을 막기위해 용인 방면으로 진격했다.
소규모 정찰 분소를 지키는 일본군의 진지들을 격파하면서 진격을 시작한 조선군이 와키자카의 본대와 마주친 것은 오후 1시경. 소규모의 왜군 진지를 도륙하면서 적진으로 깊숙하게 진격했던 선봉대의 측면을 기병과 장창병으로 기습해왔다. 왜군의 기습으로 선봉의 조선군의 전열이 갑자기 무너지면서 도망자가 속출하기 시작했고, 이를 수습하려던 장수들이 왜군이 조총 저격으로 죽자 전군이 도망쳐 버렸다.
다행히 선봉대는 용인 광교산 일대에 진을 치고 기다리던 본진과 합류하면서 6월 5일의 첫번째 전투는 완료 되었지만 6월 5일의 전투로 조선군은 백광언과 이지시, 이지례와 같은 무관 대부분이 전사하고 선봉대로 나선 병력이 절반 이상이 죽거나 다치는 피해를 본다.
싸우다 죽은 것도 아니라 도망가다 서로에게 깔려죽은 조선군
하지만 6월 5일의 전투는 6월 6일 벌어진 본 전투의 서막에 불과했다. 이제 그나마 군사들의 군기와 선봉에서 활약을 해줄 무관들이 전사한 조선군은 장수가 없는 오합지졸로 변모해 버린 상황. 6월 6일 아침 밥을 해먹겠다면서 가마솥에 불을 지피고 있던 조선군을 발견한 일본군이 돌격을 해왔다. 무기와 갑옷도 입지 않고 무 질서하게 밥을 해먹고 있던 조선군은 제대로 된 방어선이나 방책도 갖추지 못하고 있었고, 아무 생각없이 일본군의 기습을 받은 것.
더욱 한심한 일은 일본군이 기습을 해오자 이에 대비해 병력들을 지휘 해야할 장수들이 먼저 도망을 친 것이다. 맨 처음 충청 병사 신익이 일본군의 기마병을 보고 도망치자, 윤선각, 이광, 김수 모두 전열을 이탈해 도망 쳐 버렸다. 지휘부가 와해된 조선군은 싸움다운 싸움도 하지 못하고 무기와 식량도 다 버리고 도망치기 시작했고, 일본군은 도망치는 조선군을 쫓아가며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마음껏 도륙했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조선군의 피해는 일본군의 무기에 피해를 입은 사람보다 도망치나가 넘어지거나 서로에게 깔려서 죽거나 다친 사람이 더 많았다고 한다. 당시 참전한 권율은 휘하의 군사를 움직이지 않아 피해를 줄였고, 동복 현감 황진은 자신이 이끌고 온 병력 대부분을 그대로 보전하고 후퇴하는데 성공하여 이후 그의 병력과 권율의 병력이 전라도 방어 작전에 주력으로 활용되게 된다.
용인전투 이후 일본군 사이에는 조선의 장수들은 겁쟁이들이라는 신념이 깊숙하게 스며들었고, 이 전투를 지휘했던 김수, 이광, 윤선각등은 민중의 놀림감이 되었으며, 이광과 윤선각은 파직되었다. 용인 전투가 보여주는 모습은 아마도 준비가 안된 인물과 부대가 전장에 나갔을때 어떤일이 벌어지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다.
다음번에 볼 쌍령 전투와 함께 조선의 치욕적인 전투 기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모습인 용인 전투의 주인공은 무능한 지휘관과 그런 무능한 지휘관을 경멸하는 부하들, 그리고 마지 못해 전쟁터로 끌려나온 병사들이다. 이런 군대의 구성으로는 어떤 전쟁을 치른다고 해도 승리를 한다는 것 자체가 기적과 같은 일이다.
무경 칠서중 하나인 오기의 오자 병법에 따르면 “군법과 지휘 체계가 명확하지 않고, 상벌이 불 공정하다면, 군사들은 징을 쳐도 멈추지 않고, 북을 울려도 나아가지 않을 것이니 백만 대군이 있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라고 말한바 있다. 용인 전투에 나선 조선군의 모습이 오기가 설명한 필요 없는 백만 대군의 모습 그대로가 아닌가?
여기에 오기가 말한 공격을 하면 이길 수 있는 적군의 유형 일곱번째와 여덟번째에 해당하는 엉성한 군기와 전장 관리는 일본군에게 공격하시오라고 커다랗게 표지판을 세워 놓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오자 병법에서 지체 없이 공격할 수 있는 적군의 유형 일곱번째는 지휘관은 무능하고 간부들은 경솔하며, 병사들은 단결되지 않아 자주 동요하며, 상호간에 협조 체계가 이루어지지 안는 부대이고, 여덟번째는 진지의 배치가 불안정하고, 숙영 태세가 엉성하며, 지형이 높은곳에 선정해 절반 가량이 노출되고 있는 적군을 말한다.)
지휘관이 엉망이면 모든 것이 엉망
군대가 전쟁에 참여하여 전투를 수행한다는 것은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일이다. 이는 결코 섯불리 결정되어서는 안되는 것이고, 감정적으로 움직여도 안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광와 다른 삼도 감사들이 이끌었던 삼도 근왕군은 그 시작부터 개인의 명예 회복을 위해 구성된 조잡한 군대였으며, 어떤 준비나 계획도 없이 움직인 부대였다.
병사들의 훈련 부족을 탓할 수 있으나 그런 병사들을 이끌고 전선으로 나간 지휘관의 책임은 더욱 크다. 공자는 논어에서 “훈련되지 않는 백성을 실전으로 내모는것이야 말로 백성을 버리는 것”이라 말했다. 그런데도 당시 많은 지휘관들은 농부와 생업 전선에서 고생하던 민초들을 징발에 칼과 활을 쥐어주며 나가 싸우라라고 말했다.
하지만 전장에서 보여준 당시 일부 지휘관들의 행태는 그들과 함께 전장터에서 싸울자가 누가 있을지도 의심하게 만드는 행동을 서슴지 않고 했다. 그리고 정부는 그런 자들을 벌하지도 않고, 넘어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대표적인 예가 경상 감사 김수이다. 그는 임진왜란 초기 참전한 전투마다 도망치기에 바뻣으며, 심지어 휘하의 지방관들에게도 일본군을 피해 도망치라고 명령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당대 권력자와 깊은 관계를 자랑하는 인물이였고, 처벌을 받기 보다 진급을 거듭해 중추원 영사에 올랐다.)
오자는 국가와 군대를 다스리는데 있어 상벌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 했지만, 임진왜란 시절 조선은 상을 받을 자들은 처벌하고, 벌을 받을 자들은 상을 주는 이상한 형태의 통치 구조가 판을 치고 있었다. 이러니 국가의 영이 제대로 서지 않고, 7년 동안 나라를 일본군에게 국토가 유린되는 문제점을 보이고 만 것이다. 그리고 더욱 큰 문제는 조선의 지배층은 이런 난리를 겪고 나서도 자신들의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고 권력 다툼에만 전력하다가 결국 청나라에 참패를 당하고 만다.
그리고 그 전쟁에 세계 역사상 최악의 전투로 손 꼽을 수 있는 쌍령 전투가 있다.
원문: 로빈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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