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 이야기가 2000년대 극초반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학벌간 차별과 지역감정의 골이 지금보다도 더 깊던 20년 전의 이야기라는 것을 말이다.
상고 출신의, 대학을 졸업하지도 않은 노무현이 엘리트 중의 엘리트 이회창을 이겼다. 한나라당 사람들과 이회창 후보의 지지자들은 이 사실을 믿고 싶어하지 않아했다. 기성 권력부터 언론까지 그랬다. 이후 노무현 대통령이 맞이하게 되는 여러 장벽은 이 엘리트주의에서부터 시작된다.
사람들은 애초에 선거 결과 자체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대선이 끝난 후 한 특수학교 교사가 인터넷에 올린 「정보기관 중견 간부의 양심선언」이라는 괴문서에 낚여 버리고 만다. 인터넷 보급 초기라 가짜뉴스에 대한 면역도 없던 시절이다. 결국 한나라당은 당선무효소송을 제기하고, 재검표를 주장했다. 결국 전국 1천만 장 가량의 투표지를 재검표하게 된다.
그러나 뒤집어진 표는 0.01%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회창 후보의 표는 50표가 늘고, 노무현 후보의 표는 734표가 줄었다. 덕분에 한나라당은 재검표 비용 약 5억 원을 고스란히 부담하게 된다. 참여정부의 아슬아슬한 시작이었다.
열린우리당 창당에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노무현은 기존의 새천년민주당에서 부족함을 느끼고 있었다. 새천년민주당은 보수 야당인 한나라당만큼 낡고 보수적으로 변해 있었고, 호남이 지역구라는 이유만으로 당선된 함량 미달의 의원들도 많았다. 변화의 필요성을 느낀 다양한 의원들이 힘을 모으면서 열린우리당이라는 여당이 탄생했다.
민주당은 화가 났다. 노무현 대통령이 민주당 간판으로 당선된 후 빠져나가는 듯한 이미지이기도 했고 . 대선 때 사용한 경비 44억 원도 고스란히 민주당 몫의 빚으로 남아 있었다. 감정이 시시각각 예민해지는 가운데, 노무현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했던 말이 트리거가 되었다.
개헌저지선까지 무너지면 그 뒤에 어떤 일이 생길지는 나도 정말 말씀드릴 수가 없다.
2004년 2월 18일, 합동 기자회견에서 한 말이다.
국민들이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을 압도적으로 지지해줄 것을 기대한다. […] 대통령이 뭘 잘해서 열린우리당이 표를 얻을 수만 있다면 합법적인 모든 것을 다하고 싶다.
2월 24일, 방송기자클럽 초청 대통령 기자회견에서 한 말이다.
위의 두 발언은 대통령의 선거중립의무를 위반하고 특정 정당 지지를 유도했다는 혐의를 불러일으켰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대통령에게 중립의무 준수를 요청했으나, 대통령은 납득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야권은 분노했다. 여기서부터 탄핵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2004년 3월 12일, 그날 국회의 풍경은
3월 5일, 대통령의 발언을 접한 새천년민주당은 긴급의원총회를 소집했다. 대통령이 선거법 위반 및 측근비리에 사과하지 않는다면 탄핵을 발의하겠다고 선언했다.
3월 6일, 청와대는 부당한 정치적 정략적 압력이라며 거부했다.
3월 9일, 한나라당 의원 108명, 새천년민주당 의원 51명이 서명한 탄핵소추안이 발의되었다. 자민련은 동의하지 않았지만, 사과는 요구했다.
3월 10일, 탄핵안 1차 처리에 실패한다.
3월 11일, 노무현은 특별 기자 회견을 열고 사과 요구를 거부했다. 그러자 자민련도 당론을 선회하면서 탄핵안 가결이 급진전된다.
운명의 3월 12일,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국회에 의자와 서랍을 쌓고 문을 끈으로 묶어 국회를 봉쇄했다. 아예 의장대 아래에서 잠을 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나라당과 민주당 의원들은 새벽 3시 50분에 기습했고, 육탄전이 시작되었다. 당시 정동영 의원은 의사봉을 숨겼고, 이부영 의원은 엉엉 울고, 정세균 의원은 의장 자리에 앉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새벽은 지나가는 듯했다.
그러나 오전 11시 4분이 되어 야당 의원들이 경호원을 대동하고 동시에 입장했다.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순식간에 포위되어 끌려나갔다. 총 195명의 의원이 투표를 실시하였으며, 투표 결과 193명이 찬성하고 2명이 반대해 가결되었다. 의장은 의사봉을 잡고 세 번 내려친 뒤 탄핵소추안 가결을 선포한 후, 한 번 더 말했다.
총 투표 수 195표 중 가 193표, 부 2표. 헌법 제65조 2항 단서의 규정에 의하여 대통령 노무현 탄핵소추안은 가결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수많은 카메라가 그들을 찍고 있었다. 한 의원이 퇴장하면서 카메라에 이렇게 말했다. 그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대한민국 만세, 자유민주주의 만세, 16대 국회 만세.
그리고 국민은… 대단히 화가 났다
여러분, 얼마나 놀라셨습니까? 설마 그러랴 했습니다마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됐습니다. 헌법기관인 국회의원의 개별적인 판단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193명의 찬성으로 비리로 점철된 16대 국회는 이제 대통령의 권한을 정지시킨 것입니다. 탄핵 가결 그 최대 피해자는 물론 우리 국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뉴스데스크는 1시간 일찍 시작해서 밤 10시 반까지 2시간 반 특집 뉴스데스크로 보도해 드리겠습니다.
이날 MBC뉴스의 포문을 연 엄기영 앵커의 말이다. 이 사건에 기민하게 반응한 곳은 MBC만이 아니었다. 다른 방송사 모두 촉각을 곤두세워 헌정사상 최초의 탄핵 사태를 보도했다. 긴급 여론조사도 실시되었다. 국회가 잘못됐다는 의견이 무려 70%로 집계되었다. 이 여론조사 결과는, 향후 펼쳐질 정국의 예고편과도 같았다.
당시 국회는 중대한 오판을 저질렀다. 탄핵으로 인해 자신들의 지지층이 결집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국회의원은 대대로 대한민국에서 제일 신뢰도가 떨어지는 직종(…)이다. 그리 크게 잘못한 것도 아닌데 자신의 손으로 직접 뽑은 대통령을 탄핵시켰다는 게 시민들의 공분을 불러왔다.
어두웠던 1980년대와 일반 시민이 대통령이 된 1990년대를 지나, 드디어 정치가 안정된 2000년대로 접어드는 즈음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공성전에 가까운 형태로 권력을 뒤집어 버렸다. 이는 투표권에 민감한 국민의 심기를 통째로 거스르는 짓이었다.
이때 본격적인 촛불 집회가 시작된다. 촛불집회라는 형태 자체가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미선이·효순이 사건으로 알려진 미군 여중생 압사 사고 집회 때였으나, 이 탄핵 심판 시위를 거치며 완전히 시위의 한 형태로 자리 잡게 된다. 분노한 시민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탄핵무효 민주수호’를 부르짖으며 노무현 대통령의 직무 복귀를 요구했다. 이때 주최측은 집회에 나온 사람들의 규모를 약 22만 명으로 추산했다.
사람들이 길거리에 쏟아져 나오는 수준의 분노였으니, 제17대 선거의 결과는 불보듯 뻔했다. 직후에 이어진 17대 국회의원 총선은 이른바 ‘탄핵 심판 선거’가 되어버렸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지지층은 급격하게 붕괴하고, 반대로 열린우리당은 막대한 지지층을 흡수하게 된다. 심지어 지역감정조차 타지 않는 공통된 의견이었다. 대구경북에서조차 노무현은 싫어도, 민주주의의 기반을 뒤흔드는 것은 더 싫다는 여론이 튀어나왔다.
열린우리당은 과반의 의석을 확보하는 압승을 거뒀다. 200석까지 확보할 수도 있었는데, 정동영 의원이 ‘노인들은 투표하러 오지 말라’는 노인 폄하 발언을 하면서 막판 지지율이 떨어져 나갔는데도 그러한 수준이었다.
반면 민주당은 간신히 목숨만 이어붙인 형국이었다. 텃밭인 호남 지역만 아니었다면 당선자를 배출하지 못할 뻔했다. 그래도 한나라당은 의석을 건졌다. 당시 신임 당 대표였던 박근혜 의원이 천막당사 선거운동을 펼치며 예상보다 선방했던 것이다.
2004년 5월 14일, 헌법재판소가 대통령 탄핵 소추안을 기각했다. 이로써 헌정 사상 첫 대통령 탄핵 사태가 종결되었고, 노무현 대통령은 다시 대통령의 자리로 돌아왔다. 총 63일이 걸린 일이었다.
탄핵을 기각하는 헌법재판소 풍경.
영광의 총선, 나락의 지선
그러나 영광은 오래 가지 않았다. 노무현 재임기 후반, 2005년부터 2008년까지 전 국민은 그야말로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고스톱에서 져도 노무현 때문이었고, 접촉사고가 나자 버스 기사가 뛰어내려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라고 소리를 지르던 시절이다. 그만큼 여론이 악화되었던 것이다.
당시 노무현 정권은 여러 실정을 거듭하고 있었다. 재벌 개혁 공약은 파기했고, 수도 이전 공약은 위헌 판결을 받았고, 부동산 정책과 교육 정책에서 크게 실패했다. 언론은 연신 정부를 때려댔다. 자연스럽게 노무현 정부에 대한 지지율은 크게 떨어졌다. 당시 노무현 정부의 향방을 가리키며 이런 조롱이 따라다니기도 했다.
좌측 깜빡이 켜고 우회전했다.
안 그래도 대통령 임기 중에 치러지는 지방선거는 정권 심판론의 성격을 띠기 마련이다. 여기에 노무현 정권의 실정이 더해지자, 결과는 더 처참해졌다. 제4회 전국 동시 지방선거의 최종 득표율은 51.6%를 달성했다. 이때의 침체된 분위기를 반영하듯, 투표율 자체도 저조했던 것이다. 이때의 선거 결과는 한마디로 ‘열린우리당의 참패, 야당인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압승’이었다.
열린우리당은 여기에서 큰 타격을 입는다. 열린우리당과 노무현 정권의 토대에 기반이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한나라당에게는 영남이, 민주당에게는 호남이 있었으나 노무현을 당선시킨 것은 오로지 변화를 원하는 시민들의 모임이었다. 그런데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자, 자연스럽게 등을 돌린 것이었다.
이후 열린우리당은 이합집산을 거듭하다 대통합민주신당과 합당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4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천국과 지옥을 오간 정당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10년 후, 대한민국은 다른 방향에 서서
이 지방선거에서 큰 주목을 받은 사람은 따로 있다. 바로 한나라당 의원 박근혜였다. 박근혜는 한나라당이 소멸의 위기에 놓여 있던 제17대 총선에서 끌어올리고, 제4대 지방선거는 엄청난 승리로 이끌었다. 화려한 존재감으로 ‘선거의 여왕’이라는 별명도 얻으며 유력한 대선 후보가 되었다.
한편, 노무현 정부 시절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면서 시민들의 물질적 부에 대한 갈망은 더욱 커지고 있었다. 이 분위기를 타고 경제 분야에서 강점을 보이며 올라온 후보가 있었다. 당시 서울시장이었던 이명박 후보다. 그는 노무현의 뒤를 이어 제17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가 퇴임한 후, 박근혜 후보가 제18대 대통령이 되었다.
이제 두 사람은 모두 교도소에 있다. 제19대 대통령에는 노무현의 유산을 이어받은 비서실장 출신 문재인이 등극했다.
2004년에 광화문으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은 약 20만 명이었고, 2016년 광화문을 메운 사람들은 약 5배인 100만 명으로 추산되었다.
2004년, 국회의장 자리를 점거해 눈을 감고 있던 국회의원 정세균은 2016년 국회의장이 되어 손수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하는 의사봉을 두드렸다. 헌정사상 두 번째 대통령 탄핵이었다.
환호성으로 가득했던 2000년 초반의 국회와 달리, 2016년의 국회의원들은 침통한 얼굴로 앉아 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2021년 8월 현재, 민주당은 후보 경선을 진행중이다. 이재명 캠프의 김영진은 강력한 후보인 이낙연 후보를 이렇게 공격했다.
이낙연 후보가 2004년에 노무현 대통령 탄핵할 때 탄핵에 찬성했습니까? 반대했습니까?
이낙연 대표는 짤막한 입장을 내놓았다.
예, 반대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될 때, 총 192표 중 단 2명이 반대표를 던졌다. 이중 한 명이 이낙연이라는 말은 그동안 계속 떠돌던 소문이었다. 탄핵 표결 뒤 처음으로 찬반 여부를 공개적으로 밝힌 것이다. 여기까지 약 17년이 걸렸다.
같은 지점에서 다른 이야기가 전개된다. 10년 후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지금 정치를 하는 사람들은 어떤 모습으로 그 자리에 서 있을까? 광화문은 그때도 시끄러울까? 미래를 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다만 그 모습을 결정하는 자리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그것을 선거라 부른다.
우리가 직접 행사하는 한 표가 미래의 형태를 결정지을 것이다. 그 한 표가 모여 역사가 된다.
『선거로 읽는 한국 정치사』는 매 선거 때마다 벌어졌던 드라마틱한 각축전을 다루고 있다. 가장 중요한 정치적 순간인 선거에 포커스를 맞춤으로써 대한민국 민심이 왜, 어떤 방향으로 흘러갔는지 알 수 있다. 딱딱하지 않고 부드럽게 서술되어 있기 때문에, 이야기책 읽듯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구글에서도 찾기 힘든 당시 선거 자료를 일목요연하게 볼 수도 있다.
2022년, 새로운 대통령 선거와 지방선거를 앞두고 있다. 이 책을 읽고 대한민국 여론이 어떻게 흘러갈지 점치는 것도 큰 재미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