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무명이었다. 1988년 5공 청문회 스타, 아무도 뽑아주지 않는 부산을 혼자서 3번 들이받은 바보. 그가 당선될 것이라고는 대통령 선거 1년 전만 해도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
대통령 후보의 1년은 그 어느 때보다도 밀도가 높다. 유력 후보가 진창에 빠지기도 하고, 무명 신인이 갑자기 스타로 떠오르기도 한다. 그중에서도 2002년은 유례없이 뜨거운 드라마였다. 그 역전극을 오늘 다시 이야기해보려 한다. 대한민국 정치의 새로운 계보가 탄생했던 그 1년에 대해서.
새천년민주당 경선, 드라마가 시작되다
김대중 대통령의 레임덕이 심화되던 2002년, 새로운 대선을 1년 앞둔 상황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던 이름은 이회창과 이인제훗날 피닉제가 되는 그 인물였다. 이회창은 한나라당의 총재였고, 이인제는 제15대 대선에서 그 이회창을 겨눠 떨어뜨린 인물이었다. 대선은 이 둘의 일기토가 되리라는 예측이 많았다. 그러나 이인제 혼자서는 이회창을 무너뜨리기 힘겨워 보이는 측면도 있었다.
여당이었던 새천년민주당은 새로운 실험에 도전한다. 대통령선거 후보 경선을 ‘국민 참여 경선’ 형식으로 바꾸기로 한 것이다. 경선 후보들은 3월부터 4월까지 각 도시를 순회하며 당원 50%, 일반 국민 50%의 비율로 투표를 받기로 했다. 그때만 해도 몰랐다. 이게 각본 없는 드라마라는 소리를 듣는, 신의 한 수가 될 줄은.
이때 후보는 이인제와 동교동계 대표 의원 한화갑, MBC 앵커 출신으로 인지도가 높았던 정동영, 민주화 운동으로 이름 높은 김근태, 그리고 인지도 낮은 노무현이었다. 아무도 노무현이 활약할 줄은 몰랐다. 그러나 노무현에게는 색다른 무기가 있었다. 바로 그의 팬클럽 ‘노사모’였다.
당시의 대한민국은 초고속인터넷 가입자 수가 1,000만 명에 가까워져 있었다. 1990년대 후반 김대중 대통령이 소프트뱅크 손정의 회장을 만나 들었던 국가 성장 전략인 “첫째도 브로드밴드, 둘째도 브로드밴드, 셋째도 브로드밴드”를 실천한 결과였다. 그러나 아직 정치가들은 인터넷의 힘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선거전략은 대부분 전통적으로 내려온 방법을 택했다.
그러나 노무현의 팬들은 2030세대로, 이미 인터넷을 활용하는 데 능숙해져 있었다. 이들은 온라인 공간을 기반으로 뭉쳐 경선부터 대선, 그리고 대통령 재임 기간까지 한국 정치에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게 된다. 이들의 결성에 대해서는 더 자세히 후술하기로 한다.
경선으로 돌아와서, 제주 첫 경선에서 노무현은 3위에 그쳤다. 그다음 경선 지역인 울산광역시에서 1위를 한 건 쉽지 않아도 그럴 만한 일이었다. 원래 노무현의 정치적 기반이 영남이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광주광역시 경선이었다. 광주는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핵심이자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이었다. 다들 민주당 지지율 1위인 이인제와 광주가 기반인 한화갑 후보가 1위를 두고 다툴 것이라 예상했다.
그런데 광주 경선 직전, 놀라운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다. 노무현VS이회창 양자구도일 경우 노무현이 오차범위 내에서 근소하게 앞선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던 것이다. 이 결과를 보도한 곳은 문화일보였는데, 당시에 문화일보는 광주에 들어와 있지 않았다. 이때 노사모가 직접 광주까지 내려와서 신문을 시민들에게 나눠줬다고 한다. 이 덕분에 광주의 여론은 요동치게 된다.
결국 광주 경선에서 노무현이 1위를 차지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였다. 이후 노풍(盧風), ‘노무현 바람’이라는 단어가 탄생했다. 노무현은 노풍을 타고 순조롭게 강원도, 경남, 전북, 대구에서 연거푸 1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정치계뿐 아니라 여당인 민주당마저도 큰 충격에 휩싸인다. 광주에서의 패배에 낙심한 한화갑은 후보에서 사퇴해 버리고, 위기감을 느낀 이인제는 노무현을 ‘색깔론’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노무현의 아내인 권양숙 여사의 장인 아버지 권오석이 공산주의자로, 양민학살에 가담했다는 전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이회창과 조선일보, 동아일보가 합세해서 공격했다.
그때 노무현이 선택한 것은 정면 돌파였다. 그는 인천 경선을 앞두고 두고두고 회자되는 명연설을 남긴다.
제 장인은 좌익 활동을 하다 돌아가셨습니다. 해방되던 해에 실명하는 바람에 앞을 못 봐 무슨 일을 얼마나 했는지 모르겠지만, 제 처가 네 살 때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그 사실을 알고도 결혼했습니다. 그래도 아들딸 키우고 잘살고 있습니다. 뭐가 잘못됐다는 겁니까? 사상도, 지역도, 연령도 하나로 합쳐야 할 시대에 왜 이런 이야기들을 끄집어내서 세상을 혼란케 합니까? 이런 아내를 버려야겠습니까? 그러면 대통령 자격이 생깁니까? 이 자리에서 여러분이 심판해주십시오. 여러분이 자격이 없다고 하신다면 대통령 후보 그만두겠습니다. 여러분이 하라고 하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저는 아내에게 불만이 없습니다.
두고두고 회자되는 그때의 그 연설.
그렇게 4월 27일, 잠실에서 대망의 서울 경선이 열렸다. 이날 노무현은 새천년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지지율은 무려 50%까지 치솟았다. 첫 번째 봄날이었다.
‘노사모’란 무엇인가?
여기서 노사모를 짚고 가자. 풀네임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 이들의 탄생 때만 해도 이들이 16대 대통령 선거의 비장의 무기가 될 줄 알았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2000년, 당시 노무현은 국회의원 후보였다. 부산에 출마해서 또 떨어졌다. 종로구에서 출마하면 평탄하게 당선할될 수 있었는데도, 굳이 험지 부산을 들이받은 지 3번째였다. 그도 그럴 게, 그는 당시 우리나라의 해묵은 지역감정을 타파해야겠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르는 지역감정을 건드린 한나라당 허태열 후보에게 또 지고 말았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그가 낙선한 직후, 사람들이 그의 웹사이트 ‘노하우’에 모여 밤을 새워서 토론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야기가 도저히 온라인에서 그치지 않자, 어느 날 한 대전의 PC방에서 60명이 모였다. 이날 이 사람들이 ‘노무현을 사랑하는 모임’을 만들었다.
이들의 목표는 처음부터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였다. 한 푼도 받지 않고 오로지 이 목적만을 위해 모여 이변을 만들었다. 이후 정치인들의 팬클럽 시조가 되기도 한다.
2002 월드컵, 새로운 대선 주자로 정몽준을 소환하다
그런데 이상한 변수가 나타났다. 2002 한일 월드컵이었다.
최근에도 2020 도쿄 올림픽이 진행됐지만, 2002한일월드컵은 비교도 할 수 없는 열기를 띠고 있었다. 거의 사회현상에 가까울 정도였다. 한 판 한 판 이길 때마다 국민들은 엄청나게 환호했다. 월드컵과 관련된 모든 인물은 맹목에 가까운 인기를 얻었다.
이때 나타난 인물이 정몽준이다. 그는 대한축구협회장으로서 월드컵 유치에도 지대한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좋아하다 못해, 정치인으로서도 지지하기 시작했다. 마침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은 답보 상태였다. 결국 정몽준은 국민통합21이라는 정당을 창당해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참고로 이때 이회창은 두 아들의 병역기피 논란으로 허우적대고 있었다…)
설상가상 민주당은 지방선거에서도 지고, 재보선에서도 패했다. 이대로 따로 출마한다면 노무현과 정몽준의 표가 갈려 이회창의 당선이 유력해질 상황이었다. 다시 한나라당에게 정권을 넘길 수는 없다고 생각했고, 결국 노무현은 승부수를 띄웠다. 국민통합21이 제안한, 여론조사에 의한 단일화 방식을 정몽준에게 제안했던 것이다. 여론조사는 TV토론이 끝난 후 진행하기로 했다.
노사모는 이때도 필사적이었다. 이 여론조사 전화 한 통을 받기 위해, 집 전화는 무조건 핸드폰으로 착신되도록 설정을 변경해 오는 전화를 모두 받았던 것이다. 이런 노력의 끝에, 결국 노무현이 더 높은 지지율을 보였다. 천신만고 끝에 단일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갑작스러운 단일화 철회의 이유
이후 노무현은 다시 여론조사에서 이회창을 앞서기 시작했다. 이회창은 37%, 노무현은 43.%로 6.5%나 앞서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단일화 이후 정몽준은 노무현의 유세 현장에 동행하기로 했다. 하지만 정몽준은 어째서인지 노무현 후보 지원 유세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다 선거 전날 위기가 찾아왔다. 서울 명동에서 공동 유세를 마친 뒤, 갑자기 국민통합21 대변인이 기자회견을 열어 단일화 철회를 선언했던 것이다.
왜 정몽준은 갑자기 단일화를 파기했던 걸까? 가장 유력한 설은 내각 구성에서 불만이 쌓이던 중, 선거운동 마지막 유세에서 노무현이 정동영과 추미애를 유세차량 단상에 올려 차기 대선주자로 소개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정몽준에게 재벌 개혁에 동참할 뜻이 있냐고도 물었다고 한다. 정몽준은 이 모습을 보면서 완전히 심사가 뒤틀렸고, 그래서 쾌속으로 지지 철회를 발표했다는 것이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노무현 캠프는 혼돈에 빠졌다. 노무현은 정몽준을 직접 찾아갔지만, 결국 만나지 못하고 돌아서야 했다. 그 쓸쓸한 모습이 TV를 통해 생중계됐고, 이 모습이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다.
대선 당일인 새벽 5시 30분경, 노무현 후보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정몽준 국민통합21 대표와의 단일화 공조는 여전히 유효하며, 집권하면 정권을 공동으로 운영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때 노무현의 지지자들은 동네 아파트 단지를 돌며 조선일보를 치우고 있었다. 그날 조선일보의 헤드라인은 이것이었다.
정몽준, “盧 지지 철회”
그렇게 대선 직전까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선거가 진행되었다. 12월 19일, 싸늘한 목요일이었다.
기적적으로 당선되기까지, 길고 길었던 하루
그날 밤의 당선 소식은 밤 11시 30분경에 발표되었다. 어려운 승부였다.
결과적으로 노무현 후보는 1,201만 표를, 이회창 후보는 1,144만 표를 얻었다. 겨우 57만여 표 차이였다. 주요한 승리의 원인은 노무현 후보가 호남에서 받았던 압도적인 지지와 26만여 표 앞선 충청권 지지였다. 역전에 역전을 거듭한 드라마틱한 선거였던 만큼, 초박빙 접전 지역도 많았다. 불과 수십 표 차이로 순위가 갈린 곳이 3곳이나 될 정도였다. 다만 부재자투표는 초 압승했다고.
정몽준의 지지 철회는 몇 퍼센트의 지지율이 빠지는 정도의 타격을 입혔다는 게 중론이다. 하지만 동시에 민주당 지지자와 무당파층의 표를 결집했다는 분석도 있다. 특히 노무현 후보가 문전박대당하는 사진이 방송 전파를 타면서 동정표를 모았다는 것이다.
또한 노사모를 비롯한 젊은 층이 인터넷 및 핸드폰으로 투표를 독려한 전략이 무척 유효했다고도 한다. 오전에는 이회창 지지율이 높다가, 젊은 층이 투표소에 가는 오후 시간대에 지지율이 올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디언에서는 당선 소식의 제목을 ‘세계 최초의 인터넷 대통령이 로그인했다(World first internet president logs on)’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후, 이회창과 정몽준의 운명은
왜 이회창은 패배했을까? 전문가들은 ‘김대중의 호남 지지 기반을 노무현이 흡수했기 때문’이라 한다. 하지만 이회창 본인은 이런 분석에 반대했다. 그는 자신의 이미지에서 문제점을 찾았다.
유권자 중 좌‧우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중간층, 이른바 중도층이 선거의 승패를 좌우하는데, 나는 이들을 설득하는 데 실패했던 것이다. 나는 선거 유세나 토론 또는 홍보에서 청중이나 상대방을 이론의 여지 없이 압도할 만큼 힘 있는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선거는 설득인데 그 능력이 부족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정몽준의 짧은 정치 인생 또한 실질적으로 그 지점에서 멈추었다. 정치적 이미지도 망가진 데다, 배신자로 낙인이 찍혀버린 것이다. 훗날 ‘버스비 70원’ 발언으로 세상 물정 모르는 상속 재벌로 이미지가 박혀버리기까지 한다. 거기에 2014년 그의 아들이 했던 ‘국민이 미개하니까 국가도 미개한 것 아니냐’는 발언은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했던 정몽준을 낙선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것은 또 다른 시작이었을 뿐, 모든 선거는 드라마가 된다
화려하고 드라마틱한 승리. 그게 인생의 정점이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그의 정치는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지금 역사 속에서 노무현 정권은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가? 그 이후의 대한민국은 어떻게 흘러갔는가? 결과는 우리 모두 알고 있다.
그의 죽음 이후 약 1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지금은 그의 정치적 유산을 물려받은 문재인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 세월 동안 그는 문재인은 두 번 대선에 도전해 한 번 당선되었으며, 한 명의 또 다른 대통령이 탄핵당했고,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이 감옥에 들어갔다. 그리고 사람들은 세 번의 대통령 선거를 했다. 이제 또 다른 대통령 선거를 1년 앞두고 있다.
영화 『노무현입니다』에서 유시민은 이런 말을 한다. 생전의 노무현 대통령과 나누었다는 이야기다.
노무현의 시대가 올까요? 그렇게 저한테 물어보셨어요.
‘오죠. 안 올 수 없죠. 반드시 옵니다.’
그런데 ‘노무현의 시대가 오면 나는 없을 거 같아요.’ 그러시더라고요.
‘후보님은 지금 새로운 변화의 첫 파도를 올라타신 거예요. 그 첫 파도가 밀려와서 가야 할 곳까지 갈 수도 있지만, 그 첫 파도가 거기까지 못 가고 주저앉을 수도 있죠. 그러면 그다음 파도가 곧 오겠죠. 그런데 첫 파도를 타고 계시기 때문에 거기까지 못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오기는 와요.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그랬더니,
‘허, 그렇죠. 그런 세상이 오기만 하면야 내 없으면 어때.’
- 영화 〈노무현입니다〉 중
모든 선거가 드라마다. 선거를 들여다보면 그 당시의 삶과 사회를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표가 역사의 주인공이다. 우리가 선거를 해야 하는 이유고, 과거의 선거를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다.
『선거로 읽는 한국 정치사』는 이 드라마틱한 선거의 역사를 다룬다. 이승만, 윤보선, 박정희,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박근혜. 이 굵직한 인물들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최전선에서 싸우는 드라마틱한 선거 이야기가 펼쳐진다. 선거의 과정에서 이전의 정권이 저물어가는 상황과 새로운 도전자가 나타나는 과정이 나타나기 때문에, 이 한 권만 읽어도 대한민국 근현대사에 관한 거시적인 시각을 갖출 수 있을 것이다. 인터넷에서는 찾기 힘든 적절한 사료를 보는 것도 이 책의 재미다.
역사를 알면 미래를 알 수 있다. 2022년 대선을 내다보고 싶은 당신이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