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마 신호등의 탄생
며칠 전에는 베를린 시의회 의원이 교통신호등(Ampel)을 바꾸자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베를린의 보행자 신호등은 아래와 같이 ‘파란 불’일 때는 남자 모습니다. 이건 일종의 여성차별이니 치마 입고 머리띠 땋은 여자 모습이 등장하는 신호등을 도입하자는 것입니다.
남녀평등을 교통신호등에까지 적용해야 하는지 약간 의아하기도 합니다만, 실제 드레스덴(Dresden), 츠비카우(Zwickau) 등 일부 지역에서는 아래 사진과 같은 여성신호등을 설치해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독일의 교통신호등에는 남녀차별 문제와는 별개로 약간 슬픈(?) 역사가 깃들어 있습니다. 서독에 사실상 흡수·통합된 동독에 대한 아련한 향수를 느끼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통일 이후 거의 모든 제도와 문물이 서독 식으로 통일된 가운데, 바로 이 동독 보행자 신호등(Ampelmännchen, 신호등 꼬마) 정도가 살아남은 것입니다. 어떻게 교통신호등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여기서 한번 살펴볼까 합니다.
원래 교통신호등은 거리에 차량이 넘치게 되면서 등장했습니다. 최근에는 가끔 교통정체를 경험할 만큼 차량이 늘어나긴 했지만 통행차량이 얼마 안 되는 북한에는, 아래와 같이 미모의 젊은 여성교통경찰이 신호등을 대신하지요.
서구에서는 대체로 1950년대 이후 신호등이 도입되었습니다. 도입 초기에는 나라마다 디자인이 달랐는데 점차 표준화의 길을 걸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신호체계는 자동차, 자전거, 보행자에 대해 모두 동일했습니다.
그런데 동독에서는 페그라우(Karl Peglau)라는 교통심리학자가 빈발하는 교통사고에 대처하기 위해 보행자만을 위한 교통체계를 1961년에 고안했습니다. 자동차신호와 다른 보행자 고유의 신호에 보행자들의 반응이 빠르다는 점과 색맹에 대한 배려도 작용했습니다.
이리해서 만들어진 게 ‘약간 거만하고’ ‘발랄하고’ ‘소부르주아적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모자를 쓴’ 신호등 꼬마였습니다. 머리통이 크고 다리가 짧은 꼬마 모습이며, 종교적 지도자의 느낌도 준다고 합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모자는 오랫동안 동독지도자였던 호네커(Erich Honecker)의 여름 밀짚모자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합니다.(아래 사진 참조)
혹시 지도자에게 아부하기 위해 호네커의 밀집모자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실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1961년 당시의 최고지도자는 울브리히트(Walter Ulbricht)였읍니다. 김일성과 박정희 동상을 세우는 한반도와 독일은 다르다는 점을 염두에 두십시오.
동독의 마지막 유산
한편, 1990년 동서독이 통일되면서 모든 제도와 문물은 서독 식으로 통일되어 갔습니다. 그리해서 신호동도 서독 식으로 통일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흐름에 대한 하나의 작은 반발로 나타난 것이 1995년 초에 시작된 ‘신호등 꼬마 살리기’(Rettung der Ampelmännchen)였습니다.
통일에 대한 뜨거운 기대를 가졌던 동독인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환멸을 겪게 됩니다. 공장들이 대거 문을 닫고 실업자가 폭증하게 되니 불만이 커질 수밖에 없지요. 게다가 동독체제에 대한 부정이 자신들의 과거 삶에 대한 부정으로 연결되니 견디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아래 사진은 제가 지난 5월에 방문했던 동독 모자공장입니다. 통일 후 24년이 되어 가는 데도 아직 폐허로 남아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동독인들의 과거에 대한 향수(Ostalgie)가 피어오릅니다. Ostalgie는 Osten(동독)과 Nostalgie(향수)의 합성어입니다. 그리고 신호등꼬마는 바로 그 동독 향수병의 하나의 상징(mascot)이 된 것입니다. 1996년에 설립된 ‘Ampelmann GmbH’는 신호등꼬마의 이름으로 동독향수병을 이용해 동독시절 용품들을 판매하기까지 했습니다.
고등학교 때 배운 유치환의 시 ‘깃발’에는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이란 유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신호등꼬마는 통일 이후 동독인들의 현실적 어려움을 외치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원래 인간들은 세월이 지나면 과거에 대한 아름다운 면만 상기하기 쉽습니다. “구관이 명관이다”는 말도 그래서 나온 것입니다. 박정희 향수도 그런 종류이지요. 동독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생활수준은 서독에 크게 뒤떨어지고, 재정은 파탄지경에 이르고, 정치적 자유는 억압받고, 환경은 오염된 과거의 어두운 면은 곧잘 잊어버립니다. 대신에 치열한 경쟁에 시달리지 않고, 일자리 걱정을 하지 않고, 이웃 간의 우애도 돈독했던 과거의 아름다운 면을 떠올리게 된 것입니다.
신호등꼬마를 유지하려는 캠페인이 벌어지는 가운데, 실제로 보행자에 대한 효과 면에서 서독신호등보다 동독신호등이 우월하다는 연구도 나타났습니다. 독일의 권위 있는 주간지 Der Spiegel은 신호등꼬마에 대해 미(美)와 효율성을 겸비하고 있다고 칭찬하기도 했습니다.
그리해 동독의 신호등꼬마는 살아남았고, 이는 서베를린은 물론 자르브뤼켄(Saarbrücken), 하이델베르크(Heidelberg)의 교차로에까지 확대되기도 했습니다. 다만 신호등 표준화정책으로 인해 더 이상의 확대는 중단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현재 독일의 보행자 신호체계는 동독식, 서독식, 범독일식의 3방식이 혼재하고 있습니다.
남북 통일, 북한향수를 대비하고 있는가
자신들의 과거 삶의 양식 중 겨우 신호등 하나 살아남은 동독인들은 소외감을 느끼는 게 당연합니다. 서독놈(Wessie), 동독놈(Ossie)하는 말도 그래서 나온 것이지요. 하지만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그런 차별은 사라져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미 서독의 제도와 문물 속에서 동화되었으니까요.
동독 향수병은 나이 든 세대의 시한부 문화라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Die Lnke(좌파)와 같은 합법정당이 동독인들의 이해를 어느 정도 대변하고 있는 상황에서 동독인들의 불만은 예멘에서처럼 폭발할 가능성은 없어 보입니다.
한반도는 어떨까요. 만약에 남북한이 통일된다면 북한의 제도와 문물 속에서 과연 어떤 게 유지될 수 있을까요. 북한 사람들은 ‘생활총화’ 등을 통해 말하는 훈련이 잘 되어 있는데, 그게 계속될까요. 러시아어 교수를 했던 탈북자에 따르면 북한의 교수법은 남한보다 우월하다고 하는데 그게 이어질까요. 핵무기제조나 로케트 발사 기술은 전승될 수도 있겠지요.
예전에 한반도의 통일은 남한체제와 북한체제를 변증법적으로 지양한 보다 나은 체제로의 통일이어야 한다고 생각한 분들이 있었습니다. 두 체제의 장점을 살리고 단점은 극복한 체제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동서독 통일의 경우를 보면, 그런 아름다운 가능성은 극히 희박해 보입니다. 아니 오히려 두 체제의 단점이 증폭될 가능성도 없지 않습니다.
다른 나라의 통일 예컨대 베트남이나 예멘이나 수단의 경우는 더 말할 필요도 없고, 그들보다 훨씬 나은 독일통일에서조차 변증법적 지양은 이루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서독보다 물질적 문화적 수준이 낮은 남한과, 동독보다 물질적 문화적 수준이 크게 낮은 북한이 통일되면 아마도 독일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에 직면할 것입니다.
일례로 북한향수병도 동독향수병보다 더 심하지 않을까요. 탈북자들 중에 남한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유럽이나 미국으로 재차 망명하는 사람이 늘고, 심지어 북한으로 되돌아가는 사람들조차 나타나는 현실이 그걸 웅변합니다.
동독의 엘리트들은 통일 이후 상당히 소외되기도 했지만 Die Linke라는 정당을 통해 나름대로 지위를 보존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북한을 통합할 가능성이 낮은 남한은 이른 시일 내에 통일을 달성하기가 우선 어렵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울러 장차 통일이 된다하더라도 북한향수병이 심각해지지 않도록 제대로 준비를 하지 않으면 커다란 사회적 곤란을 겪게 될 것입니다. 아직도 영호남 차별이 지속되는 남한의 사회문화적 수준에서 그런 곤란을 헤쳐 나갈 수 있을지 참으로 의문입니다.
이상 베를린의 신호등꼬마를 둘러싼 가벼운 논란을 보면서 느낀 감상이었습니다.
원문: 개혁적 진보의 메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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