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철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어느덧 선거 시즌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특히 2022년은 대선과 지방선거가 함께 열리는 해이기에 더욱 의미가 큽니다.
민주당은 비교적 무난하게 경선 레이스에 진입한 상황인데요, 흥미로운 건 국민의힘입니다. ‘30대 당대표’의 등장과 당외 인사가 지지율 1위를 달리는 현상에 대해 다양한 우려와 기대의 목소리가 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새로워 보이는 현상도 살펴보면 과거의 반복인 경우가 많습니다. ‘40대 기수론’이나 ‘제3지대론’은 선거 때마다 거의 항상 등장해왔던 것이죠.
대통령 직선제와 국회의원 소선거구제를 채택하고 있는 한국은 선거 결과가 정치사 전체를 뒤바꿔 버리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선거는 한국 정치의 ‘결정적 순간’을 읽을 수 있는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한국 정치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모두 선거를 전후로 해서 일어났으니까요.
헌법에까지 새겨져 길이 기억되는 4.19 혁명은 3.15 부정선거가 직접적인 트리거가 되었습니다. 박정희·전두환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유신 체제’와 ‘체육관 대통령’으로 대표되는 왜곡된 선거 제도를 이용했죠.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국민의힘(자민당계)─더불어민주당(민주당계)의 양당 구도는 김영삼의 ‘3당 합당’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선거로 읽는 한국 정치사』는 이처럼 한국 현대사의 주요 변곡점을 50여 차례의 선거를 통해 조망하고 있는 책입니다. 나아가 선거 결과가 어떻게 한국 역사를 뒤흔들었는지, 권력자들이 역사를 뒤흔들기 위해 선거를 어떻게 이용했는지를 이야기합니다.
선거로 읽는 대한민국 건국사
찬탁 대 반탁, 남한 단독 선거와 국토 분단, 그리고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와 4.19 혁명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의 건국사는 선거를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민주 선거가 실시된 것은 1948년 5월 10일의 일입니다. 이 선거에서는 200명의 국회의원을 선출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198명의 국회의원만이 선출되는데요, 제주도에서 4.3 사건이 벌어지며 선거가 무효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식민지배로부터 해방을 이루자마자 찬탁과 반탁이 충돌했고, 국토는 사실상 분단되었으며, 최초의 선거에서는 양민 학살이란 비극이 벌어지며 의회 정원을 전부 채우지도 못했습니다. 격동과 비극의 연속이었던 한국 근현대사는 첫 선거부터도 그러했던 셈입니다.
부정선거와 4.19 혁명
2대 총선도 격동 한가운데에서 치러지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승만 정권은 반민특위 활동을 중단시켰고, 좌익 세력에 대한 탄압과 숙청을 본격화했습니다. 다수의 국회의원이 간첩으로 몰려 제거당하는 와중에 김구 암살 사건까지 벌어집니다. 정부의 인기가 계속해서 하락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선거일을 연기하려 하지만 이는 미국의 반대에 부딪쳐 실패합니다.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된 것도 그다지 빛나는 역사는 아니었습니다. 민심이 떠나가고 총선에서 패배한 이승만 대통령이 권력 유지를 위해 선택한 방법이었으니까요. 직선제 개헌을 관철하기 위해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의원들을 간첩으로 몰아 체포하거나, 경찰과 군대로 국회를 포위하는 등 온갖 불법적인 방식을 동원했습니다.
이렇게 밀어붙인 대통령 직선제가 훗날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것은 또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
개표 비리로 점철된 3대 대선 이후, 이승만 대통령은 경쟁 후보였던 조봉암을 체포하여 사형합니다. 이어 치러진 4대 총선과 대선에서는 야당 참관인들이 구타당하고 집단 투표가 난무하는 등 대대적인 부정선거가 자행되었습니다. 이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가 4.19 혁명으로 폭발했음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선거, 군부 독재의 도구로 전락하다
이승만 정권이 몰락한 이후에도 한국 정치에 봄은 오지 않았습니다. 잠깐 동안의 내각제 정권 이후 한국은 장기간의 군부 독재 시대를 겪게 됩니다. 박정희의 등장이죠.
군부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는 장기 권력 독점을 위해 온갖 금권선거와 부정선거를 자행했고, 동백림 사건 등 간첩 사건을 조작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대중의 지지가 무너져가자 유신 체제라는 무리수까지 두었다가, 부마항쟁 등 국민적 저항에 부딪쳤죠. 그렇게 대통령직을 호령하던 중 결국 김재규에게 암살당하며 권좌에서 물러납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벌어진 사건들은 좀 더 복잡합니다. 예컨대 한국 선거에 처음으로 색깔론을 본격적으로 동원했던 게 박정희가 아니라 그 상대였던 윤보선이었다는 사실 같은 것이죠. 당시 윤보선은 “부산, 대구에는 빨갱이가 많다”는 발언으로 지역감정을 자극하는가 하면, “박정희는 전에 공인된 공산주의자였고 여순반란 사건을 조직하는데 협력했다”며 박정희를 공격했다고 합니다.
유신헌법은 사실 법이라고 하기에도 부끄러운 수준이었습니다. 박정희를 99.9%의 찬성으로 대통령에 당선시킨 통일주체국민회의라든가, 도시 지역의 의석 나눠 먹기를 위한 중선거구제, 심지어 국회의원 1/3을 사실상 대통령이 임명하는 유신정우회 등 독재를 강화하기 위한 온갖 꼼수가 횡행했습니다. 그 결과 민주공화당이 38.7%를 득표해 전체 의석의 과반인 146석을 얻을 때 신민당은 32.2%를 득표하고도 52석밖에 얻지 못하는 기이한 결과가 나타나고 맙니다.
박정희 정권의 몰락 이후에도 군부 독재는 계속되었습니다. 전두환의 쿠데타로 권력은 다시 군부로 넘어갔고, 전두환은 유신 독재를 벤치마킹해 더욱 강력한 독재 기반을 굳힙니다. 선거를 민의를 반영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군부 독재를 공고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은 셈입니다.
‘87년 체제’, 현대 정치 체제의 근간이 완성되다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은 식지 않았습니다. 국민들은 김대중과 김영삼의 협력으로 탄생한 신생 신민당에 큰 지지를 보냈습니다. 전두환 정권은 온갖 폭력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유지했지만, 87년 1월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 그리고 6월 이한열 열사 최루탄 사망 사건이 벌어지자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대적인 항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영화 1987의 배경이기도 한 ‘6월 항쟁’이죠.
결국 전두환은 백기를 들었고 대통령 직선제가 부활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국 정치사에 봄은 오지 않았는데, 당시 야권을 상징하던 두 거목인 김영삼과 김대중이 각기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는 등 분열한 끝에 전두환의 후계자인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사태가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결과가 영 이상하게 나오긴 했지만, 1987년의 ‘6월 항쟁’과 대통령 직선제 복구는 한국 정치사에 있어 엄청난 족적이었습니다. 지금까지도 ‘87년 체제’라 불리며 유지되고 있는 정치 체제가 바로 이때 구축된 것이기 때문이죠.
이후 치러진 총선에서는 여전한 야권의 분열에도 불구하고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이 70석,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이 59석을 획득하며 여소야대 정국을 형성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한국 정치사에 또 한 번의 거대한 분기가 됩니다. 여소야대 정국에서 안정적인 국정 동력을 원했던 노태우와, 김대중에게 의석수에서 밀리며 정치적 입지에 위기를 느꼈던 김영삼이 결합한 것입니다. 이른바 ‘3당 합당’입니다.
‘정치는 생물’이라는 격언이 있습니다만, 87년 체제의 등장 이후 벌어진 이합집산만큼 이를 극명히 보여주는 일도 없을 겁니다. 사실 이야기를 단순하게 보면 김영삼의 3당 합당은 그저 나쁘게만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 김대중의 대선 불출마 번복 같은 사건들이 있었다는 점이나, 김영삼 또한 민주자유당에서 내각제 약속을 저버리고 대통령 직선제를 밀어붙였으며, 이후 대통령에 당선되어서는 군부 독재 세력을 척결하고 하나회 해체 등의 업적을 남겼다는 점 등을 보면 정치라는 게 그렇게 단순히 선악 구도로만 설명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이런 ‘이합집산’은 이후의 선거사에도 계속해서 반복됩니다.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최초의 정권 교체’라 할 만한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은 사실 박정희의 참모이며 초대 중앙정보부 부장이었던 김종필과의 연합에 힘입은 바가 컸죠. 노무현의 당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경선 과정서부터 ‘노풍’이라 불리는 흐름을 타긴 했지만, 정몽준과 연합이 아니었다면 당선까지는 어려웠을 겁니다.
역사는 반복되지만, 그 형태는 변한다
한국 선거사에서는 늘 반복되는 사건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제3후보’의 대두입니다. 1992년의 정주영이나 2002년의 정몽준, 그리고 2012년/2017년의 안철수 등이죠. 이들에게는 중요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기존 정치 세력과 거리가 있던 인물로, 어떤 바람을 타고 유력 후보로까지 부상했다가 급격히 지지세를 잃었다는 점입니다. 이는 정치적 자산이나 정치인으로서의 체력 없이 신선한 이미지와 인기만으로는 대선과 같은 큰 선거에서 승리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부분은 총선과 대선을 불문하고 선거 전략으로 심심찮게 등장했던 ‘북풍’과 ‘지역감정’입니다. 군부독재 시기만 해도 여당은 간첩사건을 조작하거나 안보 위기 상황을 부각해 심심찮은 재미를 보아왔는데요, 이런 ‘북풍’은 2000년대 들어 점차 힘을 잃어가더니 이제는 역풍까지 불기 시작합니다. 심지어 최근에는 보수 정당 측에서 남북 화해 무드를 ‘신북풍’으로 규정하는 상황까지 왔죠.
지역감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역감정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건이 ‘초원복국’ 사건이죠. 여당인 민주자유당 관계자들이 ‘초원복국’ 식당에 모여 노골적으로 지역감정을 선거전략에 이용하려던 녹취가 공개된 사건인데요, 이러한 모략이 발각되었음에도 오히려 민주자유당 후보의 지지율이 급등하는 터무니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죠. 그만큼 지역감정의 힘이 강력했다는 의미겠지요. 하지만 최근 선거에서는 상당부분 완화되고 있는 추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선거가 끝날 때마다 선거에서 패배한 진영을 중심으로 ‘부정선거 음모론’이 불거지고 있는 점 역시 눈여겨볼 부분입니다. 진보의 압승으로 끝난 2020년 총선 때는 보수 진영 측에서 ‘사전 투표 조작설’을 주장했었죠. 반면 보수의 승리로 끝난 2012년 대선에서는 진보 진영 쪽에서 ‘K값 음모론’을 주장했고요. 여기에는 부정선거로 점철되었던 과거 선거사가 큰 영향을 끼쳤을 겁니다. 그만큼 사회적 신뢰라는 자본이 얼마나 쌓기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라 불리며, 권한을 어떻게 위임할 것인지를 정하는 룰입니다. 물론 지금의 선거 제도에도 한계는 있습니다. 그래서 내각제나 대통령 중임제 등 개선 방안에 대한 여러 가지 아이디어가 계속해서 제시되고 있지요. 하지만 실제 개정까지 나아가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그건 아마도 선거가 60년 한국 정치사의 정수이자 그간 쌓아온 사회적 신뢰의 결과물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가올 선거는 한국 정치사에 어떤 격동으로 남게 될까요? 『선거로 읽는 한국 정치사』는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한 좋은 참고서가 되어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