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를 기다리며>의 고도가 Godot라는 것을 알았을 때, 소년은 어른이 된다
<고도를 기다리며>가 최초의 부조리극이라는 사실은 교과서에서 익히 배워서 알고 있었다. 부조리극의 사전적 설명도 열심히 외웠다가 모의고사에서 잘 써먹었다(1950년대에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전위극 및 그 영향을 강하게 받은 모더니즘 시대의 최후의 연극이라는 뜻이라고. 참고 나무위키).
그런데 어느 누구도, 심지어 교과서마저도, 나에게 고도가 Godot, 그러니까 사람 이름이라는 설명을 해준 사람은 없었다. 그러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지잖아. 부조리극이 뭔지 순식간에 이해할 수 있게 되잖아.
생각해 보자. 한자어 고도孤島는 ‘해수면 따위를 기준으로 측정한 대상 물체의 높이’라는 단어다. 일단 어렵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새로운 시대의 출발이나 혁명 같은 대단한 사건을 다룬 작품으로 상상하게 된다. 마치 <여명의 눈동자>처럼.
반면 ‘고도 Godot’는 그냥 사람 이름이다. 그저 어떤 인물을 기다리는 작품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작품에 대한 인상은 확 뒤바뀌어 버린다. 사람들은 고도가 누구인지 유추해야 한다. 고도는 누구인가? 고도를 왜 기다리는가? 고도는 왜 오지 않는가?
그러나 <굴뚝을 기다리며>의 굴뚝은 단어 그대로다. 그것은 굴뚝을 상징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우뚝 선 굴뚝, 공장 옆에 서서 하늘을 찌를 것처럼 솟아오른 굴뚝.
이 작품이 부조리극이어야만 했던 이유
<굴뚝을 기다리며>는 부조리극이다. <고도를 기다리며>에 대한 오마주라고 한다. 그래서 나머지 세부사항도 <고도를 기다리며>와 똑같다. 두 명의 주인공이 나와서, 이치에 맞지 않고 당황스러운 대화를 나눈다. <고도>의 등장인물들이 ‘고도’를 기다리는 것처럼, 이들도 ‘굴뚝’이라는 것을 기다린다.
그러나 동시에, <굴뚝을 기다리며>는 부조리극이 아니다. <고도>는 초연 직후 엄청난 논란에 휩싸였다. 관객들과 평론가들은 머리를 쥐어 싸매며 ‘고도’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해석해내야 했다. 등장인물들이 처한 상황이 근본적으로 부조리하여 ‘부조리극’이라는 단어가 생겼다.
반면 <굴뚝을 기다리며>는 다르다. 무대 위에는 거대한 굴뚝이 있고, 먼지 묻은 작업복을 입고 작업화를 신은 사람들이 있고, 그들이 숙식하기 위한 텐트가 있다. 이 무대장치들은 아주 친절하기 때문에, 극이 시작하고 10분도 지나지 않아, 관객들은 다 알게 된다. 이들이 왜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 이들이 기다리는 ‘굴뚝’이 무엇인지.
뉴스를 조금이라도 본 적 있다면, 관객은 이게 꽤 익숙한 풍경이라는 것을 짐작하게 될 것이다. 굴뚝 위에 올라가서 농성하는 노동자들. 그래서 관객은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것이다. 아, 이건 노동자들에 대한 이야기구나, 라고.
<굴뚝을 기다리며>가 취하고 있는 부조리극의 형식은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투명한 유리창 같은 것이다. 부조리극이지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지 알 수 있다. 그러니 우리는 다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왜 굳이 부조리극이어야 했을까?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뚜렷한데, 왜 굳이 부조리극의 형식을 빌려 말해야 했을까?
답은 쉽게 나온다. ‘낯설게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무엇을? 굴뚝 위에서 농성하는 노동자들의 현실을. 그렇다면 누구를 위해? 그 현실을 ‘낯설게 보고 싶은’ 이들을 위해.
이 글을 쓰는 6월 16일, 택배 노조가 상경 투쟁을 진행한 지 이틀이 지났다. 6월 4일에는 한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외벽 작업을 하던 노동자가 추락해 숨졌다. 다른 아파트의 신축현장 안전관리에 소홀해서 하청업체 노동자를 추락사에 이르게 한 혐의로 기소된 건설사 이사는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너무나 많은 노동 관련 뉴스, 산재 관련 뉴스가 등장한다. 사람들은 잠시 안타까워한 뒤 다른 뉴스에 눈을 돌린다. 바뀌지 않는 현실이 괴로워서? 그런 점도 있겠지만, 정확히는 이 현실에 익숙해져서 그런 점도 있을 것이다. 나쁘긴 한데, 어쩐지 내 이야기가 아닌 것만 같아서. 모든 진보의 딜레마이기도 하다. 세상을 바꿔야 하는 중대한 이야기일수록, 현재에 머무르고 싶은 사람들의 냉정한 눈초리에 부딪치는 것. 실제로 작가이자 연출자인 이해성은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소수의 사람들만 노동 운동을 한다고 생각한다. 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부정적으로 판단한다. 그 간극을 예술이 좁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작품은 부조리극이라는 형식으로 ‘낯익은’ 이야기를 ‘낯설게’ 푼 것이다. 그렇다면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일차적으로는 좌석에 앉은 관객이겠지만, 정확한 대답은 어쩌면 가까이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5명의 등장인물, 그들 중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언제나 노동하고 있지만, 노동하고 싶어 하지 않는 이들에게
주인공인 ‘나나’와 ‘누누’는 굴뚝 위에서 농성하는 노동자들이다. 거기에 3명의 인물이 더 등장한다. 각각 청소, 미소, 이소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이들 또한 상징하는 바가 뚜렷하다. ‘청소’는 그들과 동일한 처지의 노동자로, 주인공들에게 동지의식과 연민을 느낀다. ‘미소’는 청소를 대체하는 기계다. 4차 산업혁명 이후 기계가 인류의 노동을 대체하는 위협적인 현실을 상징한다. 그렇다면 ‘이소’는? 이소는 20대의 노동자다. 그리고, 유일하게 등장인물들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소는 20대 노동자다. 라이더 일을 하고 있다. 분노와 불만에 가득 차 있어서 단순한 질문에도 화를 내며 대답한다. 사회가 ‘공정’하게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실제 대사에서도 언급한다. 그런데 막상 나나와 누누에게는 굉장히 공격적이다. 계급으로 따지면 기존의 노동자 세력과 화합해야 하는 게 맞는데도, 그는 강렬하게 거부한다. 그래서 그의 존재는 모순적이다.
노동자이면서, 그 누구보다도 노동자이기를 거부하는 존재. 언제나 노동하고 있지만 노동자가 처한 현실에는 관심이 없거나, 아예 적대적인 존재. 약자로서의 아이덴티티는 거부하고 기계적일 정도로 ‘공정’을 외치는 존재.
노동자이면서 노동자이기를 거부하는 자들. 자신은 비록 단순 노동을 하고 있지만, 노동 관련 뉴스를 볼 때에는 고용주와 회사의 입장에 자신을 이입하는 이들. 굴뚝에 올라간 사람들과 크게 다를 게 없으면서도, 그 현실에서는 눈을 돌리는 이들. 몸을 움직여 일한다는 가치중립적인 단어 ‘노동(勞動)이 싫어서, 지극히 고용주의 관점에서 정의된 ‘힘을 들여 부지런히 일한다’는 뜻의 ‘근로(勤勞)’라는 단어를 선호하는 이들. 그들이 바로 이 연극을 보러 오는 20·30대의 관객이고, 이 연극을 보러 간 나다.
그들이 편하게 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이 극은 부조리극이 된 것이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껍데기를 둘러쓰게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괴로운 굴뚝 위에서의 나날은 우스꽝스러운 대화와 율동이 되고, 노동자들이 노동하는 모습은 오락적인 춤이 된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괜찮다고 생각했다. 이 작품은 재미있다. 등장인물들이 내뱉는 모순적인 대사와 독특한 춤사위가 오락적으로 다가온다. 지루한 순간이 잘 없다. 그러면서도 나오는 길목에서는 같이 본 친구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맞아, 나 이런 얘기 뉴스에서 본 적 있어. 사람이 굴뚝 위에 올라가 있던데? 근데 왜 올라간 거야?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의 시대는 지나갔다. 스마트폰과 유튜브의 세계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던 것이 오락이 된다. 이제는 노동을 ‘이상하게라도’ 이야기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한 명이라도 더 노동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면, 이 연극의 목적은 충분히 달성하는 것이기 때문에.
공연 정보
● 공연기간
2021.06.10 ~ 2021.06.27
● 극장 정보
연우 소극장. 혜화의 전통적인 소극장이다. 극장 가는 길에 ‘혜화칼국수’라는 가게가 있는데 전통과 역사의 맛집이다. 꼭 한 번은 먹어보자. 극장 근처에 숨겨진 좋은 카페도 많다. 특히 ‘스페이스엠’은 낮에는 카페, 밤에는 와인바가 되는 가게다. 디카페인 커피를 팔고 있다. 창밖 풍경도 아주 좋았다.
● 추천 대상
볼 때는 즐겁게 보고, 나올 때는 극의 의미를 한 번은 곱씹고 싶은 사람에게 추천한다.
원문: 김수희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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