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모토 바나나, 에쿠니 가오리, 냉정과 열정 사이. 이 소설들은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하나는 무척 감성적인 소설이라는 것이고, 하나는 한국에서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이 책을 안 읽는다는 인식이 있지만, 2000년대 초중반은 달랐다. <상실의 시대>로 일본 소설에 반한 한국의 젊은이들이 앞다투어 일본 소설을 읽던 때였다. 그 시절에는 누구나 <키친>을 알았고, 일본 영화인 <냉정과 열정 사이>를 스크린에서 본 뒤 원작 소설을 사서 읽었다.
왜 그 소설들은 큰 인기를 얻었던 것일까? 운율이 느껴지는 문장과 미묘한 감정이 젊은 날의 추억을 고스란히 살려내면서, 말로 형언하지 못할 기억 속의 한순간을 글자로 형상화해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당시 일본 소설에는 그런 저력이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일본 소설의 시대는 자연스레 저물었다. 그러나 그 감성을 그리워하는 독자들은 아직도 남아있다. 그런데 요시모토 바나나가 사라진 자리에, 새로운 작가가 나타났다. 바로 20대의 천재 작가 ‘아오바 유’다.
그가 묻습니다, 당신을 설레게 했던 것은 무엇인가요?
작가인 아오바 유는 이제 막 이십 대 초반이 된 젊은 작가다. 무려 16세에 스바루 신인상을 최연소로 수상했다. 그러나 젊은 나이에 차지한 큰 영광이 부담이 되었던 탓인지, 어느 순간 집필 활동을 중단하며 독자들을 궁금증에 몰아넣었다. 그런 그가 4년 만에 발표한 신작이 바로 이 소설 <잔잔한 파도에 빠지다>이다.
왜 <잔잔한 파도에 빠지다>라는 제목일까? 이 소설 속의 주인공 ‘기리노 줏타’가 결성한 밴드의 이름이 ‘the noise of tide’이고, 그들이 발표한 몇 안 되는 곡 제목이 ‘잔잔한 파도에 빠지다’이다. 극 중 등장하는 가사는 이렇다.
바람이 멎은 새까만 바다 /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이즈
예감은 하직 허상일 뿐 / 파도만이 반복되지멀리서 울리는 천둥소리 / 물결치는 너의 원피스
마음을 흔들어 놓네 / 견딜 수 없이 초조해언제까지나 길 위에 서 있어 / 소원을 되풀이하면서
수평선 저 너머에서 / 다시 만나는 두 사람
이 가사를 읽고 책 표지를 다시 보자. 그러면 책을 조금 더 깊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물결치는 깊은 바다와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의 첫사랑, 언젠가 다시 만날 것이라 속삭이는 두 사람의 모습. 말하자면 예전 우리나라를 휩쓸었던 일본 소설의 감성을 다시 복각해냈다고 해도 될 정도로 감상적인 풍경이다. 읽는 것만으로 독자를 아련한 과거로 데려가던 그 소설들 말이다.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자. <잔잔한 파도에 빠지다>라는 곡을 발표한 주인공 ‘기리노 줏타’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는 젊어 생을 마감한 천재 뮤지션이다. 그리고 소설은 그의 주변에 있었던, 혹은 그의 음악을 듣고 팬이 된 이들의 시선으로 전개된다.
첫 에피소드의 주인공 ‘하루카’는 업무에 파묻혀 살아가는 평범한 회사원이다. 그녀는 어느 날 유튜브 알고리즘에 이끌려 <잔잔한 파도에 빠지다>라는 음악을 만난다. 이 음악은 이전에 그녀가 들었던 어떤 음악과도 다르다. 그녀는 금세 그 가수의 열정적인 팬이 된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그 곡을 만든 아티스트 ‘기리노 줏타’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소설은 시점을 달리하여 기리노 줏타가 중학생이던 시절 동창이었던 수영 선수 ‘나쓰카’의 시점으로 전개된다. 학교에서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던 두 사람이지만,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열중하는 분야가 따로 있었다는 것이다. 나쓰카는 수영선수다. 줏타는 그녀가 수영하는 수영장의 한구석에서 음악을 하고 있었다. 나쓰카가 전학을 가며 헤어지기 직전,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다. 그 후 그는 <잔잔한 파도에 빠지다>를 만든다. 부서지는 파도와 천둥소리, 흩날리는 원피스 자락을 그대로 담아낸 음악 말이다.
그것은 사실 엄청나게 특별한 순간은 아니다. 무척 일상적이고 사소한 와중, 조금 마음을 흔드는 순간일 뿐이다. 하지만 줏타는 그 찰나를 놓치지 않는다. 그 설렘은 그대로 음악이 된다. 듣는 사람의 과거 속, 그리운 순간을 그대로 소환해 오는 음악이 되는 것이다.
음악 한 곡, 책 한 권이 당신을 데려가는 곳
소설 속의 등장인물들은 지쳐 있다. 회사원은 회사원대로 업무에 찌들어 있고, 밴드 멤버들은 꿈을 잃어버렸으며, 가장 벅찬 시기를 보내야 하는 십대마저도 자신을 둘러싼 세상에 기진맥진해 있다. 실제 우리의 삶처럼.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이겨냈던가? 그런 방법이 있긴 있었나?
그래서 작가인 아오바 유는 말하는 것이다. 한때 당신을 설레게 만들었던 것을 잊지 말라고, 그것은 음악 한 곡이거나 책 한 권처럼 우리의 마음을 흔드는 예술 작품이면 충분하다고.
젊은 작가의 글을 읽는 재미가 쏠쏠한 소설이다. 구습에 젖지 않은 신선한 시선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예술과 삶과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이를 부담스럽지 않고 산뜻하게 다루고 있다. 또한 등장인물들이 대부분 10~20대의 젊은이들로, 독자들과 비슷한 고민을 가지고 있어 공감할 부분이 많다.
게다가 문체 또한 청춘 소설에 가깝게 느껴질 만큼 가벼우면서도 서정적이다. 거북할 정도로 꼬이거나 불편한 감성도 없다. 그래서 일본 소설을 좋아하는 매니아들이나 청춘을 돌파하는 20대들, 혹은 예전 일본 소설에 푹 빠져 있던 독자들에게도 어필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지 리딩 소설이라는 것도 큰 장점이다. 머리 아프게 고민할 부분이 없다. 여행지에 한 권 들고 가기도 좋고, 자기 전 가볍게 읽기에도 좋다. 한 인간과 예술가의 생애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면서도, 마음의 그리운 부분을 자극한다. 편안한 마음으로 감상해 보자.
작가인 아오바 유는 이 소설을 통해 ‘예전에 느꼈던 설렘과 열정은 어디로 갔는지,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찾고 싶었다고 한다.
청춘이고 청춘이었으며 영원히 청춘일 우리, 과거에 일본 소설을 통해서 그 답을 찾았던 우리 모두에게 묻는다. 이 소설을 통해서, 우리는 새로운 답을 찾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