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소년의 납치, 살해로 촉발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교전(이라기보다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공격) 소식이 연일 해외뉴스의 톱을 차지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무자비한 공격에 민간인들이 희생되자 국제여론이 따갑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공격의 고삐를 늦출 생각이 없어 보인다. 짧게나마 이스라엘 정부의 입장이 어떠한지 살펴보는 것이 오늘날의 사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1. 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을 ‘병합’하지 않을까?
– 이스라엘이 무력으로 팔레스타인 자치지구를 점령하고 그들을 이스라엘로 완전 병합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가능하다. 하지만 이스라엘 정부는 결코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이스라엘로 흡수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 이스라엘 내의 유태인 인구는 출산율 감소로 증가율이 꾸준히 떨어지는 추세다. 이에 비해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의 팔레스타인 인구는 상대적으로 빠르게 늘고 있다. 이스라엘 중앙통계국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13년 이스라엘의 유태인 인구는 약 612만명 가량이다. 반면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를 합친 팔레스타인 자치지구 내의 팔레스타인 인구는 약 442만명(팔레스타인 중앙통계국 자료)이고, 여기에 이스라엘 지역의 (이스라엘에 동화되고 국민으로 인정되는) 팔레스타인 인구 약 168만명을 합치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자치지구 내의 팔레스타인 총인구는 이스라엘 내의 유태인 총인구에 근소하게 못 미치는 610만명 가량이 된다. 그런데 유태인의 인구증가율은 1.7%인데 반해 자치지구 내의 팔레스타인 인구증가율은 2.96%에 이른다.
– 따라서 이러한 추세대로라면, 팔레스타인 자치지역의 팔레스타인 인구와 이스라엘 국민인 팔레스타인 인구를 합한 팔레스타인 총인구는 2016년을 기점으로 이스라엘의 유태인 인구를 추월할 전망이다.
– 팔레스타인인들이 유태인들보다 출산율이 높은 것은 선진국에 비해 저개발국가의 인구증가율이 높은 것과 유사한 이치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말살’의 위협에 직면해 있는 팔레스타인인들이 생존전략으로 ‘종족 번식’을 택한 것이라 볼 수도 있다.
– 유태인들의 입장에서는 만일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병합해 온전한 하나의 국가로 만들 경우 팔레스타인인들에게도 참정권이 주어질 것이고, 그러면 수적으로 우세한 팔레스타인인들이 유태인들을 지배할 것이라는 우려를 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스라엘 정부로서는 팔레스타인 병합을 선택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2. 그러면 팔레스타인을 아예 독립시킬 수는 없나?
– 만일 팔레스타인을 독립시킨다면 이스라엘은 지금보다 더 심각한 안보위협에 놓일 가능성이 크다. 공식적으로 무장이 금지된 팔레스타인 자치지구 내에서도 하마스와 같은 비타협적 무장세력이 강력히 저항을 하는데, 팔레스타인을 독립국가로 만들 경우 그들은 당연히 군대를 보유하고 무장을 강화할 것이다. 정규군을 보유한 팔레스타인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상황, 이스라엘로서는 상상도 하기 싫은 끔찍한 시나리오다.
– 게다가 이스라엘의 유태인들은 요르단강 서안도 신의 계시에 따라 자신들에게 주어진 영토라는 역사성에도 강한 집착을 보인다. 그들에게 이스라엘 국가의 기원은 2차 대전 후 이스라엘을 건국한 1948년이 아니라 약 2,300년전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을 정복했던 시점이다. 가나안은 신이 그들에게 약속한 땅이다. 그리고 그 후 유태인들은 자신들의 왕조 아래서건 혹은 이민족 왕조의 지배 하에서건 약 1,400년간 대대로 그 땅에서 살았다. 원래 자신들의 땅이었으니 어떠한 이유에서건 포기할 수 없다.
3. 그렇다면 이스라엘로서는 현재가 최선인가?
– 공식적으로는 그렇다. 병합할 수도, 독립시킬 수도 없으니 팔레스타인을 이스라엘의 영토로 묶어놓되 자치권을 줘서 사실상 분리시키는 것이다. 이 경우, 팔레스타인의 자치권은 그들을 인정하는 정책이라기보다는 이스라엘 국내정치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배제시키는 성격이 강하다. 동거하되 배제시키는 지배전략이다.
4. 그런데 왜 충돌이 끊이지 않는가?
– 유태인들에 의해서 쫓겨난 팔레스타인인들은 여러 조직을 결성해 끈질긴 저항을 지속해왔다. 국제사회의 중재로 팔레스타인 자치지구가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강대강의 충돌이 계속되다 보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측의 온건파가 몰락하고 계속 강경파들이 득세하게 된다. 이는 팔레스타인 강경파는 저항을 멈추지 않고, 이에 대응해 이스라엘의 강경파는 무리한 과잉보복을 자행하는 갈등의 악순환으로 이어졌다.
– 이스라엘 강경파의 입장에서 테러 위협은 현실이다. 팔레스타인 무장조직들이 ‘테러’로 이스라엘의 안전을 위협하기 때문에 그 저항세력들을 뿌리 뽑지 않고서는 현재의 ‘불안정한 동거’마저도 지속하기 어렵다고 판단한다. (미국을 위시한 친이스라엘 국제사회가 강조하는 점 역시 이 부분이다.) 이스라엘 강경파들은 비대칭적이고 압도적인 무력으로 팔레스타인의 저항을 억누름으로써만 자신들의 평화가 지켜진다는 입장이다.
– 팔레스타인 강경파의 입장에서 현 상태를 유지하는 평화란 곧 패배다.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유린한 것도 모자라 분리장벽을 쌓고 억압적인 정책을 일삼는 이스라엘을 따르는 것은 ‘굴종’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이 보기에 모든 갈등의 시작은 유태인들의 이스라엘 건국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걸 바로잡지 않은 채, 피억압자인 팔레스타인의 저항을 이스라엘의 억압과 동일선상에 놓고 이야기를 하는 건 부당하다. 우리 입장에서 좀더 쉽게 설명하자면, 팔레스타인의 저항을 비난하는 것은 일본 제국주의에게 대항하는 상해 임시정부에게 “왜 자꾸 테러를 일삼느냐”고 따지는 것과 마찬가지란 이야기다.
5. 이스라엘은 왜 팔레스타인의 민간인에게까지 가혹한 공격을 일삼나?
– 이스라엘의 네타냐후 총리가 민간인 희생에 대해 ‘영혼 없는’ 유감을 표명하기는 한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민간인을 억압하는 건 그들 주장대로 ‘우발적인 실수’가 아니다. 하마스와 같은 저항조직은 정규군처럼 일정 연령대의 남성을 징집해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억압적인 현실을 베이스로 해서 자생적으로 생겨난다. 즉 민간인 가운데 이스라엘에 반감을 가진 이들이 ‘자연스레’ 하마스 조직원으로 흡수되는 것이다. 남녀노소의 구별도 없다. 이에 대해 이스라엘 정부는 ‘민간인’과 ‘테러조직’을 구분하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보기엔 팔레스타인 민간인들은 테러조직을 배양하는 텃밭이다.
– 하지만 이는 모든 민간인 학살의 전형적인 주장이다. 베트남전쟁에서의 민간인 학살이나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민간인 학살 역시 가해자들은 “민간인과 적군을 구별할 수 없다”는 식의 변명을 했다. 특히나 팔레스타인처럼 정규군이 아닌 무장세력과 싸울 경우 더더욱 ‘민간인’이 누군지 알기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민간인을 대상으로 무차별 공격을 자행하는 행위에 면죄부가 주어지는 건 결코 아니다.
6. 현대판 ‘헤렘 전쟁’(Herem War)?
– ‘헤렘 전쟁’이란 고대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전쟁에서 나타난 전쟁 양태이다. 야훼를 섬기는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을 정복하면서 이방신을 섬기는 현지의 주민들은 물론이거니와 그들의 가축이나 여타 재물까지 모조리 ‘진멸’해버리는 전쟁이다. 적의 진영에 속한 모든 생명체와 물건을 없애버리는 무자비한 파괴. 이는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 민족이 이방종족의 문화에 물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 주어진 신성한 미션이었다. 고대 전쟁에서 패자에 대한 승자의 약탈이 보편적이었단 점을 떠올린다면, 헤렘 전쟁은 경제적 이득보다 ‘이념적(혹은 종교적) 순결성’을 더 강조하는 독특한 성격을 지닌다.
– 성경은 이스라엘의 헤렘 전쟁이 완벽하지 못했음을 지적한다. 정복자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현지주민들과 그들의 재산을 곳곳에 남겨두었고, 이는 향후 이스라엘의 가나안 생활이 타락하게 되는 원인으로 기록된다. 따라서 헤렘 전쟁을 완벽하게 수행하는 것은 고대 유태교에서는 도덕적으로 옳았다.
– 하지만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헤렘 전쟁은 인종청소(genocide)에 다름 아니다. 현재 이스라엘 강경파들이 팔레스타인 민간인들에게 자행하는 만행을 보면 혹시 그들이 과거의 헤렘 전쟁으로부터 이념적인 영향을 받고 있지 않나 우려된다. 공식적으로는 팔레스타인과 ‘동거’를 선언했지만, 마음속으로는 헤렘을 꿈꾸는 게 아닐까? 병합할 수도, 독립시킬 수도 없는 존재라면 아예 지상에서 사라지게 만드는 것. 그에 대한 정당성을 고대의 헤렘 전쟁으로부터 가져오는 것이다. 그것이 무장조직이건 민간인이건 가리지 않고 잔인한 공격을 가하는 결과로 나타난 게 아닐까. 이스라엘군의 무차별 폭격을 특히나 더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게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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