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 다음 대통령은 누가 됐으면 좋겠습니까?
송: 그걸 어떻게 말하겠어요… 우리 민주당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민주당.
리: 누가 돼도 상관이 없다…
송: 제가 당 대표가 되려 하는데, 그러려면 공사는 멀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리: 서울시장, 부산시장, 선거가 참패로 끝났습니다. 어쩌다 이 꼴이 났다고 생각하세요?
송: 가장 큰 건 부동산 문제죠, 뭐. 부동산 LH문제뿐만 아니라, 부동산 대책을 24번인가 내놓으며, 정작 부동산에 실패했으니 할 말이 없습니다.
정치 입문기
리: 정치하다가 제일 스트레스 받은 적이 언제입니까?
송: 욕 얻어먹을 때마다 스트레스받죠. 하도 자주 얻어먹긴 하지만… 제일 큰 건 대선에서 두 번 연속으로, 이명박-박근혜한테 깨졌던 때죠.
리: 본인이 선거에서 진 게 더 스트레스 받지 않아요?
송: 그렇지는 않아요. 저는 국회의원 아니라도 서 있을 자신이 있으니까… 변호사 자격증도 있지만, 몸도 튼튼해요. 노동자로 오래 살아봤기 때문에… 총학생회장 출신 중에 7년 동안 노동운동한 사람은 내가 처음일 거예요. 내가 국정원에 잡혀갔을 때 국정원 직원들도 놀라더라고요.
리: 어쩌다 국정원에 끌려가서…
송: 그때는 노동운동 하는 게, 그만큼 위험했으니까요. 한 2년은 위장취업 상태였고, 이후에는 노동 단체에서 일을 했죠. 근데 노동운동을 도와주다 보니까 법률적인 게 엄청 필요하더라고요. 하다 보니 변호사보다 내가 더 자료를 잘 만들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차라리 변호사 하는 게 낫겠다 싶어서, 변호사가 됐습니다.
리: 머리가 굉장히 좋군요;;;
송: 우리 집안이 공부머리는 타고난 것 같아요. 6남매 중에서 사시 2명, 행시 2명 합격했고, 교수도 1명 있으니. 그렇다고 막 천재, 이런 건 아니고…
리: 어마어마한데요. 어머님께서 애 키우는 법, 공부법 책 내지 않았습니까?
송: 어머님은 안 내고 우리 큰형이 냈죠. ‘송가네 공부법’이라고… 창피해서 읽어본 적은 없고… 저는 우리 아버지 슬로건을 좀 많이 좋아했습니다. ‘평범의 연속은 비범이다’란 거죠.
리: 와… 멋지네요. 그걸 공부할 때 새겼습니까?
송: 아뇨. 저는 그걸 학생운동할 때 써먹었는데…
5.18 시위에 앞장선 고등학생, 분노를 안고 학생운동에 뛰어들다
리: 대체 학생운동을 언제 어떻게 했기에;;;
송: 제가 고2때 보충수업비 폐지하라고 애들 모아서 데모를 했어요. 아니, 퀄리티도 별로 안 좋은데 무슨 돈을 추가로 받냐… 시대가 웃긴 게, 보충수업비 가지고 개겼다고 또 경찰서를 갔어요. 그렇게 조사받고 있는데 새벽에 갑자기 나가란 거예요. 제가 잡혀간 날이 10월 25일이었는데, 10.26이 일어난 거죠.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리: 박정희에게 고마워해야겠군요.
송: 아니, 김재규한테 고마워해야지;;; 어릴 때 경찰서 가면 얼마나 무서운데요… 그러다 고3때 518이 터졌죠. 영화 〈화려한 휴가〉에 나온 그 이쁘장한 남학생 있잖아요. 송중기인가…
리: 이준기입니다;;;
송: 네, 무튼 그 학생이 나온 고등학교가 우리 고등학교였어요. 광주대동고등학교… 제가 우리학교 시위를 주동했지요. 그리고 경찰한테서 도망갔다가 광주로 돌아가지 못했어요. 피가 끓었지만, 여수에서 아버지한테 붙잡혀 있었죠. 어차피 광주가 다 봉쇄돼 있어서 들어갈 수도 없었을 겁니다. 돌아오니 시민군에 참여한 친구 1명이 죽어있고… 친구가 죽으니 어린 나이에 고민이 엄청 컸습니다. 계속 대학 와서도 5.18이 꿈에 막 보이고…
리: 그래서 대학 가자마자 이제 돌을 던졌나요?
송: 학생운동에 참여하면 감옥에 갈 게 뻔한데, 그렇다고 전두환이를 보면 피가 끓고… 타협으로 진보적인 교회 대학생들을 꼬셔서 시위하러 나가고는 했죠. 그런데 제가 열심히 하니까, 지하 운동권 선배들의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오더라고요.
솔직히 무서웠어요. 그런데 안 들어가자니, 518 때 아무것도 못한 내 자신이 그려지고… 그때 새벽 기도를 가서 시편 23편을 읊은 기억이 나네요.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 않음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리: 그렇게 운동권이 되더니, 총학생회장까지 갔군요(…)
송: 원래는 저도 조용히 졸업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84년 4학년 때 학원 자율화 조치가 시작돼서 사법경찰이 교내에서 철수했어요. 그전까지는 학교 안에서 데모하면 바로 잡아갔는데, 이게 사라진 거죠. 운동권 애들도 다들 안심하고 졸업하는 분위기였는데, 저는 막상 싸울 상대가 사라지니까 갑자기 또 끓어오르는 거예요. ‘난 졸업하면 안 된다. 적과 싸워서 감옥에 가더라도 싸워야 된다…’
리: 아니, 뭐 뒤늦은 중2병을…
송: 그 전엔 사실 총학생회 개념도 약했어요. 그런데 이제 학원 자율화가 이뤄졌으니, 단발적으로 싸워서는 안 되고. 대중적 조직을 구성하자 생각한 거죠. 그날 내 자취방에서 부산시장 나간 김영춘이하고 서울대 이정우하고, 셋이 모여가지고 총학생회장 나가기로 합의한 거죠. 그렇게 ‘군사 독재 타도’를 외치다가, 감옥에 가며 학교에서 제적됩니다. 한 5개월인가 있다 풀려났어요.
리: 덕택에 군대 빠졌으면 나쁘지 않은데요(…)
송: 그런 계산이야… 뒤늦게는 그렇게 할 수 있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언제 나올지 모르는 전과자가 됐으니… 또 제가 독방을 썼는데 사람 살 공간이 아니었어요. 변기통이 방 바로 옆에 있고, 거기서 자고 밥 먹어야 되니까… 그게 정말 죽겠더라고요. 그래도 겨울이라 다행이지, 여름까지 갔었으면…
리: 일찍 풀려나 다행이네요. 풀려나서는 무엇을 했습니까;;;
송: 노동운동을 시작했죠. 85년에 인천에 내려가서 대우자동차 공장 건설 현장에서 배관 용접공으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리: 요즘 용접하면 돈 많이 번다는데 스킬을 하나 익혀 두셨군요…
송: 그렇죠. 대학에서 제적당했지만 언제든 먹고 살 수는 있어야 했으니까요. 이때 제가 속한 노동운동 조직이 김문수가 주도한 곳이었는데, 좀 조직화된 노동운동의 시초격일 겁니다. 주사파 쪽은 무슨 종교 같은 느낌이 들어서 멀리했고, 노동운동 쪽을 택한 거죠.
노회찬과 함께한 노동운동, 동구권 몰락을 보고 실사구시의 길을 걷다
리: 성경 공부도 하고, 막시즘 공부도 하고… 할 건 다 했네요.
송: 네. 그렇게 노동자들 조직하다가, 또 국정원에 잡혀가지고… 정말 한 달 동안 두들겨 맞았습니다. 옷을 팬티까지 다 벗겨놓고 나체 사진을 찍더라고요. 그래서 왜 찍냐고 그랬더니, 두들겨 맞다 죽으면 한강에 던질 텐데, 시체가 떠오르면 식별용으로 찍는다고… 제가 그때 23살이었는데, 제가 맞는 것보다 옆방 비명소리가 더 무서웠어요.
리: 근데 한 달 만에 풀어줬어요? 왜 이리 빨리 풀어준 거죠?
송: 아니, 내가 노동운동으로 잡혀 왔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잡아 온 거 자체가 전두환 암살 음모였거든요. 내가 고등학교 선생님한테 보낸 편지에 “밤마다 청와대에 쳐들어가서 전두환, 이 살인마 집단을 작살내는 꿈을 꾼다”고 적었거든요.
리: ……
송: 우리 아버지 친구가 국정원장 장세동이 형 장세태였습니다. 아마 그것도 빨리 풀려나는 데 영향을 미쳤을 거예요. 한 달간 맞기만 하다 나오니 정신이 없었는데, 그때 노회찬을 만나게 된 거예요. 그때부터 노회찬이 내 노동운동 지도 선임, 요즘 말로 사수가 된 거죠. 노회찬이 저보고 대중성이 좋으니까, 택시, 버스, 화물 쪽을 전담시켰어요.
리: 대중성이 좋다니, 무슨…
송: 그때 택시 기사님들 많이 거치셨어요. 근데 학생운동 출신이 또 엘리트 의식 같은 게 있다 보니 기사님들과 잘 못 어울렸거든요. 근데 저는 잘 받아들이고 같이 술도 많이 마시고 하니 그쪽으로 간 거죠. 그러던 와중 87년 6월 항쟁으로 사면복권이 됩니다. 제적이 취소돼서 학교 돌아가려 하니, 어차피 공부 안 할 거 알았는지 학교에서 졸업장 줄 테니 오지 말라고…
리: ……
송: 그리고 90년 소련이 무너집니다. 물론 노동운동이 사회주의 만들자는 생각으로 한 건 아니지만, 좀 빈부 차이가 없는 세상을 만들어보자는 꿈이 있었죠. 노회찬도 마찬가지였고… 우리가 종북 주사파는 반대했지만, 평등한 사회 민주주의를 지향했는데, 사회주의의 한 형태였던 동구권이 무너진 거죠. 그래서 형들한테 500만원을 받았어요. 내가 진짜 동구권 사회주의가 무너졌는지,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고. 그렇게 배낭여행을 갔죠.
리: 동구권 가보니까 어떻던가요?
송: 개판이더라고요. 사회주의는 완전히 허상이라는 느낌이 들었죠. 당시 우리나라도 선진국이 아니었는데, 가난하고 더럽고 냄새나고… 환상이 완전히 깨진 거죠. 한국에 와서 운동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현실을 바꿔야겠다. 노회찬이랑 이야기하고, 변호사가 되기로 했어요. 당시 제가 택시연맹 사무국장이었는데 안건을 냈죠. ‘송영길 사무국장 사법고시 안건’이라고.
첫 선거의 쓴맛과, 37세 초선 의원
리: 그렇게 사시에 합격하셨군요.
송: 그렇죠. 2년 만에 합격하고 사법연수원 다니는데, 임종석이하고 이인영이가 둘이 찾아오더라고요. 그러더니 “형이 정치를 해야 한다, 우리 세대를 대표해서 치고 나가야 한다”고 설득하더라고요.
리: 그래서 바로 설득에 넘어갔나요?
송: 아니, 그놈들도 웃겼던 게, 제가 연수생이지, 변호사도 아닌데 어떻게 정치를 해요? 근데, 변호사 되고 나서 99년도에 보궐 선거가 생겼어요. 제가 살고 있는 지역구의 이기문 의원이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이 상실된 거죠. 그때 대대적으로 우상호, 허인회, 이런 애들 100여명이 서명해가지고 DJ한테 송영길이 공천해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리: 그때만 해도 운동권이 참 좁고 끈끈했나 보군요.
송: 그것도 있지만, 솔직히 걔들 입장에서는, 제가 뚫고 나가야 자기들도 기회가 열릴 테니까(…) 이런 생각도 있었을 겁니다.
리: 아니, 그러면 지들이 먼저 나가면 되잖아요;;;
송: 아니, 그래도 제가 노동운동도 많이 했고 변호사 자격도 있고, 속된 말로 커리어가 좀 있었죠. 또 제가 사는 지역이라 정당성도 좀 있었고요. 마침 DJ가 젊은 피 수혈 이야기하실 때이기도 했거든요.
리: 선거는 승리하셨습니까?
송: 떨어졌습니다. 우리 지역이 민주당이 센 지역인데… 그때가 옷 로비 사건 났을 때예요. 김태정 장관 부인 때문에 난리가 났죠. 그때 DJ가 김태정을 해임시켰으면 됐는데, 오히려 마녀사냥이라 받아쳤어요. 실제로 마녀사냥인 면이 있었습니다. 그리 크게 떠들 일이 아니었는데…
리: 억울하셨겠군요.
송: 솔직히 그랬죠. 그래도 자존심이 있어서 옷 로비 사건 때문에 떨어졌다는 소리는 한마디도 안했어요. ‘제가 부족해서 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인터뷰했죠. 그리고 다음 해 2000년 총선에 당선합니다. 37살에 초선 의원이 된 거죠.
노무현 당선을 위해 온몸을 바치다
리: 당선되자마자 노 대통령 선거운동 뛰었겠군요.
송: 노 대통령과는 변호사 되기 전부터 안면이 있었어요. 제가 택시 조합장할 때 수련회 강사로 초청하며 연을 텄죠. 정말 인기가 많았습니다. 말도 잘하지만, 대세를 추종하지 않고 역풍을 거슬러오르는 힘이랄까… 원래 선거운동 때 저는 선관위에 있어서 어느 후보 편도 들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근데 정몽준 바람이 불며 김민석이가 탈당하고, 그때 이대로는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제가 수행하겠다고 자원을 했죠.
리: 수행?
송: 노무현 후보를 수행하겠다… 노 대통령이 인기가 없으니까 국회의원이 한 명도 수행을 안 하는 거예요. 내가 왜 충격을 받았냐면 신라호텔에 무슨 행사가 있어서 참석했는데, 이회창 후보가 오는데 금배지들이 한 10여 명이 쫘악 따라다니더라고요. 노무현은 달랑 두 명인가? 그것도 의원이 아니고… 기분이 너무 짠해가지고…당장 ‘저부터 수행하겠습니다’하고..
리: 광주경선 열풍 크지 않았나요?
송: 후보가 되고도 찬밥이었어요. 그래서 후보교체론이 막 나왔잖아요? 정몽준 단일화 이야기 나오고… 후보 수행을 하면서 그때 많이 친해졌습니다.
리: 그렇게 해서 이제 대통령이 되고… 나에게도 한 자리가 오겠다! 이런 희망이 보였습니까?
송: 그때는 제가 초선 재선이라 뭐 장관 같은 자리는 기대도 안 했죠. 그리고 당선되자마자 열린우리당 분당 터지고…
리: 분당은 어떻게 보셨나요?
송: 저도 당이 새롭게 탄생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했는데… 분당해서 가는 건 반대였거든요. 솔직히 정동영이 자기 당대표 하려는 욕심이 컸던 거지… 노 대통령도 처음엔 분당 반대했잖아요. 나중에 어쩔 수 없이 따라온 거죠. 구태는 공천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도태시켜야지, 괜히 쪼개지고 또 합당하고, 또 지역구도를 잉태하게 만들고…
리: 하지만 그 당시 열린우리당이 인기를 끌면서 과반 먹지 않았었나요?
송: 하… 그건 탄핵 열풍으로 온 우연의 결과물이죠. 그건 완전히 노무현 대통령의 어떤 개인기라고 할까… 정작 열린우리당은 금방 무너졌잖아요.
노무현과의 대립, 뒤늦게 그 아픔을 깨닫다
리: 마찬가지로 노 대통령 인기도 빠르게 내려갔죠. 노무현 대통령 시절은 어떻게 보세요?
송: 저도 혈기왕성해서 비판적인 발언을 많이 했죠. 특히 대북 송금 특검, 대연정, 두 가지는 공개적으로 반대했습니다. 반대로 적극 찬성했던 건 FTA가 있네요. 특위 간사를 맡고 세게 지지했죠. 연기금 주식 투자 확대도 강력히 주장했고요. 당시 연기금의 주식 포션이 4%인가밖에 안 됐는데, 저는 최소한 25%는 가야 한다 했죠. 제 생각에 당시 주식 저평가 있었고 외국인 주식 막 들어오는데, 연금도 주식 비중 늘려야 하지 않나,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리: 그때도 반대 많았죠.
송: 그렇죠. 노 대통령 생각도 저랑 같았는데, 김근태 선배가 반대해서 많이 싸웠죠. 김근태 선배는 아무래도 원조 운동권이시다 보니…
리: 본인도 운동권이지 않습니까.
송: 노무현 대통령이 어떤 의미를 가지냐면, 제가 초선 때부터 운동권 선배들한테 이야기했어요. 서울법대 전설적인 장기표 선배, 서울 상대 전설적인 김근태 선배, 왜 당신들이대통령 안 되고 노무현 대통령이 된 거냐. 우리 운동권이 엘리트주의에 갇혀 있었다는 거다… 양반 출신 의병장이 상놈들하고 겸상도 안 할 때, 신돌석 장군은 밑바닥에서 같이 밥 먹었다… 노무현이 우리 시대의 신돌석이다. 엘리트 운동권에 갇히면 안 된다…
리: 그런데 요즘 386들이 그 비판을 받잖아요.
송: 그렇죠. 모든 역사라는 게 한때 개혁을 이끈 이들도, 이끼가 끼고 다시 개혁의 대상이 되는 것이죠. 그런 면에서 민주당이 좀 청년들을 키울 필요는 있어요. 이번 총선에서도 저는 전용기, 장경태의 공천을 강력히 주장했어요. 수혈한 김남국도 키울 기회를 줘야 한다 했고.
리: 김남국 이야기를 들어가면 또 조국 이야기가 나오는데, 어떻게 보십니까?
송: 저도 아쉬움이 있어요. 청문회 열 때까지는 저도 강력히 옹호했는데… 장관을 꼭 시켰어야 하나… 좀 쉬다가 부산서 국회의원 출마시켜도 되지 않나, 후자가 맞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지요.
리: 노 대통령이 돌아가셨을 때는 어떤 생각을 하셨습니까?
송: 초선, 재선 시절 노 대통령 세게 비판했는데… 그 이후 자기반성이 더 커졌습니다. 그때 제가 욕 많이 먹었어요. 최고위원 회의에서 “죽은 권력인 노무현 대통령 철저히 수사하고, 또 살아있는 권력인 이명박 대통령 친구들도 철저히 수사해라”고 했거든요. 그런데 조선일보가 뒤를 자르고 앞에만 보도한 거예요.
제가 당시 방통대 중국어과를 다니고 있었는데, 중간시험 보고 있는데 그 소식을 들은 거예요. 너무 먹먹한 심정으로 바로 내려갔죠. 내려갔더니 저를 포함한 의원들 죄다 물병 얻어맞고 욕먹고 그랬죠. ‘이 새끼들 뭔 낮짝으로 왔냐’고… 그냥 상갓집에 꼼짝도 않고 앉아있었어요. 그저 혼자 앉아있으니, 새벽 4시쯤 노사모 몇 분이 와서 술 따라주고 했던 기억이 있네요.
리: 참 아픈 기억이군요.
송: 그리고는 몇 번 언론에 반성문도 쓰고 그랬죠. 노 대통령… 옛날에는 우리가 아무리 투정해도 버텨줄 줄 알았는데, 노 대통령도 정말 상처가 많은 사람이었던 거죠. 저도 나이가 들어서 4선, 5선, 인천 시장도 해보고 하니까… 더 실감 나게 이해가 되는 겁니다. 그 사람의 외로움과 고통이… 제가 초선 재선 때는 젊을 때라 그 아픔을 몰랐던 거죠.
인천시장으로 행정가의 능력을 보이다
리: 그리고 2010년 인천시장이 되는데요. 참 평가가 갈립니다.
송: 저는 제 국회의원 시절 이런저런 공과가 있지만, 인천시장 시기만큼은 정말 잘했다고 봅니다. 부도 위기의 인천을 구했다고 자부해요. 제일 먼저 비정규직 공무원을 정규직으로 전환시켰고, 인천 지하철 노조 해고자들도 다 복직시켰죠. 그다음에 인천대학교를 국립대로 만들었어요. 뉴욕주립대, 겐트대, 유타대 등 글로벌 캠퍼스도 유치했고요.
리: 아, 원래 인천대는 국립대가 아니었어요?
송: 네. 이름 때문에 다들 착각하는데, 제가 시장 때 바뀐 거예요. 무엇보다 삼성 바이오로직스를 비롯해서 바이오, BT사업을 다 유치했잖아요. 셀트리온, 바이오로직스, 동아제약… 유령도시 송도를 살려낸 거죠. 그 전에 인천은 노후된 사업 위주였어요. 경기은행이 망한 이후 은행도 없었는데, 하나금융타운을 유치해서 우리나라 5대 은행이 들어온 거고요.
리: 재정건전성 이슈도 있던 걸로 아는데… 공청 채무가 더 늘어났다 이런 얘기도 있던데…
송: 늘어난 부분은 순전히 아시안게임 경기장 건설하고 지하철 2호선 건설하는 거였어요. 아시안 게임은 취소하지 않는 이상은 해야죠. 이미 공 사되고 있는 지하철 2호선을 접을 수도 었고요. 채무는 그 두 가지 때문에 쓴 게 거의 전부입니다. 오히려 안상수가 숨겨놓은 채무들, 8천억이 넘는 채무도 제가 다 해소시켰습니다. 적자라서 부도나기 직전인 걸 살려낸 거죠. 당시 인천시가 외국인 투자에서 서울을 이기고 1위를 했어요.
리: 그 수많은 업적에도 왜 졌을까요?
송: 가장 큰 게 아무튼 박근혜 마케팅이었죠. 유정복이 박근혜 비서실장 출신이니까. 또 세월호가 터지다 보니, 제가 너무 미안해서 선거운동을 거의 안 했어요. 마이크도 안 쓰고 유세차도 안 하고, 그냥 조용조용 돌아다니기만 한 거예요. 아무튼 그렇게 선거에 떨어졌죠.
리: 잘 나가다가 떨어지면 어떤 기분인가요?
송: 뭐, 기분은 나쁘지만 할 일은 해야죠. 안상수는 낙선하고 잘 안 나왔다 하던데, 저는 이 악물고 정상 근무했어요. 제일 처음에 시장 되자마자 했던 게, 모든 청소 미화원 아줌마 아저씨들하고 해장국 식사하는 거였어요. 그다음 지하철 노조원들, 시청 직원들… 그걸 퇴임하기 전에 또 한 번씩 이별 식사를 했죠. 특히 지하철 정규직화 시켜준 아주머니들 많이 울더라고요. 그걸 다 하고, 임기 다음 날 아침 바로 일본으로 갔습니다.
리: 공부하려고 간 겁니까?
송: 그렇긴 한데, 솔직히 박근혜 마케팅으로 붙은 유정복 꼴 보기도 싫어서(…) 메이지 유신 유적지를 싹 돌아보고, 중국 칭화대로 가서 1년 정도 공부했어요. 그리고 대만 정치대에서 3개월 공부하고… 중국 양안관계를 통해 남북관계를 돌아보면 어떨까 한 거죠. 덕택에 영어, 중국어는 어찌저찌 강의할 정도로는 합니다. 일본어는 아직 그 수준은 아니고요.
정권 재창출 위해서는 오만 버리고 국민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리: 아무튼 당대표 선거에 나섰는데, 이낙연 당대표는 괜히 욕만 먹지 않았습니까? 본인도 마찬가지일 것 같은데…
송: 시기적으로 좋진 않죠. 그래도 전 대선 욕심으로 나서는 건 아니니, 당에 잘 헌신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리: 당대표 되면 뭐 하실 생각입니까?
송: 가장 우선시해야 할 건 정권 재창출이죠.
리: 하필 제일 어려운 일을 하려는군요. 정권 재창출시키려면 이제 어떻게 해야 될까요?
송: 맞물리는 이야기인데, 부동산 문제를 해결해야죠. 또 코로나에 묻혀있는데, 남북관계도 좋지 않아요. 여기에 친이재명과 비이재명 간의 갈등 골도 깊고… 결국은 원팀을 만들어야죠. 원팀을 만드는데, 아무래도 홍영표, 우원식보단 제가 더 적격이라 봅니다.
리: 말 나온 김에 이재명 도지사는 어떻게 보십니까?
송: 이재명은 국회의원도 한번 안 해보고 대통령 해보겠다는 겁니다. 저는 586들이 이걸 비판할 게 아니라, 반성해야 한다고 봐요. 어찌 보면 우리 586들, 다 서연고 나오고 잘나갔죠. 젊어서 뱃지 차고 떵떵거리고.
그런데 이재명은 노동자로 일하다가 중앙대학교 겨우 들어가서 뒤늦게 고시합격해서 변호사가 됐어요. 힘겹게 싸우며 그사이에 대중과 얽히는 감을 익힌 거죠. 그런데 대통령이 돼서 이 국가 전체를 책임져 보겠다는 강한 권력의지도 있고. 이런 의지가 있어야 고민하고 공부도 많이 하게 돼요. 제가 586이지만, 아직도 586 의원들은 더 많이 배워야 한다고 봅니다.
리: 지금 민주당이 살아나려면 제일 필요한 게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송: 정당이라는 게 국민의 마음을 얻어야 하는 조직이잖아요. 지금 민주당은 우리만의 논리에 좀 갇혀있는 것 같아요. 그러면 어떤 이야기를 해도 억지로 보이고 소통이 안 되지요. 특히나 니들 한번 잘해보라고 탄핵까지 시킨 국민들 입장에서는, 이명박 박근혜 탓이나 하는 민주당이 초라하고 미워 보이죠.
지금 민주당이 갖춰야 하는 것은 능력, 이게 드러나야 국민의 신뢰가 온다
리: 그러면 더 도덕적으로 되야 된다는 건데, 도덕성 따지다 보면 소모적으로 흐르기 쉽지 않나요?
송: 도덕보다 능력을 발휘해야죠. 지금의 문제는 무능이에요. 코로나 잘 막으니 지지율 급등했잖아요. 부동산 못 막으니 지지율 개판 나고… 국민들은 유능한 정당과 정부를 지지합니다. 제가 평생 자랑으로 삼는 게 한미FTA와 송도 바이오예요. 이처럼 경제적으로, 청년 실업 문제나 부동산 문제를 해결해가는 정당이 될 때, 국민들의 사랑을 다시금 받을 거라 봅니다.
리: 지금 국힘에 대해선 어떻게 보세요? 국민의 힘에 대해선 어떻게 보세요?
송: 굉장히 힘들겠죠. 윤석열 지지율이 높은 건, 민주당이 밉지만 그렇다고 국힘을 이뻐하지도 않겠다는 거예요. 2012년에 만약 안철수 중심으로 갔다면 민주당은 깨졌겠죠. 자기 당이 키우는 인물로 가지 못한다면, 국힘은 재편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뭐, 국힘 뭐라할 것 없이, 우리 민주당부터 잘 정리해서 가봐야죠.
리: 그러면 윤석열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송: 어찌 됐든 대단히 정치적인 인물이라는 게 드러난 거죠. 자기가 조직에 충성한다고 수많은 워딩을 했지만, 자기 중심성이 대단히 강한 사람임이 드러났죠. 하지만 대개의 정치인들이 그런 경향이 있기에, 이를 뭐라할 건 아니라 생각합니다.
리: 그렇네요. 그러면 윤석열은 외려 정치에 잘 맞는 사람이다?
송: 그렇든 아니든 정치를 하지 않는 게 맞다고 봅니다. 검사장까지는 모르지만, 검찰 총장과 대법원장은 그걸 최후의 공직으로 삼는 게 옳습니다. 검찰 총장이나 대법원장 자리는, 그것을 공직의 마지막으로 해야, 우리 사회의 가장 공정성이 요구되는 조직에 기강이 섭니다. 또 후배 검사들이나 판사들 볼 때도 귀감이 되고요. 아니면 정치조직화되기가 쉽습니다.
리: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송: 이번이 세 번째 당대표 도전입니다. 지금 민주당에 필요한 것은, 결국 부동산 등 국민의 삶을 개선할 능력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야 정권 재창출의 기회가 열릴 것이고, 여기에 제 남은 정치를 걸어보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