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은 한국 역사상 전에 없이 큰 성과를 거두었다. <기생충>에서는 아찔한 스릴과 서스펜스를 통해 계급이 현대 사회에서 얼마나 공고히 설정되어 있으며 또 작동하는지를 보여준다. 이 대단히 극적인 영화는 부자를 악하게, 빈곤한 자들을 선한 희생양으로 다루는 데에서 벗어나 오히려 이를 전복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기생충>에서 가난한 이들은 선을 넘어 높은 곳으로 기어오르고자 하는 악취이며 높은 집에서도 가장 낮은 바닥에 웅크리고 숨어야만 밟히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기생충이다. 그들은 소수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를 짓밟고 가장 낮은 계단 아래로 밀친다. 여기서 투쟁의 대상이 되는 것은 부르주아가 아니라, 같은 위치에서 나의 경쟁자가 될 수 있는 또 다른 프롤레타리아이다.
가난한 이들을 악하게 다루었다는 것만으로 영화를 비판할 수는 없다. 약자를 선하게만 다루는 것 또한 혐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가 가난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서는 지적할 부분이 있다. 현실을 잔인할 정도로 재현하는 필름 속에서 기택 가족의 가난은 끝없이 대상화된다. 영화는 꾸준히 가난한 이들에게서 씻을 수 없는 ‘가난의 냄새’가 난다고 주장한다. 그 결과 기택 가족은 그들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부유한 이들이 불쾌해하는 냄새, 이물질이나 기생충으로 기능한다. (인물들이 극화되어 나타나는 건 스릴러가 갖는 특징이긴 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닌 가난을 어떻게 포착해야 할까? 실재하는 약자들을 조명할 때 미디어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그에 대한 해답과도 같은 영화다.
플로리다 주, 올랜도. 디즈니월드로 가는 길목에는 알록달록한 모텔들이 있다. 보라색이나 분홍색의 화려한 페인트로 색칠되어 있지만 낡고 찌든 냄새가 나는 모텔에는 디즈니월드로 향하는 관광객 대신 건물처럼 ‘낡고 찌든’ 장기투숙객들이 모여든다. 미혼모, 범죄자, 마약 중독자와 PTSD 환자와 이민자가 말이다.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주인공인 여섯 살 무니는 이런 모텔 매직캐슬(Magic Castle)에서 엄마 핼리와 함께 살고 있다.
무니가 사는 매직캐슬도 역시 빈대가 끓는 방을 소독하거나 벽에 난 실금을 메우는 대신 밝은 보라색으로 외벽을 칠하는 곳이다. 그래서 환상의 나라 근처에 있는 매직캐슬은 알록달록한 색깔에도 불구하고 디즈니월드의 성이 아니라 값싼 플라스틱 장난감처럼 보인다. 국가의 보조금으로 삶을 꾸려나가거나 보조금조차 없이 복지의 사각에 내몰린 사람들이 사는 이 싸구려 모텔촌에 새로운 아이가 들어오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매직캐슬에서 자란 무니는 어른들이 울기 전에 어떤 표정을 짓는지 아는 조숙한 아이이면서 침 뱉기 놀이와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 장난꾸러기다. 그는 스쿠티와 새로운 친구 젠시의 손을 잡고 동네를 누빈다.
영화에서 끝없이 펼쳐지는 아이들의 장난은 제법 위태롭다. 디즈니월드 매표소에서 관람객들에게 동전을 얻어 아이스크림을 사 먹는 것부터, 폐건물에 불을 지르는 아주 위험한 놀이까지. 놀이터가 없는 모텔촌에서 ‘무엇도 아닌’ 공간들은 모두 아이들의 놀이터가 된다. 모든 놀이공간은 세상이 그렇듯 무신경하며 불친절하고 때로 위협적이지만, 어린이들은 해맑은 모험을 즐긴다. 상상력이 세상을 항상 근사한 곳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영화는 아이들에게 존재하는 위협까지 거세해 비추지는 않는다. 언제나 위험은 도처에 도사리고 있지만 바비와 같은 어른들에 의해 좌절되거나 아이들이 알아채지 못할 뿐이다. 그러므로 조마조마함과 불안감, 두려움은 아이들의 몫이 아니라 지켜보는 어른들-관객의 몫이다.
한편 어른들의 세상은 모험을 즐기는 무니와 스쿠티, 젠시의 일상과 다르다. 특히 무니의 엄마 핼리는 일에서 해고된 후로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하지 못한다. 그는 방에 늘어져 시간을 허비하거나 친구에게 음식을 얻어와 무니와 먹거나 주변 호텔에서 불법 향수 장사를 한다. 혹은 디즈니월드로 향하는 손님들의 물건을 훔쳐 팔기도 한다. 백 번 양보하더라도 좋은 엄마라고 하긴 힘들지만, 무니에게는 세상 하나뿐인 엄마다.
마찬가지로 핼리에게도 무니는 유일하다. 상황이 아무리 나빠지더라도 핼리는 무니를 포기하지 않는다. 가지고 있는 것은 몸과 방세도 낼 수 없는 방 한 칸뿐, 딸과 함께 살기 위한 발버둥이 끊임없이 좌절된 끝에 핼리는 매춘에 발을 들인다.
영화는 핼리가 하는 일을 명확히 비추지 않는다. 앞서 무니에게 닥치는 위협을 묘사하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다만 밤마다 목욕을 해야만 하는 무니와 불현듯 욕실을 침범하는 남성의 이미지를 통해 모녀에게 닥친 폭력의 이미지를 암시할 뿐이다. 그것은 자본의 이미지이며 두 사람이 거부하거나 반항할 수 없는 권력의 침범이다. 그리고 결코 핼리와 무니의 집이 될 수 없지만, 분명 핼리와 무니의 집이었던 낡은 호텔방은 이런 한 차례의 침범 이후로 손쉽게 무너진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지역 아동센터는 성매매를 한 핼리에게서 무니의 양육권을 박탈하고 무니를 다른 가정에 입양시키기 위해 두 사람의 공간을 침범한다. 이때 국가의 권력은 핼리와 무니가 함께하기를 돕는 대신, 오직 핼리라는 부적응자를 추방하기 위해서만 작동한다. 핼리가 무니와 함께 했던 시간이나 무니가 핼리와 함께 하고 싶다는 것은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핼리에게 정기적인 소득이 없고, 그가 성매매를 했으며 아동을 싸구려 모텔에 방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발버둥 끝에 아동센터의 직원들에게서 도망친 무니는 친구 젠시에게 달려간다.
내가 이 나무를 왜 좋아하는지 알아? 쓰려졌는데도 자라나서.
그렇게 말하던 무니, 쓰러진 채로도 꿋꿋하게 자라야 했던 무니는 젠시 앞에서 끝내 울음을 터트린다. 무니를 당장 울게 하는 것은 엄마가 성매매를 했다거나 돈을 벌지 못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시는 볼 수 없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그래서 젠시는 울고 있는 무니를 데리고 디즈니월드로 향한다. 어떤 사람이 가도 행복해지는, 웃을 수 있는 공간에 무니와 함께 편입되고자 한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손을 맞잡은 두 아이를 따라 카메라는 선물가게와 주차장을 지난다. 웃는 사람들이 가득한 디즈니월드의 중앙로를 나아간다. 그리고 무지개 끝에 있다는 황금을 찾아가듯 마법의 성을 향해 달린다.
아이들의 발걸음이 멈추는 것은 싸구려 모텔 ‘매직캐슬’과는 다른 진짜 매직캐슬,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곳이면서 동시에 사람들이 만든 가짜 마법의 성이다. 무엇도 해결할 수 없는 가짜 마법 앞에서 예정된 슬픔은 사라지지 않고 다만 유예될 뿐이다.
감독 션 베이커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만약 이 영화에 악당이 있다면, 그건 특정 인물이 아니라 임대 주택 위기나 불경기, 연방 자금 지원 부족 등일 것이다.
그의 말대로 <플로리다 프로젝트>에는 완전한 선인도 악인도 없다. 변두리로 사람들을 밀어내는 건 ‘빌런’이 아니라 사회 구조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플로리다 주 올란도에 위치한 디즈니월드에는 연간 5천5백만 명(2014)이 방문한다.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1965년 디즈니가 올란도에 이 테마파크를 건설하기 위해 부동산을 매입한 개발 프로젝트의 이름이다. 디즈니가 꿈꾼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물론 성공적으로 완성되었고, 디즈니월드에 속하지 못한 사람들은 목적지가 아니라 경로로만 존재하는 변두리에 내몰렸다. 이렇듯 관광산업이 발전하면서 도시 전체가 테마파크로 바뀌는 현상을 디즈니피케이션(Disneyfication)이라고 한다.
디즈니피케이션 된 도시들은 고유의 정취나 원주민들의 생활상을 잃고 관광객들의 테마파크로 변모한다. 올란도도 그런 도시 중 하나다. 디즈니월드가 완공된 후, 놀이공원 근처에는 알록달록한 모텔들이 여럿 들어섰다. 그리고 관람객들을 받기 위해 지어졌던 모텔은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발발하면서 히든 홈리스(Hidden homeless)들의 집이 되었다. 영화의 주인공인 핼리와 무니 모녀도 이런 히든 홈리스다.
히든 홈리스란 거주할 곳이 없어 단기 숙박 시설에 장기적으로 머무르는 사람들을 말한다. 이들은 모텔이나 고시촌, 찜질방 등 거주공간이 아닌 곳을 주거용으로 사용한다. 이런 히든 홈리스들은 노숙을 하지 않아 홈리스로 집계되지는 않지만, 실질적으로 안정된 거주공간이 없는 노숙자이다. 그리고 이러한 홈리스들을 지원하는 플로리다 주의 보조금 정책은 ‘플로리다 프로젝트’라고 불린다.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디즈니월드를 만들기 위한 계획이면서 동시에 집이 없는 사람들에게 지원금을 주는 정책인 셈이다. 이렇듯 제목이 갖는 이중성은 무니가 디즈니월드 코앞에 살아도 불법적인 방법 없인 불꽃놀이조차 훔쳐보지 못하는 아이러니를 꼬집는다.
플로리다란 누군가에게는 기회의 땅이고 누군가에게는 꿈과 희망의 놀이공원이다. 마찬가지로 플로리다 프로젝트 또한 누군가에게는 그저 디즈니월드를 만들어낸 정책일지 모른다. 그러나 시선이 닿지 않는 외곽에는 플로리다 프로젝트에서 지원하는 보조금 외엔 기회를 잡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빈곤한 이들이 게으르거나 어리석거나 악하기 때문이 아니다. 올랜도를 사람이 사는 땅 대신 동화 속의 성으로 만드는, 개인이 발버둥을 쳐도 극복할 수 없는 거대 구조-프로젝트 때문이다.
아이들이 보는 세상은 우리의 것과 같지 않다. 단순히 동심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어린 시절 놀았던 동네에 돌아가면 길이나 건물이 왜 이렇게 작아졌는지 생각을 하게 될 때가 있다. 이는 아이들의 시야가 어른들보다 낮을 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시야각도 어른들보다 작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시야에서 세상 모든 것은 어른들이 느끼는 것보다 커다랗게 보인다.
그래서 <플로리다 프로젝트>에서는 시종일관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 카메라를 잡는다. 특히 디즈니월드를 향해 달리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꾸준히 아이 레벨(Eye level)을 무니의 높이에 둔다. 이 영화와 마찬가지로 아이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우리집>의 윤가은 감독은 이렇게 밝힌 바 있다.
조금이라도 위에서 아래로 찍으면 아이들이 대상화되어 보이더라고요. (…) 아이들의 키 차이 때문에 카메라가 밑으로 이동하는 건 자유롭게 두되, 눈 위로는 함부로 올라가지 말자고 규칙을 세웠어요.
그의 말마따나 <플로리다 프로젝트>에서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무니는 영악하거나 천사 같거나 되바라지거나 순진무구한 아이가 아니다. 그는 여타 영화들이 빈곤층이나 아이들 같은 사회적 약자에게 그래 왔듯 한 가지 속성으로 대표되지 않는다. 무니는 사건의 주체이며 자기 삶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무니의 시야를 통해 우리의 눈에 들어오고, 관객들은 그를 통해 단편적으로나마 무니의 삶을 이해할 수 있다. 영화는 무엇도 설득하지 않는다. 핼리의 행동을 변명하거나 무니의 사랑스러움을 부각해 비극성을 과시하지도 않는다. 카메라는 구구절절한 설명 대신 최소한의 경험과 최대한의 이해만을 담는다.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진 카메라는 더욱 적은 암시만을 보여준다.
이는 결국 한 가지 깨달음으로 나아간다.: 사람들은 거기에 존재한다. 그들이 존재하는 방식을 관객에게 설득하지 않아도, 누군가에게 ‘잘 보이거나’ 누군가와 비교당하지 않아도. 우리가 보지 못했던 세상에도 사람들은 존재하고 아이들은 자라난다.
그래서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카메라는 가난을 조롱이나 동정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높은 곳에서 그들을 내려다보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감히 그들을 동정할 이유가 없다. 무니의 시야에서 세상은 불친절하되 현란하고 명랑한 곳이다. 무니는 엄마 핼리와 함께 하는 시간을, 친구들과 뛰어노는 시간을 마음껏 즐기며 자라고 있다. 예정된 슬픔 속에서도 말이다.
그러므로 관객들이 느껴야 하는 것은 동정심이 아니라 죄책감과 불안감이다. 우리가 알록달록한 페인트로 덧발라 외면했던 곳에도 사람이 있다. 디즈니월드로 향하며 지나쳤던 싸구려 모텔들에서도 사람이 자란다.
카메라는 관객을 무니의 시야에 맞춰 간접 경험을 제공하면서 이러한 감정을 전달한다. 이 영화가 기생하지 않는 약자를, 대상화되지 않은 가난을 포착하고 전달하는 방식이다.
원문: 예진의 브런치
참고문헌
- [영화속 경제] 플로리다 프로젝트 – 관광객의 놀이터가 되는 ‘디즈니피케이션’.” 주간경향
- [인터뷰]‘우리집’으로 돌아온 ‘아이들 영화 장인’ 윤가은 감독 .” 경향신문
- [허프인터뷰] ‘플로리다 프로젝트’ 션 베이커는 월세만 밀리지 않는다면 계속 이런 영화를 만들고 싶다.” 허핑턴포스트
- <플로리다 프로젝트> 숀 베이커 감독 – 아이러니한 슬픔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씨네21
- “쓰러지고도 계속 자라나는 너를 응원해.”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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