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트하우스를 보고 있자면 다른 평범한 드라마들이 지루하고 시시해 보일 지경이다. 늘어지고, 뻔한 전개, 고구마처럼 답답한 내러티브가 단 1도 없다. 오죽하면 주단태의 여자친구는 화장실 다녀오면 바뀐다는 말이 나오겠는가.
기승전결이 아니라 기와 결만 있다. 대사 속도, 장면 전환이 빨리 보기 2배속을 보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빠르다. 그렇다면 우리가 막장드라마에 빠지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1. 인간의 어두운 욕망을 자극한다.
펜트 하우스라는 공간과 극 중 인물들의 화려한 삶에 비치는 허영과 현시욕은 사실 인간의 본성이다. 대한민국 0.01% 의 상류층이 모여 파티와 불꽃놀이를 하며 누리는 그들만의 세상을 사치의 극치라며 비난하는 마음 한편엔, 누구나 한 번쯤은 저렇게 살아보고 싶다는 부러움과 열망이 있다.
인간은 누구나 갑이 되어서 대접받고 싶은 욕망이 있다. 똑똑하고 성실했던 검사, 교수, 기업인들이 국회의원만 되면 욕망의 노예로 변해가는 것은 인성에 특별한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보통사람이기 때문이다. 자리와 환경이 주어지면 인간은 누구나 갑질을 한다. 단지 인격과 성숙함이 그 욕망을 다스리고 절제할 뿐이다. 무의식에 꼭꼭 억제해 왔던 원초적인 욕망이 드라마를 통해서 구현되는 쾌감은 실로 강렬하다. ‘욕하면서도 본다’는 말처럼, 우리의 엄격한 초자아는 이 드라마를 부정하고 비난하게끔 만들지만 본능은 간절히 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양극화된 모순과 갈등이 우리를 매 순간 시험대에 오르게 만든다. 내가 오윤희라면 어떻게 했을까, 딸을 위해서 심수련을 배신했을까? 내가 천서진이나 주단태라면? 일반인이라면 평생 한두 번도 겪지 않을 갈등을 펜트하우스의 인물들은 매 순간 마주한다. 매회마다 승자가 바뀌고 그들에게 주어지는 가혹한 양자택일과 시험대는 마치 우리가 주인공들과 함께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극적인 도파민의 바다로 인도하는 것이다.
2. 천서진이라는 캐릭터의 입체성과 공감력
펜트하우스의 핵심인물은 천서진(김소연)이다. 모든 인물의 원한 관계가 그녀를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데, 단순히 그녀를 악인이라고 단정 짓고 미워하기에는 무언가 그녀의 삶에 공감되는 부분이 너무나 많다. 권위적이고 경쟁적인 아버지, 평생을 애정결핍과 불안정한 애착 속에서 자라온 어른 아이가 천서진이다.
재벌의 삶을 살면서도 오직 1등, 청아예고의 이사장, 트로피에 집착하는 불안이 그녀의 삶 전체를 지배해왔다. 언제든지 새엄마와 이복 여동생에게 모든 걸 빼앗길 수 있다는 불안, 아버지에게 버림받을 수 있다는 유기불안이 그녀의 원초적인 신호불안과 고통을 잉태했고, 사멸에 대한 공포를 느끼게 했을 것이다.
유부남과 불륜을 즐기고, 목표를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얼음 여왕 같은 도도함을 풍기지만 한편으로 그녀가 한없이 불쌍하고 나약해 보이는 이유는 아마 그것 때문이 아닐까. 모든 것을 다 가진 듯 보이지만, 속이 뻥 뚫려 있는 공허함과 허무함, 17년을 함께 산 남편은 물론 딸에게도 진실된 신뢰관계를 형성하지 못하는 그녀는 평생을 열등감의 쳇바퀴 속에서 살았다.
존 볼비의 이론에 따르면 천서진은 전형적인 불안정 애착유형을 가지고 있다. 부모의 관심과 애정을 갈구하며 소리 지르고 분노하고, 모든 힘을 쥐어짠다. 권위적이고 냉담한 부모가 주지 않았던 것을 남편에게 보상받길 원하지만 이조차 실패하고 만다. 남은 것은 껍데기뿐인 권력과 돈, 명예에 대한 뒤틀리고 왜곡된 집착, 그리고 딸에 대한 소유욕이다.
자신과 똑같이 열등감과 좌절로 망가져가는 딸을 보며 과거의 트라우마를 몇 번이고 재경험하는 그녀 또한 너무나 아픈 피해자인 것이다. 이러한 모순과 생생함이 우리를 그녀의 삶에 공감하게 하는 이유인 것이다.
3. 공격성의 환기, 대리만족
막장드라마는 인간 내면의 은밀한 파괴 욕구, 공격성을 환기시키고 대리만족의 쾌감을 준다. 충분히 말로 할 수 있는 얘기를 부수고 집어던지고, 때리고 소리 지른다. 천서진과 주석경은 평범한 톤의 대사가 거의 없다. 단전 깊은 곳에서부터 길어낸 응어리와 분노의 샤우팅을 듣고 있자면 실제로 저렇게 예의 없고 제멋대로인 사람이 있을까? 싶다가도, 한편으로는 속시원한 느낌이 든다. 보통 우리는 항상 남의 눈치를 보면서 조심조심 살고 있기 때문이다.
‘민폐를 끼치지 말아야지, 타인의 감정을 불쾌하게 하면 안 돼.’ 직장에서, 학교에서 우리는 얼마나 감정을 억누르며 지내왔던가. 천서진과 주석경을 보면 그야말로 전두엽이 없는 것처럼 본능과 감정이 입으로 튀어 나온다. 일반인들이 ‘진짜 몇 대 때려주고 싶다. 쌍욕을 날리고 싶다’ 수백번 생각하고 절제하는 것들을 이성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행동으로 옮겨 버린다.
이러한 카타르시스에 우리는 열광하는 것이다. 살면서 실제로 물건을 부수고 누구를 때릴 일이 몇 번이나 되겠는가, 평생 그럴 일이 없는 사람들이 더 많다. 마치 액션영화를 보는 듯한 감정의 분출과 아드레날린에 미러링 하며 간접 쾌감을 느끼는 것이다.
화이팅 이지랄 pic.twitter.com/o73asiKGqU
— 펜트하우스 보세요? (@thePenthouseArc) March 19, 2021
4. 인간의 내면, 관계에 대한 이해
펜트하우스의 성공은 단순히 원초적이고 자극적이어서가 아니다. 이전의 막장드라마들과 수준이 다른 열렬한 지지와 관심을 받는 이유는 인간 내면과 관계에 대한 깊은 이해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감추려 해도 새어 나오는 열등감, 자존감과 정체성, 라이벌 의식등을 조명하면서 형제는 물론 부부사이, 심지어 부모 자식간에도 적이 될 수 있구나, 라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오윤희와 천서진의 관계를 보면서 어린 시절 나를 무시했던 친구가 생각났고, 주단태가 자녀를 학대할 때, 내가 부모에게 당했었던 정서적 학대, 원망과 두려움, 분노가 떠올랐다. 마치 드라마를 보는 게 아니라 심연, 깊은 무의식에 감춰왔던 내 은밀한 욕망과 감정들이 떠올라 부유하고, 이것을 마주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나를 배신하고 다른 여자와 결혼한 첫사랑이 이혼 후 다시 내편이 되었다가 각자의 딸을 보호하기 위해 다시 적이 되는 상황.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그럴듯해 보이는 이유는, 복잡하고 거미줄 같이 얽힌 다수의 상관관계와 상호작용이 사건에 개연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어제의 원수가 오늘의 동지가 될 수 있고 친언니처럼 따르던 사람을 하루아침에 배신하기도 한다.
그 베이스에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모성애, 복수심, 분노, 열등감 같은 근원적인 감정에 대한 이해와 통찰이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드라마에 이토록 열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원문: 박종석의 페이스북
이 필자의 다른 글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