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모 은행의 신입사원 연수에서, 요즘은 군대에서도 하지 않는 3시간 동안 기마 자세 상태로 복창을 하는 가혹 행위가 발생하여 크게 이슈가 되었었다.(관련 뉴스 영상)
이는 기업의 인사 시스템이 이상한 형태로 변질된 매우 극단적인 예이지만, 나는 평소 그룹에서 모든 계열사의 대졸 신입 공채에서 임원 인사까지 모든 걸 총괄하는 한국의 독특한 인사 시스템에 문제가 많다고 생각했다. 나 역시 10여 년 전에 군대식 신입사원 교육을 받았었고 지금은 전혀 상반된 기업 문화를 가진 회사에 다니는 입장에서, 이러한 인사 시스템에 대한 내 생각을 정리해봤다.
1. 왜 그룹 공채인가?
매 학기가 시작되면 대학 가엔 ‘XX그룹 대졸 신입공채 설명회’ 등의 현수막이 걸리고, 서류 전형 → 필기 시험 → 면접을 걸쳐 힘들게 선발된 대졸 신입사원들은 ‘XX그룹 00기’라는 이름을 받고 그룹 연수 → 회사별 연수를 거쳐 현업 부서에 배치된다. 기업마다 조금씩 다르긴 하겠지만 거의 동일한 패턴을 몇 십 년째 반복하고 있다.
이러한 대규모 대졸 신입 공채 시스템은 분명히 장점이 있다. 특히 우리나라 경제가 급성장하던 80~90년대에는 인력을 대거 선발하여 집중적으로 훈련시킨 후 현업에 빠르게 배치하는건 매우 효율적인 시스템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2008년 금융 위기처럼 극도의 불황기에도 대기업들은 사회적 책임 수행 차원에서 대졸 공채를 계속 해왔으며, 이러한 공채가 없었더라면 국내 청년 실업율이 크게 높아졌을 것이다.
2. 그룹 단위 인사 시스템의 문제점
1) 그룹에서 원하는 인재상?
삼성의 SSAT를 비롯해서 각 그룹마다 별도로 개발한 필기 시험이 있고, 그를 통해서 그 그룹에서 원하는 인성과 지적 능력을 갖춘 인재를 선발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처럼 대기업 집단의 사업 영역이 극도로 다각화되어있는 상황에서, 과연 그룹에서 원하는 공통의 인재상이라는게 존재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삼성전자에서 반도체 개발을 할 엔지니어와 제일모직의 의류 디자이너가 같은 인성과 지적 능력을 갖춘 사람이라면, 그게 오히려 문제있는거 아닐까? 마찬가지로 현대차에서 자동차 엔진 개발할 엔지니어와 현대카드에서 슈퍼콘서트를 담당할 마케터를 같은 현대차그룹의 기준으로 뽑고, 교육을 시킬 수 있을까?
2) 누구도 행복하지 않은 보직 배치
이렇게 대규모로 채용된 신입사원들은 계열사 인사팀과의 면담을 거쳐 현업 부서에 배치된다. 물론 이 과정에서 어떤 부서에서 신입 사원이 필요한지, 그리고 신입사원들은 어떤 부서에 배치되길 원하는지 의견 수렴은 한다. 하지만 인사팀에서 그 많은 부서가 어떤 사람을 원하는지, 그리고 더 많은 신입사원들이 어떤 능력을 갖고 있고 어떤 일을 하고 싶어 하는지에 대해서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을까?
결국 신입사원을 받은 부서에서도, 배치된 신입사원 입장에서도 모두 불만족스러운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가 많지 않을까?
3) 순환 보직을 통한 전문성 결여
옛날보단 ‘평생 직장’의 개념이 많이 약해졌고 이직도 이젠 흔한 일이 되었지만, 국내 기업에서 임원분들을 보면 대부분 신입 공채로 입사해서 평생 그 직장에서만 근무하며 여러 순환 보직을 거쳐 임원이 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는 ‘공채로 선발된 인력들은 평생 이 회사에 다닌다’는 가정 하에 경영 수업 차원에서 순환 보직을 시켰던 것 같다.
문제는 순환 보직의 범위가 너무 넓은 경우 (예: 마케팅 → 영업 → 인사 → 재무 → 마케팅) 그 임원들이 그 기업의 비즈니스에 대해서는 전반적으로 잘 알 수 있으나 전문성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점이다. 특히 그룹 내 특정 회사의 임원이 다른 계열사 임원으로 옮겨가는 경우도 흔하게 볼 수 있는데, 이 경우는 더 우려가 된다.
특히 국내 기업들의 경우 매년 말 정기 임원 인사가 있고 1년 만에 보직이 바뀌는 임원도 상당수이기 때문에, 임원들은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려는 생각을 갖기보다는 전임자가 했던 일을 부정하고, 1년 동안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한 것처럼 보일 수 있는 일, 속된 말로 ‘광팔기 좋은 일’ 에 집중하여 그 다음 임원 인사 때 더 좋은 자리로 옮겨가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 같다.
이건 국내 기업의 경쟁력을 갉아먹는 매우 심각한 이슈인데, 특히 내가 몸담고 있는 마케팅의 경우 장기적인 브랜드 전략 하에 꾸준한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기업을 찾아보기 어렵고, 그때 그때 hot한 아이템을 잡아 이슈 메이킹을 해보려는 기업들이 너무 많다. 반대로 단기간에 승부를 보기 어렵고 겉으로 ‘티가 안 나는’ 웹사이트 개선 등은 마케터들의 고려 대상에서 제외되기 쉽다.
3. 구글의 인사 시스템, 뭐가 다른가
먼저 기업마다 비즈니스 영역과 처한 상황, 문화가 모두 다르기 때문에, 구글의 사례를 소개하며 ‘모든 기업이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고 얘기하고자 하는건 절대 아니다. 하지만 앞에서 지적한 국내 대기업 인사시스템에서 생길 수 있는 문제점들을 구글에선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지를 참고하시면 좋겠다. (상당수 외국계 기업들도 같은 시스템일걸로 생각한다)
1) 인턴도 현업에서 알아서 채용
경력이 없는 인턴, 신입 사원부터 임원까지, 구글에서 채용을 결정하는데 가장 중요한건 인사팀이 아니라 그 사람이 일하게 될 팀의 팀장과 팀원들의 판단이다. 인력 충원 허가를 받으면 어떠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필요한지를 인사팀에 명확하게 전달해주고, 인사팀에서는 지원자가 그 자격 요건에 맞는지 스크리닝하는 역할만 하고, 면접을 통해 채용 결정을 하는건 실무자들이다.
사실 사람을 잘못 뽑으면 가장 힘들어지는 건 같이 일하는 팀장과 팀원들이기 때문에,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여 신중하게 뽑을 수 밖에 없다. 일년에 몇 천명을 뽑는 국내 대기업 그룹에서는 불가능한 얘기 아니냐고 할 수도 있지만, 우리 팀에 꼭 필요한 사람을 뽑기 위해서라면 그 정도 노력과 시간 투자는 감수해야 하지 않을까?
2) 보직 이동은 커리어 발전을 위해
구글은 국내 기업에 비해서는 보직 이동이 수시로, 그리고 대부분 본인의 커리어 계발 의지에 의해 이루어지며 인사팀에 의해 일방적으로 보직 이동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순환 보직이 아닌 기존에 했던 일을 기반으로 관련 영역으로 옮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예: 영업 → 마케팅, 파트너십), 따라서 개인의 전문성과 회사의 성과가 모두 강화된다.
이는 구글 뿐 아니라 대부분의 외국계 회사들도 마찬가지인것으로 알고 있으며, 삼성전자도 마케팅 등 전문 영역에서는 외부 전문가 영입 후 전문성을 키워나갈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3) 고위직일수록 끊임없는 자기 계발
국내 대기업에서는 임원이 되면 실무에서 손을 떼고 보고받고, 지시하고, 인력 관리만 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고, 그러다보니 실무자들이 보기에는 ‘감을 잃었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러나 보고만 받아서는 실무자들에게 제대로 된 direction을 내리기 어렵고, 더 큰 문제는 바깥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정확히 알지 못해서 시의적절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국내 대기업 임원들이 커리어 발전을 위해 자발적으로 이직을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어떻게든 사내 임원들끼리의 경쟁에 이겨서 한 자리라도 더 올라갈 수 있을지만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구글에서 사업제휴를 담당하는 김현유(Mickey Kim)님이 자신의 포스팅에서도 언급했듯이, 구글 임원들은 일방적인 보고를 받는게 아니라 업계 트렌드를 끊임없이 주시하며, 중요한 내용은 자신의 인사이트를 담아서 팀원들에게 공유한다. 그래서인지 구글코리아의 대표이사였던 염동훈 대표는 얼마 전 아마존 웹서비스 코리아 대표로, 다른 비즈니스 부문 임원들이셨던 분들도 트위터, Air BnB 등 스타트업으로 이직했다.
그 분들의 이직 사유는 ‘구글에 오랫동안 다니면서 많은 것을 배웠지만 새로운 회사에서 새로운 비즈니스를 하면서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싶다’ 였다. 밑에서 일하던 사람들 입장에서는 윗 사람이 회사를 떠나는게 충격적일 수도 있지만, 내가 임원이 되어도 저렇게 ‘업계 트렌드에 대한 감을 잃지 않고 평생 자기 계발을 해야한다’는 자극을 받았다.
4. 결론
대기업이나 공기업 입사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며 그들의 인사 시스템에 순응하고자 하는, 또는 이미 그 안에 몸담고 있는 분들께 드리고 싶은 나의 조언이다.
1) 평생 직장은 없다
IMF 이후로 대학의 전공 순위는 취업 가능성을 최우선으로 재편되었고, 취업 시에도 소위 ‘철밥통’이라고 하는 돈많이 주고, 편하고, 안정적인 직장을 선호하는 경향이 너무 강해졌다. 그래서인지 요즘 대학생들과 이야기해보면 어느 회사에서 어떤 일을 하고 싶다는 구체적인 생각보다는 대기업 여러 곳에 지원해서 합격하는 곳에서 시키는 일하겠다는 생각이 강한 것같다.
하지만 불과 몇 년 전만해도 평생 직장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SK 플래닛, 한전같은 회사도 희망 퇴직을 실시하는 등 평생 직장이라는 개념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당장 유망하고 안정적으로 보이는 직장에 들어가서 부품처럼 시키는 일만 하는 것보다는, 나의 평생 직업을 만들 수 있는 회사, 아직 작지만 엄청난 발전 가능성이 보이는 회사를 찾아보자.
2) 새로운 직장에 가서 새로운 걸 찾아보자
무조건 이직을 하라는건 아니다. 이미 좋은 회사에서 중요한 업무를 맡고 있다면 그 직장에서 계속 커리어를 계발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지금 있는 직장에서 더 이상 배울 수 있는게 없다면, 다른 회사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아보자. 특히 국내 기업에서 외국계 회사로 옮긴다면 새로운 업무 방식과 조직 문화를 통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고, 최소한 기존 직장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네트워크를 유지하면서 새로운 네트워크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걸 느껴보자.
그리고 기업 입장에서도 구성원들이 떠난다고 해서 배신자라고 매도할 것이 아니라, 그들과의 네트워크를 통해 비즈니스를 확대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면을 봐야 할 것이다. 일례로 맥킨지에서는 다른 회사로 이직한 전 동료들을 졸업생 (McKinsey Alumni)라고 부르며, 그들이 네트워크를 유지하고 서로 비즈니스를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한다. 전에 어디선가 봤던 아래의 사진을 보면서 격하게 공감한 적이 있었는데, 다른 분들께서도 공감하실 거라고 믿는다.
3) 트렌드에 대한 감을 놓치지 말자
한 직장을 5~10년 정도 다니면 일이 완전히 손에 익고 실무를 후배들에게 넘기면서 몸이 편해진다. 그러면 바깥 세상의 변화를 주시하며 새로운 배움의 기회를 찾기보다는, 편한 사람들과 편한 일을 하려는 경향이 강해지고, 그러다보면 위에서 언급했던 전형적인 대기업 임원의 모습이 되어가는 것같다.
하지만 세상은 현기증이 날 정도로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고, 특히 인터넷의 발전과 함께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은 물론 일하는 방식도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으며, 일자리의 국경은 없어진지 오래이다. 이제 우리의 경쟁 상대는 옆에 앉아있는 동료가 아니고 인도나 브라질에 있는 나보다 10살 어린 젊은이일 수도 있으며, 심지어는 로봇이 될 수도 있다.(손재권님 블로그 ‘소프트웨어 로봇이 기자를 대체한다’ 참고)
그렇기 때문에 바깥 세상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계속 관찰하며 내가 평생 직장이라고 믿고있는 회사가 어느날 위기에 쳐하지는 않을지, 새롭게 떠오르는 분야에서 나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는 없을지 찾아봐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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