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비긴즈
여당이었던 새천년민주당은 2002년 3월 9일부터 4월 26일까지 2달에 가까운 대장정을 거쳐 대선 후보를 선출했다. 특히 당시 새천년민주당은 ‘국민 경선제’를 도입하여 당원(50%)과 국민(50%)의 투표로 대선 후보를 뽑았는데, 이는 새천년민주당 경선 흥행의 중요한 포인트 중 하나였다. 경선 시작 당시까지만 해도 이인제가 ‘대세’로 여겨졌으나, 경선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노무현이 대두. 3월 13일 노무현-이회창 양자구도 여론조사에서 노무현이 승리하는 결과가 나오고, 3월 16일 민주당의 거점인 광주 경선에서 노무현이 승리하며 이인제 대세론은 붕괴되고 노무현 필승론이 대두된다. 이후 대부분의 지역에서 무난하게 승리하며 노무현이 새천년민주당의 대선 후보로 확정. 경선 기간동안 노무현의 지지율은 고공행진한다.
반면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의 경선은 그리 큰 화제를 끌지 못했는데, 이는 전대 대선 후보였던 이회창 대세론이 너무 굳건했던 까닭. 한나라당은 2002년 4월 13일부터 5월 19일까지의 경선을 통해, 이회창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
다크 노무현
노무현 후보의 갑작스런 대두는 ‘노풍’이라 불리며 화제가 되었다. 이러한 강세는 한나라당 경선이 끝날 때까지도 유지되었으나, 점차 그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2002년 초부터 제기된 김대중 전 대통령 친인척 비리 의혹은 5월 2일 ‘실세’ 권노갑이 금품수수 혐의로 소환되고 김대중 대통령의 아들 김홍걸/김홍업 씨의 비리 의혹이 가시화되며 김대중 대통령의 사과와 당 탈당이라는 결과를 낳는다. 3남 홍걸 씨는 5월, 2남 홍업 씨는 6월 구속되었다.
4월 30일 김영삼 전 대통령의 상도동 자택에 방문한 것도 역풍을 불러왔다. 30년 전 받은 시계를 보여주는 등 지나친 저자세를 보였다는 반응이 많았고, 이 역시 지지율 하락의 중요한 원인으로 지적되었다.
병풍 리턴즈
민주당은 6월 3일 당보를 통해 이회창 아들 병역비리 문제를 다시 제기하며 병풍의 재점화를 시도한다. 이어 21일에는 97년 대선 당시 이회창의 최측근과 병무청 고위 간부가 만나 ‘병역비리 은폐 대책회의’를 열었다는 의혹을 제기하였으며, 이는 꾸준히 이회창 측을 괴롭히는 소재가 된다.
무너지는 민주당
새천년민주당은 6.13 지방선거에서 참패를 당한다. 광역단체장은 호남 및 제주의 4명만이 당선되었고, 기초단체장 역시 총 227명 중 44명만 당선. 과거 노무현은 “영남권 전패시 재신임 묻겠다”는 약속을 했는데, 실제로 영남권에서 전패함에 따라 재신임을 묻게 된다. 민주당은 재신임을 의결하지만, 당내 계파인 중도개혁포럼이 후보와 지도부의 사퇴를 재차 요구하는 등 내홍.
조커의 등장 – 월드컵과 정몽준
2002년 5월 31일 개최된 월드컵에서 한국이 4강에 진출하며, 대한축구협회 정몽준 회장에 대한 지지율이 급등한다. 7월 들어서는 대부분의 대선 여론조사가 그를 제 3후보로 포함하여 실시. 특히 8월 들어서는 정몽준-이회창 구도에서 정몽준이 앞서는 결과가 나오기 시작하고 심지어 3자구도에서도 이회창-정몽준이 접전을 벌인다.
민주당은 한때 정몽준을 노무현의 대안으로 모색하기도 했으나, 정몽준은 독자신당을 만들어 출마하는 쪽으로 가닥. 9월 17일,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9월 말 실시된 많은 여론조사에서 이회창과 정몽준의 지지율 차이는 3자구도에서도 오차범위 내로 나타났으며, 특히 양자대결에서는 이회창을 압도하는 것으로 조사되기도 했다.
투페이스 민주당, 반노의 그림자 동맹
3자구도에서 지지율이 대부분 2강(이회창-정몽준) 1중(노무현) 구도로 나타나고, 양자구도에서도 정몽준이 이회창에게 여유있게 앞서가는 반면 노무현은 오차범위 내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자, 새천년민주당의 내홍은 심화되었다. 특히 반노 의원들은 노무현 대통령 후보와 한화갑 대표의 사퇴를 공공연하게 거론하기도 했다. 9월 말, 선대위 출범에 즈음해 한화갑 대표는 노무현 후보에 대한 지지 의사를 명확히 밝히나, 비노 의원들은 선대위에 관심을 두지 않고 대신 후보단일화를 위한 독자기구 출범에 골몰한다.
10월 4일, 비노 및 반노 의원이 주축이 된 ‘후보단일화 협의회’가 공식 발족. 발족식에는 김영배 위원장을 비롯 34명의 의원이 참여하였으며, 노무현 후보에게 단일화를 압박하고 이를 거부할 경우 단계적으로 탈당하는 계획을 세운 것으로 알려진다. 후단협은 노무현, 정몽준, 이한동, 박근혜, 자민련, 민국당 등 6개 정파가 참여하는 ‘6자연대’를 기획하나, 당시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하고 탈당했던 박근혜는 한나라당 복당을 언급하기 시작하고, 연대는 실패한다.
본격적인 충돌
9월 25일, 한나라당은 금강산 관광의 댓가로 현대상선을 통해 대북 비밀 송금이 이루어졌다는 의혹을 제기한다. 이는 여당의 노무현 후보 뿐 아니라 현대가의 사람인 정몽준 후보에게도 민감한 이슈였다.
한편 9월 30일, 노무현 후보는 중앙선대위를 출범하며 충청권으로 행정수도를 이전하겠다는 공약을 내놓았다. 같은 날 출범식에서 노무현은 팬클럽인 ‘노사모’가 모은 돼지저금통 1570개를 전달받기도 했는데, 노사모와 ‘희망돼지’로 불린 이 소액 모금은 노무현 대통령의 선거운동에서 대단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불꽃이 일어난다 – 김민석 탈당 사건
민주당의 김민석 전 의원은 후단협 사태에 있어 중립적인 입장이었으나, 10월 들어 노무현에게 단일화 가능성을 열어 둘 것을 촉구하기 시작. 이어 17일에는 민주당을 탈당, 정몽준의 신당에 합류하였다. 그는 비노나 반노 정치인으로 분류되지 않던 인물일 뿐 아니라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의 서울시장 후보로 나서는 등 무게있는 정치인이었으며, 또한 젊은 정치인으로서 상당한 인기를 누리고 있던 인물이기도 했기에 탈당의 충격이 매우 거셌다.
이어 신낙균 상임고문도 민주당을 탈당, 정몽준 신당에 합류. 후단협과 정몽준은 공동신당을 만들자는 데 합의하였다.
그러나 김민석의 탈당은 예상치 못한 움직임을 불러온다. 오마이뉴스를 중심으로 김민석을 질타하는 목소리가 거세어졌으며, 여기에 노무현 후보를 응원하는 ‘개민군단’의 온라인 성금이 대규모로 모이기 시작. 모금 16일간 1132명 960여 만원이 모금되는 데 그쳤던 것이 김민석 탈당 후 이틀이 채 안 돼 무려 5509명이 몰려 1억6300여 만원이 모금되었다.
정몽준 주가조작 논란
10월 27일 이익치 현대증권 전 회장은 현대전자 주가조작 사건이 정몽준 고문의 지시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를 근거로 한나라당은 파상 공세에 나서고, 정몽준 검증론이 재점화된다.
정몽준의 지지율은 10월 들어 서서히 하락세를 보인다.
후보단일화
그동안 단일화에 비판적인 입장을 보이던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후보가 11월 3일, 후보단일화를 공식 제안한다. 민주당은 TV 토론 후 국민경선 방식을 제안하나, 정몽준은 협의나 여론조사를 통한 단일화를 주장. 이때를 즈음하여 양 후보의 지지율은 오차범위 내에서 각축을 벌이기 시작하고, 단일화 후보 선호도 역시 양자가 거의 동률.
한편 11월 4일에는 민주당에서 의원 11명이 집단 탈당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이들은 후보단일화를 명분으로 민주당을 탈당. 특히 이인제 의원 등의 탈당설이 함께 돌면서 민주당의 내홍은 더욱 심각해진다. 이인제가 김종필과 극비리에 회동을 갖고 중부권 신당을 논의했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한편 단일화와 관련, 세부사항에서 이견을 보이던 정몽준-노무현 후보는 11월 16일 새벽 포장마차에서 만나 담판. 세부사항까지 완전히 합의를 끝낸 양 후보는 포장마차에서 ‘러브샷’을 나누는 퍼포먼스를 연출한다. 19일에는 정몽준 측이 노무현 측의 여론조사 합의 사항 유출을 문제삼아 단일화 파기를 거론하는 등 먹구름이 끼기도 했으나, 22일 결국 극적으로 재협상.
22일 TV토론을 가진 노무현 정몽준 양자는 24~25일 양일간 후보단일화 여론조사를 시행한다. 여기에서 결국 노무현이 극적으로 승리하면서, 노무현이 양자 단일화 후보로 결정된다. 협상 단계에서 불리한 조건을 수용한 점, 노사모의 희망돼지 운동 등이 그의 승리 요인으로 제시되었다.
단일화 승리 후 노무현의 지지율은 오차범위 밖에서 이회창을 앞서는 것으로 조사되기 시작했다.
후보단일화 파기
노무현-정몽준 후보단일화가 노무현의 승리로 끝나면서, 본격적인 선거운동이 시작된다. 이때부터는 여론조사 결과를 공표하는 것이 금지되면서 깜깜이 선거가 시작.
12월 1일, 당 경선에서 노무현에게 패배했던 이인제가 민주당을 탈당, 이틀 후 김종필이 총재로 있던 자유민주연합에 입당한다. 이어 15일 기자회견을 갖고 개인 입장으로 “이회창 후보에 투표하겠다”고 선언하며 이회창 후보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의 여론조사 추이는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진짜 ‘빅 뉴스’는 대선 투표소가 열리기 단 8시간 전 정몽준 후보로부터 나왔다. 대선 전날 밤 10시, 정몽준 측은 노무현 지지를 철회한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정몽준은 지지 철회의 이유로 노무현의 “미국과 북한과 싸우면 우리가 말린다”는 발언을 문제삼았으나, 실제로는 노무현이 종로 유세에서 차차기 대통령으로 추미애, 정동영 등을 지목하는 등 ‘성의’를 보이지 않음에 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노무현은 급히 자택을 방문하고 다시 정몽준을 설득하려 했으나, 정몽준이 그를 만나주지 않으면서 결렬되었다.
조선일보는 이를 바탕으로 대선 당일인 19일 사설 <정몽준, 노무현 버렸다>를 통해 “노무현 후보의 손을 들어줬던 정몽준씨마저 ‘노 후보는 곤란하다’고 판단한 상황이다. 이제 최종 선택은 유권자들의 몫이다” 등의 주장을 펴 큰 비난을 받기도 했다.
노무현 라이즈
정몽준의 후보단일화 파기 선언은 노무현 지지층의 강력한 결집을 불렀다. 방송3사의 모든 출구조사에서 노무현 후보는 이회창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으로 당선될 것으로 예측되었다.
개표가 시작되며 처음에는 이회창 후보가 앞서갔으나, 서울의 개표함이 열리면서 분위기가 바뀐다. 8시 42분에는 노무현이 첫 역전을 이루고, 9시 10분에는 당선이 유력, 9시 30분에는 당선이 확실하다는 방송사 보도가 나온다. 그리고 밤 11시 30분, 노무현의 당선이 확정되면서 16대 대선은 막을 내렸다. 최종 투표율은 70.8%. 득표율은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48.91%, 한나라당 이회창 46.58%, 민주노동당 권영길 3.89%, 하나로국민연합 이한동 0.30%, 호국당 김길수 0.20%, 사회당 김영규 0.08%.
노무현은 서울/경기/충청/전라/제주를 포함한 국토 서부에서, 이회창은 강원/경상을 포함한 국토 동부에서 승리하여, 동서구도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노무현의 승리에는 젊은 유권자들의 지지와 수도권에서의 승리가 결정적인 것으로 평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