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1997〉에 나왔던 장면이다. 노란 우비를 입은 젝스키스의 팬들과 하얀 우비를 입은 H.O.T의 팬들이 빗속에서 격렬하게 싸우는 장면. 전설의 90년대 팬덤 싸움 이야기다.
그런데 이제는 다 옛날이야기다. 온라인 시대가 되면서 이제 각 그룹 팬들은 만날 일도 잘 없기 때문이다. 굳이 싸우려면 트위터에서 모욕죄 각을 재며 싸운다(…) 강산이 두 번은 변할 세월이 지나면서 팬덤 문화도 엄청나게 변한 것이다.
‘젝스키스=노란색 풍선, H.O.T.=하얀색 풍선’으로 대변되던 아이돌 팬덤의 상징 색깔도 마찬가지다. 20년 전에는 색깔을 넘보는 게 선전포고나 다름없었지만, 지금은 저렇게 두루뭉술한 컬러로 구별하기에는 아이돌 가수가 너무 많다. 풍선? 시야 가린다고 팬들이 나서서 싫어한다.
이제는 팬덤을 상징하는 컬러를 회사에서 지정해서 알려준다. 아예 헷갈리지 않게끔 팬톤 컬러로 지정해서 알려준다. 풍선 대신 응원봉 굿즈를 만들어서 2–3만 원대 가격으로 판매한다. 예전에는 자생적으로 탄생했던 팬덤 문화가, 이제는 기획사의 ‘팬덤 마케팅’으로 변화한 것이다.
응원봉은 새로운 팬덤의 시대를 알려주는 키라고 할 수 있다. 단순히 불만 들어오는 게 아니다. 2020년 최신 기술까지 업데이트되어 물 건너 글로벌하게 유명해진 K-응원봉을 만나보자.
1. 방탄소년단, 그 유명한 보라색
사실 방탄소년단은 상징 컬러가 없었다. 컬러 문화가 흐릿해진 지 오래였기 때문에 따로 지정하는 수고를 들이지도 않은 것이다. 대신 이들의 응원봉 ‘아미밤’은 말 그대로 폭탄을 연상시키는 흑백 디자인으로 제작되었다.
이들에게 상징 컬러가 생긴 건 얼마 안 된 일이다. 2017년 2월 열린 고척돔 팬미팅에서 팬들의 아이디어로 작은 이벤트가 열렸다. 곡 분위기에 맞추어 팬들이 응원봉에 보라색 비닐을 씌워 이벤트를 열었고, 그 광경을 본 멤버 뷔가 보라색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멘트를 했다. 이때부터 잠정적으로 방탄소년단=보라색의 이미지가 결정된 것.
이제 ‘방탄소년단=보라색’의 공식은 가수와 팬만 아는 암호 같은 게 아니다. 워낙 방탄소년단의 팬들이 전 세계에 많다 보니, 해외 방송사 계정이나 투어를 도는 도시, 투어 장소 등은 방탄소년단을 맞을 때마다 보라색으로 꾸밀 정도로 유명해진 상황.
팬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한 이벤트 하나가 이 정도로 큰 파급력을 가지게 된 상황. 이게 다 여러모로 대단한 방탄소년단의 인기 덕분이다.
2021년 1월에 열리는 골든디스크 시상식을 후원하게 된 기업 큐라프록스도 방탄소년단을 모티브로 한 칫솔을 보라색으로 제작했다. 방탄소년단이 골든디스크를 4번째로 석권한다면 기념으로 사도 좋을 듯. 더구나 1월 10일 시상식 직후 인기상 수상자를 위한 스페셜 에디션이 발매된다고 하니 그 역시 기대해봐야 할 것이다.
2. 엑소, ‘블루투스 연동 응원봉’의 시대를 열다
IoT 기술은 팬덤 문화에도 도입되었다. 국내에서 IoT기술을 도입할 생각을 한 것은 바로 SM 엔터테인먼트다. 약 2016년부터 도입되었으며, 2017년 잠실 주경기장에서 열린 엑소 콘서트가 가장 유명한 사례일 것이다.
구체적인 원리는 다음과 같다. 먼저 팬이 소유한 콘서트 티켓의 좌석번호를 전용 애플리케이션에 입력한다. 그리고 블루투스 센서가 부착된 응원봉도 애플리케이션과 연동한다. 그러면 공연장 원격제어 프로그램을 활용해 해당 좌석에 앉은 팬의 응원봉을 조작할 수 있게 되는 것. 이 기술을 통해 응원봉의 불빛뿐 아니라 컬러까지 제어 가능하다. 자리 바꿔 앉지 말자
물론 SM에서는 여전히 컬러를 활용한 굿즈를 판매 중이기 때문에, 엑소도 편의상 상징색 하나는 있다. 보통 회색을 쓴다. 팬들은 딱히 싫어하지 않지만, 회색에 엄청난 충성심을 느끼지는 않는 모양.
3. NCT, 네오그린 컬러와 신세대의 고기망치
풀네임이 Neo Culture Technology라는 NCT. 이름 덕분에 상징색도 네오하기 짝이 없는 네오그린이 되어버렸다. 너무나 눈에 띄는 색깔인 나머지 상징색이 옅어지는 트렌드를 홀로 역행한다. 게다가 이들의 응원봉은 아이돌 업계에서도 괴상한 모양으로 손꼽힌다. 덕분에 안 그래도 강력한 아이덴티티가 더 강력해진 상황.
손꼽히게 이상하게 생긴 덕분에 별명도 많다. 토르망치, 고기망치, 믐뭔봄 등. 게다가 여러 기술이 적용된 응원봉 특성상 가격도 35,000원이나 한다. 덕분에 판매 페이지의 리뷰는 각종 드립으로 넘쳐난다. 타 팬들도 우울할 때마다 찾아본다는 전설의 후기들을 살펴보자.
덕분에 눈에 딱 보이는 연두색 = NCT라는 아이덴티티가 강해진 편. 딱히 팬들이 원했던 아이덴티티는 아니므로 그다지 즐거워 보이지는 않는다(…)
4. 핑크를 쓰는 수많은 가수
선택지가 없었던 그룹들도 있다. 대표적으로 블랙핑크가 있다. 이름 때문에 그냥 블랙과 핑크를 잘 써야 했다(…) 고민 끝에 회사에서 내놓은 디자인.
이름 때문에 응원봉 색깔이 정해진 그룹은 또 있다. 에이핑크다. 이들은 팬덤 이름인 ‘판다’를 넣어 핑크색의 ‘판다봉’을 만들었다.
핑크가 가진 걸리시한 이미지 때문에, 이외에도 핑크를 응원봉 컬러로 쓰는 곳은 수두룩하다. 일단 소녀시대가 있다. 다만 공식 응원봉은 데뷔하고 11년(!)이나 지난 2018년에 제작되어 소녀시대의 인기에 비해서는 유명하지 않은 편.
하지만 누가 뭐래도 핑크색으로 제일 유명한 팬덤은 이곳일 것이다. 바로 트로트 가수 송가인의 팬클럽 ‘어게인’이다.
최근 가장 강력한 핑크색의 아이덴티티를 가진 조직이다. 응원봉뿐 아니라 옷, 모자까지 핑크색으로 모두 맞춘다. 그만큼 엄청난 충성심과 조직력과 재력을 갖춘 집단이니… 이분들이 나타나면 예를 갖추어 공경하자.
마무리하며
이제 응원봉 문화는 비단 10–20대만의 것이 아니다. 미스터트롯을 통해 트로트 가수들을 좋아하는 중장년층 팬덤이 생겨나면서, 어르신들을 겨냥한 응원봉 굿즈도 제작되는 건 양반인 수준.
사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거대한 팬클럽을 이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문재인 대통령에게도 응원봉이 존재한다. ‘달봉이’ 혹은 ‘이니봉’이라고도 부른다고. 달이 바다 위에 떠 있는 모습을 본떠 디자인되었고, 팬카페 ‘젠틀재인’에서 제작했다.
컬러와 굿즈를 이용해 집단에 대한 소속감을 높이고 고취감을 끌어올리는 것은 아주 오래된, 그리고 효과적인 문화다. 비단 아이돌 팬클럽뿐 아니다. 우리나라 축구 대표팀도 붉은색에 대한 강력한 정체성을 가졌고, 정당 또한 컬러를 적극 활용하지 않는가.
그래서 큐라프록스는 2021년 1월 9일부터 10일까지 방영되는 골든디스크 시상식을 공식적으로 후원하면서, 팬덤 컬러를 활용해 한정판으로 제작한 ‘큐라프록스 리미티드 에디션’을 선보인다. 스위스에서 제작한 명품 칫솔로, 기념 삼아 간직하기 좋을 만큼 훌륭한 퀄리티와 특별한 디자인이 잘 조화된 제품이다.
팬덤 문화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예쁜 칫솔로만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팬들은 컬러에서 사랑하는 아이돌을 상징하는 코드를 읽어 들인다. 같은 보라색 굿즈여도 무게감이 다르다. 이것이 팬덤 마케팅의 힘이다.
케이팝은 세계 음악 시장에서 6위에 달하는 수익을 벌어들이는 거대한 산업이 되었다. 누군가는 팬덤의 마음을 색깔 하나로 사로잡아 돈을 번다. 케이팝의 핵심을 담당하는 팬덤 마케팅, 그중에서도 굿즈 마케팅에 대한 심도 있는 시선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