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노동계, 재계가 모두 반대하던 노조법 개정안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불신이 만연할수록 사회적 거래비용은 증대하고, 공동의 이익을 실현할 기회는 줄어든다.”고 주장하며, 사회적 자본인 신뢰(Trust)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최근 정부의 노조법 개정안을 둘러싼 갈등이 뜨겁다. 국회 앞 시위에 나선 민주노총에, 경찰은 방패와 곤봉으로 무장하고 차벽을 세웠다. 한국노총은 국회 앞 천막농성을 개시했다.
재계에서는 “노동편향적 법안”이라고 하고 있고, 노동계에서는 “역대급 노동개악 중단하라”고 하고 있다. “역대급 노동개악”이면 재계에서라도 환영해야 한다. 실제로 ‘역대급 노동개악’으로 꼽힐 수 있는, 법정 노동시간을 최대 68시간까지 허용했던 박근혜 정부의 ‘양대 지침’에 대해서는 재계가 별 반발이 없었다.
반면, “노동편향”이라면 노동계에서는 환영 내지는 표정관리를 해야 정상이다. 그런데 민주노총의 여의도 국회 기습집회에서는 심지어 “방역실패가 왜 우리 책임이야?!”라는, 거의 사랑제일교회 수준의 워딩까지 나오면서 반발이 극심했다.
핵심은 노동계가 정부를 “믿지 못해서”이다. 재계는 정부를 못 믿는 다기보단, 그냥 언제나처럼 장사하는 사람들의 ‘거래의 기술’을 활용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II. 정부가 밀어붙이는 노조법 개정안, 도대체 무슨 내용이길래?
이번 노조법 개정안은 ILO(국제노동기구)에서 꼭 준수하라는 ‘핵심협약’을 담고 있다. 지금껏 정부는 ILO(국제노동기구)에 가입한지 긴 시간이 지났음에도, ILO의 ‘핵심협약’을 지키지 않았다. 이제와 서두르는 이유에 관해 살펴보자.
1. EU 집행위원회는 왜 ILO 핵심협약 비준을 촉구했나?
EU는 한-EU FTA 발효(2011년 7월)이후부터 줄곧 한국에 ILO 핵심협약 비준을 요구했다. 그리고 2018년 3월에는 EU 집행위원회 명의로 ILO 핵심협약 비준을 촉구하는 서한을 보내왔다. 작년 12월부터는 한-EU FTA 분쟁해결절차가 개시되었다.
전문가 패널 심리도 진행되고 있는 상황으로, 한국으로서는 EU라는 거대시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통상압력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올해 6월 EU는 한-EU 정상회담에서는 다시 FTA 이행강화와 ILO 핵심협약 비준을 촉구했다.
그렇다고 EU가 노동기본권의 전도사라고 착각해서는 곤란하다. 현대 무역의 주요 비관세 장벽 중 하나는 환경⋅노동정책에 의한 규제이다. 노동조합의 협상력이 강할수록, 기업은 인건비 상승의 압력을 받는다. EU의 노동기본권이 강한 만큼, 한국도 노동기본권이 강화되어야 한국과 EU의 기업들은 동등한 조건에서 경쟁할 수 있게 된다.
ILO 기본협약 비준은 노동계 표를 의식한 문재인 정부의 국정과제이자 대선공약이기도 했지만,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결국 통상압력에 있었다. 이 때문에 문재인 정부는 2018년 5월, 경제사회노동위원회법을 통과시키고, 경제사회노동위원회(이하 ‘경사노위’)를 통해 노사정 사회적 대화를 진행했다.
그러나 2019년 5월까지 노조법 개정에 관한 노사 간 합의가 이뤄지지 못하자, 1) 공익위원 입장문을 중심으로 ILO 3개 협약의 비준이 추진되면서, 2) 동시에 비준 협약과 충돌하지 않도록 하는 노조법 개정이 추진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경사노위는 사회적 대화를 위한 기구였다. 그런데 된 정부의 개정안은, 사회적 대화가 완료되지 않은 채 나왔다. 때문에 기계적 중립에 치우쳐 있으며, 그 결과는 <결사의 자유> 권리를 타협한 개정안이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2. 결사의 자유 보장과 Trade-off
(1) 결사의 자유 보장
ILO는 핵심협약으로 결사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으며, 이는 “누구든 자유롭게 노동조합을 설립하거나 가입”할 수 있게 하며, “노동조합 활동을 이유로 한 고용거부나 해고 등 불이익을 금지”하는 것을 모토로 한다.
이에 따라 정부안은
① 실업자와 해고자의 노동조합 가입 자격 보장 (기업별 노동조합에도 가입 가능)
② 노동조합의 대의원 및 임원 자격은 규약으로 자유롭게 정함
③ 노동조합 전임자의 급여지급금지 규정 삭제
④ 교섭창구 단일화 제도에서 사용자 동의로 개별 교섭 시에도 성실교섭 및 차별금지 의무를 부여하고, 다양한 교섭방식의 활성화를 위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노력의무 신설
⑤ 퇴직 공무원⋅교원의 노동조합 가입 허용, 가입기준을 직급에서 직무로 전환하며, 소방공무원의 노동조합 가입 허용
등을 내용으로 한다.
(2) 회색지대: 교섭창구 단일화 제도 보완
한편, 이번 개정안에서는 교섭창구 단일화 제도에 대해, 교섭단위 분리뿐만 아니라 통합도 가능하게 함은 물론, 사용자의 개별교섭 시 차별금지나 성실교섭 의무 등에 대해서 이전보다 개선되었다는 평가는 가능하다. 그러나 노동계는 애초에 “교섭창구 단일화 제도 자체의 폐기”를 원하고 있다. 현재 복수노조 교섭창구 단일화 제도 자체가 위헌소송이 제기된 상황이다. 따라서 이 부분은 결사의 자유 보장도, 개악도 아닌 회색지대라고 볼 수 있겠다.
(3) “자유의 대가” – 결사의 자유에 대한 Trade off
애초에 경사노위에서 사회적 대화를 통한 합의로 결정되었어야 하는 문제는, 기계적 중립과 균형을 위해 노동계가 원하는 내용만큼 재계가 원하는 내용도 넣자는 식으로 기계적 균형에 치우쳤다는 것이다.
재계의 요구를 받아들여 정부안은
① 단체협약의 유효기간 상한선을 2년에서 3년으로,
② 사업장 점거에 있어서 사용자 점유를 배제하여 조업을 방해하는 형태의 쟁의 금지
③ 근로시간 면제제도 유지
④ 해당 기업의 종업원이 아닌 조합원은 사업장 내 조합활동 시 내부 규칙 등 준수
⑤ 기업별 노동조합의 임원은 사업장 종업원 (이하 ‘종사근로자’)인 조합원으로 한정
⑥ 조합원 수 산정 시 종사근로자가 아닌 자는 교섭창구 단일화, 쟁의행위 찬반투표 등 절차의 조합원 수 산정에서 제외한다.
등의 내용이 첨가되었다. 이는 노동계의 반발을 불러올 수밖에 없는 내용인데, 애초에 “노동기본권”에 대해 타협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ILO 사회적 대화팀의 권고에도 배치될 뿐만 아니라, “기계적 중립과 균형”에 치우치다 보니 자칫 독소조항이 될 수 있는 문구들을 넣어놓아 노동계의 화를 돋게 만든 것이다.
III. 외않됀데? : 노조법_개정안으로_사람을_화나게_해_보자
1. 선비준 후입법? 선입법 후비준?
정부는 노조법 개정안 입법과 ILO 핵심협약 비준을 동시에 하려고 하지만,(선입법 후비준) 노동계는 줄기차게 선비준 후입법을 요구하고 있었다. 실제 ILO는 협약의 국제적 효력이 발생하기 전인 1년 내, 기술적 조언을 통해 국내 입법안 개정을 조정할 수 있다는 입장이기도 하다. 정부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며 국내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한다.
“핵심협약 선비준 시 국내법 개정 과정의 혼란과 갈등 우려, 입법시한을 정해둔 논의는 시한이 임박할수록 갈등을 더욱 심화⋅증폭시킬 것이며, 1년 내 입법 불발 시 입법 공백 초래되어 이에 따른 현장 불확실성 우려” (고용노동부 설명자료, “핵심협약 비준, 사실은 이렇습니다.” 中)
입법시한을 정해둔 논의는 시한이 임박할수록 갈등을 더욱 심화∙증폭시킨다고 본인들의 입으로 말하고 있으면서, “이번에 동시에 처리해야 한다.”는 압박을 통해 노동계와의 갈등을 더욱 심각하게 만들고 있다. 선비준 시 국내법 개정과정의 혼란과 갈등이 우려된다고 했지만, 이미 핵심협약 비준과 병행하여 추진되는 노조법 개정안으로 인한 노동계와 정부의 갈등은 심각할 정도로 증폭되고 있다.
그래서 결사의 자유 보장이라는 노동기본권 확보라는 취지에서 노동계의 숙원을 풀어주는 측면이 있는 핵심협약 비준을 추진하면서도, 욕을 먹고 있는 것이다. ‘마춤뻡’이 틀려도 단단히 틀려먹었다.
2. 노사관계의 다양화를 충분히 반영한 걸까?
이번 노조법 개정안은 “노동조합”에 대한 정의조항(노조법 제2조 제4호) 중 노동조합으로 보지 않는 경우 중 ‘라 목’의 단서만을 삭제하였다. “근로자가 아닌 자의 가입을 허용하는 경우” 여전히 노동조합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인데, 얼핏 보면 당연한 말인 듯 하지만, 생각보다 복잡하다.
노사관계는 점점 다양해지고 있고, 간접고용과 특수형태근로종사자는 점점 증가하고 있다. 프리랜서와 편의점 점주는 근로자일 수 있을까? (최근 판례는 철도 역사 내 매점운영자들을 노조법상 근로자로 봐야한다고도 판시했다.)
즉, “노동조합”에 가입해서 활동하기에,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성이 포괄하지 못하는 다양한 노동의 양태를 자주적∙민주적으로 개선하기 위한 단체가 노동조합인데, 이 조항이 존치되면서 누군가는 여전히 스스로의 노동기본권 실현을 위해 법원의 판단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사실 이는 기존 판례가 ‘노조법 제2조 제4호 라목 단서는 기업별 노조에 한정되는 조항’이라고 판단한 것에 착안한 것이다.(대법원 2001두8568 등) 즉, 이 법안은 판례의 소극적 반영이라고 볼 수 있고, 정부의 적극적인 ‘노동존중 의지’라고 보기엔 미흡하다.
3. 합리적 이유, 효율적 운영이란 말의 함정
실업자와 해고자의 노동조합 활동을 보장한다고 하면서, 정부는 노조법 제5조를 개정하여 종사근로자와 비종사근로자를 분류해놓았다.
그리고 종사근로자가 아닌 경우(즉 해당 기업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이 아닌 조합원)는 사업장 내 노동조합 활동 시 사용자의 효율적인 사업운영에 지장을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활동을 할 수 있고, 사업장 출입 및 시설 사용에 관한 사업장 내부 규칙 또는 노사간 합의 등을 준수해야 하며, 사용자는 합리적 이유 없이 종사근로자가 아닌 조합원의 사업장 출입 등을 거부해서는 안된다고 규정한다. (노조법 제5조 제2항 내지 제4항)
딱 봐도 뭔가 꺼림칙하다는 게 느껴지지 않나?
“효율적인 사업운영”과 “합리적 이유”란 과연 무엇인가.
저건 결국 법정다툼에 갔을 때 판례에 맡기겠단 이야기다.
때에 따라서는 산별노조의 서울본부장, 또는 연맹위원장이 개별 사업장에 들어가려 하는데 “비종사 근로자”라서 못 들어가는 상황도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최근 산별노조 임원의 개별 사업장 출입과 관련해 비록 직접 긍정한 적은 없으나, 공동주거침입죄로 기소된 사건에 대해 대법원이 무죄판결을 내린 바 있다. 따라서 산별노조 임원의 사업장 출입이 조합활동으로서 필요하거나, 기업 측의 시설관리권을 침해하지 않은 경우에는 위법성이 조각되어 적법하다는 점은 명확해지긴 했다.
하지만 이건 판례 이야기고. ILO는 노조 대표가 자신이 고용되어 있지 않은 사업장이어도 자기 조합원이 있으면 사업장에 접근할 수 있도록 보장되어야한다고 밝히고 있음에도, ‘효율적인 사업운영’, ‘합리적 이유’를 방패로 출입을 막을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건 문제다.
아울러 ‘종사 근로자’와 ‘비종사 근로자’의 구분은 파업 등 쟁의행위에 들어갔을 때, 똑같은 조합원인데도, 각종 조합원으로서의 권리와 의무에 필요한 조합원 수 산정에 배제한다면, 비종사 근로자인 조합원은 파업에 참여할 때 이게 쟁의행위인지, 파업지지 조합활동인지도 모호하게 된다. 아울러 ‘간접 근로자’의 경우, 자신에게 직간접적으로 관계된 근로조건에 대해 파업찬반투표를 할 수 있는데, 최악의 경우 찬반투표에서 제외될 수도 있다.
추상적이고 가치판단적인 단어가 법안에 들어가면 결국 이런 식으로 파생되는 문제점들이 생기게 된다. 누구에게도 욕먹지 않기 위한 법안은, 사실 모두 불만족하게 되어 있다.
4. 결사의 자유를 보장한다더니, 임원 누가 할지는 왜 정해줌?
정부의 노조법 개정안은 임원의 자격은 규약으로 정할 수 있다고 했지만, 기업별 노동조합의 경우 해당 기업에서 일하고 있는 종사근로자 중에서 선출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정부는 ‘기업별 노조 체제 하 우리나라의 특성을 반영’한다고 했지만, 사실 “결사의 자유”의 핵심은 기업별 노조와 초기업별 노조 모두 결사의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누가 자신들을 대표할지” 스스로 정할 수 있는 권리도 자연스럽게 포함된다.
박귀천 교수(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는 이에 대해 “회사는 대표이사, 임원 등 경영진을 구성할 때 회사의 발전을 위해 회사 외부의 유능한 인재를 영입하여 경영진을 구성할 수 있는 게 당연하게 생각되면서, 왜 노동조합은 노동조합의 발전을 위해 종사 근로자가 아닌 유능한 외부 인재를 임원으로 선임할 수 없는 것인가라는 의문”(9.16 노조법 개정안 토론회 발제문 中)을 제기한다.
5. 전임자 급여지급금지는 삭제하면서 근로시간 면제제도는 유지한다고??
제일 이상해보이는 것 중 하나다. 이번 ILO 핵심협약 비준으로 노동조합 업무에만 종사하는 근로자(전임자)에 대한 급여지급금지는 삭제되었는데, 애초에 전임자 급여지급금지랑 같이 들어온 법인 근로시간 면제제도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물론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서 근로시간면제시간을 심의할 수 있게 되어서, 현재보다 개선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뭔가 앞뒤가 안 맞는 느낌은 여전하다.
6. 직장점거, ‘전부 또는 일부’라는 단어의 위력
현재 노동계가 제일 반발하고 있는 내용은 크게 3가지인데, ① 종사근로자와 비종사 근로자의 구분, ② 단체협약 유효기간 상한 연장, ③ 생산 기타 주요업무에 관련되는 시설 등에 대해 그 전부 또는 일부를 점거하는 형태의 쟁의행위를 금지하는 것이다. 이중 가장 큰 반발을 사는 게 바로 “전부 또는 일부”라는 단어 때문이다.
사실 이번 개정안이 ‘역대급 노동개악’이란 소릴 듣기엔 좀 허무하게도, 현행법상으로도 생산 기타 주요업무에 관련되거나 이에 준하는 시설로 대통령령이 정하는 시설은 지금도 점거하는 형태로 쟁의행위를 할 수 없다. (현행 노조법 제42조 제1항)
그럼에도 노동계의 극심한 반발이 있는 건, “전부 또는 일부”라는 단어의 첨가 때문이다. 판례는 직장점거에 대해 전면적⋅배타적 점거의 정당성은 부인하지만, 부분적⋅병존적 직장점거는 정당성을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전부 또는 일부”라는 말을 넣어버리니, 입법을 통해 기존 판례 법리를 후퇴시키는 것 아닌가? 하는 노동계의 의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고용노동부는 설명 자료를 통해 판례 법리를 준용하여 입법화한 것뿐이라고 이야기하나, 바뀐 문구를 통해 사용자 측이 소송을 걸면, 이에 대한 판단은 완전히 다른 영역이다. ILO 핵심협약 비준을 한다면서 노동계가 요구한 적도 없는 걸 막 집어넣으면 사회적 대화를 그저 더 암담하게 만들 뿐이다.
7. 단체협약 유효기간 연장: 소수노조는?
노동계는 단위노조 위원장 임기가 2년인데, 단체협약 유효기간을 3년으로 연장하면 교섭도 한번 제대로 못하고 임기를 끝내라는 거냐고 반발한다. 하지만 민주노총 측의 성명과 다르게, 2016년 한국노동연구원 통계에 따르면, 산별노조 대상 위원장 임기의 경우 3년 임기는 68.3%, 2년 임기는 30% 수준이었다. 아울러 노조법은 임원의 임기를 최대 3년까지 가능하게 해뒀다. (노조법 제23조 제2항)
따라서 이걸 갖고 노동계가 “노동조합 조직과 교섭력 약화를 위한 책동”이라고 말하는 건 과도하다고 본다.
그렇다 해도 교섭창구단일화 제도가 여전히 살아있는 상황에서, 단체협약의 유효기간을 연장하면, 기존에도 2년간 교섭대표노조가 아닌 경우 소수노조의 단체교섭권이 침해되는데, 3년으로 연장되면 소수노조는 더더욱 약화된다. 단체협약 유효기간에 대한 사용자의 민원을 받아주면서, 정작 노동조합의 숙원인 교섭창구단일화 제도 폐기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안하다보니, 모든 노동조합에게 결사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ILO 핵심협약 비준이 오히려 소수 노조의 결사의 자유를 더 억압해버릴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게 생겼다.
8. 결론: 아무 것도 안하지만 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하겠다.
솔직히, ‘역대급 노동개악’은 아니다. 난 역대급 노동개악이라고 이야기하는 건 굉장히 과도하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그래도 노동계와 재계 모두 반발하고 있다는 건, 역으로 노동계에 유리한 점도 있다는 방증이다. 아울러 퇴직 공무원과 교원의 노동조합 가입을 규약으로 허용할 수 있게 되었고, 소방공무원의 노동조합 가입이 허용됨은 물론, 노동조합 가입허용범위를 직급이 아닌 직무로 나눈 등, 공무원과 교원의 단결권이 증대된 점은 분명 무의미하다고 볼 순 없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여태까지 글을 보면 어느 정도 눈치챘겠지만, 이번 노조법 개정안은 대부분 “법원의 판단”을 구해야 하는 문구들이 곳곳에 삽입되어 있다. 결국 불확실성을 정치적으로 해결하지 않고 사법의 영역으로 해결하도록 손을 놔버린 것이다. 정부는 사법과 소송으로 승자와 패자가 나뉘게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모두가 이길 수 있는(win-win) 사회적 대화의 최종 책임자이고 조정자여야 마땅하다.
‘노동존중 정부’라면, 사회적 대화에 가장 큰 책임이 있다. 그러나 경사노위에서 사회적 합의가 안됐다고 해서, 공익위원 입장문과 노동계와 재계의 입장을 기계적으로 짬뽕해놓고 쟁점사항은 법원으로 돌리는 것, 이건 “노동존중 정부”가 아니거나, 아니면 노동을 존중하는 정부로서의 책임을 심각하게 방기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결국 신뢰는 사회적 거래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한 가장 큰 사회적 자본이다. 정부는 총자본과 총노동의 이익을 위해 이 “신뢰”를 재조직할 책임이 있다. 그 신뢰의 시작은 바로 사회적 대화에 대한 정부의 전향적인 노동 중심적 자세일 것이다.
IV. 그런데 말입니다: 민주노총은 무고한가?
노동계에 심정적으로 가까운 사람들은 이쯤 되서 늘 고민이 생긴다. 과연 정부가 100% 잘못했는가? 하는 부분, 까놓고 말해서, 민주노총은 그럼 잘못이 없고 100% 피해자인가? 아니면 그 잘못은 넘겨야 하는가? 이런 부분에 대해 글을 쓰는 사람들은 고뇌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번에 그냥 한번 솔직하게 느낀 점에 대해 써보겠다.
1. 배태된 응집성 접근법
흔히들 이야기한다. 노동계가 사회적 대화를 하기엔, 정부와 자본이 믿을 수 있게 행동했느냐? 그들을 어떻게 믿느냐? 신뢰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라고. 일견 타당한 지적이다.
다만, ‘불평등의 세대’ 책의 저자로 유명한 이철승 서강대 교수의 다른 저서, ‘노동-시민 연대는 언제 작동하는가’는 “배태된 응집성 접근법”을 통해 노동조합과 복지국가의 정치사회학적 연관성에 대해 설명한다.
이 두꺼운 책의 내용을 모두 설명할 순 없지만, 거칠게 요약하면, 시민사회에 대한 노조의 배태성(Embeddedness)과 정당에 대한 노조의 응집성에 따라 복지국가에 대한 노동조합의 영향력은 다르게 작동되고, 시민사회와 노동조합의 연대, 그리고 집권당과 노동조합의 응집성이 모두 높을 때, 복지국가와 노동자의 권리를 지키는 데 도움이 된다는 주장이다.
이 책은 제6장 ‘신자유주의적 시장 개혁과 축소의 정치’ 장을 통해 노무현 정부 시절의 민주노총과 참여정부의 ‘신자유주의’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기재해놓았다.
노동에 우호적일 것으로 간주되었던 ‘개혁’ 정부가 왜 그렇게 돌연 신자유주의적으로 전환했는가? 그 추동력은 불가피한 외부의 경제적 압력이었나? 노무현 대통령 자신의 정치적 의지였는가? 배태된 응집성에 균열을 내는데 국가 관료와 보수세력은 어떤 역할을 했는가? … 배태된 응집성 접근법은 사회정책의 형성에서 개인의 역량이나 지도자 개인의 의지를 외생 변수가 아닌 내생변수로 간주하는데, 이 같은 내생 변수들은 경합하는 시민 및 정치세력에 의해 형성된다. …
민주노동당에 치우친 민주노총의 동맹관계 (국가와의 응집성 하락), 정파갈등에 따른 분열 (배태성 하락), 주변의 진보적 시민단체들이 노무현 정부로 포획된 것 (배태성 하락) 이 모두가 민주노총과 노무현 정부 사이에 배태된 응집성이 사라지도록 한 원인이 되었다. 더욱이 이로 인해 사용자들은 보다 쉽게 다가가 민영화를 위한 로비를 할 수 있었다. 민주노총이 노무현 정부와 갈라지게 된 주요 원인 또한 집권 후 6개월 동안 민주노총 산하 노조들이 벌인 전투적인 파업이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국가에 대한 노조의 응집성이 하락함에 따라 노무현 정부의 의사결정과정에 사용자들의 로비가 개입될 수 있던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었다. – 이철승, 노동-시민 연대는 언제 작동하는가(2019) 中
이쯤 되면, 뭔가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 한번은 비극으로, 한번은 희극으로’란 말이 생각나지 않는가?
2. 사회적 대화의 거부: 1노총이라며?!
애초에 경사노위의 초대위원장은 민주노총 출신의 문성현 위원장이었다. 아울러 경사노위법은 애초에 의결사항에 대해서는 노사정을 대표하는 위원 각 2분의 1 이상이 출석하도록 되어 있다.(경제사회노동위원회법 제7조 제4항) 따라서 민주노총이 만약 경사노위에 책임있게 참여한 상황에서는 노동계 5명이 다 불참해버리면 개악안이 통과되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러나 사회적 대화를 공약으로 내걸고 당선된 ‘직선제 집행부’인 김명환 집행부는 경사노위 참여 안건을 관철시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코로나 19 시기 의욕적으로 추진한 ‘원포인트 사회적 대화’도 정부와 잠정합의문까지 다 만든 상황에서 조인식이 반대파에 의해 무력으로 무산돼버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정부 입장에서는 그들이 사회적 대화의 최종 책임자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대화의 한 축으로 명실상부한 ‘제1노총’인 민주노총이 사회적 대화의 주체로 나오면 이를 이니셔티브로 활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렇게 되지 못했다. 한국노총은 제2노총에 불과했다. ILO 핵심협약 비준 논의를 민주노총이 제1노총의 위상으로 경사노위 안에서 치열하게 싸웠다면 어땠을까. 그래도 똑같았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민주노총 내 일부 정파야 있겠지만, 솔직히 잘 모르겠다.
민주노총은 최근 여의도 국회의사당을 둘러싼 차벽과 경찰병력을 향해 “방역 실패가 우리 탓이냐?!”라면서 전광훈 급 샤우팅을 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물론, 방역수칙을 지켰음에도 표현의 자유와 집회시위의 자유, 결사의 자유라는 핵심 권리에 대한 정부의 안일함에 마땅한 방책이 없는 민주노총의 어려운 상황을 상징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러한 시위에 대해 코로나 19 정국에서 국민 정서를 고려하면, 타당성에 의문이 든다. 사실 정부가 사회적 대화의 최종 책임자임을 잠시 벗어나서 ‘서로의 신뢰’ 측면을 바라보자면, 정부 측에도 이유가 없는 건 아니었다.
이미 한 차례 국회 난입 전력이 있는 상황에서 ILO 핵심협약으로 인한 상호 갈등은 증폭되고 있는데, 지금의 집행부는 사회적 대화를 주장한 김명환 집행부가 무너지고 난 뒤의 비대위 체제다. 솔직히 ‘정부의 책임’을 벗어나 개별 주체의 모습으로만 보면 일말의 이해가 가기도 한다.
3. 신뢰는 움직이는 거야
신뢰는 쌍방 간의 행동이 쌓여 믿음이 축적될 때 비로소 형성되는 것이다. 분명 지금까지의 정부는 작은 타협안들을 축적시켜나가면서 노동 쪽에 신뢰를 심어주는데 실패해왔다. 그러나 최근의 코로나19에 따른 원포인트 사회적 대화는 대통령과 총리가 나서서 잠정합의에 힘을 실어주려 했음에도 민주노총 스스로 정치적 자살골을 넣어버렸다. 신뢰는 정부의 책임이기도 하지만, 이런 식이라면 정부도 민주노총을 신뢰할 수 없다는 데 일종의 알리바이를 제공해버린 셈이다.
배태된 응집성 접근법은 노동조합의 국가와 정부, 정당에 대한 응집성 하락으로 비로소 반대편의 사용자들이 정부의 의사결정과정에 개입할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노동친화적이었던 참여정부가 한미FTA등 ‘신자유주의’를 그 어떤 정부보다 급진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던 데에는, 민주노총의 배태성과 응집성의 하락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2020년의 오늘도 과연 민주노총에게 책임이 완전히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솔직히 가슴에 손을 얹고, 이번 정부의 노조법 개정안이 ‘역대급 노동개악’이라고 말을 할 수 있나? 공무원과 교원의 단결권이 증진된 건 사실이고, 비종사 근로자 조합원의 경우에도 합리적인 이유란 전제가 붙긴 하지만, 노동조합 활동 시 사업장 출입이 가능하도록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역대급이 아닌 걸 역대급이라고 우기면, 대화를 통해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대화회피의 정당성을 찾기 위한 면피용 투쟁이라는 따가운 시선을 받을 수밖에 없다. 신뢰는 상호간에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V. 답은 정해져 있다.
‘답정너’ 란 말이 있다. ‘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대답만 하면 돼.’ 사실 이 노조법 개정안에 대한 갈등의 해결에 대한 답도 정해져 있다. 답은 대화다. 사회적 대화. 민주당의 안호영 의원 대표 발의안은 실제 노동계의 의견을 받아 앞서 언급한 노조법 제2조 제4호 라목 전체를 삭제한 보다 진전된 방향을 담고 있다. 정부, 그리고 노동존중의 여지가 있는 우호적 정당과 노조가 이러저러한 갈등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대화하면서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신뢰는 공동체의 번영을 가져올 수 있는 주요자본이기 때문이다. ILO 핵심협약의 기본정신인 ‘결사의 자유 보장’이 사회적 대화의 장을 정착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