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줄 요약
1. 백두산은 옛날부터 한-중 양국에서 장백산이라고 불렸다. 지금도 그냥 장백산이라고 불러도 된다.
2. 만주의 모든 민족은 백두산을 숭상했다. 한국인에게만 백두산이 특별한 의미가 있는게 아니다.
3. 동북공정이 문제 없다는 것은 아니나, 생수의 원산지 표기 때문에 뭐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4. 그러니 김수현 전지현 욕하지 말고, 역사에 더 관심을 가지자.
생수 광고 논란, 과연 사실일까?
난데없이 한류스타 김수현과 전지현이 생수 광고 때문에 뜻하지 않은 화제의 중심이 됐다.
‘별에서 온 그대’ 이후 인기 상종가를 달리던 이들이 중국 생수 광고에 출연한게 문제라는 주장이 제기됐고, 이게 큰 파문이 되면서 두 스타는 수십억원의 손해를 무릅쓰고 광고 계약을 해지해달라고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내용을 읽어 보니 헝다 생수 업체의 원산지 표기가 백두산 아닌 장백산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큰 문제고, 백두산을 장백산이라고 부르는 것은 동북공정의 무시무시한 함의가 들어 있는 호칭이라는 주장이다. 사전식으로 정리하며, 살펴 보도록 하겠다.
‘장백산’에 관련된 오해들
[명사] 장빠이산(長白山). 중국에서 백두산을 부를 때 사용하는 이름.
2014년 6월. 김수현과 전지현이 한 편의 광고 때문에 여론의 도마에 올랐다. 이들은 최근 중국의 헝다(恒大)그룹 계열 생수 업체의 모델로 등장하게 됐다. 그런데 일각에서 두 한류스타가 이 광고에 출연한 것은 중국의 동북공정에 이용당한 것이라고 주장을 제기했다. 이 생수 제품의 취수원이 백두산인데, 백두산 대신 ‘장백산’이란 이름이 표기돼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논리를 들어 보면 이렇다. 중국 정부는 최근 들어 장백산을 ‘중국 10대 명산’에 포함시키고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면서, ‘한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의 이름을 장백산으로 못박아 놓고 ‘자기네만의 것’으로 왜곡하고 있다. 그러니 생수 산지를 백두산 아닌 장백산으로 표기하는 광고에 출연하는 것은 반민족적인(?) 행위라는 주장이다.
놀랍게도 이 주장은 일파만파로 번져갔고, 부담을 느낀 전지현과 김수현이 해당 생수 업체에 광고 모델 계약 철회를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사실관계를 따져 보면 참 얼토당토 않은 일이다.
백두산, 혹은 장백산은 만주와 한반도 일대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정상에 천지라는 거대한 화산호가 있고 최고봉은 장군봉 혹은 병사봉이라고 불리며, 높이는 해발 2744m다. 많은 사학자들은 단군의 아버지 환웅이 개국한 태백산 신시가 바로 백두산 기슭이라고 보고 있다. 육당 최남선은 한민족의 역사가 시작되는 곳이라는 의미를 담아 ‘불함문화론’을 저술하기도 했다. 불함산도 백두산을 가리키는 별칭 중 하나다.
뭐니뭐니해도 ‘동해물과 백두산이’로 시작하는 애국가의 가사를 보든, 북한에서 사실상 국가와 맞먹는 무게를 가진 ‘김일성 장군의 노래’가 ‘장백산 줄기줄기’로 시작된다는 점을 보든 이 산이 한국인의 정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굳이 더 설명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한민족만이 이 산에 각별한 애정을 쏟아 왔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청을 건국한 누루하치는 자신들 만주족의 시조는 백두산 천지에 내려와 목욕하던 천녀가 신령한 열매를 먹고 낳은 아이라고 선언했다. 이 아이에게서 자신의 조상 아이신고로(愛新覺羅) 씨족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를 포함해 만주 지역을 영유했던 모든 민족은 백두산을 영산으로 섬기고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왔다.
다산 정약용도 지인 신광하에게 준 글에서 ‘백두산은 산해경에 불함산, 각종 지리지에는 장백산으로 소개된다’며 ‘청 황제가 전통적인 명산을 말하는 오악(五嶽)에 백두산을 더해 육악으로 삼고, 때를 맞춰 제사를 지내니 존귀함과 중대함이 옛날에 비할 비가 아니다’라고 했다. 백두산, 아니 장백산이 중국인들에게 큰 의미를 가진 산이 된 것은 최근의 일이 아니다.
국경 지역의 산이나 강이 국가에 따라 부르는 명칭이 다른 경우 역시 드물지 않다.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의 국경을 이루는 알프스 산백의 남쪽 연봉들을 가리켜 오스트리아에서는 쥐트티롤(Südtirol), 즉 남 티롤이라고 부르고 이탈리아에서는 돌로미티(Dolomiti)라고 한다. 중국과 러시아의 동쪽 끝 경계를 이루는 강은 중국에서는 헤이룽강(黑龍江), 러시아에서는 아무르(Amur)강이라고 부른다.
심지어 이 장백산이라는 이름은 동북공정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기 거의 천년 전부터 우리 조상들에 의해 흔히 사용됐다. 위에서 거론한 다산 정약용 뿐만이 아니다. 고려말 목은 이색은 ‘곡주공관신루기(谷州公館新樓記)’에서 “우리 나라의 영토는 삼면이 큰 바다에 닿았고, 북쪽으로는 장백산에 이른다(我國壤地。三面大海。北連長白山)”고 썼다.
1458년 신숙주가 집필한 ‘국조보감’의 세조 초 기록에도 “삼각산을 중악, 금강산을 동악, 구월산을 서악으로, 지리산을 남악으로, 장백산을 북악으로 삼자고 건의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왕조실록만 봐도 같은 산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백두산이 95회, 장백산이 40회 나온다.
1712년, 청태종은 사신 목극등 등을 보내 백두산을 기준으로 조선과 청의 국경을 구분하는 정계비를 세우게 했다. 여기에는 서위압록 동위토문(西爲鴨綠 東爲土門), 즉 서쪽으로는 압록강, 동쪽으로는 토문강(송화강의 상류)을 국경으로 삼는다고 명기되어 있었다. 이대로라면 두만강 이북의 광활한 간도 지역을 조선 땅으로 인정한 셈이다.
그러나 청은 이 토문강은 발음이 비슷한 두만강이라고 우기며 간도 탈취의 야욕을 불태웠고 1909년 일본은 만주 철도 이권을 차지하는 대가로 간도를 중국의 영토로 인정해버린다. 이 간도협약이 체결되고 일제시대를 맞으면서 두만강 이북의 우리 강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962년 북한과 중국 정부가 맺은 변계조약에 따라 한국과 중국의 국경은 압록강-두만강 선으로 확정된 것으로 보인다.
힘에 의해 실제 영토가 왔다 갔다 하는 냉엄한 현실에서, 한낱 생수병의 원산지 명칭이 그 나라 식으로 표기되어 있다고 법석을 떨어 봐야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또 그 생수 광고에 출연한 한국 연예인을 놓고 역사 의식이 없다며 훈계하는게 가당한 일일까. 심지어 그 명칭은 수천년 동안 한-중 양국이 공유했던 이름인데 말이다. 고소를 금할 수가 없다.
생수 광고 출연이 잘못됐다고 주장하시는 분들은 마치 ‘장백산’이라는 이름의 기원이, 중국이 ‘한국인의 영산’인 백두산을 빼앗기 위해 날조한 이름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백두산-장백산의 관계가 독도-다케시마의 관계인 것처럼 본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백두산은 영토 분쟁지역도 아니고, 중국과 한국(북한)이 공유하고 있는 산이다.
윗글을 읽고 나서, 동북공정의 장착 유무를 떠나, 대체 정상적인 중국 생수 제조 업체라면 그 생수의 원산지 이름을 어디로 표기해야 할 지 한번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자기 나라에서 쓰는 이름인지, 아니면 남의 나라에서 쓰는 이름이어야 할지.
현재 백두산은 천지를 중심으로 절반 정도는 중국 땅, 나머지 절반이 북한 땅으로(정확하게는 천지의 54.5%는 북한 것이고, 나머지 45.5%가 중국 땅이라고 합니다) 되어 있다. 물론 백두산 정계비를 우리 쪽 주장대로 해석해도, 백두산의 30%는 중국 땅이었던 셈이지만, 어쨌든 현재 백두산의 일부가 중국 영토이기 때문에 남한에 사는 한국인들도 백두산을 관광하러 갈 수 있다. 말하지면 그 분들도 백두산을 오른 게 아닌, 장백산을 오른 것이다.
어쨌거나 생수 이름이 장백산인 것도 아니고, 그저 취수원이 장백산이라고 표기된 생수의 광고에만 출연하는 것도 잘못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이걸 근거로 전지현이나 김수현이 생수 광고에 출연하기로 한 것이 무슨 역사의식이 결여된 행동이라거나, 매국적인 행동을 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참 어이없는 얘기다. 어처구니없는 사건 때문에 지금 막 일고 있는 중국 내 한류에 찬물을 끼얹는 거나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아마도 ‘1박2일’의 ‘백두산을 가다’ 편이 준 감동을 지금도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이 프로그램에도 곳곳에 ‘장백산’이 붙어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시면 어떤 기분이 드는가. 이 프로그램이야말로 동북공정에 이용당한 바보같은 프로그램이었다고 주장하실 셈인가.
다들 냉정을 되찾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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