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뜨겁게 달구는 기본소득 논쟁
기본소득 논쟁이 한국을 뜨겁게 달구고 있습니다. 기본소득을 둘러싼 논의 자체가 오래된 것이기도 하거니와, 코로나바이러스-19 팬데믹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기본소득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더욱 확대되었죠.
특히 전국민 대상으로 지급된 40만 원의 1차 긴급재난지원금은 이런 인식에 불을 붙이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그 전후로 여러 지자체가 10-20만 원 수준에서 지급해왔던 ‘기본소득’ 정책도 있었고요. 현금을 직접 지급하는 기본소득형 복지 정책은 코로나바이러스-19라는 사안의 긴급성에 부합했을 뿐 아니라, 경기 활성화, 특히 요식업 등 ‘바닥 경기’를 활성화하는 효과가 엿보이기도 했습니다.
기본소득 논의의 최전선에 있는 것은 국내 최대의 지방자치단체인 경기도의 수장, 이재명 도지사입니다. 이재명 지사는 9월 2차 긴급재난지원금 정국에서도 선별지원 대신 전국민 보편지원을 주장했으나, 결국 당정 협의를 뒤집고 본인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데는 실패했죠. 하지만 보편지급의 당위성을 설파하고 많은 지지자들을 얻는 데는 성공했습니다.
이재명 지사가 기본소득을 주요 정책 목표로 제시한 건 오래된 일입니다. 2017년 지난 대선 당시에도 “기본소득을 통해 국민의 가처분소득을 늘리면 국민경제 순환에 사용된다”면서, “사내유보금 등 고여 있는 돈을 조세 등의 형태로 회수해 국민의 가처분소득으로 전환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또 2018년 다보스 포럼에서는 “자동화로 인한 대량실업은 불가피한 사회현상으로 이에 대한 정책적 개입이 필요하다”면서,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기본소득은 피할 수 없는 운명과도 같다”고 발언했죠.
월스트리트저널, “경기 부양을 위한 한국의 기본소득 실험”
정책 목표로 ‘제시’하는 수준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재명 지사는 실제로 도정에 실험적인 기본소득 정책을 ‘도입’하기도 합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지난 9일 자사 홈페이지와 유튜브 채널에 “경기 부양을 위한 한국의 기본소득 실험”이라는 기사 영상을 게시했습니다.
월스트리저널이 소개하는 “한국의 기본소득 실험”이란, 바로 이재명 지사의 “청년기본소득” 정책입니다. 경기도내에 거주하는 만 24세 청년 17만 명에게 분기별로 25만 원, 연 100만원의 경기지역화폐를 지급하는 것인데요. 경기도에 3년 이상 주민등록을 두고 계속해서 거주하고 있는 사람은 고용 여부나 소득에 관계없이 동일액을 지급받게 됩니다.
이재명의 “청년기본소득”, 앤드류 양의 “자유배당금”
월스트리트저널은 이재명 지사의 청년기본소득 정책을 앤드류 양(Andrew Yang)의 자유배당금(Freedom Dividend) 공약에 빗댑니다. 자유배당금은 기본소득 정책의 또다른 이름인데요.
앤드류 양은 이번 2020년 민주당 대선 경선에 후보로 나서 돌풍을 일으킨 바 있는 기업가입니다.비록 조 바이든 후보에 밀려 낙선했지만, 인지도가 거의 없던 후보임에도 불구하고 6%대까지 지지율이 오르는 등 크게 선전하여 이름을 알렸죠.
자유배당금은 그의 공약 중 가장 큰 이목을 끌었던 공약인데, 그는 “자유배당금으로 모든 성인 미국인에게 매달 1,000달러를 지급”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습니다. 실제로 이메일을 등록한 사람들 중 추첨을 통해 1년 간 매달 1,000달러의 자유배당금을 지급하겠다고 선언하며 이목을 끌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기본소득은 비단 경기도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주목받고 있는 정책입니다.
경기페이의 ‘지역 경기 활성화’ 효과에 주목하다
월스트리저널은 이재명 지사의 청년기본소득이 가진 복지제도로서의 효과는 물론 지역 경기 활성화 효과에도 주목합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청년기본소득의 대상자가 된 여러 청년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요. 첫 사례는 이명아 씨입니다. 이명아 씨는 청년기본소득 덕분에 여러 개의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대학 졸업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경기지역화폐는 신용카드의 형태로 지급되어, 다음 지급일 전까지 수령액을 지역 내에서 소비해야 합니다. 주소지 이외의 지역이나 맥도날드와 같은 대기업 체인에서는 경기지역화폐를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지역 상권에 낙수효과를 일으킵니다.
월스트리트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이명아 씨는 말합니다.
알지 못했던 음식점이 어떤 게 있는지 좀 많이 찾아보고, 많이 알게 되고, 그래서 가서 지역화폐를 사용도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이명아 씨와 같은 소비 패턴이 전통 시장에 낙수효과를 일으키는 데 주목합니다. 수산물을 판매하는 이충환 씨의 인터뷰입니다.
청년들, 그냥 30대, 20대 이런 친구들이 굉장히 많이 늘어나고 있고 또 실제로 이 친구들이 오다보니까 시장이 재밌구나, 다음에 또 한 번 와볼까.
코로나 1차 유행이 한창이던 3월만 해도 손님이 적어서 보통 힘든 게 아니었다는데요. 경기지역화폐의 경기 활성화 효과가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어떤 시장들은 매출액의 90%가 감소한 곳도 있었어요. 지역화폐로 인해서 매출액 향상에 엄청나게 도움이 되고 있고.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4월 코로나바이러스 경기침체 극복을 위한 재난소득이 1,300만 명에게 지급된 뒤, 경기지역화폐 가맹점은 매출이 비가맹점에 비해 약 45배나 상승했다고 합니다.
기본소득 실험이 필요한 이유
월스트리트저널의 기사를 좀 더 살펴봅시다. 경기지역화폐를 통한 각각의 거래 정보는 경기도청으로 보내지고, 도청 직원들은 지출액을 10원 단위까지 살펴봅니다.
이재명 지사는 사업의 세부 조정을 위해 정보 수집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자금이 실제로 경기 부양에 도움이 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액수는 크지 않지만 골목상권, 영세 자영업자들의 매출을 늘려주면서 특히 전통시장 같은 곳이 다시 부활하는 그런 실적을 낸 일이 있습니다.
이재명 지사의 말입니다.
지역화폐의 효과에 대한 반론
다만, 월스트리트저널은 그 이면 또한 들여다봅니다.
첫번째는 바로 사생활 침해 이슈인데요.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요안나 마린스쿠 교수는 보편적인 기본소득 프로그램의 경제적 역할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마린스쿠 교수의 발언을 인용합니다.
정부가 매출을 분석하는 일은, 사생활 보호에 대한 우려를 불러일으킵니다.
만일 당신의 정보가 추적되고 있다면, 최악의 경우 그 정보를 정부가 정치적으로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에게서 어떤 혜택을 빼앗거나, 특정한 일을 하도록 압력을 가할 수도 있죠.
또 한 가지, 마린스쿠 교수는 기본소득으로 지급한 돈이 쉽게 저축으로 대체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돈은 쉽게 대체되어 지역에서 소비되는데, 이것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다른 돈은 저축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사람들은 그것을 해당 지역이 아닌 타지역의 상품과 서비스에 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역화폐만큼 추가적인 소비 효과가 생기는 게 아니라, 어차피 쓸 돈을 지역화폐로 먼저 쓰고 그만큼은 저축하게 될 뿐이라는 거죠. 그렇게 저축한 돈은 다시 다른 지역의 상품과 서비스에 사용하게 되고요. 결국 지역 바닥 경기 활성화 효과는 생각보다 적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기본소득 실험은 계속 필요하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경기도의 기본소득과 지역화폐 실험은 계속 이어져 나가야 하는 걸지도 모릅니다. 정부는 개인의 정보에 어디까지 접근해야 하는가, 기본소득과 지역화폐를 통한 복지 효과와 경기 활성화 효과는 어느 정도인가, 계속 연구하고 들여다봐야 할 문제인 것이죠.
이재명 도지사는 경기지역화폐, 경기페이의 성공을 2022년 대선 캠페인을 향한 구호로 삼고 있습니다. 이 구호는 사람들에게 상당히 어필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2차 긴급재난지원금 정국과 기본소득 논쟁을 지나며, 이재명 지사는 지금 차기 대권 후보 지지율에서 1위를 달리고 있습니다.
기본소득의 필요성은 앞으로 더욱 대두될 수밖에 없습니다. 4차 산업 혁명과 자동화, 로봇, 인공지능의 발전과 함께 점점 일자리가 감소할 것이 명약관화하기 때문이죠. 경기도는 한국 최대의 지자체이자, 가장 중요한 제조업 지역이기도 합니다. 다보스 포럼에서도 이미 얘기했던 바, 이재명 지사의 문제의식은 여기에서 나옵니다.
특히 이재명 지사는 코로나바이러스-19가 이런 ‘노동의 종말’을 가속화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코로나19가 우리 사회가 앞으로 맞닥뜨리게 될 4차 산업혁명시대, 소위 노동의 종말 시대, 극단적 양극화의 시대를 아주 급작스럽게 앞당긴 측면이 있기 때문에 새로운 기회 요인이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그래서 기술 분야 사업가들도 기본소득의 옹호자로 나서고 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실업급여와 달리 기본소득이 이렇게 일자리를 잃어가는 사람들을 위한 안정적인 수입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이죠.
이재명 지사는 최종적으로 월 50만 원의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연간 300조 원의 예산이 필요합니다. 이재명 지사의 목표는 장기적입니다. 짧으면 10년, 길면 20년까지도 바라보고 있죠.
이 지사는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앞으로 GDP가 약 50% 더 성장하고, 사회복지 지출을 OECD 회원국 평균인 22%까지 올릴 경우 600조까지 마련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이 지사는 여기에 생산을 자동화한 공장들에 부과하는 ‘로봇세’를 통해 부분적으로 재원을 마련할 구상도 하고 있습니다.
일부 보수적인 기본소득의 반대자들은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들에게까지 기본소득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재명 지사는 말합니다. 이건 “경제정책”이기도 하다고 말입니다.
이건 복지정책이 아니라 경제정책이기 때문에 국가의 경제정책에 따른 이익을 세금을 많이 내는 사람을 배제하는 것은 오히려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월스트리트저널도 주목하고 있는 것처럼, 이재명 지사의 기본소득 실험은 세계적으로 볼 때도 상당히 과감하고 본격적입니다. 지난 9월 긴급재난지원금 지급 방식 문제가 그랬듯이, 앞으로의 선거에서 이재명 지사가 제시한 기본소득이 주요 화두로 오를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한국인의 50% 정도가 이미 보편적 기본소득 프로그램에 찬성하고 있으며, 이들이 다음 대선에 정부에 메시지를 보낼 것이라는 문장으로 기사를 마무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