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찰구가 존재하지 않는 독일의 지하철
얼마 전 독일의 출판사인 bpb(Bundeszentrale für politische Bildung, 정치교육연방센터)에 몇 권의 책을 주문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책값을 미리 받지 않고, 책을 보내면서 고지서를 첨부합니다. 그 고지서에 따라 은행을 통해 책값을 송금하는 방식이지요.
이런 후불제 방식은 처음 접하는 터라 상당히 놀랐습니다. 물론 은행의 신용카드도 일종의 후불제입니다. 하지만 신용카드를 만드는 과정에서는 보통 일정한 신용 체크를 거칩니다. 그런데 bpb에서 서적을 주문할 땐 그냥 책을 받을 주소만 입력할 뿐이지 다른 체크 과정은 없습니다.
돈을 떼먹으면 어쩌려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돈을 떼먹는 사람들에 대해선 나중에 사회에서의 공적 활동을 제약하는 시스템이 작동하는지는 모르지만, 사회성원 사이의 신뢰의 두터움을 드러내는 것 같았습니다.
병원비 지불방식도 서적주문에서보다는 약간 엄격하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후불제였습니다. 치과에서 진찰을 받고 나니 간호사가 그냥 집으로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보험증을 제시했었기 때문에 병원과 보험회사가 자기네끼리 결제를 하는 줄 알고 랄랄랄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건 아니고, 나중에 계산서가 집으로 날아왔습니다. 그 계산서에 따라 병원에 송금을 하고나서 그 대금을 보험회사에 청구하니 일정 비율을 환급해 주었습니다. 한국처럼 병원에서 개인부담액을 그 자리에서 바로 받으면 될 텐데 귀찮기는 했습니다. 이렇게 불편한 점도 있지만, 이 역시 나중에 환자가 송금해 줄 것이라는 신뢰가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주는 시스템인 셈입니다.
독일 지하철에 개찰구가 없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표를 확인받는 개찰구 없이 그냥 자유롭게 지하철을 탈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표 없이도 탈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만약에 많은 사람들이 표를 끊지 않고 탈 것 같으면 이런 시스템은 작동할 수 없습니다.
한국은 물론이고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에선 독일과 달리 개찰구를 거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나라들에선 독일식 시스템으로 하면 표를 끊지 않고 타는 행위, 좀 어려운 말로 하면 도덕적 해이(moral hazard)가 훨씬 더 많이 나타날 것이기 때문에 개찰구를 만들었겠지요.
미국에서 제가 지냈던 솔트 레이크(Salt Lake) 시에선 전차(tram)가 다녔는데, 거기엔 개찰구가 없었습니다. 대신에 거의 매일 같이 검표원이 중간에 올라타서 차표 소지 여부를 확인했습니다. 그 도시는 모르몬교도가 중심이어서 다른 미국 지역에 비해 질서를 아주 잘 지키는 편인데도 그랬습니다.
독일도 가끔씩 검표원이 올라와 확인을 하고 만약 표를 소지하지 않은 경우엔 요금의 20배 정도의 벌금을 부과합니다. 하지만 미국 솔트 레이크에 비해선 검표원이 나타나는 빈도가 훨씬 덜합니다. 만약에 검표원을 대폭 늘려야만 한다면 차라리 개찰구를 만드는 게 비용이 더 적게 들 수도 있겠지요.
신뢰가 기반에 있어야 복지로 나아갈 수 있다
이건 독일이 다른 나라들에 비해 구성원 사이의 신뢰가 높은 사회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가 다 조사를 해보진 않았지만 북유럽도 독일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가 상대적으로 바람직하게 생각하는 사회에선 다 신뢰가 높은 수준에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신뢰가 높으면 거래비용(transaction cost)이 적게 듭니다. 거래비용이란 시장거래에 소요되는 비용(재화와 서비스의 직접적 가격 이외의 비용)을 의미합니다. 아주 추상적인 경제이론에선 거래비용을 무시하지만, 실제 현실에선 거래비용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예컨대 얼마 안 되는 검표원으로 지하철을 운영할 수 있는 고신뢰(高信賴) 사회에선 개찰구를 만드는 비용이 절약되는 것이지요. 그 반대로 저신뢰(低信賴) 사회관계에선 많은 거래비용이 소요됩니다.
극단적으로 갱단이 마약을 주고받을 때의 거래비용을 생각해보십시오. 영화에서 보듯이, 상대편이 돈은 주지 않고 마약만 받고 내뺄 위험성, 또는 총질을 할 위험성 등을 고려해 총잡이와 주먹을 동원해야 하는 거래비용이 소요되는 것이지요.
신뢰정도는 거래비용만이 아니라 복지사회의 작동가능성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만약에 정부의 복지급여에만 기생하려는 사람들이 많다면 정부가 그 재정적 부담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사회성원 대다수가 일할 능력이 있을 때는 복지에 기생하지 않고 일자리를 찾는다는 신뢰가 존재해야 복지사회가 지속가능합니다.
그런 신뢰가 뿌리 내리지 못한 것도 미국이 유럽과 달리 복지가 취약한 하나의 이유입니다. 이건 미국의 역사적 업보(Karma)이기도 합니다. 오랫동안 흑인을 노예로 잡아와 부리면서 흑인의 사회적 지위와 자립성이 약해졌고, 그에 따라 미국사회를 이끌어가는 백인 중산층이 흑인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여러 해 전에 스웨덴 교수와 스웨덴의 복지시스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는 스웨덴국민들의 프로테스탄트 윤리를 강조했습니다. 속된 말로 열심히 일해야 천당 간다는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작동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해서 복지에 기생하는 도덕적 해이 문제가 심각하지 않고, 따라서 사회성원들이 서로를 신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회과학자가 윤리를 논하니 약간 의외였습니다만, 경제학도인 제가 윤리의 문제도 생각하게 만든 하나의 계기였습니다. 사실 <역사의 종언>이란 저서로 유명한 후쿠야마(Francis Fukuyama)도 <Tust(신뢰)>라는 저서를 통해 신뢰가 사회전반에 미치는 영향을 논한 바 있기는 합니다.
신뢰라든가 윤리라든가 하는 것은 넓게 표현하면 ‘문화’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문화의 정의는 가지각색일 것입니다. 하지만 사회구성원의 ‘행동 패턴’, ‘관행’을 문화라고 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겉모습 뒤의 속살”, “하드웨어를 움직이는 소프트웨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한국의 신뢰와 윤리, 혁명적 변화가 필요
경제학도는 일종의 경제결정론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맑스 식으로 표현하면, ‘토대’인 경제가 ‘상부구조’인 정치나 문화 등을 규정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잘 따져보면 토대인경제가 일방적으로 상부구조를 규정한다기보다는 상호작용을 하는 걸로 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정치는 주로 경제적 이해관계를 둘러싸고 움직이기는 하지만 일정한 자율성도 갖고 있습니다. 특히 사회가 꽉 짜이지 않고 유동적인 사회일수록 정치의 자율성은 커지는 것 같습니다. 예컨대 박정희 시대의 정치는 경제운용을 상당히 주도해 나가기도 했지요.
마찬가지로 문화도 토대에 의해 규정을 받지만 토대가 바뀌더라도 그에 상응해 곧바로 바뀌지 않는 일정한 생명력을 갖고 거꾸로 토대를 규정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약간 이야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예를 들어보지요. 이탈리아는 기본 경제시스템은 독일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낮은 문화수준 탓도 있어서 부패와 남북간 경제격차가 심하고, 베를루스코니 같은 황당한 인물이 수상이 되기도 하고, 마피아가 설치기도 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한국은 어떨까요. 한국의 신뢰와 윤리 나아가 문화는 어떠한 상태일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저는 한국사회가 일종의 ‘문화혁명’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모택동 시절 홍위병들의 문화혁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혁명적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한국은 1960~80년대의 ‘산업혁명’을 거쳐 1인당 소득, 무역규모, 산업구조 등 경제의 양적 측면에서는 선진국 반열에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1987년 ‘정치혁명’을 통해 아직 허점이 많지만 형식적으로는 민주주의의 틀을 갖추었습니다. 이제 ‘분단체제의 극복’이라는 한국적 특수과제와 더불어 ‘문화혁명’이 중요 과제로 떠올랐습니다.
이게 제대로 수행되면 한국은 ‘바람직한 선진국’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고단함’, ‘억울함’, ‘불안함’을 초래하는 경제구조나 낙후된 정치구조는 어쩌냐고요. 바로 그걸 바로잡는 데도 문화혁명이 한몫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꼭 닮은 이탈리아와 한국
그런데 과연 한국의 문화는 ‘혁명’을 해야 할 만큼 문제가 많을까요. 문화란 건 나라마다 서로 다를 뿐이지 우열을 따지거나 선악을 논할 수 없다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언어나 문학처럼 그런 반론이 통하는 경우도 있겠습니다만, 신뢰수준과 같이 그런 반론이 통하지 않는 문화 분야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후자와 관련해 한국은 중국이나 아프리카, 중동의 많은 국가들에 비해선 낫다고 할 수 있고, 과거에 비해 나아지고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문제투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독일이나 북유럽에 비해 많이 뒤떨어져 있지요. 물론 독일이나 북유럽이 유토피아는 아니고 그 사회에도 이런저런 문제점이 있습니다만, 적어도 한국보다는 총체적으로 문화수준이 높다는 이야기입니다.
세월호 참사를 생각해 보십시오. 유병언 회장, 선장 및 선박직 직원, 감독관료들의 직업윤리를 도대체 찾아볼 수 있을까요. 돈벌이에만 혈안이 되고, 승객을 안전하게 수송한다는 직업윤리는 내팽개친 상황 속에서 이런 참사가 일어난 셈입니다.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신자유주의 타령’이 유행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한국사회의 신자유주의(시장만능주의)를 논할 수 없는 1970년에 비슷한 남영호 참사가 일어났으므로 신자유주의는 선박 참사의 ‘필요조건’이 아닙니다.
아울러 한국보다 신자유주의가 더 극성을 부리는 미국이나 영국에서 이런 선박참사가 일어나지 않는 걸 보면 신자유주의는 선박참사의 ‘충분조건’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점에서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신자유주의 타령’ 대신에 타락한 직업윤리 문제를 따져보는 게 더 의미 있을 것입니다.
자꾸 이탈리아 예를 들어서 뭣합니다만, 약 2년 전 이탈리아의 유람선 코스타 콩코르디아가 좌초했을 땐 보여준 선장의 태도를 떠올려 보십시오. 세월호 선장과 비슷하게 승객은 내팽개치고 자기 혼자 내빼기 바빴습니다.
이탈리아의 직업윤리 역시 우리와 비슷하게 엉망입니다. 며칠 전엔 이탈리아 베니스에 다녀온 한국인에게서 들었는데, 식당에 메뉴를 약간 애매하게 표시해 놓고는 바가지를 듬뿍 씌우더라고 했습니다. 한국에 주재한 주요 외국대사들과 식사를 해본 친구에 따르면, 유독 이탈리아 대사만이 자기 친척이 하는 사업 이야기를 꺼내더라고 했습니다.
독일말로 직업은 Beruf이고 이는 직업이란 뜻 말고도 하느님이 부여한 소명(召命)이란 뜻도 포함합니다. 소명으로서의 직업이니 ‘자긍심’도 있고 ‘책임감’도 있게 마련이지요. 물론 직업 간에 부당한 격차가 크지 않은 임금구조도 그걸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장인(Meister)이라는 말이 주는 무게감도 상당합니다.
또 한국에선 교회는 많으나 북유럽에서와 같은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제대로 자리 잡지 않았으니,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문화’도 별로 없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교회를 통해 패거리를 만들거나, 하느님을 통해 세속적 복을 받으려는 데 치중하는 것이지요.
우리 사회에선 소득수준이나 사회적 지위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직업윤리가 취약합니다. 세월호 참사의 원인을 비정규직 문제와 직접 연관시키기는 곤란하다고 제가 말했던 게 바로 이런 점을 두고 한 지적입니다. 비정규직인 박지영씨는 숭고한 직업윤리를 발휘했는데, 오히려 선박직 정규직들은 내빼기 바빴지요.
존경을 받지 못하는 사회유력층, 무너지는 신뢰
박근혜정부에서 총리나 장관으로 내정되었던 인물들을 보십시오. 3권분립 정신에 투철한 직업윤리를 갖고 있다면, 김용준처럼 헌법재판소장을 지내놓고 총리직을 수락할 까닭이 없지요. 안대희처럼 대법관 퇴임 후 그 경력을 통해 5개월만에 16억 원을 벌고도 부끄러움도 없이 총리직을 맡으려 하는 일도 있을 수 없지요. 다른 직종의 직업윤리는 어떤가요. 제자 논문을 여러 편이나 자기 걸로 둔갑시킨 인물이 교육부장관을 하겠다고 나서지 않습니까.
극우파 아베를 낳은 일본사회의 문화 역시 그리 높게 평가하기는 어렵습니다만, 그래도 일본에는 ‘부끄러움(はじ)’의 문화라는 게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선 식민지와 전쟁을 경험하면서 무조건 살아남는 게 장땡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힘 센 자에 아부하면서 부끄러움 같은 것은 제대로 따지지 않는 문화가 자리 잡은 게 아닌가 싶습니다.
재벌총수는 온갖 불법과 비리를 저지르면서까지 자기 지배력을 확장합니다. 회사 돈을 자기 호주머니 돈처럼 멋대로 주무르는 것이지요. 삼성총수 3세 이재용이 수십억의 유산으로 수조원의 재산가가 된 과정은 결코 생산적인 노력의 산물이 아니지요. 그런 재벌로부터 정계·관계·언론계·학계·검찰은 넙죽넙죽 돈을 챙겼습니다. 이리해 부끄러움을 모르는 공범자 유력집단이 형성되는 셈입니다.
부끄러움을 모르고 직업윤리를 망각한 문화는 유력층으로부터 사회전반에 퍼져갑니다. 거대기업이나 공기업 정규직도 일종의 ‘특수이익집단’으로서 다른 근로자에 비해 부당하게 높은 처우를 누리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이지요. 하층 근로자 역시 이런 문화 속에서 제대로 된 직업윤리를 갖기 힘든 게 당연합니다.
사회유력층이 존경을 받지 못하니 자연히 사회 성원 사이의 불신도 큽니다. 게다가 세월호에서 보듯이 남을 믿고 시키는 대로 했다간 안타깝게 비명횡사하기까지 합니다. 예전에 농민들이 정부가 강요하는 작물을 심었다가 공급과잉으로 농사를 망친 경우도 비슷합니다. 이런 속에서 신뢰문화가 자리잡을 수 없지요.
대규모 사업장에서 구조조정을 단행할 때, 다른 선진국과는 달리 유독 한국에선 극심한 마찰이 발생합니다. 여기엔 거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의 부당한 임금격차와 부실한 사회보장제도가 주요 원인이지만, 그것 말고도 노사 간의 불신문화도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경영이 어렵다는 점과 꼭 회사측이 제시한 규모의 정리해고가 필요한지에 대해 노동자의 불신이 존재하니, 노조는 일단 싸움부터 벌리고 보는 것입니다. 거꾸로 회사측도 노조를 합리적 대화가 가능한 상대로 인식하기 어려우니, 대화노력을 소홀히 하고 가급적 많은 규모의 정리해고를 추구하는 경향을 갖기 쉽습니다. 그리해 한진중공업이나 쌍용차에서 보듯이 불신문화로 인해 엄청난 사회적 비용이 발생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어찌 해야 할까요. 어려운 문제입니다. 특히 문화에 대해선 완전 까막눈인 제가 경제학전공자로서 정답을 내놓기는 참으로 곤란합니다. 그래서 그냥 논의를 촉발하는 차원에서 몇 마디 해볼까 합니다.
우선 뭔가 잘 안되면 모든 걸 문화 탓으로 돌리고 개혁을 포기해선 안 되겠습니다. “엽전은 어떨 수 없다”는 식의 담론은 부당한 기득권을 유지하고 우리 사회 전반의 발전을 저지하려는 논리입니다. 예컨대 재벌체제에 대해 그건 문화의 문제라서 어쩔 수 없다는 게 그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한국 사회, 많이 변화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수 있다
그리고 한국 사회의 흐름을 살펴보면 문화도 많이 변화해 왔습니다. 죽은 후 매장이 중심이던 문화가 얼마 안 되는 사이에 화장 쪽으로 바뀐 것입니다. 가부장적인 질서도 많이 변화해 요즘 젊은 세대의 부부 사이는 옛날과 많이 다르지요.
현대자동차에서 정세영 회장이 오래 전에 할부제를 도입했을 때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당시에 미국과 같은 신뢰문화가 형성되지 않았는데, 미국식 할부제를 선뜻 도입했더니 돈을 떼먹는 경우가 많아 경영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그런 일은 없지요.
수십년 전에 오토바이 교통경찰이 응급실에 실려 왔는데 치료를 위해 묵직한 장화를 벗기니 100만원 정도의 현찰이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속도위반 단속을 센서로 하게 되면서 이런 교통부패문화가 거의 자취를 감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잘 바뀌지 않는 문화도 있습니다. 이탈리아는 통일된 지 150년이 지났습니다만 남부는 북부에 비해 소득도 절반 정도이고 문화도 많이 다릅니다. 부패가 심하고 마피아가 설치는 문화이지요.
독일을 비롯한 유럽은 중동이나 아프리카의 이민자나 집시들로 골치를 썩이고 있습니다. 극우정치세력이 최근에 급성장세를 보이는 것도 이민자들이 유럽사회에 잘 동화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잘 바뀌지 않는 문화이지요.
얼마 전에 프랑스 출신 감독이 제작한 남북한에 관한 다큐멘터리 “Korea – Für immer geteilt? Nord- und Südkorea Dokumentation”(코리아 – 영원히 분단되었는가? 북한과 남한 다큐멘터리)을 같이 보고 토론하는 자리가 있었습니다.
고위층과 인터뷰도 하면서 남북한을 둘러보고 비교하는 내용의 다큐멘터리입니다. 시간 날 때 한번 시청해 볼 만합니다. 독일어를 모르더라도 대충 따라갈 수 있습니다. (1편 / 2편)
그런데 그 자리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남북한 모두 고위층들과의 인터뷰는 어려웠을 뿐만이 아니라 대단히 경직적이었다고 합니다. 또 이 영화는 남북한의 협조(남한에서는 KBS)를 받아 제작되었는데, 북한은 물론이고 남한 역시 이 영화를 방영하지 않았습니다.
남한 쪽에서 방영하지 않은 이유는, 북한의 김일성 생가와 동상이 나오면서 동시에 남한의 박정희 생가와 동상도 나오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남한과 북한의 문화가 비슷한 수준이라는 느낌을 주는 게 거슬렸던 것이지요.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남한은 왕조체제하의 북한보다 훨씬 앞선 사회입니다. 그러나 서양인의 눈으론 “도토리 키 재기” 같이 보이는 셈입니다. 요즘 김정은을 졸졸 따라다니는 인물들이 수첩에 열심히 받아쓰기 하는 체 하는 것이나, 박근혜의 말을 국무위원들이 열심히 받아쓰기 하는 체 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지요. 이런 것 역시 잘 안 바뀐 문화 부분인 셈입니다.
이처럼 쉽게 바뀌는 문화영역과 잘 안 바뀌는 문화영역이 존재하는 속에서 어찌 해야 문화혁명을 이룰 수 있을까요. 거듭 말하지만 저는 잘 모릅니다. 문화 전공자들이 나서주면 좋겠습니다.
다만 교육이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것입니다. 때마침 이른바 진보교육감들이 대거 당선되었으니 한국사회 문화혁명의 일익을 담당한다는 역사적 소명의식을 갖기 바랍니다. 전교조, 혁신학교 등등의 문제를 포괄하는 총괄적 과제로서 문화혁명이라는 큰 뜻을 세워야 수구세력의 쪼잔한 공세에 늠름하게 대처할 수도 있습니다.
다음으로 법적 조치도 문화의 커다란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며칠 전 독일에서 흥미로운 판결이 있었습니다. 독일인들은 자전거를 많이 타고 다닙니다. 그런데 원칙적으로 자전거를 탈 때는 헬멧을 쓰게 되어 있는데, 질서를 잘 지키는 독일인도 잘 쓰고 다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며칠 전 판결에선 헬멧을 쓰지 않고 사고가 나서 머리를 크게 다친 피해자에게 20%의 자기 과실을 인정했습니다. 그러자 당장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자전거를 탈 때 헬멧을 쓴 사람들이 눈에 띄게 늘어난 것입니다.
한국에서도 근래 횡령 배임을 저지른 재벌총수에 대해 과거처럼 솜방망이 처벌을 하지 않고 실형을 언도하는 경우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SK의 최태원회장, CJ의 이재현회장, 한화의 김승연 회장이 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건 앞으로 재벌들의 문화를 바꾸는 중요한 하나의 계기가 될 것 같습니다.
윤리, 이제는 중요한 사회 의제로 자리잡아야 할 때
더 근본적으로 문화를 규정하는 삶의 윤리체계를 바로잡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조선시대 유교문화는 많이 허물어졌고, 서양에서 유입된 기독교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제대로 된 삶의 윤리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윤리 공백 상태에서 한국사회가 “아귀다툼의 아수라장” 같은 모습을 띠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죽음까지 포괄하는 삶의 윤리를 어떻게 재정립할 수 있을 것인지 종교인들이 ‘종교혁명’에 나서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철학자도 나서야 하겠지요.
근래 대학의 인문학과는 구조조정에 내몰리고 있을 정도로 천대받고 있습니다. 반면에 기업인이나 사회유력층을 상대로 한 인문학강좌는 나름대로 성황을 이룹니다. 졸부들이 서가에 브리타니카 백과사전을 장식해 놓던 것과 비슷합니다. 그런 장식이 아닌 삶의 윤리로서 제대로 된 한국 문화를 위해 인문학자들도 분발했으면 좋겠습니다.
이 외에도 한국사회의 문화혁명을 위해 필요한 일들은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걸 앞으로 문화 전공자들이 본격적으로 논의해주었으면 합니다. 외국의 문화이론을 열심히 소개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한국의 문화혁명을 어떻게 수행할 수 있을지를 밝히는 게 더 시급한 과제가 아닐까요. 혹시 이리해서 외국이론의 한계에서 벗어나 뭔가 독창적인 문화이론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쓰고 보니 주제넘다는 느낌이 듭니다. 경제학 전공자가 너무 아무데나 손을 뻗치는 것 같지요. 맞습니다. 다만 이는 제 나름대로 한반도의 현실을 고민한 결과입니다. 경제에서 정치 그리고 나아가 문화 문제로 필연적으로 연결이 된 셈입니다.
저는 노무현시대의 경제개혁이 왜 제대로 진전되지 않는지 고민하면서 한국의 정치를 살펴본 바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의 진보를 비판한다>를 출간했습니다. 그 후 정치가 제대로 잘 안 돌아가고, 세월호 참사까지 발생하면서 문화 문제를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한국의 진보를 비판한다>에서 X축의 ‘진보-보수’ 대립만이 아니라 Y축의 ‘개혁-수구’ 대립에도 주목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거기선 주로 경제문제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만, 직업윤리를 포함한 문화개혁 역시 Y축의 문제에 포함시킬 수 있겠습니다.
아울러 제가 여기 독일에서 동독과 북한을 비교하면서도 문화 문제의 중요성에 눈뜨게 되었습니다. 동독과 북한은 둘 다 일당독재 하의 계획경제체제라 할지라도 문화가 서로 너무 달랐습니다.
동독에선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고, 누드해변이 서독보다 더 많고, 정치범에 대한 육체적 고문이 행해지지 않았습니다. 가정에서 여성들의 권리는 서독 여성보다 더 강했다는 이야기를 동독출신 여성에게 직접 들은 바도 있습니다.
그리고 동독 시절 악명 높은 슈타지(Stasi, 한국의 국정원에 해당) 책임자로 밀케(Erich Mielke)라는 인물의 경우를 봅시다. 그는 동독이 망할 때까지 수십 년간 슈타지 책임자로 일했습니다.
그런 그를 통일 이후 처벌하려고 했으나 그가 1931년에 공산당원으로서 경찰에 총격을 가한 죄밖에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는 한국이라면 이미 시효가 지난 범죄이지요. 다시 말해 한국 중앙정보부의 이후락처럼 부정축재를 하지도 않았고, 소련 KGB의 베리아처럼 무고한 인물들을 불법적으로 처형하지도 않은 것이지요.
짤방, 소제목 편집: 리승환
이런 동독은 문화면에서 북한은 말할 것도 없고 한국 적어도 1987년 이전의 한국보다 선진적인 사회였습니다. 그런 동독과 서독의 통일이 남북한 관계에 얼마큼 참고가 될 수 있을지 고민을 하게 된 것입니다.
어쨌든 이런 연유로 한국 아니 한반도의 문화혁명에 대해 논하게 된 셈입니다. 문화의 중요성을 논한다고 경제나 정치를 소홀히 하자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경제, 정치, 문화가 모두 서로 깊게 관련되어 있으니, 그 관련성을 염두에 두면서 우리 사회를 따져보고 발전시켜 가자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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