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 10월 1일-나운규의 영화 <아리랑> 개봉
1926년 10월 1일, 나운규(羅雲奎, 1902~1937)가 시나리오를 쓰고 주연·감독한 영화 <아리랑>이 서울의 극장 단성사에서 개봉되었다. 흑백 화면의 무성영화였지만 이 영화는 이 땅의 민중들에게 일대 충격을 안겨준 혁명적 영화였다. 영화가 끝나면 감동한 관객들은 목 놓아 울며 아리랑을 따라 부르곤 했다고 한다.
영화 <아리랑>의 주제가와 함께 제1권이 시작되면 ‘개와 고양이’라는 자막에 이어서 변사의 해설이 시작된다.
……평화를 노래하고 있던 백성들이 오랜 세월에 쌓이고 쌓인 슬픔의 시를 읊으려고 합니다. ……서울에서 철학 공부를 하다가 3·1운동의 충격으로 미쳐버렸다는 김영진(金永鎭)이라는 청년은……
영화 속에서 광인 영진(나운규 분)은 낫을 휘두르며 오기호(주인규 분)를 쫓아간다. 기호는 이 마을의 악덕 지주 천가(千哥)의 머슴이며 왜경의 앞잡이이기도 하다. 영진은 온 마을 사람이 송충이처럼 미워하는 기호를 이처럼 증오하며 왜경과 마주쳐도 찌를 듯이 낫을 휘두른다.
한편 영진에게는 영희(신일선 분)라는 여동생이 있으며, 그는 광인 특유의 사랑으로 영희를 아낀다. 어느 날 서울에서 영진의 대학동창생 윤현구(남궁운 분)가 그의 친구를 찾아 이 마을로 온다.
그러나 영진은 현구를 알아보지 못하고, 영희가 오빠를 대신하여 그를 맞이한다. 영진의 불행을 걱정하는 두 남녀 사이에 어느덧 순수한 애정이 싹튼다.
마침 마을에서 풍년의 농악제가 열린 날 고약한 머슴 기호가 마을을 기웃거리다가 혼자서 집안일을 하고 있는 영희를 보고 그녀를 범하려 든다. 이때 현구가 돌아와 기호와 격투를 벌이게 된다. 영진도 이 자리에 있었지만, 정신이상자인 그의 눈에는 두 남자의 격투가 마치 재미있는 장난처럼 보여 히죽히죽 웃기만 한다.
그러던 영진이 환상을 본다. 사막에 쓰러진 한 쌍의 연인이 지나가는 대상(隊商)에게 물을 달라고 애원한다. 그러자 상인은 물 한 모금 대신 여자를 끌어안는다. 그 순간 영진이 낫을 번쩍 들어 후려친다.
그 순간 대상은 사라지고, 영진의 낫에 찔려 쓰러진 것은 기호였다. 이때 영진은 기호가 흘린 피를 바라보다 충격을 받으며 맑은 정신을 되찾는다.
이 자리에 영진의 아버지, 교장 선생, 천가, 그리고 일본 순경 등과 마을 사람들이 모여든다. 어느새 영진의 손에는 포승이 묶인다. 영진은 그를 바라보고 오열하는 마을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러분, 울지 마십시오. 이 몸이 삼천리강산에 태어났기에 미쳤고 사람을 죽였습니다. 지금 이곳을 떠나는, 떠나려는 이 영진은 죽음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갱생의 길을 가는 것이오니 여러분 눈물을 거두어주십시오…….
이러한 변사의 해설과 함께 영진은 일본 순경에 끌려가고, 주제가 <아리랑>이 남아 흐른다.
–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중에서
주인공은 3·1운동 때 잡혀 일제의 고문으로 정신이상이 된 민족 청년. 그리고 그가 미워해 죽이게 되는 기호는 일제에 아부하는 반민족적인 인물이다. 일제 편에 선 반민족적인 인물을 응징하는 장치로서 나운규는 정신이상자를 내세웠다. 민족과 반민족의 대결, 뒤틀린 역사적 상황을 돌파하는 장치로 나운규는 살인이라는 서사를 선택한 것이다.
촬영도 당시로는 드물게 우리 농촌의 생생한 현장을 사실적인 기법으로 묘사하여 한국 리얼리즘 영화의 효시라는 평가를 받았다. 또, 작품 속에서 기호를 살해하게 되는 부분을 환상 장면으로 설정하고 처리한 것도 뛰어난 기법이었다.
항일 민족의식을 담은 <아리랑>, 리얼리즘 영화의 효시
그러나 이 작품의 가장 큰 감동은 ‘항일민족정신’이라는 작품의 주제를 전통민요인 <아리랑>과 연결하여 자연스럽게 승화시킨 점이었다. 영화의 제목이자 주제가였던 민요 <아리랑>은 암담한 시대를 사는 온 겨레에게 민족적 동질의식과 함께 일제의 식민지배에 대한 현실을 환기하는 강력한 동기로 관객에게 다가갔을 것이다.
흑백 35밀리 무성 영화 <아리랑>은 한국 영화사상 가장 초창기에 제작된 명작이다. 1926년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의 제2회 작품으로 나운규의 감독 데뷔작품이다. <아리랑>은 개봉이 되자 전국의 극장에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아리랑>의 모티프(motif)는 나운규의 고향인 회령에서 청진까지 철도를 부설하던 노동자들이 부르던 애달픈 노랫가락 ‘아리랑’이었다고 한다. 그는 전통민요에서 영화의 기본적인 줄거리를 착상했다고 한다.
이 영화의 영향으로 영화 제작이 활발해졌고, 당시의 조선 영화계가 번안 모방작이나 개화기 신파극 형식의 영화를 버리고 민족영화 제작이 본격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아리랑>은 민족영화 창조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재 <아리랑>의 원본 필름은 찾을 수가 없다.
나운규는 함경북도 회령 출신이다. 호는 춘사(春史). 회령 출신. 약종상(藥種商)의 6남매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918년에는 간도의 명동중학에 들어갔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학교가 폐교되자 1년여 동안 북간도와 시베리아 지역을 유랑했다.
독립운동으로 2년간 복역
3·1운동 뒤, 그는 독립군이 간도에서 회령으로 진격하기 전 터널이나 전신주를 파괴하는 임무를 띤 결사대인 도판부(圖判部)에 가입했다. 이후 서울로 간 그는 ‘청회선(청진-회령 철도) 터널 폭파 미수사건’의 용의자로 잡혀 2년간 복역하고 1923년 출옥하였다. 1924년 부산에 조선키네마주식회사가 설립되자, 그는 부산으로 내려가 연구생이 되었다.
나운규는 조선키네마가 제작한 윤백남(1888~1954) 감독의 <총희(寵姬)의 연(戀)>에 단역인 가마꾼으로 처음 출연하여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1925년 백남프로덕션의 제1회 작품인 <심청전>에서 처음으로 주역(심 봉사 역)을 맡아 연기파 배우로 이름을 얻었고 이듬해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의 <농중조(籠中鳥)>에 출연하여 절찬을 받아 일약 명배우가 되었다.
나운규는 배우로 만족하지 않고 직접 영화 만들기를 결심하고, 독립운동을 배경으로 한 저항적인 작품 <아리랑>과 <풍운아>(1926)를 직접 쓰고 감독·주연을 맡았다. 이때 그는 우리 나이로 스물다섯 살에 불과했지만, 일약 조선 영화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주목받게 되었다.
<풍운아>는 시베리아 방랑 시절의 나운규를 연상시키는 듯 시베리아에서 건너와 세탁소를 내서 고학생들을 돕고 악한을 응징하는 영웅적인 인물이 주인공. 나운규 주연의 이 영화는 <아리랑>보다 활극적 요소가 강해 역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들쥐>(1927), <금붕어>(1927) 와 같은 작품을 만들어내며 흥행의 보증수표와 같은 이름이었던 나운규는 조선 영화계의 스타로 군림했다. 그는 단성사 운영주 박승필(1875~1932)의 권유와 후원을 받아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을 나와 1927년 윤봉춘(1902~1975) 등과 함께 나운규프로덕션을 세웠다.
<아리랑> 이후, 조선 영화계의 대표하는 인물로 부상
이후 나운규는 <잘 있거라>(1927), <옥녀(玉女)>(1928), <사랑을 찾아서>(1928), <사나이>(1928), 나도향 원작의 문예영화 <벙어리 삼룡>(1929) 등을 만들었다. 이중 <사랑을 찾아서>는 <두만강을 건너서>라는, 원제가 검열에 걸려 제목을 바꾸어야 했던 작품으로 독립군으로 활약하던 시기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나운규가 만들어낸 작품은 대중의 큰 사랑을 받았다. <벙어리 삼룡>이 대구 만경관에서 상영될 때는 관객이 초만원이어서 극장 2층이 무너졌고 진주에서는 무대에까지 들어찬 관객들로 배우들이 극장에 들어가지 못할 지경이었다.
‘나운규의 시대’였지만 실상은 초라했다. 그의 방탕한 생활로 인해 회사는 적자를 면치 못했다. 결국, 나운규프로덕션은 해체되고 그는 일본의 촬영소를 돌아본다며 조선을 떠났다.
일본에서 돌아온 나운규는 1931년, 우익단체인 일본국수회(日本國粹會) 회원인 도야마 미츠루(遠山滿)가 세운 원산만프로덕션에 참여하여 <금강한(金剛恨)>이라는 영화에 출연하였다. 또 배구자(裴龜子) 무용단과 함께 순회공연을 하러 다니기도 하면서 영화인들의 집중적인 성토를 받았다.
심훈(沈熏)이 “천인비봉 기불탁속((千仞飛鳳 饑不啄粟 : 봉황은 천 길을 날며 주려도 조따위는 먹지 않는다)”라며 조선 영화계를 대표하기도 했던 나운규의 몰락을 안타까워할 정도였다.
1932년에는 이규환 감독의 <임자 없는 나룻배>에 주연으로 출연하여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다. 뒤이어 만든 작품들은 <무화과>(1935)·<강 건너 마을>(1935)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문명비판·사회비판 등 부정 정신을 나타낸 것이었다.
1936년 영화계에 획기적 선풍을 일으킨 발성(토키talkie) 영화가 등장하자, 나운규는 <아리랑> 제3편을 발성 영화로 제작하였으나 참담하게 실패했다. 이 무렵 그는 폐결핵과 싸우면서 이태준의 원작 소설 <오몽녀(五夢女)>를 영화를 만드는 데 진력했다.
<오몽녀>를 완성하여 1937년 단성사에서 개봉하였으나 그의 병은 급속도로 나빠졌다. 일본을 다녀오는 등 무리하다가 나운규는 같은 해 8월 9일, 파란 많았던 짧은 생애를 마감했다. 향년 36세. 그의 영결식은 <아리랑>이 개봉되었던 단성사 극장에서 치러졌다. <아리랑>에서 공연한 여배우 신일선은 다음 글로 그의 죽음을 추모했다.
“나는 이제 무엇을 위하여 살며 무엇을 위하여 죽으리까. 오로지 영화만을 위하여 살았고 영화만을 위하여 돌아가신 거룩한 당신의 영혼이 영원히 행복함을, 눈뜬 잠을 자고 있는 나는 속마음으로 축원하나이다.”
– 신일선, 월간 『삼천리』(1937)
나운규는 식민통치의 억압과 수탈에 대한 저항, 통치권에 결탁한 자본가에 대한 비판이라는 주제를 일관되게 추구했다. 또, 그의 작품은 모두 약자에 대한 동정과 함께 악덕·난륜(亂倫)에 대한 신랄한 고발과 풍자를 담고 있다.
민족영화인 나운규, 크고 깊은 발자국
나운규는 영화인으로 활동한 약 15년 동안 29편의 작품을 남겼고, 26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직접 각본·감독·주연을 맡은 영화가 무려 15편이나 된다. 그의 작품 목록(필모그래피 filmography)이 그대로 우리나라 영화 자체의 성장 과정이 된 것이다.
나운규는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았다. 그가 한국 영화사에 남긴 발자국은 크고 깊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나운규’ 항목은 다음과 같은 최상의 찬사로 마무리된다.
“그는 투철한 민족정신과 영화예술관을 가진 최초의 시나리오작가일 뿐 아니라, 뛰어난 배우 양성자이며 연기 지도자였다. 그는 민족영화의 선각자이며, <아리랑>이라는 불후의 명작을 남기고, 영화의 정신과 수준을 크게 끌어올린 불세출의 영화작가로 평가된다.”
원문: 이 풍진 세상에
참고
- <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위키백과>
- 이달의 독립운동가 나운규, 국가보훈처
- [추석 인물 열전]②전국 발칵 뒤집은 ‘아리랑’의 나운규, <아시아경제>(2017.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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