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눔의 집과 위안부 할머니가 박유하 교수가 출간한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출판금지 가처분신청 및 명예훼손 소송을 했습니다. 현재의 상황에서는 1심까지는 가겠지만, 서로 간에 조정하고 끝내기를 기대합니다.
2. 저는 조선인 위안부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사람은 아닙니다. 박유하 교수 역시 마찬가지이겠지요. 저는 국문학을 박교수는 일문학을 전공했는데, 제가 위안부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은 계기는 제 전공인 근대문학 연구에서 왔습니다.
3. 애초에 제 관심사는 일제말기 문학의 ‘협력과 저항’의 문제였는데, 이런 연구에 관심을 갖다 보니, 학문의 언저리에서 한국, 일본, 중국, 대만, 인도네시아 등의 학자의 견해를 게으르게 읽은 지 한 10여 년이 되었습니다.
오키나와의 기록: 40여 곳의 조선인 위안부 공식 확인
4. 제 전공은 국문학이지만, 경희대학에서는 ‘시민교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지난 3년 동안 동아시아의 ‘시민교육’과 ‘평화교육’의 문제를 고민하면서, 동아시아의 평화교육의 문제에 주목해 연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의 한 부가적 생각을 <주간경향>에 ‘오키나와로부터 온 편지’를 연재한 지 꼭 6개월이 지나고 있습니다.
5. 오키나와를 자주 취재, 연구차 방문하면서, 오키나와에서 반기지 운동을 하고 있는 일본 본도인, 오키나와인, 재일 코리언, 귀화 조선인 등을 종종 만났습니다. 물론 오키나와 문학도 읽었고, 오키나와에 대한 기록을 남긴 일본인들의 책들도 꼼꼼히 읽어 보았습니다.
6. 오키나와 남부 이토만시 마부니에 있는 오키나와 평화공원에는 여러 종류의 조선인 위령시설이 있습니다. 박정희가 조성했다는 조선인 위령비도 있고, 평화의 초석에 기입되어 있는 한반도 출신 학병, 군부, 위안부 들의 각명비도, 당시 일본군 32군 사령관인 우키시마의 각명비와 함께 있는 것도 보았습니다.
7. 오키나와인들은 현재도 일본을 ‘야마토’로 부르고, 일본인들을 ‘야마톤츄’라 부릅니다. 오키나와를 ‘우치나’로 자신들을 ‘우치난추’로 부르죠. 오키나와 전쟁 당시 체류했던 여러 조선인들은 ‘조세나’로 부릅니다.
8. 박유하 교수는 일제하 강제연행된 위안부들과 일본군과의 관계를 같은 “일본국민”이었다고 말하지만, 오키나와에서 오키나와인, 조선인, 일본인들은 박교수의 생각과 다르게 생각했고 행동했습니다. 가장 명백한 것은 “말”이 달랐기 때문에, 오키나와어나 일본어로 끼리끼리 대화하면, 스파이 혐의로 처형하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9. 오키나와의 조선인 위안부들은 대만, 남방, 한반도, 중국에서 입도하는 일본군을 따라 오키나와로 연행되었습니다. 중국에서 온 위안부들은 중일전쟁 전후로 ‘간호부’를 포함한 ‘근로정신대’로 갔다가 ‘위안부’로 전락한 사람들과 애초부터 ‘위안부’로 강제연행된 사람들이었고, 한반도에서 오키나와로 강제연행된 위안부들은 1944. 10. 10. 공습 직후 군부와 함께 오키나와로 연행된 사람들입니다.
10. 현재까지 확인된 바로는 오키나와에 130여 군데의 위안소가 있었고, 그 가운데 40여 군데에 조선인 위안부가 있었다는 것이 공식 확인되었습니다(하야시 교수 등이 계속 확인 중입니다). 조선인 위안부의 실상은 현재 한국에 있는 재일코리안 감독인 박수남의 <아리랑의 노래>(1991)라는 영화와 증언집, 군부 출신인 김원영의 <어느 한국인의 오키나와 생존수기>(1991)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밖에 일본과 오키나와 연구자들의 증언집에도 잘 드러나 있습니다.
위안부를 그저 여성학계의 문제로 방기한 한국 학계의 문제
11. 박유하 교수가 주장하듯이, 위안부들과 일본군이 “동지” 비슷한 감정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저는 “스톡홀름 신드롬”이라는 개념으로, 박교수가 해석했던 개념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12. 나중에 길게 분석해야 겠지만, 박교수가 <아시아 여성기금> 및 ‘강경파’ 위안부 및 지원단체를 비판하고 있는 논리는 오오누마 도쿄대 교수의 <위안부 문제는 무엇이었는가>(중앙공론, 2007)의 주장과 유사하거나 많은 부분에서 동일합니다.
13. 따라서 저는 박유하 교수와 논쟁하기보다는 오오누마 교수의 저작을 문제삼고, 이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게 일단 선행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 많은 식견을 갖고 있는 한겨레의 한승동 기자나 중립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길윤형 기자 등이 검토해 보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4. 저는 한국의 일문학계나 역사학계도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일제말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한국의 사학계는 이것은 ‘여성학계’의 문제라는 식으로 연구를 방기했습니다. 그러니 몇몇 여성학자들과 저 같은 국문학자들이 논의를 하게 된 것입니다.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한 일본학자들이 이 문제에 대해 제대로 된 논의를 하지 않았기에 오늘과 같은 사태가 연출된 것입니다.
아시아 여성기금, 좋게만 볼 수 없는 이유
15. 아시아 여성기금에는 우파와 리버럴, 그리고 북한 문제에 조예가 깊은 와다 하루키 교수도 참여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요시미 교수를 포함한 위안부 문제의 해결에 적극적인 양심적 좌파 지식인들은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아시아 여성기금> 쪽은 마치 제3의 길을 연다는 식으로 특히 초기 위안부 진상규명에 힘쓴 일본 내 좌파들과 한국 및 정대협과 같은 지원단체를 ‘강경파’라며 비난했습니다.
16. 오오누마가 중심이 된 <아시아 여성기금>은 위안부 할머니들의 세속성을 유독 강조했습니다. 역사적 심판이 중요한 게 아니라 당장 살아갈 “돈”이 중요하다. 이것을 부정하면 안 된다, 하는 식이었죠. <아시아 여성기금>은 네덜란드, 대만, 필리핀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하고, 한국에서 개인적으로 신청한 할머니들에게도 그랬습니다. 수상의 사과 편지도 친필 사인을 해 보냈지만, 일본 정부는 과거나 이제나 “도의적 책임”을 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7. “도의적 책임”이라는 말. 참 아름다운 말입니다. “법적 책임”은 말도 안 된다, 불가능하다, 곤란하다의 면죄논리가 이 “도의”의 참 뜻입니다. 박유하 교수가 교묘하게 왜곡하고 있지만, “아시아 여성기금”에 대해 일본 정부는 협조하지 않았습니다. 민관합동 모금형식으로 된 자금 가운데, 공적 자금은 거의 대부분이 ‘공무원 노조’ 등을 중심으로 한 금액이었고, 아이러니컬하게도 재일 조선인 역시 성금을 내기도 했습니다.
18. 한국정부는 김영삼 정부와 김대중 정부를 지나면서, 위안부 할머니에 대한 국가적 지원을 결정했습니다. <아시아 여성기금>을 받지 않아도, 일단 생활과 건강보장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일본을 향해서 “돈”이 아니라 국가의 법적 책임과 배상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 정부 역시 이러한 한국의 태도를 지지하며, 현재까지도 일본 정부를 압박하고 있습니다.
19. <아시아 여성기금>은 절반의 성공과 실패로 끝났습니다. 이번에 문창극 씨의 총리지명에 반대했던 새누리당 의원 중에 이쟈스민 의원이 있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필리핀 역시 일본군 위안부의 피해국이었기 때문입니다.
20. <아시아 여성기금> 사업은 끝났습니다. 아시아 여성기금의 최초 광고는 한국의 <한겨레>에 게재되었고, 당시 동아일보 기자였던 이낙연(현 전남도지사)이 이를 적극 평가하는 기사를 쓴바 있습니다. <아시아 여성기금> 쪽에서, 자신들의 사업목표를 설명하기 위해 한국의 지일파 지식인들에게 여론형성을 부탁했지만, 당시에 다 난색을 표했다고 오오누마 교수는 <위언부 문제는 무었이었던가>에서 쓰고 있습니다. 그 책에는 서울대의 이영훈 교수와 함께 박유하 교수가 <아시아 여성기금>을 이해하는 희귀한 한국의 지식인이라며 고평되고 있습니다.
친일 – 반일의 이분법을 넘어
21. 위안부 문제는 단순한 국가폭력이 아닙니다. 이것은 식민지와 제국주의와 남근주의가 종합된 20세기의 비극입니다. 구 일본군들이 “위안부”에 대한 인상을 담고 있는 글들에는 그들이 “누이” “아내” “동지” 같았다거나, 죽음을 목전에 둔 순간에 “구원의 여인”이었다는 식의 어처구니없는 발언이 자주 등장합니다. 한계상황에서의 정서적 도착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22. 우리가 위안부 문제를 논의하는 것은 오오누마나 박유하 교수가 말하듯 “반일 내셔널리즘” 때문이 아닙니다. 저는 스스로의 연구입장을 ‘비민족주의적 반식민주의’의 관점에서 견지하고 있습니다.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도 많다는 것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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