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진학률 1위, 삶의 만족도는 뒤에서 1위
한국 고등학생들의 대학 진학률은 OECD 주요 국가 중 가장 높은 70.4%(2019년 기준). 하지만 청소년층의 삶의 만족도는 OECD 주요 국가 중 꼴찌. 한국 교육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어떤 숫자들입니다.
1980년대, 1990년대, 2000년대… 긴 세월 동안 한국 교육은 오직 대학만을 목표로 달리는 ‘시험 기계’를 만들어왔습니다. 2010년대, 개인의 개성과 정체성이 존중받는 다양성의 시대. 이제는 뭔가 조금… 달라졌을까요?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2020년 지금도 고등학교 교실 뒤 게시판에는 전국의 대학교 분포도와 ‘인서울’의 꿈을 응원하는 팸플릿이 붙어 있습니다. 세상이 바뀐 속도를, 우리 아이들의 교실은 전혀 따라가지 못한 것처럼 보입니다.
학교 교육은 대학 입시에만 초점을 맞추고,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만을 위주로 돌아갑니다. ‘공정’이 시대의 화두로 떠올랐다지만, 결국 그 결론은 ‘공정하게’ 수능시험 성적대로 학생들을 줄 세우라는 요구로 승화합니다. 아이들의 개성과 다양성을 꽃피우는 전인적 교육 같은 모토는 잊힌 지 오래인 것처럼 보입니다. 어떤 면에서, 어쩌면 우리는 뒷걸음질을 치는 걸지도 모릅니다.
학교 공부로부터 목표 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새로운 목표를 심어주자
아현산업정보학교는 참 독특한 학교입니다. 서울 마포에 원래 1984년 아현직업학교로 개교했던 이 학교는 1990년부터 일반계고교 직업과정 위탁 교육을 시작했는데요. 공부보다 다른 분야에 관심이 있는 아이들이 고등학교 2학년 때 시험을 치러 아현산업정보학교에서 고등학교 3학년 시절을 보내게 되는 것이죠.
아현산업정보학교에는 14개의 학과가 있습니다. 사진영상, 패션디자인, 방송영상, 카페플라워, 실내건축디자인, 만화애니메이션, 디지털시각디자인, 한/양식조리, 제과/제빵, 미용예술, 관광서비스, E스포츠, 게임제작, 실용음악 등, 전통적인 직업군뿐 아니라 2000년대 이후 들어 각광받는 새로운 직업군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서울의 인문계고 수는 200개가 넘습니다. 하지만 학교는 ‘모든 아이’들을 품어주지 못합니다. 한 반 30명 중 적어도 5–6명, 많게는 15명 가까이가 수업 시간에 잠만 잔다는 게 통설입니다. 대학 입시, 인서울, 공부 잘하는 아이들에 초점이 맞춰진 교육은 공부가 느린 아이들을 챙겨주지 못하고, 자연스레 학교 교육에서조차 도태되고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아이들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죠.
아현산업정보학교의 존재는 그래서 소중합니다. 이 학교가 일반계고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직업과정 위탁 교육을 실시하게 된 계기가 바로 그런 것이었다고 합니다.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학교 공부로부터 목표 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아이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이 아이들에게 직업교육을 시켜주면 어떻겠냐는 것이죠.
“술에 취해 복도를 돌아다니는 학생을 만났어요.”
물론 쉬운 일은 아닙니다.
교문에 들어올 때 일단 같은 교복을 입은 놈이 하나도 없어. 머리 (색깔도) 다 달라. 손에 책가방 든 애들이 있다 없다? 없다. 정말 한 명도 없어요. 교무실에 올라가면 여기서 퍽, 저기서 퍽, 야 이 새끼야 뭐 새끼야. 오토바이 훔친 놈, 담배 피우다 걸린 놈, 뭐 한 놈이 득실득실한 거예요.
2007년에는 교감으로, 2015년에는 교장으로. 아현산업정보학교와 두 번이나 연을 맺었던 방승호 선생님은 처음 만났던 학교 상황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땐 진짜 꼴통들이 많았거든.
임용 초기에는 그냥 발령이 나서 갔을 뿐인, 평범한 직업인으로서의 교사였을 뿐이었습니다. 그렇죠. 꼴통. ‘인서울’ 대입을 포기한 아이들, 수업 시간이면 잠만 자는 절반의 아이들은 그렇게 불리곤 합니다. 하지만 거기에서 한 겹만 더 깊이 들어가 본질을 보면 조금 다른 모습이 보일지도 모릅니다.
아현산업정보학교에서 새로운 꿈을 찾은 학생들, 그리고 그 학생들을 바꾼 방승호 교장 선생님의 유쾌한 교육법을 다룬 다큐멘터리 ‘스쿨 오브 락’. 이 영화는 최근 헬싱키 영화제에 초청받기도 했죠. 여기에서 방승호 선생님은 재미와 친밀감, 주체성을 모토로 하는 교육 철학과, 그 교육법이 학생들을 실제로 어떻게 바꾸었는지를 무척 인상 깊게 보여주는데요.
이 영화에서 방승호 교장 선생님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교장으로 부임해 왔을 때, 술에 취해서 복도를 돌아다니는 학생을 만났어요. 데려다 놓고 앉아서 얘길 하니까, 얘가 밤새 아르바이트로 갈빗집에서 갈비를 자르고 온 거야. 경제적으로 힘이 드니까. 사실 자야 하는데 정말 그걸 참고 학교에 온 거야.
만일 그 아이의 행동만 보고 내면을 안 보면, 그냥 술 취한 애로 생각했겠죠. 학생도 아닌 애라고. 그런데 잠깐 앉아서 물 한 잔 주고 얘길 듣는 순간 다른 애가 되는 거예요. 가장이 되는 거죠. 집에 가서 자야 하는데도 학교에 온 아이가 되는 거예요.
방승호 교장 선생님은 자해 학생과의 에피소드도 소개합니다.
아침에 걔 왔는지 확인하는 게 큰일이었어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거든요. 이야기를 들어보면 불쌍해, 진짜 불쌍해서 회의할 때 말을 못 해요.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대단한 거야.
‘나는 나를 온전히 받아들인다’. 그 구절을 대여섯 번 소리 내서 같이 읽으면 아이가 눈물을 펑펑 흘려요. 한 번도 위로받은 적이 없었던 거죠.
쉬는 시간 10분을 쪼개 교장실에 ‘놀러 가는’ 아이들
방승호 선생님은 교장실을 놀이터로 만들었습니다. 학생들은 자기들끼리 놀기에도 바쁜 쉬는 시간 10분을 쪼개 교장실에 놀러 옵니다. 방승호 선생님의 교장실에 방문하는 아이들은 하루에만도 100명 남짓. 아현산업정보학교의 전교생이 750명 정도니까… 어마어마한 거죠. 그냥 말만 놀이터라고 지어놓은 게 아니란 얘깁니다.
방승호 선생님은 상담실에 온 아이들과 ‘놀이’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른바 ‘모험 놀이’라고 이름 붙은 방법론인데요. 간단한 팔씨름이나 발등 밟기, 레크리에이션 놀이에 스킨십과 심리 치료를 자연스럽게 녹여내 학생들의 마음을 여는 것이죠.
물론 이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교장실이란 원래 웬만한 사고를 친 게 아니고서야 갈 일이 없는 곳이죠. 권위적인 학교 위계질서를 생각하면 학생들이 교감, 교장 선생님을 일부러 찾아간다는 게 말이 안 되거든요. 그래서 방승호 선생님은 익살꾼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우스운 탈과 가발을 쓰고 복도를 돌아다니며 먼저 학생들에게 낮은 자세로 다가가는 거죠.
방승호 선생님은 실제로 음반을 7장이나 낸, 말하자면 ‘7집 가수’이기도 합니다. 원래는 김광석 스타일의 포크 음악을 추구했었는데, 요즘에는 시대의 흐름에 발맞춰 트로트(!)에도 도전한다고 하네요. 방승호 선생님은 이런 경력을 십분 활용해 학생들과 함께 공연을 즐기기도 하고, 학생들이 만든 노래를 함께 감상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훈계 대신 노래를 활용하기도 합니다.
다 되는데 담배는
안 되는 것 같다
등나무 밑에 가면
하얀 담배 꽁초가
이놈의 자식들
혼을 내야지만 막상 보면
천진한 얼굴
방승호 선생님의 노래, “No Tabacco”중 일부입니다. 사실 이런다고 아이들이 바로 담배를 끊길 기대하는 건 무리겠지만, 그래도 적어도 딱딱한 훈계보다는 한 번 더 자신을 돌아볼 기회는 되겠죠. 훨씬 친근하게 다가올 테고요.
“게임하는 아이들에게, 아예 e-스포츠를 가르치자”
재미 하면 게임을 또 빼놓을 수가 없죠. 방승호 선생님은 교감 재직 시절 아현고에 e스포츠학과를 만든 인물이기도 합니다.
왜 아이들이 공부를 포기하는지 궁금해 전교생과 상담하던 방승호 선생님은, 많은 아이들이 게임 때문에 공부를 포기한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물론 공부를 포기하지 않은 학생들도 많은 수가 게임을 즐겼고요.
그래서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고민하다가, 아예 e스포츠학과를 만들어버리는 발상의 전환을 꾀합니다. 기왕 만드는 김에 아예 교실을 PC방처럼 꾸미기까지 하죠. 이 발상의 전환의 결과는 대성공. 프로게이머가 매년 몇 명씩 나오고 대학 진학률도 70%에 육박하는 성과를 냈습니다.
우리 학교 아이들이 준프로게이머로 탄생하고 있어요. 팔자가 바뀌었을까요, 안 바뀌었을까요? 완전히 바뀐 거죠. 걔가 그냥 인문학교에 계속 다녔다면, 여전히 목하 취침 중이었겠죠.
최근 미성년자의 게임 과몰입 문제가 화두가 됐습니다. WHO는 게임 중독에 질병코드를 부여하기도 했고요. 하지만 방승호 선생님은, 게임이 문제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게임에 빠지면서 성적이 떨어지고 부모와의 관계도 멀어졌다고 하지만, 좀 더 살펴보면 게임에 빠졌기 때문에 나빠진 게 아니고, 그 전에 아이를 둘러싼 안 좋은 환경이 먼저 있었던 경우가 대부분이라고요.
방승호 선생님은 이런 아이들에게는 오히려 잘 디자인된 환경을 제공함으로써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말합니다. 무조건 금지하는 게 능사가 아니라, 친구들과의 관계, 프로 선수들과의 상호 관계를 통해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과몰입 해결의 단초라는 것이죠.
아이들에게 주체적으로 목표를 찾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현고에서 학생들은 주체적으로 교육에 동참합니다. 춤을 배우는 학생은 트레이너와 함께 춤 강습을 받습니다. 영화 촬영을 배우는 아이들은 직접 카메라로 단편 영상을 찍어보죠. 실용음악을 하는 아이들은 매일같이 스스로 작곡을 해 봅니다. 그 노래를 ‘7집 가수’ 방승호 선생님이 함께 들어주는 건 물론이고요.
이렇게 춤을 추고, 영화를 찍고, 노래를 만들며 스스로의 재능을 느끼고, 또 좋은 성과가 나오면 상도 받고요. ‘공부’라는, 단 하나뿐인 목표를 향해 돌진하다 지쳐 나가 떨어져버렸던 아이들은 아현고에서 새로운 꿈을 만들게 됩니다. 목표가 생기니까, 교실에서 자는 게 일이었던 아이들도 자연히 치열하게 새 목표를 향해 달리게 됩니다.
e-스포츠학과를 만든 건 물론, 최근에는 LoL팀을 창단하기도 한 아현고. 물론 쉬운 길은 아닙니다. 없던 교육과정을 만들고 채워나가려면 좌충우돌할 수밖에 없고, 주변의 도움도 많이 필요하죠. 하지만 방승호 선생님은 바로 그게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중요한 게,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아이들이 직접 채워 나가니까 과에 힘이 생기는 것 같아요. 그동안 교육과정은 위에서 일방적으로 만들어져 내려오는 것이었는데, 여기는 애들이 지지고 볶아가며 스스로 만드는 과정인 거죠. 더 내 거 같은 느낌이 드니까, 유대감도 있고, 성장속도도 빠르고, 진로에 대해 확신도 갖게 되고, 더 기뻐하게 되는 것 같고요.
“내 꿈”을 얘기할 수 있는 교육
저는 아현 와서 19년 동안 몰랐던 행복을 찾은 것 같습니다.
한 학생의 말입니다. 학생들은 다들 아현고에 와서 비로소 ‘꿈’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내 꿈은 내 옷 브랜드를 만드는 거야.” “내 꿈은 프로게이머야.” “내 꿈은 영화감독이야.”
우리나라 고교 교육에서, ‘내 꿈’을 이야기할 줄 아는 아이들이 얼마나 되었던가요. 아현고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꿈’을 이야기합니다. 서울대, 의대, 이런 거 말고, 진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말이죠.
학교 다니면서 학교가 나에게 주는 행복이라든가, 득을 주는 곳이라고 생각을 한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아요.
또다른 학생의 말입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아이들에게 꿈을 돌려줘야 한다, 아이들의 개성과 정체성에 맞는 다양한 교육이 필요하다, 이런 말 자체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얘기죠.
진짜 문제는 아마 ‘어떻게’가 아닐까요. 학생들이 스스로 다가올 수 있도록 문턱을 낮추고, 학생들이 주체적으로 자신의 목표를 찾아갈 수 있게끔, 내가 배우고 성장하는 길을 스스로 만들 수 있게끔 만들어주는 것 말이죠.
그냥 말만 ‘학생들의 개성을 존중’… 이러니까 자연히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여전히 학교는 권위적이고, 교장실 교장실은 가죽 소파에 그럴듯한 응접용 탁자에 이른바 ‘귀빈’들을 모실 때나 사용되는. 그런 환경에서 다양성이 어떻게 꽃필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학생들이 터놓고 ‘꿈’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7집 가수’ 방승호 선생님의 유쾌한 이야기는, 우리 교육이 나아갈 방향의 실마리를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낮은 곳에서 먼저 다가가는 선생님. 때로는 조금 우스꽝스러워 보여도, ‘교장으로서’ 모든 아이들을 품고 조망하려면 마땅히 있어야 할 위치가 바로 거기일지도 모릅니다. 일선 담임 교사보다도 더 가까이서 아이들과 친밀함을 유지하는 것, 아이들로 하여금 속을 터놓을 수 있게 해 주는 것. 어쩌면 그게 ‘교장’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업무일지도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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