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들은 재밌는 특징이 있다. 눈이 4개고 손이 10개다.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일까? 어릴 적 아침 풍경을 떠올려 보라. “엄마! 내 교복 어딨지?”라며 내 눈에는 죽어도 보이지 않는 옷을 찾아 헤매면 오른손으로는 내 등짝을 철썩 때리면서도 왼손으로는 순식간에 교복을 찾는 엄마의 모습. 심지어 시간이 촉박해지면 나의 옷과 동생의 준비물을 동시에 찾는 신기술까지 선보이곤 하셨다.
더 놀라운 건 그 과정에서 딱히 엄마에게 무슨 물건을 찾는다고 하소연하지 않았는데도 물건을 찾는 눈빛만으로도 상황을 파악하고 먼저 해결하기도 했다는 거다. 아버지를 비롯한 식구들은 자신들의 로직에 따라 아침 출근이나 등교를 준비하고 엄마는 놀랍게도 그 과정에서 생길 문제를 미리 또는 즉시 해결하여 모두의 동선에 문제가 없도록 조율하곤 했다.
아마 많은 집에서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마법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나는 엄마는 다른 인종, 엄마는 다른 영역의 능력자라고 생각했다. 엄마는 원래 그런 능력이 있는 사람, 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마치 누군가는 영어를 잘하고 누군가는 수학을 잘하는 것처럼 말이다.
내가 엄마가 되고 나서 그 마법의 비밀은 저절로 풀렸다. 누구도 엄마로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엄마의 조율 능력은 수업 시간에 배우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훈련되는 후천적 능력으로 개발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여기에는 하나의 가장 중요한 원동력이 필요하다. 바로 ‘애정을 기반으로 한 관찰’이라는 엔진이다.
가족들이 아침의 바쁜 순간에 잘 준비를 하고 나갈 수 있도록, 출근 뒤 또는 등교 후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앞을 내다보면서 조율하는 건 가족에 대한 애정이라는 엔진이 없이는 작동하지 않는다. 이 능력이 참 재밌다는 생각을 했다.
흔히 〈아들과 딸〉 〈사랑이 뭐길래〉 같은 1980년대 드라마를 보면 능력 있는 딸들은 평생 가족들을 위해 희생만 한 엄마에게 “난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를 외쳐 엄마 가슴에 대못을 박는다. 엄마 역을 맡은 배우는 가족을 위해 손발이 되어 살피고 챙겨준 자기 역할이 참 덧없다고 느낀다. 물론 드라마에서는 몇 회가 지나면 딸은 반성하고 엄마에게 용서도 구하며 결국 화해하지만.
그동안 엄마의 이런 능력은 그저 집에서만 소비되는, 가족들에게만 가치 있는 능력으로 치부되었다. 하지만 비즈니스맨의 관점으로 본다면 이 능력은 대단히 섬세하고 멋진 능력이다.
흔히 말하는 빅데이터 시대에 사람들이 쏟아내는 데이터에는 모두 각각의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요즘처럼 빅데이터가 이슈가 되면서 사람들이 관심 있는 단어, 주로 검색하는 소스들, 반복되어 쌓이는 데이터 중 이유가 없는 것이 있던가? 단어 하나만 꿰뚫어도 그 단어가 데이터가 되는 과정의 스토리가 있기 마련이고 결국 이런 스토리를 찾아내고 상대의 상황과 입장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상대가 필요한 것이 뭔지 알아채는 관심, 상대의 동선과 상대의 니즈를 반걸음 먼저 읽어내는 능력 또는 배려는 꼭 가족 간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비즈니스맨의 영역에서 이 능력을 발휘해보자.
나는 홈쇼핑 방송을 할 때 전문 게스트와 함께 많이 진행한다. 지금까지 함께 한 요리 명인, 쉐프, 연예인, 제품 개발자들. 일부는 능숙하게 생방송에 적응하지만 사실 홈쇼핑에 처음 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당황스럽다. 심지어는 꽤 오랜 기간 동안 방송 생활을 한 사람도 생방송은 녹화방송과는 좀 다르다고 이야기한다. 수정이나 편집이라는 게 없기 때문이다.
정해진 시간 동안 판매까지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경직된다. 게다가 홈쇼핑은 그 어떤 채널보다도 심의가 까다롭다. 상업성을 띠기 때문에 그렇다. 할 수 있는 말보다 하면 안 되는 말이 더 많다. 그래서 어느 정도 적응이 된 사람이 아니면 처음에는 고생을 한다.
나는 쇼핑호스트 중에서도 유난히 이런 상황의 분들과 함께 생방송을 많이 기획해왔다. 여느 카테고리 아이템보다 식품이 중소 아이템이 많고 철저히 개인의 기술력에 의존해서 상품화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TV를 틀어 홈쇼핑을 보면 공감할 것이다.
그러다 보니 다른 능력보다도 이 부분에서 좀 탁월함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연예인 같은 외모를 타고나지는 못했지만 용케도 비즈니스 분야에서 써먹을 능력이 있었나 보다. 특히 엄마가 되면서 더욱 이런 부분의 능력이 나의 일에 큰 도움이 됐다. 가족들을 눈으로 먼저 챙기듯, 함께하는 사람들이 필요한 게 무엇인지가 먼저 보이는 것이다.
아이들은 늘 나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게 많다.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이 머릿속에서 뒤죽박죽된 채 쏟아진다. 나는 그걸 익숙하게 재배치한다. 같은 방법으로 상품의 장점을 더 나열하고 싶지만 간단명료하게 정리되지 않아서 입에서 맴도는 60세의 요리명인 마음속에 들어가기도 한다.
지방에서 평생 한 가지 채소만 재배하던 어르신이 계셨다. 이분의 눈에는 채소가 내 새끼고 내 자식이다. 그래서 홈쇼핑 심의와는 관계없이 ‘무조건 최고’인 것이다. 자식 사랑에 이유가 없듯이 이분은 왜 내 작물이 좋은지, 왜 먹어야 하는지 마케팅적 접근 없이 그냥 좋고 ‘무조건 먹어봐!’인 것이다.
이렇게 해서는 홈쇼핑 생방송을 할 수 없다. 이 어르신의 마음에서 필요한 것, 그리고 이 어르신이 소비자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대신 전해주는 것이 바로 쇼핑호스트의 역량이다. 그리고 이 역량은 엄마의 마법과도 닮아있다.
요리를 참 좋아하는 연예인이 자신의 이름을 건 상품을 런칭했다. 소비자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건 음식을 이렇게도 보여주고 싶고 저렇게도 보여주고 싶지만 생방송의 스튜디오는 우리 집, 내 부엌이 아니기에 웬만큼 숙달되지 않으면 어디에 뭐가 있고 어디서부터 어떻게 보여줘야 하는지 어렵다. 게다가 생방송으로 이뤄지는 작업이라 카메라와 호흡을 맞춰서 모든 시연을 해내야 한다. 당연히 어렵고 손이 부족한 느낌을 받게 되고 내 마음 같지 않다.
다시 한번 엄마의 부엌을 떠올려보자. 참 신기하게도 엄마는 뚝딱뚝딱 요리를 했다. 아무것도 없는 것 같던 우리 집 부엌에서 늘 맛있는 음식이 나왔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객관적으로 맛있다기보다는 주관적으로 우리 식구의 입맛에 맞는 음식, 또는 우리 가족의 건강 상태에 맞춘 음식들이 나왔다.
고등어 넣고 매콤하게 지진 조림을 좋아하던 아버지가 통풍으로 고생하실 때는 통풍에 좋지 않은 등푸른생선 대신 흰살생선을 써서 조림을 만드시곤 했다. 장아찌 하나면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우던 내가 임신 후 임신성 당뇨로 고생할 때 어머니는 설탕을 대체하는 천연 감미료를 활용해서 맛과 모양은 똑같지만 혈당을 잡는 나만의 장아찌를 만들어주셨다. 맛있게 먹는 것을 포기하는 식구들이 없도록 요리 프로그램의 쉐프처럼 전문적이고 빠르진 않지만 엄마의 요리는 늘 맞춤형이었다.
나도 엄마를 닮았다. 매운 음식을 좋아하는 남편용 떡볶이를 만들 때 소스를 넣기 전 한 주먹 정도만 옮겨 담아 케찹과 파프리카를 갈아 만든 소스에 아이용 떡볶이를 먼저 만든다. 어렵지 않지만 식구들 모두의 니즈를 만족시킬 수 있고 가족들은 모두 모여 만족스러운 식사를 할 수 있다. 새로운 레시피도 아니고 어디 내놓을 음식도 아니지만 우리 식구들에게 맞춤이 될 수 있는 푸드 소프트웨어들이 우리 집 부엌에는 하나하나 쌓여간다.
다시 스튜디오로 돌아가 보자. 자신의 이름을 건 상품을 좀 더 자세히 보여주고 싶은 연예인. 그가 필요한 건 제품의 패키지가 될 수도 있고 제품을 담을 멋진 그릇이 될 수도 있다. 또는 자신이 아이들에게 해주었던 제품을 활용한 응용요리가 될 수도 있다. 어른들의 입맛에 맞춰 한 그릇 먹고 나면 땀이 시원하게 나는 매운 육개장을 만들었지만 같이 먹고 싶어 하는 아이를 위해 달걀을 풀어서 주었다는 걸 보여주고 싶을 수도 있다.
그들의 이야기를 귀담아듣고 그들이 원하는 시연의 진행 상황을 반걸음 앞에서 도와줄 수 있는 능력, 왠지 엄마의 배려와 닮았다. 내가 아는 것을 말하고 나를 빛내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나와 함께 하는 사람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찾아주고 그들의 스토리를 빛나게 해주는 것도 쇼핑호스트의 멋진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과정은 데이터를 관찰하고 분석해 새로운 혁신을 만들어내는 것과도 같다. 생방송의 정해진 시간 동안 소비자들이 원하는 것은 찾아내다 보면 구매와 이어지고 구매의 결과는 수치가 되어 또 다른 데이터가 된다.
기술이 발전하고 시스템이 진화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과학으로만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기술이라는 단어와 시스템이라는 단어 사이에 보이지 않는 결이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결을 아주 잘 읽는 엄마라는 여성들은 얼마든지 비즈니스맨이 될 수 있다. 오히려 월등할지도 모른다.
원문: 석혜림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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