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고통은 하나님의 뜻인가?
세월호 참사와 일제 강점, 그리고 6.25와 남북 분단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해석하는 발언들을 보면서, 몇 가지 점을 짚어야 하겠다. 이런 발상 배후에는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주관하는 역사의 주인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인류와 자연을 관장하시고, 그분의 뜻 밖에서는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없다는 믿음은 사건마다 그분의 뜻을 묻게 한다. 특별히 고통이나 재난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이 고통에는 도대체 무슨 뜻이 있는가?
고통 및 재난의 뜻을 물을 때 세간에 ‘하나님의 뜻’을 입에 담는 사람들은 흔히 ‘죄’ 혹은 ‘허물’을 고통의 원인으로 꼽는다. 죄가 있고, 하나님은 그에 대해 고통으로 심판한 것이다. 그러니 주어진 고통을 달게 받고, 죄를 벗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고통을 일으킨 귀책사유를 제거해야 그 고통도 끝나게 된다.
이러한 해석을 성서에서 찾는 이들도 있다. 흔히 신명기 역사 구도라고 불리는 그 구도에 따르면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이 죄를 짓고, 하나님이 그 죄에 대해 문책을 하면,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호소하고, 하나님은 그에 응답하는 구도가 이스라엘 역사에서 반복된다.
이런 구도에 익숙한 사람들은 고통에 빠진 사람들에게 회개를 요청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라고 권면한다. 가령 일제 강점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한 어떤 사람들은 일제 강점이 우리 민족의 ‘게으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강변한다. 게으름을 멈추고 돌이킬 때에라야 심판이 거두어진다.
일제 강점기가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은 신성모독
그러나 이런 식의 해석은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지은 죄목을 기억하기만 해도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의 죄는 해방과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을 떠나 번영과 안정을 약속해 준다는 우상을 따라 억압과 불의와 착취를 행하던 우상 숭배의 죄였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죄의 본질은 생명과 평화와 진리의 하나님을 떠나 욕망과 욕심을 따라 다른 이들을 괴롭히고 사회와 나라를 망치는 죄였다.
하나님은 게으름 때문에 우리 민족을 일제의 손에 넘겼다고 하는 발상은 하나님을 대단히 고약한 분으로 만드는 신성모독이다. 또 동남아시아에 발생한 자연재해를 두고 우상숭배에 대한 죄라 하다가 ‘기독교 국가’인 미국에 불어닥친 허리케인을 두고는 동성애자에 대한 심판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해명하여 밝힌 것이 아니라 자신의 근본주의적인 신앙을 하나님에게 투영한 것에 불과하다.
재난을 당한 이들에게 특별한 죄를 찾을 수 없을 때 이른바 희생양 해석이 등장한다. 이번 세월호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어떤 사람들은 바다가 아이들을 삼킨 것은 동성애를 비롯한 우리 성인들의 죄를 아이들을 희생시켜 우리에게 깨닫게 했다고 ‘하나님의 뜻’을 주장한다.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펴기 위해 선택하는 ‘죄’의 목록은 성경에서 고른 것이기는 하지만 자신들의 신앙적 색깔이 강하게 드러난 것들로 대체로 성경에서 엄중히 다루는 죄보다는 개인적인 죄에 머무는 목록들이다. 여하튼 이런 희생양 해석도 자신들이 해석한 성경 본문에서 찾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양으로 삼고, 우리의 죄를 대속시켰다는 이른바 대속의 논리가 그들의 희생양 해석을 위한 근거로 사용된다. 대속 신앙에 관해서는 무수한 얘기를 할 수 있지만, 말을 줄여 요점을 얘기하자. 대속 신앙을 잘못 이해하면 저질러진 악으로 고통 받는 이들의 고통 배후에 하나님을 두게 된다.
그렇게 말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대꾸하고 싶다. “악은 너희들이 저질러 놓고, 그 악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을 두고, ‘하나님이 그대들을 희생양 삼아 우리를 깨우치게 하셨다’고 하고 싶은가? 그렇게 고상하게 자신의 악에서 벗어나고자 하는가!” 하나님은 세월호의 아이들을 희생시켜 우리를 깨우치려 하신 게 아니라 우리 사회의 죄악이 아이들까지 죽여 버린 것이다. 여기서 찾을 수 있는 ‘하나님의 뜻’은 그 죄악과 맞서 싸우는 것뿐이다.
고난에 하나님의 뜻이 있을지라도, 그 뜻을 왜곡하지 말라
일제 시대 기독교인 선배들은 우리 민족의 상황을 죄-심판-탄원-구원의 이른바 신명기식 구도에 넣기보다는 출애굽기에서 찾았다. 야곱의 후손들이 무엇인가를 잘못했기에 이집트의 종살이를 한 것이 아니다. 이집트 사람들의 탐욕과 악독과 완고함이 히브리인들을 고역과 눈물에 몰아넣었다.
하나님이 구원자 모세를 통해 기적적인 해방을 히브리인들에게 허락하셨듯이 우리 민족의 구원을 하나님에게 요청한 것이 일제 시대 저항하는 기독교인 선배들의 성서 읽기였다. 민족의 모습을 되돌아보는 작업을 하지 않은 게 아니다. 민족의 무능과 부패를 통탄했었다. 그러나 일제 시대의 고통은 일제의 잘못이지 그 고통이 ‘하나님의 뜻’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고통이 증언하는 것은 일제의 탐욕이지 우리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은 아니었다.
우리 민족이 오늘날까지 겪는 고난에는 뜻이 있는가? 하나님의 뜻이 있는가? 하나님의 뜻이 있다. 그 뜻은 이 고난의 궁극적 해결을 위해, 그 일을 남의 일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담당하려는 사람들의 해방의 몸짓에 있다.
“젊은 혼들아, 일어나라. 이 고난의 짐을 지자, 위대한 사명을 믿으면서 거룩한 사랑에 불타면서 죄악으로 더럽혀진 이 지구를 메고 순교자의 걸음으로 고난의 연옥을 걷자. 그 불길에 이 살이 다 타고 이 뼈가 녹아서 다하는 날 생명은 새로운 성장을 할 것이다. 진리는 새로운 광명을 더할 것이다. 역사는 새로운 단계에 오를 것이다”(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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